프란치스코(교황)/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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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역사
 
 
 
 
 
 
 
 
 
 
 
 
 
 
 
 
1. 개요2. 교황이 되기 전의 생애
2.1. 출생과 성장2.2. 흑역사?2.3. 추기경 시절
3. 교황 선출과 즉위4. 교황 재임기5. 사망
5.1. 반응
5.1.1. 정부 수반 외5.1.2. 종교계 지도자5.1.3. 기타
5.2. 장례식 참석 명단
5.2.1. 국가5.2.2. 국제기구
 
 
 
 
 
 
 
 
 
 
 
 
 
 
 
 
 
 
 
 
 
 
 
 

1. 개요[편집]

 
 
 
 
 
 
 
 
 
 
 
 
 
 
 
 
 
 
 
 
 
 
 
 
266대 교황 프란치스코의 일생을 시간순으로 나열한 문서. 교황 즉위 이후의 행적에 대한 내용은 프란치스코(교황)/재위기간 문서도 참고.
 
 
 
 
 
 
 
 
 
 
 
 
 
 
 
 
 
 
 
 
 
 
 
 

2. 교황이 되기 전의 생애[편집]

 
 
 
 
 
 
 
 
 
 
 
 
 
 
 
 
 
 
 
 
 
 
 
 

2.1. 출생과 성장[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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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황 신학생 시절
左: 어린 시절
右: 1950년대, 신학생 시절의 프란치스코 교황
1936년 12월 17일, 아르헨티나로 이민 온 이탈리아 왕국 토리노[1] 출신 마리오 호세 베르고글리오(Mario José Bergoglio)와 레히나 마리아 시보리(Regina María Sívori) 부부 사이에서 5남매(3남 2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929년, 2주 간의 항해 끝에 부에노스아이레스 항구에 도착한 친할아버지 조반니와 친할머니 로사는 '바다를 건너온 이주민(migrantes ultramar)'으로 등록되었는데, 농사를 짓다 카페 겸 제과점을 운영하신 할아버지 조반니는 상인(comercio)으로 할머니 로사는 주부(casera)로 조부모님의 큰 자랑이자 회계 학교를 졸업한 아버지 마리오는 회계사(contador)로 기재되었다.[2]

외할아버지 프란치스코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태어난 아르헨티나인이었는데 외증조부인 빈첸초가 19세기 후반에 리구리아에서 이주해온 이탈리아인이었으며, 외할머니 마리아 고냐는 이탈리아 왕국 피에몬테 알레산드리아도에서 태어나신 분으로 농부의 딸이었는데 네 살 때 부모님과 함께 제노바에서 배를 타고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왔다.[3]

부에노스아이레스 대학에서 화학과 학사를 취득하고 부에노스아이레스 대교구 소속의 '원죄 없으신 잉태 신학교'에 입학했다. 3년 후인 1958년에는 예수회에 입회해 1969년 12월 13일, 33세 생일을 4일 남기고 수사신부가 되었다.

21살 때인 1957년 늑막염으로 오른쪽 폐 일부를 잘라내고 폐렴 합병증을 평생 앓게 됐다. 여러 가지 일을 해보았으며 한때 바운서로 일한 적도 있다 한다.

사제가 되기로 한 계기가 조금 독특하다. 12살의 어린 나이에 아말리아라는 여자아이에게 러브레터를 건네며 "영원한 사랑의 맹세를 받아주지 않으면 신부가 되겠다"고 청혼했다가 단칼에 거절당했기 때문이라고 한다(관련기사).

그래서 아말리아는 60여 년이 흐른 2013년 그가 교황이 되자 말 그대로 기절초풍했다고 한다. 그녀가 공개한 이 사실에도 불구하고, 사실 다른 여자친구가 없었는지는 미지수라고 한다. 다만 청소년탱고를 같이 춘 여자친구가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물론 현실적으로는 단순히 프란치스코 교황이 꼬마 시절에 실패했던 사랑 고백 하나 때문에 성직자의 길을 걷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실연의 아픔을 잊기 위해 신학에 좀 더 열중할 수 있던 것 같다.

2023년 디즈니+의 다큐멘터리 The Pope: Answers에서 신학교에 다니기 전 애인이 있었음을 밝혔다.

이후 프란치스코 교황은 수도 고해사제, 예수회 아르헨티나 관구장, 산 미구엘 대학 신학교수, 부에노스아이레스 보좌주교, 그리고 대주교를 역임한 뒤 2001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해 추기경으로 임명됐다.
 
 
 
 
 
 
 
 
 
 
 
 
 
 
 
 
 
 
 
 
 
 
 
 

2.2. 흑역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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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아르헨티나의 군사독재에 대해 침묵했던 전적이 있다는 비난을 받았고 관련 건으로 인권단체에서 2010년도에 고발된 적이 있다. 예수회 소속의 사제 2명이 독재정권에 납치되어 고문당한 사건에 침묵했다는 의혹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교황이 아르헨티나 군부 유력자의 가족신부 등의 개인적 네트워크를 동원하여 독재자들에게 사적으로 선처를 호소하였고, 두 사제는 결국 풀려났다고 밝혀졌다.[4]

비겁해 보일지는 몰라도, 이는 쿠바가톨릭 사제들도 택하고 있는 나름의 실용적 전략이다. 당장 정권을 전복할 수 있는 힘이 없다면, 직접 대립각을 세우기보다는 타협과 조정을 통해 어떻게든 사람들을 돕는 것도 현명한 전략이다. 게다가 교황이 군사독재에 찬성한 것은 결코 아니며, 군부의 살인부대에 쫓기는 사람들을 숨겨주고 자신의 여권을 주어 국경을 넘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등의 개인적인 저항을 적극적으로 했다.

아르헨티나 가톨릭 교회의 수장으로 있으면서 당시 성직자들이 '애국주의' 선언을 통해 군사독재와 결탁하는 것을 막지 않았다는 비판이 제기된 바 있지만, 이건 상황에 따른 것이다. 독재와 인권탄압 수준에서 당시 아르헨티나는 더러운 전쟁이라는 탄압을 벌여 정부를 비판하면 쥐도 새도 모르게 자루에 넣어져 대서양에 수장, 또는 생매장되어 참살당했다.[5] 적극적으로 전면저항에 나설 경우 베르골리오는 지금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것이다.

가톨릭 신자가 대다수인 국가에서 추기경이 공개적으로 정권에 대한 반대를 조직한다면 교황청과 타 가톨릭 국가들의 반발이 예상되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살해하지는 못하겠지만, 다른 방식으로 생명에 위협을 미칠 것이 거의 확실하다. 전에 언급된 자신의 여권으로 독재에 탄압받는 정치범을 국외로 탈출시켜주는 행위도, 들켰으면 목이 달아났을 것이다. 한 정치범 생존자는 당시 베르고글리오 추기경이 너무나 침착하게 선뜻 도와서 "자기가 어떤 곤경에 뛰어들고 있는지를 정말 알고 있을까에 대해 의문이 들 정도였다"고 말했다.

특히나 호르헤 비델라의 습관 중 하나가 다름 아닌 반대 인사를 쥐도새도 모르게 납치한 뒤 자루에 담아서 그걸 헬기에 실은 뒤 대서양 한복판에 갖다 버리는 짓이었다. 만에 하나, 베르골리오 추기경도 전면에 나섰더면 이 꼴이 났을 것이다. 훗날 순서대로 아르헨티나 대통령이 되는 네스토르 키르치네르 변호사 부부가 호르헤 비델라 정권이 들어서자마자 괜히 시골로 낙향한 게 아니다. 도시는 위험했기 때문이다.

비슷한 예로 먼 중앙아메리카의 나라인 엘살바도르에서는 1970년대에 독재에 저항하던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가 미사 중에 대중의 눈 앞에서 사살당했는데도 범인들은 밝혀지지 않았고, 오히려 엉뚱한 사람들이 누명을 쓰고 사형을 당했다.[6] 요한 바오로 2세가 맞서 싸웠던 스탈린주의 이후의 공산당이나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과 대립했던 박정희, 전두환 정권은 그래도 최소한의 눈치를 보느라 말이 통하기라도 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7] 당시 베르고글리오 신부였던 교황은 "(군부에게) 믿음을 심어줘서 누가 숨어 있을 거라는 생각을 못하게 하는 전략을 썼"던 것이다.

2014년 즉위 1주년을 앞두고 앞에서는 침묵했지만 뒤에서는 은신처를 제공하고 해외도피를 도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에 따르면 최소 20~30명, 최대 100명까지 반정부 인사들을 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물론 3만 명이나 희생된 아르헨티나 군부독재의 참상에서 수백 명 구했다는 것이 침묵을 정당화할 수 있느냐는 비판은 가능하지만, 적어도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보다는 분명히 나은 행동이며, 위쪽 문단에서도 설명했듯이 은신처는 물론 해외도피까지 실제로 도왔다는 점에서 자신의 위험도 기꺼이 무릅썼다는 점은 충분히 인정할 만하다.

특히나 개인이 국가를 상대로 벌일 수 있는 일에 대한 한계를 생각할 때 이 정도면 꽤 선방한 것이다. 즉 당시에 교황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신의 목숨을 걸고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구한 것이다. 이 모든 일에 대해서 교황이 아무런 해명도 하지 않고 비판은 비판대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도… 이 부분은 2015년 12월 13일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다루었다.

다만 시골 하급 성직자 운운하기는 좀 그런게, 그는 1973년 수도사제로서 맡을 수 있는 상당한 고위직인 예수회 아르헨티나 관구장이었다. 또한 구한 사람은 구한 것이지만, 정작 자신이 체포 등에도 관여했다는 의혹을 사고 있다는 것이 문제이다. 최상단 납치 피해자였던 신부 2명중 한명인 올란도 요리오 신부[8]는 1985년 재판에서 주교가 명단을 넘겼다고 믿는다고 주장했다. 무엇보다도 2000년대에 벌어진 재판에서 베르고골리오 추기경은 수차례 재판 출석 자체를 거부했으며, 단 한번 출석한 재판에서도 모든 증언을 얼버무렸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 때문에 교황으로 즉위하는 그 시점에도 그는 재판장에 피의자로 불려다니고 있었다. 교황이 되면서 이 문제가 흐지부지 되었지만, 만일 교황이 되지 못했다면 본격적으로 말이 나왔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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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울 실바 추기경
칠레 500페소 주화
칠레의 라울 실바 엔리케즈 추기경과도 대비된다는 견해도 있다. 추기경이자 산티아고 대교구장의 직위에서,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의 쿠데타를 맞이했다. 엔리케즈 추기경은 이 쿠데타를 즉각 비난했으며, 그 과정에서 벌어진 살육에 대해서도 비판했다. 그는 쿠데타 정부에 대항하기 위해서 정교회, 유대교, 개신교 등과도 연합해서 대립했다. 그래서 군사 쿠데타가 붕괴된 이후 칠레에서 성인이나 마찬가지 대우를 받았으며, 칠레 500페소 주화에 그 얼굴이 새겨져 있다. 하지만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과 정치적 문제로 대립했다라는 이유로 1983년 산티아고 대교구장 직위에서 은퇴해야 했다고 한다.

사실 옛날부터 가톨릭 교회 밖에선 요한 바오로 1세요한 바오로 2세 시기 로마 교황청이 남미의 군사 정권들을 지지했다는 의혹이 존재한다. 왜냐하면 이들이 가톨릭의 텃밭 남미에서 좌파 정권을 몰아내고 집권했기 때문이다.... 정도가 아니라 타 종교에 대하여 보인 유화적인 모습과는 별개로 요한 바오로 2세는 당장 폴란드 출신의 굉장히 반공적이며, 신학적으로 보수적인 인물이었다. 생전과 사후 보여준 성인 같은 이미지 때문에 간과하는 점이지만, 당시 교황청이 적극적으로 나섰다면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를 그렇게 백주대낮에 참살하고도 쉬쉬 덮어두는 게 가능했을 리가 없다. 스페인에서도 당장 80년대 프랑코 정권의 잔당인 극우 테러조직 반공 사도 동맹(Alianza Apostólica Anticomunista)를 오푸스 데이를 통해 지원했다는 의혹도 있고, 스페인 내전 당시 좌파에게 학살당한 성직자들은 시복한 반면, 같은 시기 바스크 정치인들과 사제들이 프랑코 세력에게 학살당했던 바스크 성직자들의 신원 회복과 학살 진상 조사에 대한 협력은 철저히 무시했다. 성직자로서 보인 모범과는 별개로 정치적으로 요한 바오로 2세가 냉전 시기의 진영 논리에 빠져 있었던 건 굉장히 조심스러운 얘기가 아니라 알 사람은 다 아는 공공연한 비판 요소이다. 요한 바오로 2세 참고. 한국에서 군사정권에서 맞서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을 비롯한 가톨릭계 인사들이 민주화 운동에 투신했던 한국 가톨릭의 특수성 때문에 나머지 세계 가톨릭권의 역사나 동향에 대해 크게 아는바 없는 한국인들이 종종 충격 먹는 대목이지만, 가톨릭 교회는 원래부터 보수 우익적이고 19세기엔 자유주의, 20세기엔 사회주의와 맞서 싸우는데 열을 올린, 결코 정치적으로 중립적이며 듣기 좋은 도덕적인 가르침만 하는 집단이 아니다.[9]
 
 
 
 
 
 
 
 
 
 
 
 
 
 
 
 
 
 
 
 
 
 
 
 

2.3. 추기경 시절[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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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바오로 2세와 베르골료 추기경, 2001년 2월 21일
베네딕토 16세와 베르골료 추기경, 2007년 1월 13일
1998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부에노스아이레스 대주교에 임명되었고, 2001년 2월 21일 같은 교황에 의해 추기경에 서임되었다.

부에노스 아이레스 대교구장 재임 시 아르헨티나 동성결혼 법안 반대운동을 주도하며 국제사면위원회 등의 인권단체의 비판이 많았다. 반대운동 때 동성결혼과 인공피임을 확대하는 정책을 펼치는 아르헨티나 대통령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데 키르치네르에게 "중세적 마인드를 가진데다가 이단심문관 같다"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때문에 서로의 사이는 매우 좋지 않아 프란치스코 교황 역시 추기경 시절인 2012년 성명을 통해 대통령을 "독재를 노리는 선동꾼"이라고 비판하였다. 페르난데스는 페론당(정의당) 출신 정치인으로[10] 실제로 후안 페론&이사벨 페론 부부에 이어 아르헨티나 2번째의 부부 대통령이기도 하다. 아르헨티나의 동성결혼 합법화 및 입양 조건 동등화는 상하원 모두에서 통과되었다.

교황이 수꼴처럼 보일지도 모르겠으나, 당시 교황이 비난했던 것은 대통령이 행정명령을 통해 통치한다는 것에 대한 비판이라는 점에서는 어휘가 강했을지는 몰라도 타당한 비판이다. 정치학이나 행정법을 공부하면 약간이나마 언급되는 부분인데, 원래 행정명령은 제왕적 대통령이 입법부와 사법부를 우회하여 삼권분립을 무너뜨리는 단골 수단으로 사용되었으며, 위임민주주의의 일종으로 "포고령주의"로 불리는 행정명령의 남용은 민주주의의 제도화를 방해하고 법을 통한 법치주의를 훼손한다는 평가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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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2월 12일 루한(Luján)에서
2013년 3월 19일 바티칸에서[11]
그런데 베르골료 추기경이 교황이 되자, 페르난데스 아르헨티나 대통령이 그에게 포클랜드 섬에 대해 영국의 군사적 증강을 막고 자신과 대화 창구를 놓아달라는 개입 요청을 하였다. 교황의 공식 반응은 아직 없지만, 영국은 교황은 여태껏 그랬던 것처럼 주권 국가 사이의 일에 간섭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야 한다고 매우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페르난데스 대통령 탓에 가만 있다가 불똥이 튄 격인데, 이래저래 악연인 듯. 페르난데스 대통령은 이번 기회를 통해 가톨릭과의 관계 개선을 도모하고 있는데, 그 이면에는 2015년 대선에서 승리하기 위한 것이라는 분석이 있다.

베아트리즈 발레라(Beatriz Valera)라는 여성이 자신의 아들이 사제로부터 성폭행을 당했다고 고발하려고 들어오자 강제로 사무실에서 내쫓았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이 모자는 나중에 교회와 금전적 합의를 보았다고 한다. 이 여성은 "베르골리오 추기경도 물론 알고 있었다. 모두가 알면서 침묵하고 있으므로, 모두가 공모자이다."라고 하였다.

10대 소년을 성추행한 혐의로 조사를 받던 훌리오 세자르 그라시(Julio César Grassi) 신부에 대하여 공개적으로는 연을 끊은 것처럼 행동하여 언론의 공격을 피했으나, 직접 사설 조사관을 고용하여 그라시의 무죄를 주장하는 보고서를 작성하는 것을 주도하였으나 그라시는 결국 유죄로 밝혀져 감옥에 갔다.
 
 
 
 
 
 
 
 
 
 
 
 
 
 
 
 
 
 
 
 
 
 
 
 

3. 교황 선출과 즉위[편집]

 
 
 
 
 
 
 
 
 
 
 
 
 
 
 
 
 
 
 
 
 
 
 
 
상세 내용 아이콘   자세한 내용은 2013년 콘클라베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베네딕토 16세 교황이 건강상의 문제로 퇴위한 후에 치러진 콘클라베 이틀째인 2013년 3월 13일 오후 7시 기준으로 제266대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교황청이 부패 스캔들섹스 스캔들로 홍역을 치른 만큼, 개인적으로 청렴하고 교리적으로는 보수적이며 사회적으로는 개혁적인 프란치스코 교황이 차기 교황으로 선출된 듯. 그동안 거론되던 주요 교황 후보는 아니지만 인지도가 아예 없던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언론 보도에 의하면 비유럽파 추기경들은 개혁적인 교황을 원했으나 적절한 후보를 내지 못한 채 콘클라베에 돌입했다고 한다. 투표 전에 모든 추기경들이 소신을 피력하는 개인발표 시간이 있었는데, 이때 베르골료 추기경이 교회가 본연의 영적인 임무에 돌아가야 한다고 피력한 것이 결정적이 되었다. 그의 이런 피력을 계기로 개혁파 추기경들이 그에게 주목했고 뒤이은 투표에서 1위를 차지했다.

투표가 진행돼서 개혁파 추기경을 중심으로 의견이 정리되고 미국의 추기경인 우얼 대주교가 미국 표를 끌어모으고 일부 유럽표가 그에 가담하면서 베르골료 추기경은 수월하게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또한 가디언의 추측으로는 전 교황 선출 때도 이미 득표 수가 2위였을 것으로 추정되며[12],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례적으로 빠른 콘클라베의 결과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전임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고령으로 인한 건강 문제 때문에 퇴위했음에도 만 76세의 고령인 프란치스코가 선출된 것을 놓고 추기경단이 '몇 년 간의 시간벌기'를 선택했다는 관측이 있다. 한편 그의 선출에 베네딕토 16세의 의중이 크게 작용했다는 음모론도 나왔다.

그의 교황 취임을 두고 흑인 교황을 기대했던 아프리카에선 섭섭해하는 분위기였다. 이탈리아인 교황을 바랐던 이탈리아에선 아쉬워하면서도 이탈리아계 이민자 교황이라서 좀 낫다는 분위기. 물론 남미에선 역사상 첫 남미인 교황이라고 기뻐했다.
 
 
 
 
 
 
 
 
 
 
 
 
 
 
 
 
 
 
 
 
 
 
 
 

4. 교황 재임기[편집]

 
 
 
 
 
 
 
 
 
 
 
 
 
 
 
 
 
 
 
 
 
 
 
 
상세 내용 아이콘   자세한 내용은 프란치스코(교황)/재위기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5. 사망[편집]

 
 
 
 
 
 
 
 
 
 
 
 
 
 
 
 
 
 
 
 
 
 
 
 
사망 하루 전날의 모습
"Cari fratelli e sorelle, buona Pasqua."
("형제자매 여러분, 행복한 주님 부활 대축일입니다.")

2025년 4월 20일 주님 부활 대축일, 프란치스코 교황의 주님 부활 대축일 축복 중. 사실상 교황 본인의 직접적인 유언.
(한국어 번역: 가톨릭평화방송.#)

2025년 주님 부활 대축일 행사에 참여한 바로 다음 날인 4월 21일 현지 시각 7시 35분,[13] 바티칸의 성녀 마르타의 집(Casa Santa Marta)에서 향년 8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14] 연합뉴스바티칸 공식 영어 뉴스BBC 뉴스 영상 2시간 뒤, 궁무처장(Camerlengo)인 케빈 패럴 추기경이 현지 시각 9시 45분(한국 시각 16시 45분)에 공식적으로 사망을 발표했다. 바티칸 보건위생국에서 밝힌 직접적인 사인은 뇌졸중으로 혼수 상태에 빠진 뒤 회복 불가능한 심부전으로 인한 사망이다.# 뿐만 아니라 2형 당뇨병고혈압을 앓고 있었던 사실이 밝혀졌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2월 14일 양쪽 폐에 심각한 폐렴 때문에 입원했다가 3월 23일 퇴원해 교황청으로 돌아왔다. 의사가 2달은 쉬라고 권고했지만,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퇴원 2주 후부터 활동을 재개하며 일했다. 소식통에 따르면 "교황이 자신의 여명이 얼마 없는 것을 알고 더 열심히 일한 듯 하다"고.#

사망 바로 전날에는 주님 부활 대축일 낮 미사에 참석해 성 베드로 광장에 모인 신자들에게 인사를 보냈으며 JD 밴스 미국 부통령을 접견하기도 했으나, 결국 교황은 바로 다음날 사망했다. 바티칸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임종 당일 오전 5시 30분경부터 급격한 건강 악화가 나타났으며 교황의 상태를 주시하던 주변에서도 이를 즉시 인지하였고, 약 한 시간 후 2022년부터 개인 건강 담당 비서로 일해 온 간호사 마시밀리아노 스트라페티에게 감사의 의미를 담아 손을 흔든 것을 마지막으로 혼수 상태에 빠졌다고 한다. 특히, 마지막 순간에 교황 곁에 있었던 사람들은 사건이 급격하게 진행되어 교황이 큰 고통을 겪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

부활 팔일 축제 마지막 날인 부활 제2주일에 사망한 요한 바오로 2세, 성탄 팔일 축제 제7일에 사망한 베네딕토 16세에 이어, 프란치스코도 부활 팔일 축제 월요일에 사망함으로써 세 교황이 연속으로 팔일 축제 기간에 사망하였다.[15]
프란치스코 교황 관 안치
프란치스코 교황 장례미사
프란치스코 교황의 시신
장례미사

프란치스코 교황의 장례미사는 26일 오전 10시에 성 베드로 광장에서 약 25만 명이 참례한 가운데 거행되었고, 이후 2022년 성 베드로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인 6월 29일에 교황 본인이 작성해 둔 영적 유언장에 따라 로마 성모 대성전으로 운구되어 비공개 안장 예식을 거쳐 안장되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생전에 성모 대성전에 대한 애착이 매우 깊었으며, 유언장에는 대성전 내 자신이 안장될 자리를 구체적으로 표시한 첨부자료까지 넣어두었다. 묘비에는 라틴어 교황명 'Franciscus' 외에는 아무것도 새기지 말 것을 당부하였다.## 무덤 덮개 겸 묘비에 쓰인 대리석은 외증조부의 고향인 이탈리아 북서부 리구리아에서 가져온 것으로, 이것도 프란치스코 교황이 미리 부탁해 둔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생전에 작성해 둔 영적 유언장 전문은 다음과 같다. 이탈리아어 영어
자비로이 부르시니 (Miserando atque Eligendo)

지극히 거룩하신 성삼위의 이름으로, 아멘.

저의 지상 삶이 저물어 감을 느끼며, 영원한 생명에 대한 굳은 희망 안에서, 제가 묻힐 자리에 대한 마지막 바람을 전하고자 합니다.

저는 언제나 저의 삶과 사제직, 주교직을 우리 주님의 어머니이신 지극히 거룩하신 성모 마리아께 맡겨드려 왔습니다. 그러므로 제 육신이 부활의 날을 기다리며 교황 대성전인 성모 대성전에서 쉬게 해 주시기를 청합니다.

저는 제 마지막 지상 여정이 이 유서 깊은 성모 성지에서 끝나기를 바랍니다. 저는 모든 사도 여정의 시작과 끝마다 이곳에 들러 기도하며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님께 저의 지향을 온전히 맡기고 그분의 자애로운 모성적 보살핌에 감사를 드렸습니다.

저의 무덤은 앞서 언급한 교황 대성전의 파올리나 경당(로마 백성의 구원 경당)과 스포르차 경당 사이에 있는 측면 회랑의 안치 공간에 마련하여 주시기를 청합니다. 이는 첨부 자료에 표시되어 있습니다.

무덤은 지면 아래 있어야 하며, 단순하고 특별한 장식 없이 'Franciscus'(프란치스코)라는 이름만 새겨져 있어야 합니다.

제 무덤을 마련하는 데에 드는 경비는 한 은인의 후원금으로 충당할 것입니다. 저는 이미 그 후원금을 성모 대성전으로 송금하도록 조치해 놓았고, 이 리베리오 의전 사제단 특별 책임자인 롤란다스 마크리카스 몬시뇰에게 적절히 지시했습니다.

저를 사랑해 주셨고 저를 위하여 계속 기도해 주실 분들에게 주님께서 마땅한 상급을 내려 주시기를 빕니다. 제 삶의 마지막에 맞이하는 고통을, 온 누리의 평화와 만민의 형제애를 위하여 주님께 봉헌합니다.

성녀 마르타의 집에서
2022년 6월 29일
프란치스코

번역 출처: 한국천주교주교회의 #
프란치스코 교황의 무덤

교황이 성모 대성전에 안장된 것은 클레멘스 9세 이후 356년 만이며, 역대 8번째 사례다.# 유언대로 지면보다 낮은 위치에 안장되었고, 무덤을 덮은 돌에는 'FRANCISCVS'[16]라는 10글자만 새겨졌다. 무덤 뒤 벽면에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생전에 착용하던 철제 십자가 목걸이와 같은 디자인의 소박한 십자가가 걸렸다.[17] # 묘지는 본래 촛대를 보관하는 작은 창고가 있던 공간에 마련되었다.

이후 그의 후임을 결정하는 2025년 콘클라베에서 최초의 미국인 교황 레오 14세가 선출되었다. 레오 14세는 선출 당일인 5월 8일의 첫 공개 연설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의 치적을 기렸다. 또한 이틀만인 5월 10일에는 성모 대성전 내 프란치스코 교황의 무덤을 찾아 참배하여 전임자에게 경의를 표했다.
 
 
 
 
 
 
 
 
 
 
 
 
 
 
 
 
 
 
 
 
 
 
 
 
 
 
 
 
 
 
 
 
 
 
 
 
 
 
 
 
 
 
 
 
 
 
 
 

5.1.1. 정부 수반 외[편집]

 
 
 
 
 
 
 
 
 
 
 
 
 
 
 
 
 
 
 
 
 
 
 
 
  • 중화인민공화국 외교부는 궈자쿤 대변인 명의로 "중국은 프란치스코 교황의 선종에 애도를 표한다"며 애도 성명을 전했다. #
  •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교황은 기독교 신앙의 헌신적인 봉사자이면서 현명한 종교인이자 정치인, 인본주의와 정의의 뛰어난 가치를 견고하게 지키는 수호자로서 국제적으로 큰 존경을 받았다"며 "러시아는 그의 선종에 깊은 애도를 표한다"고 크렘린궁을 통해 밝혔다. #
  • 찰스 3세 영국 국왕은 "교황은 연민과 교회 통합을 위한 관심, 모든 신념을 가진 사람과 타인의 이익을 위해 애쓰는 선의를 가진 사람의 공통적 대의를 위한 지칠 줄 모르는 헌신으로 기억될 것"이라고 기렸다. #
  •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X에 "프란치스코 교황, 안식하소서. 그에 대한 기억은 축복이 되게 하소서"라는 글을 올렸다가 삭제했다. # 이스라엘은 외교 공관에게 교황에 대한 추모를 금한다는 명을 내렸는데, 이는 이스라엘의 전쟁범죄를 프란치스코 교황이 비판한 행보 때문으로 여겨진다. #
  • 이시바 시게루 일본국 내각총리대신은 "교황 선종은 바티칸 시민과 가톨릭교도뿐만 아니라 국제사회 전체에 큰 손실"이라고 애도했다. 특히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9년 교황으로서는 38년 만의 방일이 실현되자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를 방문, 평화에 대한 강력한 메시지를 내주셨다"고 강조했다. #[20]
 
 
 
 
 
 
 
 
 
 
 
 
 
 
 
 
 
 
 
 
 
 
 
 

5.1.2. 종교계 지도자[편집]

 
 
 
 
 
 
 
 
 
 
 
 
 
 
 
 
 
 
 
 
 
 
 
 
  • 정교회의 수장인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 바르톨로메오스 1세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사망 소식에 대해 “우정을 나누었던 그리스도 안에서의 형제 교황 프란치스코가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12년간 재임하며 에큐메니컬 총대주교청의 충실한 친구, 동반자이자 후원자로서, 또 정교회와 소수자 형제자매들의 진정한 친구로서 자주 발언하고 행동하고 그들의 발을 씻어주었다… 그의 영혼이 산 자들의 땅과 의인의 장막에서 안식하기를 한 입과 한 마음으로 기도한다”고 전했다.#
  • 콥트 정교회의 수장인 콥트 교황 타와드로스 2세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사망 소식에 대해 “갖은 위기와 전쟁 속에서도 꿋꿋이 평화의 목소리를 냈던 교황 프란치스코의 사망을 추모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 성공회 요크교구 대주교 스티븐 코트렐은 빈자에게 봉사하고 이주난민, 망명자에 대한 사랑하는 모습 등을 언급하며 추모의 메세지를 남겼다.
  • 티베트 불교의 수장이자 티베트 망명 정부의 국가원수 달라이 라마 14세는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께서는 타인에게 봉사하는 데 헌신하셨고, 자신의 행동을 통해 단순하지만 의미 있는 삶을 사는 방법을 끊임없이 보여주셨으며 우리가 그분께 바칠 수 있는 최고의 찬사는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으로서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방식으로 어디에서든 타인에게 봉사하는 것"이라고 애도했다. #
  • 태국 승왕 쏨뎃 프라마하 아리야봉사가타나나 9세(쏨뎃 프라마하 무니웡)도 애도를 표했다.#
  •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장 진우는 사망한 프란치스코 교황을 "우리 불교식으로 얘기하면 정말 자비보살입니다. 그야말로 왕생극락하기를 바랍니다."라고 칭송하며 종교의 구분을 넘는 애도의 마음을 표명했고, 교황이 2014년 8월 한국을 방문했을 때 자승 당시 조계종 총무원장을 비롯한 국내 12개 종단 지도자를 만난 것을 거론하며 "다른 종교도 존중해주시고 폭넓은 마음을 가지셨다"고 회고했다.#
  • 원불교 왕산 성도종 종법사는 애도문을 발표하하며 "교황님께서는 평생 인류의 평화와 사랑, 자비와 포용을 실천한 위대한 영적 지도자이셨다'면서 "종교 간의 경계를 넘어 상호 존중과 대화, 연대의 길을 열어주신 그 숭고한 행적은 전 세계 신앙인들에게 깊은 감동과 희망을 줬다"며 추모했다.#
 
 
 
 
 
 
 
 
 
 
 
 
 
 
 
 
 
 
 
 
 
 
 
 
 
 
 
 
 
 
 
 
 
 
 
 
 
 
 
 
 
 
 
 
 
 
 
 
  • 프란치스코 교황의 사망에 애도를 표한 이들 중에는 교황 본인의 친척도 있었다. 고향 아르헨티나에서 어린 시절을 함께 보냈던 육촌이자 살레시오회 수녀인 아나 로사 시보리(Ana Rosa Sivori)는 50여 년 동안 태국 우돈타니에서 선교 활동을 하던 중, 이 소식을 듣고 추모 미사가 열린 방콕 성모 승천 대성당을 방문해 '정말 강한 사람'인 그를 기리는 발언을 했으며유튜브 아이콘 바티칸을 직접 방문해 장례미사에 참석하기도 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9년 태국을 방문했으며 시보리 수녀가 태국어 통역을 담당한 바 있었다.
  • 프란치스코 교황의 여동생 마리아 엘레나의 아들 호세 이그나시오 베르고글리오(Jose Ignacio Bergoglio)는 자신이 기억하는 '호르헤 삼촌'에 대해 언론과 인터뷰했다.# 호세는 어렸을 때 아버지가 집을 나갔기 때문에 대신 호르헤를 비롯한 삼촌들에게 의지하며 자랐으며, 자신에게 첫 영성체와 견진을 준 사람도 호르헤였다고 한다.# 그의 가족은 장례미사에 참석하기 위해 바티칸에 가기보다는 제자리를 지키며 자신이 아내와 함께 운영하는 자선 단체에서 계속 할일을 하겠다고 밝혔다.
 
 
 
 
 
 
 
 
 
 
 
 
 
 
 
 
 
 
 
 
 
 
 
 

5.2. 장례식 참석 명단[편집]

 
 
 
 
 
 
 
 
 
 
 
 
 
 
 
 
 
 
 
 
 
 
 
 
 
 
 
 
 
 
 
 
 
 
 
 
 
 
 
 
 
 
 
 
 
 
 
 
 
 
 
 
 
 
 
 
 
 
 
 
 
 
 
 
 
 
 
 
 
 
 
 

5.2.2. 국제기구[편집]

 
 
 
 
 
 
 
 
 
 
 
 
 
 
 
 
 
 
 
 
 
 
 
 
  • 유럽 평의회 깃발
    유럽 평의회 부사무총장 비요른 베르게, 의회 의장 테오도로스 루소풀로스

[1] 여담으로 역대 이탈리아인 교황토리노는 커녕 피에몬테 출신 교황이 단 한명도 없다. 프란치스코로 인해 이탈리아 통일의 중심이었으나 이탈리아 역사 전반적으로는 변방이었던 피에몬테도 간접적으로나마(?) 교황을 배출한 셈이다.[2] 프란치스코 교황 자서전 <희망> 1장 20p[3] 프란치스코 교황 자서전 <희망> 4장 83p[4] 하지만 같은 죄목으로 납치된 교구 교사 4명과 그들의 남편 2명은 그 후 실종된다. 납치된 8명 중 신부들 2명만 빼낸 것이다.[5] 당시에는 군사독재 시절 한국에서조차 적용하지 않던 법적 처벌로서의 연좌제가 당당히 집행됐고, 재판도 없이 그저 정권에 반대한다는 이유만으로 수만 명을 항공기에 태워 대서양이나 태평양 앞바다에 던져버리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미국은 제국 주변의 안정이라는 미명 하에 그걸 적극 지원했다.[6]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 암살범들은 후에 미국에서 대주교의 유족들의 고발로 재판을 받아 유죄판결이 나기는 한다.[7] 전두환이 김대중에게 사형을 선고했다가 갑자기 풀어줘서 미국으로 보내버린 것도 이와 무관하지는 않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권 국가들이 압력을 넣었고, 전두환은 서방권 눈치를 보긴 했는지라 이에 굴복한 것. 사실 한국의 독재자가 미국의 눈치를 많이 본 까닭은 북한의 위협과 그에따라 한미동맹과 주한미군이라는 목줄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8] 나머지 생존자 프란시스코 할리스 신부는 이후 독일로 망명한 이후 은둔생활 중으로, 어떠한 발언도 하지 않았다.[9] 이런 지점으로부터 비판적으로 접근하자면 프란시스코 교황은 요한 바오로 2세의 독재 정권 비호를 받아들여 침묵한 것이지만, 동정적으로 접근하자면 순교를 각오하고 저항해봐야 교황청에게도 '빨갱이물이 들었다'며 외면당한 채 개죽음이나 당할 뻔했으므로 선택할 길이 그리 많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10] 정확하게는 페론당이 분당되어 나온 정당인 "승리를 위한 전선" 소속이다.[11] 두 사람 뒤에서 웃고 있는 사람은 베네딕토 16세 때 교황청의 2인자로 군림하던 국무원장 타르치시오 베르토네 추기경이다. 얼마 뒤 베르토네 추기경도 프란치스코 교황의 개혁 때 잘리게 된다. 너 이단 짤에서 베네딕토 16세 옆에서 살인 미소를 하고 같이 삿대질을 하는 그 분이다.[12] 일반적으로 콘클라베의 구체적 사항은 잘 알려지지 않지만 2005년 콘클라베 당시는 어느 정도 바티칸 취재기자들에게 퍼져 있었다고 한다. 당시 유력 후보는 보수성향의 요제프 라칭거 추기경과 개혁파의 카를로 마리아 마르티니 추기경이었으나, 마르티니 추기경은 파킨슨병 때문에 교황 후보를 포기했고, 개혁파가 대타로 찾은 후보가 바로 베르골료 추기경이었다고 한다. 초반 투표에서 라칭거 추기경이 1위였으나 베르골료 추기경도 40표 이상을 확보해 다시 투표를 해야 했는데 베르골료 추기경이 자신을 지지한 추기경들에게 라칭거 추기경을 지지할것을 부탁하면서 라칭거 추기경이 교황에 선출되었다고 한다. 베르골료 추기경이 중도사퇴한 이유는 바티칸에 그가 아르헨티나 군부독재정권과 결탁했다는 소문이 퍼진 탓이었다는 이야기가 있다.[13] 서머타임 적용, 미적용 시 6시 35분, 한국 시각 14시 35분[14] 재위 중 사망한 교황으로서는 지난 1903년에 향년 93세로 사망했던 레오 13세의 뒤를 잇는, 최고령 2위의 기록이다.[15] 이를 빗대어 몇몇 천주교 신자들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하늘나라로 엠마오를 떠났다"고 평하기도 했다. 엠마오는 루카복음 24장 13~35절에서 부활한 예수가 피신하던 제자들을 만난 곳의 이름으로 부활절 직후의 복음 봉독에 자주 등장하며, 천주교도 사이에는 매년 부활절 직후 신자들 사이의 기념 행사 및 성당 직원들의 휴가를 뜻하는 비유적 표현으로도 쓰인다.[16] 고전 라틴어에는 U가 없었으므로, 라틴어를 예스럽게 적을 때에는 V가 U를 대신하는 경우가 많다.[17] 예수가 양들을 돌보는 모습이 새겨져 있는데, 일명 '착한 목자(good shepherd)의 십자가'로 불린다. 천주교 신자들 사이에서도 '프란치스코 교황 십자가'라는 별칭으로 알려져 왔다.[18] 한덕수는 감리교 신자이다.[19] 트럼프는 1기 정부 시절 프란치스코 교황과 이민자 문제로 대립각을 세우며 "교황은 가톨릭 교회에 충실하길 바란다"라는 말까지 남긴 바 있다.[20] 이시바 총리는 일본 역사에서 몇 안 되는 개신교 신자 총리이다. 전통적으로 일본 총리들은 대수가 신토불교 신자였고, 기독교 신자는 열 손가락 안에 꼽을 수준이다. 일본은 기독교 인구가 적기 때문이다.[21] 입헌군주제 국가로선 이례적으로 국왕이 참석하지 않는데 생일 기념 행사로 불참 의사를 표명했다. 네덜란드는 국왕 탄일국경일이기 때문이다.[22] 라이칭더 총통도 천주교 신자이긴 하나, 천젠런 역시 독실한 천주교 신자이기도 하거니와 프란치스코 교황을 무려 여섯 번이나 만날 만큼 사이가 좋아 특별히 선택된 걸로 보인다.[23] 교황은 바티칸의 군주이기도 하므로 군주의 장례엔 원래 정상급이나 총리급 인사가 조문을 가야 하나, 교황 사망 시점에 윤석열 대통령은 궐위되어 있었고 한덕수 국무총리대통령 권한대행을 겸직하고 있어 자리를 비우기가 어려웠기에, 유경촌 주교를 동생으로 둔 독실한 가톨릭 집안 출신인데다 국가의 종교업무 주무장관이고, 가톨릭 신자 관료들 중 최선임인 유인촌 장관을 보낸 것으로 보인다. 이후 레오 14세 교황 즉위식에도 참석하였다.[24] 크렘린궁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불참 의사를 표한 것과 별개로 푸틴은 국제형사재판소(ICC)의 영장이 발부되었고 이탈리아는 ICC 회원국이기에 가고 싶어도 못 간다.[25]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는 국제형사재판소의 영장이 발부되어 이탈리아에 갈 수가 없다.[26] 현 총리인 마크 카니선거 일정을 이유로 불참 의사를 표명했다.[27] 실제 정부수반인 앤서니 앨버니지 호주 총리는 5월 선거가 가까워져 가톨릭 신자임에도 불구하고 불참을 시사하는 말을 남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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