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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1] 朝鮮 | Chōsen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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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호 | ||
행정구역 | 13도 22부 218군 2도 8구 123읍 2166면 (1945년) | |
통화 | ||
현재 국가 | ||
1. 개요2. 명칭3. 시대구분4. 역사5. 한일병합의 유무효6. 평가
6.1. 사회 분위기에 대한 고찰6.2. 병합됐으니 식민지가 아니다?6.3. 식민지 조선 내의 적극적 저항의 부재?6.4. 동화주의6.5. 차별6.6. 신분제의 유지와 권위주의6.7. 공범이라는 주장에 대한 반론6.8. 일부 긍정적 평가에 대한 반론6.9. 정치적 영향6.10. 사법 분야6.11. 경제 분야6.12. 문화 분야6.13. 언어 분야6.14. 교통 부문6.15. 이후 역사에서의 악영향6.16. 청구권 문제6.17. 일본 및 타국에 끼친 영향6.18. 종합
7. 행정구역8. 역대 조선총독9. 역대 이왕10. 사건 사고11. 미디어12. 기타13. 둘러보기1910년 일본은 대한제국을 강제병합하였고, 당시 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비밀리에 구성된 병합준비위원회를 통해 21개조의 '병합실행방법세목'을 수립하고 제1조에 "한국을 개칭하여 조선으로 할 것"으로 명시하여 국호 '대한'을 말살하고, 모든 활자매체에는 '韓'이라는 이름을 지우게 함으로써 한민족의 정기와 주체성을 말살하는 작업에 착수하여 '조선'으로 불리게 되었다.[19][20] 이후 외교적 보호국에 준하여 시행되던 통감 제도는 해외 속령 등에 시행되는 총독 제도로 개편되었다.
이에 따라 일제강점하 국내에서는 대한이란 국호가 잊혀져갔으나 독립운동가들은 이에 반발하여 일제가 사용금지시킨 '대한'이나 '한국'으로 부르기를 선호하였고, 하와이나 미국, 만주와 연해주에 거주하던 한국인들은 스스로 한인이라고 불렀다. 이는 3.1운동 이후 그 인식이 확대되어 상해에 모여 임시정부를 세우고 국호를 정해 만든 것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였다. 대체로 우익계열은 '대한'이나 '한국'을 선호했고 좌익계열은 '조선'을 선호했다.# 그래서 광복 직후 여운형의 주도로 지방자치위원회의 이름은 조선건국준비위원회였고, 이것이 선포한 국명도 조선인민공화국이었다. 독립군들의 이름 또한 이런 성향에 따라 갈렸다. 최종적으로는 남한과 북한에 각각 '대한'과 '조선'이라는 이름을 쓴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두 명칭 모두가 국호로 병존하게 되었다.
한편 오늘날 한국 국내에서 일제강점기의 시기를 지칭하는 학술적·회화적 명칭들은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이에 따라 일제강점하 국내에서는 대한이란 국호가 잊혀져갔으나 독립운동가들은 이에 반발하여 일제가 사용금지시킨 '대한'이나 '한국'으로 부르기를 선호하였고, 하와이나 미국, 만주와 연해주에 거주하던 한국인들은 스스로 한인이라고 불렀다. 이는 3.1운동 이후 그 인식이 확대되어 상해에 모여 임시정부를 세우고 국호를 정해 만든 것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였다. 대체로 우익계열은 '대한'이나 '한국'을 선호했고 좌익계열은 '조선'을 선호했다.# 그래서 광복 직후 여운형의 주도로 지방자치위원회의 이름은 조선건국준비위원회였고, 이것이 선포한 국명도 조선인민공화국이었다. 독립군들의 이름 또한 이런 성향에 따라 갈렸다. 최종적으로는 남한과 북한에 각각 '대한'과 '조선'이라는 이름을 쓴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두 명칭 모두가 국호로 병존하게 되었다.
한편 오늘날 한국 국내에서 일제강점기의 시기를 지칭하는 학술적·회화적 명칭들은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 일제강점기(日帝強占期)
표준국어대사전에 등재된 명칭으로, 오늘날 민, 관을 가리지 않고 가장 널리 쓰이고 있는 표기이다. 다만 이 표현이 공식적으로 쓰이기 시작한 역사는 길지 않은데, 2003년 부터 검정교과서에 쓰이는 등 용례가 증가하였다. 이를 두고 "일제강점기라는 용어는 대한민국을 '미제강점기'로 바라보는 북한의 사관의 영향이 작용했다"는 견해가 있으나#, 반공을 앞세우던 박정희 정부 당시에도 존재했기에 비공식적으로도 역사가 용어[21]임을 근거로 특정 사관이나 정치적 견해와는 관계가 없다는 견해도 있다.# 실제로 '일제의 강점'이라는 표현까지 포함하면 1950년대 기사에서도 이 표현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용한 인물을 토대로 따진다면 '일제강점기'가 편향된 표현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무리한 주장이다.#
- 일제시대(日帝時代)
시대구분을 나타내는 줄임말로서 회화적으로 널리 사용된다. '일제강점기'라는 표현이 보급되기 전 과거에는 공식적인 자리에서 가장 널리 쓰인 명칭이었으며, 특히 노년층에서는 왜정시대와 함께 많이 사용하는 표현 중 하나이다.[22] 최근에는 '일제시대' 또는 '왜정시대' 보다 '일제강점기'라는 표현이 권장되는 분위기다.
- 대일항쟁기(對日抗爭期)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당시 <대일선전성명서>에서 '한국이 연합국의 반침략 전선에 참가하여 추축국 세력과 이미 전쟁 중에 있음'을 포고한 바 있으며, 안중근의 하얼빈 의거에서 한국 독립운동 중의 전투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역사를 평가하여, 이를 임시정부의 일본 제국에 대한 대등한 격(格)에서의 투쟁기로 보는 관점이 반영되어 있다. 이 표기 역시 학술적으로 일부 사용되다가, 2007년 국회에서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에 관한 특별법>의 표제로 사용[23]되면서 공식석상에 등장하였고, 이후 용례가 증가하였다.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복기대 교수는 "현재 사용하는 일제강점기라는 표현조차 부적절하다"라는 견해를 펼치며 공식 명칭을 '대일항쟁기'로 바꿀 것을 주장한 적 있으나, 이에 대해서 '지나치게 목적지향적인 용어 보급 주장'이라는 도진순 창원대 교수의 반론이 있었다.#
- 국권피탈기(國權被奪期)
국가 주권의 피탈이라는 정치학적 요소를 중점에 둔 표현으로 학술적 명칭으로 사용된다.
- 왜정(倭政)
일본에 대한 멸칭인 '왜(倭)'를 사용한 명칭. 파생 표현으로는 '왜정시대(倭政時代)', '왜정치하(倭政治下)', '왜정시기(倭政時期)' 등이 있다. 과거에는 공적인 자리에서도 이렇게 부르는 경우가 있었다. 예를 들어 국회 오물 투척 사건 당시의 속기록을 보면 김두한이 '왜정 말엽'이라는 표현을 쓴다. 그러나 현재에는 옛 방식이 익숙한 노인들의 표현이나 일부 비공식적 매체에서만 사용된다. 대한민국과 다르게 북한의 경우 '일본' 또는 '일본 제국(일제)'라는 표현보다도 '왜국', '왜정'이라는 표기가 더 많이 사용되며, <조선력사> 등에서 여전히 공식적으로 '왜정시대'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을 찾아볼 수 있다.
- 기타 명칭
출처에 따라 '일본식민지시대(日本植民地時代)', '일제암흑기(日帝暗黑期)', '일정시대(日政時代)', '일본침략기(日本侵略期)', '일제침략기(日帝侵略期)', '왜치시대(倭治時代)' 등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영어로는 'Japanese colonial period', 'under Japanese colonial rule' 등으로 표현한다.
일본에서는 일본통치시대의 조선(日本統治時代の朝鮮)이라고 표현한다.
영어권에서는 Japanese colonial period in Korea, Korea under Japanese rule[25] 등으로 부른다.
특이하게도 일제강점기는 통치의 성격이 약 10년을 주기로 세차례 바뀌기 때문에, 이 시기를 설명할 때 일반적으로 3분법을 사용한다.[26] 일반적으로 10년씩 끊어 1910년대~1920년대~1930년대 순으로 보는데 그 근거는 다음과 같다.
참고로 다른 피지배국들의 사례와 비교하면 조선은 늦게 시작해서 빨리 끝난 편이라고 할 수 있다. 대부분의 경우가 19세기 후반이나 말엽에 식민지화가 이루어진 동시에 2차 대전이 끝나고도 상당수가 승전국의 식민지였던 까닭에 짧게는 몇 년에서 길게는 몇십 년 후에 가서 독립했으며, 어떤 나라들의 경우 식민 피지배 기간이 100년을 넘어가기도 했었다. 물론 개인의 삶에 대비해 보면 34년 11개월 역시 결코 짧지는 않았으며,[27] 그 34년 11개월에 일어났던 일제의 가혹한 탄압으로 인한 악영향과 잔재는 2020년대 현재에도 완전히 청산되지 못하고 이어져오고 있다.
일제강점기의 기간은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병부터 1945년 8월 15일 광복일까지 34년 11개월로 대략 35년임에도 어째선지 일제강점기의 기간을 세는나이처럼 계산하여 36년으로 계산하는 표현들이 많이 보인다. 과거에는 교과서에까지 36년이라는 표현을 썼을 정도였다.[28]
또는 일제시대를 일종의 연호처럼 기산한 것일 수도 있다. 연호는 0년이 없고 원년(=1년)부터 기산하는데, 이에 따라 일제 원년(1910년), 일제 2년, … 으로 기산하다 보면 1945년은 일제 36년이 된다. 다만 이것은 그 해를 뜻하는 것이지 기간을 뜻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엄연히 틀린 표현이며 경주 학도병 서명문 태극기를 보면 ‘상기하자 日帝 三十六年(후략)’이라는 문구가 있는데 꽤나 오랫동안 사용한 것임을 알 수 있다.
1910년 8월 22일 한일병합조약[29]을 체결하기 위해 대한제국의 대표로 참석한 총리대신 이완용과 일본 제국 측의 대표로 온 데라우치 마사타케[30]가 협상에 임했다. 이는 양국의 황제와 덴노가 마주보며 날인하는 것이 물리적으로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일본 제국 측에서는 대리인을 보냈는데 대한제국은 황제가 직접 대면하는 것이 의전상으로도 맞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일본 제국은 이 과정에서 한일병합조약을 공표하여 대한제국이 다스리던 모든 영토를 식민지로 강제로 편입하고, 옛 대한제국 황실은 왕공족인 이왕가(李王家)로 격하시켜 일본 황실에 편입시켰다.[31]
그리하여 1910년 한일병합조약 체결 이후로 약 34년 11개월간의 식민지배가 시작되었고 1919년 삼일 운동이 발발하기까지 1910년대의 일제는 무단통치[32]를 실시하였다. 이 시기 헌병경찰들이 치안업무를 담당하였기에 헌병경찰통치기로도 불리며 조선인의 집회 결사 언론 출판 등 기본권이 보장되지 않았으며 매우 폭압적인 통치가 이루어졌다. 이 시기 폭압적인 통치가 이루어진 것은 조선인의 저항을 강하게 묵살하기 위함도 있지만 경제적 측면도 강했다. 몇몇의 연구[33]에 따르면 일제가 애초에 근대국가였던 다른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과 다르게 근대화를 완전히 끝내지 못해 일제 본토와 거의 동급의 규모인 조선을 식민통치할 만한 여력이 되지 못하는 상황이었지만 러시아의 반격에 대한 고려[34]와 일본 육군의 대륙진출 야욕 등으로 급하게 식민지배를 시작하였다.[35] 일본 입장에서 조선은 영토가 혼슈와 비숫[36]하고 인구[37]도 절반에 가까웠기 때문에 본래는 좀더 점진적인 병합을 준비했지만 예정과 달리 급격하게 병합을 진행한 만큼 경제적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이에 따라 초대 총독 데라우치 마사다케는 최대한 본토의 원조를 받지 않는 자급자족의 자립적인 체제를 세우기에 이른다. 하지만 데라우치 총독은 짧은 기간에 식민지화를 완료하는 공을 세우고자 하는 욕심도 있었고 저렴한 비용과 약간의 노력으로 통치를 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식으로서 공포정치, 이른바 무단통치를 실시한 것이다. 이를테면 아예 기본권을 인정하지 않고 집회취체령으로 모임 자체를 금지해 버리면 시위를 진압할 필요도 없고 검열을 할 필요도 없게 된다.[38] 그리고 본래 의병 소탕을 위해 배치한 헌병을 사법, 행정, 치안, 교육, 위생까지 감찰, 감독하게 만들고 즉결재판까지 가능하게 하는 초법적인 권한을 부여하면 행정비용을 줄일 수 있을 뿐더러 조선인들의 항의 자체를 묵살시킬 수 있다.[39][40] 또한 세수 확보를 위해 높은 수준의 소작료를 인정했고 이러한 방법으로 1910년대는 식민통치를 위한 철도 등의 인프라 건설과 치안유지를 병행하면서도 다른 시기와 다르게 적자를 최소한으로 줄이고 그럭저럭 자립 운영이 가능하게 하였다.[41]
조선인들은 내지에 주거할 시에만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42] 이 같은 참정권 행사 형태는 현재의 미국령 푸에르토리코와 흡사하지만 실제로는 더 열악했다.[43] 조선인들은 미국령 푸에르토리코와 같은 정치활동, 언론, 집회, 결사의 자유 같은 것은 전혀 보장받지 못하였다. 게다가 조선총독부의 지배를 받는 한반도에서는 조선인들 중 극소수의 지주들과 친일파들만이 총독부 자문기구인 중추원에 들어가 정치적 의사를 피력할 수 있었다. 또한 대한제국 시기 폐지된 태형 규정을 조선태형령으로 부활시켰으며, 재정의 30~40%를 헌병 경찰제도에 투입하고, 헌병과 경찰에게 즉결처분권을 부여하였으며 이들은 조선인들에게 가혹한 조치를 일삼아 조선 민중의 증오를 받았다.[44] 약간의 예외로, 1920년대 하라 타카시 내각은 내지연장주의에 근거하여 조선총독부 관할 영토인 조선 내에서도 조선인에게 1등 신민과 동일한 권리를 보장하려는 시도를 했는데, 이는 당시 일본 제국 내각이 2,000~3,000만이라는 적지 않은 수의 조선인들이 내각을 지지하도록 만들어 군부와 조선총독부를 견제하려던 시도라고 할 수 있다.
당시 한반도는 일본 열도에 비해 천연자원이 상대적으로 풍부했고[45], 비록 구매력은 볼품 없었다고 하나 대신, 노동력 또한 값싸고 풍부했다. 일제가 이러한 특성에 주목해서 1900년대~1910년대에 쌀, 면화, 양잠, 소에 대한 품종 개량 및 육성과 SOC 건설을 통해, 조선을 일본 자본주의 발전을 위한 식량, 원료의 공급기지이자, 상품판매시장으로서 재편하고자 하였다[46]는 것이 정설이다. 그 밖의 이유로는 조선의 관세 자주권 박탈에 따른 이득, 경쟁자로 맞붙을 수 있는 조선으로부터 일본 국내 산업 보호(회사령, 광업령, 어업령 등), 러시아 등 대국에 대한 방어기제, 식민지화(이민정책) 등이 꼽힌다. 여기에 대해서는 좀 더 논의가 필요한 게, 허수열 교수의 <일제하 조선에 있어서 일본인 토지소유규모>(2012)에서는 1935 추계 기준 일본인 소유 논 면적은 조선 전체의 15%이다. 그리고 잊지 말아야할 것은 총독부가 가지고 있는 국유지는 상당한 규모였다. 또한 일본인의 조선 이민은 황수환 교수의 <근대기 일본인 이주농촌의 형성과 이주농촌가옥 - 강서구 대저지역을 중심으로>(2011)에 따르면 일본인의 조선 이민 수요는 1911년부터 시작되어 1927년까지 증가하고 있었다. 이는 대규모는 아닐지라도 총독부가 조선 이민정책을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니라는 걸 보여준다.
한편 조세수취를 정비하기 위해 1907년 한국통감부 시절부터 해오던 국유지 조사작업에 이어서 경술국치 이후인 1910년부터 1918년까지 민유지를 조사하는 토지조사사업(1912~1918)을 완료하고 한반도에 근대적 토지소유권 제도를 확립했다고 선전하였다. 실상은 좀더 체계적인 수탈을 하기위한 사업이었을 뿐이다. 예로 윤치호 일기의 내용을 보면 당시 상황이 어땠는지 짐작해볼수 있다.
그리하여 1910년 한일병합조약 체결 이후로 약 34년 11개월간의 식민지배가 시작되었고 1919년 삼일 운동이 발발하기까지 1910년대의 일제는 무단통치[32]를 실시하였다. 이 시기 헌병경찰들이 치안업무를 담당하였기에 헌병경찰통치기로도 불리며 조선인의 집회 결사 언론 출판 등 기본권이 보장되지 않았으며 매우 폭압적인 통치가 이루어졌다. 이 시기 폭압적인 통치가 이루어진 것은 조선인의 저항을 강하게 묵살하기 위함도 있지만 경제적 측면도 강했다. 몇몇의 연구[33]에 따르면 일제가 애초에 근대국가였던 다른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과 다르게 근대화를 완전히 끝내지 못해 일제 본토와 거의 동급의 규모인 조선을 식민통치할 만한 여력이 되지 못하는 상황이었지만 러시아의 반격에 대한 고려[34]와 일본 육군의 대륙진출 야욕 등으로 급하게 식민지배를 시작하였다.[35] 일본 입장에서 조선은 영토가 혼슈와 비숫[36]하고 인구[37]도 절반에 가까웠기 때문에 본래는 좀더 점진적인 병합을 준비했지만 예정과 달리 급격하게 병합을 진행한 만큼 경제적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이에 따라 초대 총독 데라우치 마사다케는 최대한 본토의 원조를 받지 않는 자급자족의 자립적인 체제를 세우기에 이른다. 하지만 데라우치 총독은 짧은 기간에 식민지화를 완료하는 공을 세우고자 하는 욕심도 있었고 저렴한 비용과 약간의 노력으로 통치를 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식으로서 공포정치, 이른바 무단통치를 실시한 것이다. 이를테면 아예 기본권을 인정하지 않고 집회취체령으로 모임 자체를 금지해 버리면 시위를 진압할 필요도 없고 검열을 할 필요도 없게 된다.[38] 그리고 본래 의병 소탕을 위해 배치한 헌병을 사법, 행정, 치안, 교육, 위생까지 감찰, 감독하게 만들고 즉결재판까지 가능하게 하는 초법적인 권한을 부여하면 행정비용을 줄일 수 있을 뿐더러 조선인들의 항의 자체를 묵살시킬 수 있다.[39][40] 또한 세수 확보를 위해 높은 수준의 소작료를 인정했고 이러한 방법으로 1910년대는 식민통치를 위한 철도 등의 인프라 건설과 치안유지를 병행하면서도 다른 시기와 다르게 적자를 최소한으로 줄이고 그럭저럭 자립 운영이 가능하게 하였다.[41]
조선인들은 내지에 주거할 시에만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42] 이 같은 참정권 행사 형태는 현재의 미국령 푸에르토리코와 흡사하지만 실제로는 더 열악했다.[43] 조선인들은 미국령 푸에르토리코와 같은 정치활동, 언론, 집회, 결사의 자유 같은 것은 전혀 보장받지 못하였다. 게다가 조선총독부의 지배를 받는 한반도에서는 조선인들 중 극소수의 지주들과 친일파들만이 총독부 자문기구인 중추원에 들어가 정치적 의사를 피력할 수 있었다. 또한 대한제국 시기 폐지된 태형 규정을 조선태형령으로 부활시켰으며, 재정의 30~40%를 헌병 경찰제도에 투입하고, 헌병과 경찰에게 즉결처분권을 부여하였으며 이들은 조선인들에게 가혹한 조치를 일삼아 조선 민중의 증오를 받았다.[44] 약간의 예외로, 1920년대 하라 타카시 내각은 내지연장주의에 근거하여 조선총독부 관할 영토인 조선 내에서도 조선인에게 1등 신민과 동일한 권리를 보장하려는 시도를 했는데, 이는 당시 일본 제국 내각이 2,000~3,000만이라는 적지 않은 수의 조선인들이 내각을 지지하도록 만들어 군부와 조선총독부를 견제하려던 시도라고 할 수 있다.
당시 한반도는 일본 열도에 비해 천연자원이 상대적으로 풍부했고[45], 비록 구매력은 볼품 없었다고 하나 대신, 노동력 또한 값싸고 풍부했다. 일제가 이러한 특성에 주목해서 1900년대~1910년대에 쌀, 면화, 양잠, 소에 대한 품종 개량 및 육성과 SOC 건설을 통해, 조선을 일본 자본주의 발전을 위한 식량, 원료의 공급기지이자, 상품판매시장으로서 재편하고자 하였다[46]는 것이 정설이다. 그 밖의 이유로는 조선의 관세 자주권 박탈에 따른 이득, 경쟁자로 맞붙을 수 있는 조선으로부터 일본 국내 산업 보호(회사령, 광업령, 어업령 등), 러시아 등 대국에 대한 방어기제, 식민지화(이민정책) 등이 꼽힌다. 여기에 대해서는 좀 더 논의가 필요한 게, 허수열 교수의 <일제하 조선에 있어서 일본인 토지소유규모>(2012)에서는 1935 추계 기준 일본인 소유 논 면적은 조선 전체의 15%이다. 그리고 잊지 말아야할 것은 총독부가 가지고 있는 국유지는 상당한 규모였다. 또한 일본인의 조선 이민은 황수환 교수의 <근대기 일본인 이주농촌의 형성과 이주농촌가옥 - 강서구 대저지역을 중심으로>(2011)에 따르면 일본인의 조선 이민 수요는 1911년부터 시작되어 1927년까지 증가하고 있었다. 이는 대규모는 아닐지라도 총독부가 조선 이민정책을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니라는 걸 보여준다.
한편 조세수취를 정비하기 위해 1907년 한국통감부 시절부터 해오던 국유지 조사작업에 이어서 경술국치 이후인 1910년부터 1918년까지 민유지를 조사하는 토지조사사업(1912~1918)을 완료하고 한반도에 근대적 토지소유권 제도를 확립했다고 선전하였다. 실상은 좀더 체계적인 수탈을 하기위한 사업이었을 뿐이다. 예로 윤치호 일기의 내용을 보면 당시 상황이 어땠는지 짐작해볼수 있다.
이일 씨 말에 따르면, 일본 경찰은 이일 씨와 다른 수감자들을 취조하면서 거침없이 몽둥이를 사용했고, 일본 경찰은 이일 씨가 참여했던 회원 운동에는 정치적 의도가 깔려 있다고 주장했으며, 수감자 두세 명이 취조를 받은 뒤 취조실에는 부러진 몽둥이 파편들이 사방에 널려있었다고 한다. 토지수용권의 정당성(또는 부당성)은 여전히 악용되고 있다. 일본에서 조선으로 밀려들어오는, 정부 보조를 받는 이주민들 수가 점점 많아지고 있다.
ㅡ1919년 8월 9일
남대문역과 역의 부속건물들 부지를 마련하려고 조선인 가옥 700여 채가 철거되었다. 이런 개발은 필요하다. 하지만 총독부는 그 작은 집을 철거당함으로써 대부분 자신이 가지고 있던 전 재산을 잃어버린 가난한 조선인들에게 보상해야 한다. 총독부는 집을 잃은 조선인들에게 토지가격의 전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다른 곳에서 새 집을 구할 수 있을 만큼 보상해야 한다. 남만주철도주식회사는 토지수용권이라는 미명으로 가난한 조선인의 재산을 빼앗아 큰 이윤을 남기고 있다. 이런 일이 조선인들로 하여금 고마움을 느끼게 만드는 최선의 방책은 아니다.
ㅡ1919년 5월 25일
신임 총독(사이토 마코토)이 천황의 어여쁜 자식인 조선인을 위한 개혁을 하겠다며 온갖 약속과 광고를 하면서 부임한 지 거의 1년이 지났다. 그동안 폐단이 조금이라도 제거되었는가? 일본인 농민들이 거주할 곳을 마련하기 위해 조선인 수백 가구를 만주로 내몰아 궁핍과 죽음에 이르게 만들면서 식민화가 열광적인 속도로 진행되고 있다. 수리조합은 말 그대로 토지수용권이라는 미명 아래 비옥한 농지들을 징발하고 있다. 관료주의는 점점 더 악화되고 있다. 개혁은 어디에 있단 말인가?
ㅡ1920년 8월 1일
총독부의 가장 교활하고 잔인한 시책은 수리사업을 통해 조선인의 논을 빼앗는 것이다. 그들은 우선 저수지를 만들 때 가장 좋은 논 중에서 수백만 평을 골라 공시지가로 징발한다. 그러고 나서 조선인 지주에게 터무니없이 과도한 수리조합비를 부과한다. 결국 조선인 지주는 일본인에게 논을 팔거나 무상으로 주는 수밖에 없다. 이런 일은 모두 가난한 조선인을 구제하려고 농업을 진흥한다는 미명하에 이루어진다. 사악하면 득 될 것이 없다는 말은 맞지 않는다. 일본의 이런 비정함이야말로 영악함과 권력만 있으면 불의도 화려하게 치장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증거다. 충남 예산에 사는 성 씨의 비옥한 논은 저주받을 수리조합 영역 안쪽에 있었다. 성 씨는 예전 같으면 평당 60전을 준다 해도 논을 팔지 않았지만, 이제는 어쩔 수 없이 논을 평당 15전에 내놓았다. 그런데 평당 15전이라고 해도 조선인은 감히 이 논을 매입할 수가 없었다. 물론 일본인도 이 논을 매입하지 않았다. 터무니없는 수리조합비와 가혹한 세금을 견디다 못한 성 씨가 조만간 자신들에게 이 비옥한 논을 공짜로 인수해달라고 애걸복걸할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니까.
ㅡ1931년 1월 10일
그 밖에 삼림지역에 대해서는 산림법을 제정, 산림령을 반포하였다. 임목 및 산림지역을 소유형태에 따라 구분하고, 지속적으로 관리된 토지에 대해 사유권을 인정하되, 지적도 제출을 요구하였고, 산림의 채굴이나 임의 용도변경을 못하게 하는 보안림(保安林)을 설정하여 산림보호정책을 펼치는 동시에 보안림 설정으로 경제적 피해를 입었을 경우 청구제도를 이용케 보조하였다. 임야 및 산림토지 중 많은 수가 공유지거나 국유인 경우가 많아, 1925년 전 국토 대비 40%가 총독부의 관할이 되었다.
한편 식민지 편입과 동시에 일본시장과의 연결을 위해 재정의 절반가량을 철도, 도로, 항만 건설에 투입하고 관개시설을 개·보수, 지역 특색에 맞는 일본의 벼, 양잠 등 우량종을 보급하는 등 일본의 2차산업과 연계하여 1차산업을 증산하고자 노력하였다.[47] 그러나 재정의 30~40%를 헌병 경찰 제도에 투입하는 등 통치 체제 확립이 최우선 목표였기 때문에 농업 정책에 온전히 집중하지는 못하였고, 이러한 모순적인 관계를 최대한 덮으면서 한국통감부의 업적을 날조하기 위해 조선물산공진회 같은 몇몇 교화정책을 펼치기도 했다.
공업의 경우 경성부와 평남에서 시작되었다. 1905년에 문을 연 용산공작창이 경성 일대의 기계공업 중심지였다. 1915년에는 진남포제련소가 문을 열어 평안도 및 황해도 일대에서 채굴된 귀금속을 제련하기 시작했다. 1917년에는 평양 근교에 오노다시멘트 평양공장이 자리잡았다. 1918년에는 미쓰비시 재벌의 겸이포제철소가 조업을 개시했는데 이는 한반도 최초 일관제철소였다. 1917년에는 평양에 첫 군수공장인 조선병기제조소 건설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 중공업 공장들은 전부 일본 본토의 재벌 자본이나 일본 정부 측에서 장악하고 운영했다.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배성준에 따르면 조선의 공업은 '식민지 이중구조'에 해당하였다. 대공장과 중소공장들이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기술과 자본을 주고받으며 발전하던 일본 본토의 산업적 이중구조와 달리, 조선의 식민지적 이중구조는 둘 간의 연관이 거의 없던 것이 특징이었다. 일본 본토의 자본과 대공장들이 원료와 시장을 대부분 장악한 가운데 조선의 수많은 가내수공업 공장들은 얼마 되지 않는 나머지 파이를 나눠먹기 위해 피터지는 경쟁을 해야만 했다. 그렇다보니 최대한 이익을 보고 빠져나가는 한탕주의적 운영이 만연했고 기술발전은 없었다. 이때 고착된 공업의 식민지적 이중구조는 일제강점기가 끝날 때까지 이어졌다.
이 시기에 기존 '국어'의 지위가 바뀌는데, 한국어는 '조선어 및 한문'으로 바뀌어서 격하되었으며, 일본어가 '국어'로 명칭이 바뀌게 된다.
한편 식민지 편입과 동시에 일본시장과의 연결을 위해 재정의 절반가량을 철도, 도로, 항만 건설에 투입하고 관개시설을 개·보수, 지역 특색에 맞는 일본의 벼, 양잠 등 우량종을 보급하는 등 일본의 2차산업과 연계하여 1차산업을 증산하고자 노력하였다.[47] 그러나 재정의 30~40%를 헌병 경찰 제도에 투입하는 등 통치 체제 확립이 최우선 목표였기 때문에 농업 정책에 온전히 집중하지는 못하였고, 이러한 모순적인 관계를 최대한 덮으면서 한국통감부의 업적을 날조하기 위해 조선물산공진회 같은 몇몇 교화정책을 펼치기도 했다.
공업의 경우 경성부와 평남에서 시작되었다. 1905년에 문을 연 용산공작창이 경성 일대의 기계공업 중심지였다. 1915년에는 진남포제련소가 문을 열어 평안도 및 황해도 일대에서 채굴된 귀금속을 제련하기 시작했다. 1917년에는 평양 근교에 오노다시멘트 평양공장이 자리잡았다. 1918년에는 미쓰비시 재벌의 겸이포제철소가 조업을 개시했는데 이는 한반도 최초 일관제철소였다. 1917년에는 평양에 첫 군수공장인 조선병기제조소 건설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 중공업 공장들은 전부 일본 본토의 재벌 자본이나 일본 정부 측에서 장악하고 운영했다.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배성준에 따르면 조선의 공업은 '식민지 이중구조'에 해당하였다. 대공장과 중소공장들이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기술과 자본을 주고받으며 발전하던 일본 본토의 산업적 이중구조와 달리, 조선의 식민지적 이중구조는 둘 간의 연관이 거의 없던 것이 특징이었다. 일본 본토의 자본과 대공장들이 원료와 시장을 대부분 장악한 가운데 조선의 수많은 가내수공업 공장들은 얼마 되지 않는 나머지 파이를 나눠먹기 위해 피터지는 경쟁을 해야만 했다. 그렇다보니 최대한 이익을 보고 빠져나가는 한탕주의적 운영이 만연했고 기술발전은 없었다. 이때 고착된 공업의 식민지적 이중구조는 일제강점기가 끝날 때까지 이어졌다.
이 시기에 기존 '국어'의 지위가 바뀌는데, 한국어는 '조선어 및 한문'으로 바뀌어서 격하되었으며, 일본어가 '국어'로 명칭이 바뀌게 된다.
제1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의 발언에서 유래한 민족자결주의가 조선 민중들 사이에 퍼지고[48] 이로 인해 촉발된 3.1 운동[49]이 격화되고, 일제의 다이쇼 데모크라시[50]와도 맞물리면서, 무단통치 시기는 막을 내린다.
이후 사이토 마코토 총독이 새로 부임하면서 이른 바 문화 통치[51]를 표방하기 시작한다. 3·1 운동에 크게 놀란 조선총독부가 그동안 조선인들에 대해 시행했던 가혹한 정책들을 일부 해소하면서, 민심을 추스리는 데 노력한 시기이기도 하다. 그동안 무관만이 임직했던 조선총독에 문관(文官)도 오를 수 있음을 내걸고[52], 치안을 헌병이 아닌 경찰이 담당하게 되었지만 그것은 눈가리고 아웅이었는데 문화 정치를 내세운 첫 해인 1920년만 해도 경찰관서의 수는 1918년보다 3.6배, 경찰관의 수는 3.4배에 달했고 경찰 예산도 3배 이상 늘렸다. 게다가 고등경찰제도를 신설해 더 악랄하게 조선인 사회를 감시하고 독립운동을 탄압하였다. 경제적으로 회사령을 철폐하여 조선인의 사업에 대한 규제를 푸는 등의 유화책을 펼치는 듯 보였지만 실제로는 일본 기업의 조선진출을 쉽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회사 설립 조건을 허가제에서 신고제로 변경하였던 것이다. 문화통치 시기에 조선일보, 동아일보, 조선중앙일보[53] 등 조선인 언론사도 여럿 창간되었다.
문화통치의 본 목적은 회유정책을 바탕으로 조선인들의 사회문화적 기반을 일본으로 흡수하고 나아가서는 조선인을 일본인화시키겠다는 것이었다. 조선인들의 언론과 사회 운동이 허용되었지만, 실제로는 검열이나 요시찰 제도 등을 통해 언론과 사회활동을 변함없이 제한하고 탄압했으며 조선인들의 사회 활동을 자신들의 통제 아래 두려고 했었다. 또한, 무단통치시기에는 송병준이나 이완용 같은 지위와 권위에 의존한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을 내세웠다면 이 시기에는 '자치론'이라는 떡밥을 내걸어 친일 지식인들을 체계적으로 육성하기도 했다. 경성제국대학 등 대대적으로 교육 시설을 정비하고 극히 제한된 인원에게만 중고등교육을 제공하면서, 광범위한 대중이 정규 교육 속에서 친일적 요소를 자연스럽게 습득하도록 했다.
다만 으레 식민지 교육제도가 그렇듯 이 시기의 교육 기회 확장은 철저히 일제가 통제 가능한 수준과 범위에서만 이루어졌으며 식민지 보조 인력을 늘리기 위해서만 기능하였다. 이 시기 전국적으로 수많은 보통학교가 설립되었으나 총독부는 자신들의 통제 밖에 있을 수밖에 없는 사립학교 개설을 규제하였고 오직 공립학교만 늘리려 했으며 이마저도 3.1운동을 의식해서 거의 짓지도 않았다. 때문에 초등교육이 보편화되고 근대화의 필수인 의무교육을 시행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수준이었다. 이 때문에 전례없는 보통학교 입학시험과 간이학교가 이때 생겼다. 이는 모든 면에 보통학교가 1개교씩 생긴다 해도 그 면 지역 전체의 교육을 관할할 수 없었다는 의미이고, 애초에 1면 1교 정책이 제대로 실현되지도 않았다. 기본적으로는 3면 1교였고, 나중에는 면 숫자가 줄어들기 시작했는데도 결국 1면 1교는 완성되지 못했다. 최대로 늘었을 때도 2천 개가 되지 못했는데, 2017년 대한민국의 초등학교 개수가 1만 개가 넘는다는 것을 고려하면, 저 학교라는 것들이 얼마나 넓은 범위를 관장해야 하는지 알 수 있다. 거기다 사립학교 규제에 비례하여 서당이 2배로 폭증하여 전국에만 2만 곳이 넘었는데 이는 의무교육이 없어 돈이 없는 계층은 학교에 갈수 없다는 사정, 그리고 일본 주도의 교육에 대한 불만이 빚어낸 결과였다.
당연하지만 총독부는 서당령을 통해 이또한 규제하러 들었고 이로인해 서당들 또한 20년대 후반이 되면서 점차 모습을 감추게 된다.
아무튼간에 전대미문의 보통학교 입시가 시행되었고, 1차 조선교육령 기준으로 교육시간은 주당 10시간. 여기에 6년제마저 정착되지 않아서 대부분은 4년을 다녔고, 5~6학년은 개설되지 않은 학교가 태반이었다. 이 부분은 조선과 일본의 교육시스템에 차이가 생기게 만들어서, 이 시기 조선에서 교육받은 것으로는 일본에서 진학할 수 없었다. 그리고 실질적으로 1920년대 말 보통학교 취학률은 18%에 불과했다는 조사까지 존재한다. 한편 소학교가 설립을 하려는 시도라도 한 것에 비해 중등학교의 설립은 극단적으로 억제되어 있었다. 2개의 도마다 남자ㆍ여자 중등학교가 1개교씩이라도 설립되어 있으면[54] 형편이 그나마 괜찮은 것으로, 한 도 내에 중등학교가 아예 없는 시기도 있었다. 중등교육이 이런데, 고등교육기관은 말할 것도 없다.
일제가 이처럼 교육기관을 철저히 자신들이 통제할 수 있는 범위 내에 둔 것은, 영국령 인도의 식민통치를 보고 느낀 점이 있기 때문이다. 영국은 인도에서 식민적 이익을 취하는 동시에 미개한 인도를 계몽하겠단 의도로 보편 교육제도를 도입했다. 이렇듯 인도인들은 자신의 의지만 있다면 충분한 수준의 초중등교육을 받을 수 있고, 그중 인적 잠재력이 있는 인재는 고등교육 역시 받을 수 있을 정도로 교육의 기회가 열려 있었다. 영국은 이러한 교육제도를 통해 친영적 프로파간다를 내재시키려 했지만, 보편 교육제도가 도입되고 수십 년이 지나자 역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사회의 교육수준이 전반적으로 향상되면서 본의 아니게 계몽이 이루어졌고, 이는 반영운동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현상을 목도한 일본은 식민지 내에서 교육만큼은 철저히 억압하고, 자신들의 통치를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 인력에게만 선택적으로 교육을 제공하기로 한다. 경성제국대학만 해도 식민통치에 필요한 법학과 의학을 교육하는 데 주목적이 있었고, 태평양전쟁 이후 공업기술인력이 필요해져서야 이공학부를 개설한다.
당시의 조선인, 특히 1910~1920년대생은 일제 강점기 아래에서 초등교육(보통학교)이나 소년 단체 등을 통해 일본식 질서·체력 단련·근면·복종 등을 배우고 체화했다. 이러한 교육은 질서를 중시하고, 규율을 따르며, 편법을 쓰지 않는 것이 훌륭한 인간상이라는 가치를 강하게 주입했다. 실제로 당시 일본은 '형식적인' 도시 청결, 행정의 일관성, 시간 준수 등에서 조선보다 상대적으로 높은 질서 수준을 보여주었고, 일부 조선인들은 이를 '문명적'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특히 새로 자라나던 당시의 어린 아이들은 부정부패나 사회적 모순에 대한 정보를 전해듣지 못했기 때문에 정직과 질서가 실제로 지켜지는 줄 알았지만, 사실은 상명하복 구조 속에서 불의에 침묵하거나 방조하는 문화가 있었고 일본 열도에서조차 방산 비리나 정치자금 스캔들, 뇌물 수수, 부정 인사 문제가 빈번했다. 저 당시의 어린이들은 청년이 되어서 태평양 전쟁에 따른 징용이나 배급 등으로 큰 고생을 해서 독립을 매우 기쁘게 반기게 되었다.
이 시기는 3.1 운동의 직접적 영향으로 독립운동이 국내외에서 활발하게 펼쳐지던 시기였다. 김원봉 단장의 지휘로 결성된 의열단은 부산경찰서(박재혁, 1920년), 밀양경찰서(최수봉, 1920년), 조선총독부(김익상, 1921), 종로경찰서(김상옥, 1923), 도쿄 궁성 이중교(김지섭,1924년), 동양척식주식회사(나석주, 1926) 등에 폭탄 투척을 하였고, 중국 관내에서는 상해임시정부가, 미국에서는 흥사단과 국민회가 일제의 식민지배에 항거하여 민족단결을 위해 노력하였다.
다만 이 시기에도 치안유지법(治安維持法)을 제정하여[55] 공산주의자 등의 사상운동가와 총독부에 반대하는 인물을 탄압하는 것은 여전했으며, 이 시기에 지방선거가 시작되었다고는 하나 실상은 일본인 아니면 부유층들이나 투표할 수 있었기에 기득권층들로 채워졌고, "무관 출신이 아닌 문관 출신도 총독 자리에 오를 수 있다"고 공표하였으나 실제로는 문관 출신이 총독 자리에 오른 사례는 광복까지 단 한 번도 없었다.[56] 또한 각종 친일파 양성 정책 등을 통해 실제로 이는 일본 입장에서 어느 정도 성공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이광수, 최남선, 최린 등의 민족개량과 자치를 내세우는 타협적 인사들을 지원하여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 및 사회주의자들과 갈등을 빚게 하였다. 이런 갈등 속에서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이 결집하여 신간회를 창립하였다.
한편으로는 그동안 폐쇄적이었던 조선인의 세계 인식이 확대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시기에 조선인들은 역설적으로 이후 시대보다 사상적, 이동적으로 개방적이었다. 한반도가 비록 식민지 체제에 속해 있었지만 세계와의 교류는 활발하였으며 조선인들의 세계 여행도 비교적 자유로웠다.[57] 오히려 냉전 때의 독재정권 시절의 대한민국이 냉전 반공 이데올로기의 영향으로 세계 여행이 통제되었고 사상의 자유가 더욱 억압되었다. (북한은 말할 것도 없다.) 이 당시에 조선에 수입된 대표적인 사상이 사회주의이며, 반제국주의 사상으로서 한반도의 해방에 일부분 기여하였다. KAPF와 같은 사회주의 문학 단체도 활동하였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의 영향으로 생겨난 수많은 자생적 공산주의자들은 조선공산당을 창당하였으나, 일제 관헌의 탄압과 내부 분파투쟁으로 와해와 재창당을 반복했다.
이후 사이토 마코토 총독이 새로 부임하면서 이른 바 문화 통치[51]를 표방하기 시작한다. 3·1 운동에 크게 놀란 조선총독부가 그동안 조선인들에 대해 시행했던 가혹한 정책들을 일부 해소하면서, 민심을 추스리는 데 노력한 시기이기도 하다. 그동안 무관만이 임직했던 조선총독에 문관(文官)도 오를 수 있음을 내걸고[52], 치안을 헌병이 아닌 경찰이 담당하게 되었지만 그것은 눈가리고 아웅이었는데 문화 정치를 내세운 첫 해인 1920년만 해도 경찰관서의 수는 1918년보다 3.6배, 경찰관의 수는 3.4배에 달했고 경찰 예산도 3배 이상 늘렸다. 게다가 고등경찰제도를 신설해 더 악랄하게 조선인 사회를 감시하고 독립운동을 탄압하였다. 경제적으로 회사령을 철폐하여 조선인의 사업에 대한 규제를 푸는 등의 유화책을 펼치는 듯 보였지만 실제로는 일본 기업의 조선진출을 쉽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회사 설립 조건을 허가제에서 신고제로 변경하였던 것이다. 문화통치 시기에 조선일보, 동아일보, 조선중앙일보[53] 등 조선인 언론사도 여럿 창간되었다.
문화통치의 본 목적은 회유정책을 바탕으로 조선인들의 사회문화적 기반을 일본으로 흡수하고 나아가서는 조선인을 일본인화시키겠다는 것이었다. 조선인들의 언론과 사회 운동이 허용되었지만, 실제로는 검열이나 요시찰 제도 등을 통해 언론과 사회활동을 변함없이 제한하고 탄압했으며 조선인들의 사회 활동을 자신들의 통제 아래 두려고 했었다. 또한, 무단통치시기에는 송병준이나 이완용 같은 지위와 권위에 의존한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을 내세웠다면 이 시기에는 '자치론'이라는 떡밥을 내걸어 친일 지식인들을 체계적으로 육성하기도 했다. 경성제국대학 등 대대적으로 교육 시설을 정비하고 극히 제한된 인원에게만 중고등교육을 제공하면서, 광범위한 대중이 정규 교육 속에서 친일적 요소를 자연스럽게 습득하도록 했다.
다만 으레 식민지 교육제도가 그렇듯 이 시기의 교육 기회 확장은 철저히 일제가 통제 가능한 수준과 범위에서만 이루어졌으며 식민지 보조 인력을 늘리기 위해서만 기능하였다. 이 시기 전국적으로 수많은 보통학교가 설립되었으나 총독부는 자신들의 통제 밖에 있을 수밖에 없는 사립학교 개설을 규제하였고 오직 공립학교만 늘리려 했으며 이마저도 3.1운동을 의식해서 거의 짓지도 않았다. 때문에 초등교육이 보편화되고 근대화의 필수인 의무교육을 시행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수준이었다. 이 때문에 전례없는 보통학교 입학시험과 간이학교가 이때 생겼다. 이는 모든 면에 보통학교가 1개교씩 생긴다 해도 그 면 지역 전체의 교육을 관할할 수 없었다는 의미이고, 애초에 1면 1교 정책이 제대로 실현되지도 않았다. 기본적으로는 3면 1교였고, 나중에는 면 숫자가 줄어들기 시작했는데도 결국 1면 1교는 완성되지 못했다. 최대로 늘었을 때도 2천 개가 되지 못했는데, 2017년 대한민국의 초등학교 개수가 1만 개가 넘는다는 것을 고려하면, 저 학교라는 것들이 얼마나 넓은 범위를 관장해야 하는지 알 수 있다. 거기다 사립학교 규제에 비례하여 서당이 2배로 폭증하여 전국에만 2만 곳이 넘었는데 이는 의무교육이 없어 돈이 없는 계층은 학교에 갈수 없다는 사정, 그리고 일본 주도의 교육에 대한 불만이 빚어낸 결과였다.
당연하지만 총독부는 서당령을 통해 이또한 규제하러 들었고 이로인해 서당들 또한 20년대 후반이 되면서 점차 모습을 감추게 된다.
아무튼간에 전대미문의 보통학교 입시가 시행되었고, 1차 조선교육령 기준으로 교육시간은 주당 10시간. 여기에 6년제마저 정착되지 않아서 대부분은 4년을 다녔고, 5~6학년은 개설되지 않은 학교가 태반이었다. 이 부분은 조선과 일본의 교육시스템에 차이가 생기게 만들어서, 이 시기 조선에서 교육받은 것으로는 일본에서 진학할 수 없었다. 그리고 실질적으로 1920년대 말 보통학교 취학률은 18%에 불과했다는 조사까지 존재한다. 한편 소학교가 설립을 하려는 시도라도 한 것에 비해 중등학교의 설립은 극단적으로 억제되어 있었다. 2개의 도마다 남자ㆍ여자 중등학교가 1개교씩이라도 설립되어 있으면[54] 형편이 그나마 괜찮은 것으로, 한 도 내에 중등학교가 아예 없는 시기도 있었다. 중등교육이 이런데, 고등교육기관은 말할 것도 없다.
일제가 이처럼 교육기관을 철저히 자신들이 통제할 수 있는 범위 내에 둔 것은, 영국령 인도의 식민통치를 보고 느낀 점이 있기 때문이다. 영국은 인도에서 식민적 이익을 취하는 동시에 미개한 인도를 계몽하겠단 의도로 보편 교육제도를 도입했다. 이렇듯 인도인들은 자신의 의지만 있다면 충분한 수준의 초중등교육을 받을 수 있고, 그중 인적 잠재력이 있는 인재는 고등교육 역시 받을 수 있을 정도로 교육의 기회가 열려 있었다. 영국은 이러한 교육제도를 통해 친영적 프로파간다를 내재시키려 했지만, 보편 교육제도가 도입되고 수십 년이 지나자 역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사회의 교육수준이 전반적으로 향상되면서 본의 아니게 계몽이 이루어졌고, 이는 반영운동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현상을 목도한 일본은 식민지 내에서 교육만큼은 철저히 억압하고, 자신들의 통치를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 인력에게만 선택적으로 교육을 제공하기로 한다. 경성제국대학만 해도 식민통치에 필요한 법학과 의학을 교육하는 데 주목적이 있었고, 태평양전쟁 이후 공업기술인력이 필요해져서야 이공학부를 개설한다.
당시의 조선인, 특히 1910~1920년대생은 일제 강점기 아래에서 초등교육(보통학교)이나 소년 단체 등을 통해 일본식 질서·체력 단련·근면·복종 등을 배우고 체화했다. 이러한 교육은 질서를 중시하고, 규율을 따르며, 편법을 쓰지 않는 것이 훌륭한 인간상이라는 가치를 강하게 주입했다. 실제로 당시 일본은 '형식적인' 도시 청결, 행정의 일관성, 시간 준수 등에서 조선보다 상대적으로 높은 질서 수준을 보여주었고, 일부 조선인들은 이를 '문명적'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특히 새로 자라나던 당시의 어린 아이들은 부정부패나 사회적 모순에 대한 정보를 전해듣지 못했기 때문에 정직과 질서가 실제로 지켜지는 줄 알았지만, 사실은 상명하복 구조 속에서 불의에 침묵하거나 방조하는 문화가 있었고 일본 열도에서조차 방산 비리나 정치자금 스캔들, 뇌물 수수, 부정 인사 문제가 빈번했다. 저 당시의 어린이들은 청년이 되어서 태평양 전쟁에 따른 징용이나 배급 등으로 큰 고생을 해서 독립을 매우 기쁘게 반기게 되었다.
이 시기는 3.1 운동의 직접적 영향으로 독립운동이 국내외에서 활발하게 펼쳐지던 시기였다. 김원봉 단장의 지휘로 결성된 의열단은 부산경찰서(박재혁, 1920년), 밀양경찰서(최수봉, 1920년), 조선총독부(김익상, 1921), 종로경찰서(김상옥, 1923), 도쿄 궁성 이중교(김지섭,1924년), 동양척식주식회사(나석주, 1926) 등에 폭탄 투척을 하였고, 중국 관내에서는 상해임시정부가, 미국에서는 흥사단과 국민회가 일제의 식민지배에 항거하여 민족단결을 위해 노력하였다.
다만 이 시기에도 치안유지법(治安維持法)을 제정하여[55] 공산주의자 등의 사상운동가와 총독부에 반대하는 인물을 탄압하는 것은 여전했으며, 이 시기에 지방선거가 시작되었다고는 하나 실상은 일본인 아니면 부유층들이나 투표할 수 있었기에 기득권층들로 채워졌고, "무관 출신이 아닌 문관 출신도 총독 자리에 오를 수 있다"고 공표하였으나 실제로는 문관 출신이 총독 자리에 오른 사례는 광복까지 단 한 번도 없었다.[56] 또한 각종 친일파 양성 정책 등을 통해 실제로 이는 일본 입장에서 어느 정도 성공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이광수, 최남선, 최린 등의 민족개량과 자치를 내세우는 타협적 인사들을 지원하여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 및 사회주의자들과 갈등을 빚게 하였다. 이런 갈등 속에서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이 결집하여 신간회를 창립하였다.
한편으로는 그동안 폐쇄적이었던 조선인의 세계 인식이 확대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시기에 조선인들은 역설적으로 이후 시대보다 사상적, 이동적으로 개방적이었다. 한반도가 비록 식민지 체제에 속해 있었지만 세계와의 교류는 활발하였으며 조선인들의 세계 여행도 비교적 자유로웠다.[57] 오히려 냉전 때의 독재정권 시절의 대한민국이 냉전 반공 이데올로기의 영향으로 세계 여행이 통제되었고 사상의 자유가 더욱 억압되었다. (북한은 말할 것도 없다.) 이 당시에 조선에 수입된 대표적인 사상이 사회주의이며, 반제국주의 사상으로서 한반도의 해방에 일부분 기여하였다. KAPF와 같은 사회주의 문학 단체도 활동하였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의 영향으로 생겨난 수많은 자생적 공산주의자들은 조선공산당을 창당하였으나, 일제 관헌의 탄압과 내부 분파투쟁으로 와해와 재창당을 반복했다.
한반도의 경제성장률[58] | ||||
1920~1930 | 1차산업 | 2차산업 | 3차산업 | 전산업 |
1.1% | 4.5% | 4.3% | 2.3% | |
한반도의 경제성장률[60] | ||||
1930~1938 | 1차산업 | 2차산업 | 3차산업 | 전산업 |
2.5% | 13.9% | 5.6% | 4.9% | |
1931년 만주사변으로 촉발된 일제의 군국주의적 야욕이 극대화되던 시기로, 일본군이 처음으로 일본군 위안부를 창설한 것이 1932년도이며 1932년에는 만주국이 수립되고, 1937년에는 중일전쟁이 개시되었다. 대신 이러한 일본의 승승장구로 인해 국외 독립운동가들에게는 가장 가혹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또한 동시기 일본에서는 다이쇼 데모크라시가 종말을 고하고 치안유지법을 위시한 본격적인 파시즘화가 진행 됐고 식민지 조선에서도 그 영향이 미쳐 많은 독립운동가들을 내란 혐의로 투옥시켰다.
이 시기 일본은 사회 불만속에 군국주의가 결국 폭주하여 군부가 군수관련 예산을 군부 입맛대로 편성하는 흡사 현대의 이집트, 파키스탄과 같은 상태가 된다. 당시 일본 국민들은 군부가 거의 독단적으로 벌인 만주사변과 만주국 수립으로 인한 시장 확보가 국내 문제를 해결해줄거라고 생각했고 국군주의하에 국가 산업구조가 사실상 전시경제나 다름 없는 모습으로 변화한다. 이때문에 대공황시기에 다른경제는 안좋은데 군수관련, 88함대와 관련한 조선업어는 대대적으로 돈이 들어가 호황이되는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당시 산미증식계획이 크게 어그러져버린 조선총독부는 이것에 주목하여 한반도를 만주와 이어지는 병참기지화를 시켜야한다 주장한다. 그렇게 제국의 쌀생산기지로 관리하려던 이웃나라는 조선은 전략적인 이유로 일본 대기업과 공업시설이 들어온다.[61]
이때문에 군국주의 특수로 유일한 박사의 유한양행과 같은 민족자본의 토양이 마련되기도 하였고[62], 총독부에 의해 농촌진흥운동과 전시체제 준비기에 남면북양 정책이 실시되고 전국적으로 농업생산량과 일본으로의 쌀 이출량이 증가하는 등 농촌과 경제에 커다란 변화가 있었다. 주식투자와 회사설립이 가장 활발했던 시기 중 하나다. 하지만 이 시기는 악명높은 대공황이 벌어지던 시기로 쌀값이 폭락하고 실업률과 빈부격차가 매우 커서 농민들에게는 끔찍한 시기이기도 하다. 이때문에 당시 많은 농민들이 파산하거나 만주로 나가거나 광부가 되거나 도시 빈민민이 된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중국인 노동자가 대거 유입되어 조선의 일용직 노동자들과 경쟁하게 되었고 청나라에 대한 묵은 감정까지 더해져 1931년 화교배척폭동이 벌어지기에 이른다.
조선의 무장 독립운동은 이제 한반도 내부와 완전히 괴리되어 1919년 수립된 상해임시정부는 1932년 이봉창 의사 의거, 제1차 상하이 사변과 윤봉길 의사 의거 여파로 중국 내륙 깊숙한 곳인 항저우(1932)와 난징(1937)등으로 거처를 옮기게 되면서 당시 조선인은 임시정부의 존재조차 모르는 경우가 많게 되었다.[63] 해외 무장투쟁의 상황은 더 열악했다. 1930년대 넘어오면서는 초반, 만주사변 시기 지청천, 양세봉 등이 지휘하는 한국독립군이 중국군과 연합하여 일본군에 맞서 싸웠으나, 만주 전역에서 일본의 영향력이 확대되어 감에 따라 독립군은 만주에서 더이상 활동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이후 일본의 괴뢰국 만주국 건국 이후 무장투쟁 활동은 매우 어렵게 되었다.[64] 반면 국내에서는 이재유의 경성 트로이카를 비롯한 사회주의계열 인사들을 주축으로 독립운동 및 사회운동이 다양하게 벌어졌는데, 소작료 인하를 요구하는 소작쟁의나[65], 노동근로조건의 개선을 요구하는 노동쟁의 등이 활발히 전개되기도 하였다.
남북의 공업 생산규모(1940년기준)[66] | |
북한(55.9%) | |
서부공업지대 | 6.1억 환 |
북부공업지대 | 3.5억 환 |
기타 | |
남한(44.1%) | |
경인공업지대 | 3.5억 환 |
영남공업지대 | 1.6억 환 |
호남공업지대 | 1.4억 환 |
삼척공업지대 | 1억 환 |
기타 | |
6개 공업지대가 한반도 전체의 92.8% | |
1940년, 5인 이상의 공장 생산액[67] | ||
남한(47%) | 북한(53%) | |
경공업(46%) | 70% | 30% |
(요업) | 20% | 80% |
(전기가스) | 36% | 64% |
(식료품) | 65% | 35% |
(목공업) | 65% | 35% |
(기타) | 72% | 28% |
(방직공업) | 85% | 15% |
(인쇄제본) | 89% | 11% |
중화학공업(54%) | 21% | 79% |
(금속) | 10% | 90% |
(화학) | 18% | 20% |
(기계) | 72% | 28% |
종업원 5인 이하의 가내공업을 모두 포함할 경우 1940년 공업 생산액의 55.9%는 북한에서 44.1%는 남한에서 생산되었으며, 1940년 일본 치하 대한민국의 산업비중은 서비스업을 제외할 때, 농업 42.8%, 공업 39.1%였다.[68]
1937년 제2차 중일전쟁 발발 무렵, 일본 제국은 이듬해 4월, 국가총동원법을 공표하여 전시체제기에 들어간다.
이 같은 일본 제국의 경제 정책은 식민지 중 이례적으로 공업기반이 들어서게 하였지만 문제는 전쟁 지속을 위해 조선 엔 발행을 남발하여 40년대를 기점으로 그리고 후일 2차 대전 종전 이후 대한민국이 세계 최빈국으로 출발한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초등학교 과정을 2년으로 압축한 형태인 간이학교(簡易學校)가 이 시기에 생겼다.
(4) 한국의 일본화
일본은 한국을 정치적·경제적·문화적으로 동화시키려고 시도하고 있다. 일본어는 한국에서 공식적인 언어로서 모든 학교에서 공부하는 필수과목이고 1939년 이후로는 공식 또는 비공식업무의 처리에 있어 유일한 법적인 언어이다. 일본은 언문이라고 부르는 한국어의 사용을 전면 금지시키는 시도를 하였으나 이것은 부분적으로만 성공하였을 뿐이다. 왜냐하면 한국인들은 마지못해 규칙에 따를 뿐이었고 국민의 85%가 일본어를 알지 못하여 오로지 한국어로만 의사표현이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한국인들은 신도의식과 일본황제를 숭배하는 의식에 강제로 참여하여야만 하였다. 학생들은 일본식 이름을 사용하여야만 하였으며 한국어신문들은 폐간되었다.
교육제도는 한국인들을 일본황제의 충성스런 신민으로 만드는 것으로 계획되었다. 일본화의 총체적인 계획은 매우 성공적이지는 못하다. 대다수의 한국인들은 일본통치를 피할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여 그들의 지배자에게 협력하지만 마음속으로는 분개하면서 일본에 적대적이고 그들 자신의 문화가 일본의 문화보다 우월하다고 느끼고 있다.1945년 5월 19일, 미국 전략사무국(OSS) 문서: "1. 중국에서의 전략정보활동에 대한 총체적 특수계획실시 연구 -한국편"
1940년대가 되자, 일본은 태평양 전쟁을 시작했다. 양면전쟁, 총력전의 특성상 일본군의 전력이 부족해지자[69][70] 일제는 외지와 내지를 강압적으로 완전히 통합하는 흡수정책이자 문화적 제노사이드(Cultural genocide)인 민족말살정책을 강제로 수행하였다.[71]
본래 일제의 통치목적은 점진적인 영구병합이었으나, 1941년 태평양 전쟁의 발발로 흡수정책이 더욱 가속화되어 일본 기업이 더 활발하게 진출함은 물론, 한국어를 사용하는 매체를 금지하고, 창씨개명을 시행하였으며, 징병제까지 도입했다.[72] 그 직전까지만 해도 조선의 지식인층과 지배계층의 상당수가 친일로 전향하고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어찌 보면 한민족은 꾸준히 점진적으로 번져왔던 영구병합의 위기를 직접적으로 당면하게 되었다. 동시에 일본의 통치에 대한 반감이 더욱 깊어지는 시기가 되어 일제강점기에 태어난 세대조차 남의 나라 치하에 살고 있는 것이 얼마나 힘든가를 가장 크게 체감한 시기였다.

이시기 식민지 시절 조선의 경제는 그야말로 구한말 그 이전으로 퇴보하였다.# 30년대 병참기지화로 높였던 성장률은 무기생산에 돈을 쏟아붓던 일본 경제가 한계를 보이면서 초인플레이션 폭탄으로 되돌아왔고 여기에 1939년 냉해의 영향으로 조선내 쌀 생산에도 차질을 빗었다. 이때문에 많은 조선인들이 일본쪽 일용직을 알아보기 위해 일자리를 알선 받았는데 전쟁 말기에 이것이 강제징용 문제로 되돌아오게된다.
문화통치의 상징이었던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1940년 물자 부족 및 한국어 매체 금지로 인해 강제 폐간되었다. 게다가 태평양 전쟁의 발발로 일제의 물자와 인력 공출, 이른바 병참 기지화 정책은 조선민중을 이전에 겪지 못한 유례없는 고통에 빠지게 하였다. 원래 계획에는 없었던 조선인에 대한 강제징용이나 징병 계획[73]도 군부의 강력한 반대를 거스르고[74] 실시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전쟁의 성과가 나빠지자 일제는 전쟁물자 공급에 더욱 사력을 가하게 된다.
그리하여 조선에서 공출제를 실시한다. 부설된 철도 선로를 도로 뜯어가고[75], 금속으로 된 밥그릇과 숟가락, 젓가락은 물론, 징이나 꽹과리 같은 철제 악기를 비롯하여 낫이나 호미 또는 쟁기 같은 농기구, 심지어는 요강까지 빼앗아 갔다.[76] 그러나 미군에 제해권과 제공권을 빼앗기는 바람에 실제 공출된 물자가 일제 본토로 이송되지는 못하였고, 더 큰 문제는 물자를 거둬들인 후 다시 마구잡이로 분배하는 통에 시장과 유통체계가 완전히 마비되어 극심한 혼란상황이 빚어졌다.
태평양 전쟁 시기는 독립운동사의 암흑기이다. 이미 1930년대부터 일제의 탄압이 더욱 극심해졌다.
1944년에 결성되었던 여운형의 조선건국동맹도 이 시기의 몇 안 되는 독립운동 단체였다. 경성 부민관 폭파사건과 대구 학병 거부의거, 평양 학병거부의거도 이 시기 매우 드물게 나타난 독립운동에 속한다.
일본 제국 자체가 자체적인 모순과 한계로 인해 문제점을 맞이한 것처럼 식민지 조선에서도 조선인의 독립 요구와 저항이 끊임없이 계속되어 일제도 완벽하게 억누르지 못했다.[77] 미드웨이 해전 이후 점점 패색이 짙어지면서 일본 제국의 과부하가 심해지기 시작하자 "전쟁에서 일본이 패배할 것"이라는 소문[78]이 돌고 있었고 농촌, 도시 등 조선인 사회가 전시체제로 인한 징용과 물자 공출로 인해 피폐해져 가면서 붕괴 양상이 나타나는 등[79] 일제의 통치에 대한 적개심이 높아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 제국도 이런 점을 알고 있었기에 1945년이 되어서야 조선에게 참정권을 주는 것을 검토했지만, 사실상 유명무실한 내용에 그마저도 시행하기 전에 일본이 항복하면서 무산되고 만다. 한편 미군의 공습 역시 한반도까지 다다르기 시작했는데, 일본 본토의 대규모 전략폭격과는 달리 군수 시설이나 철도 등을 겨냥한 핀포인트 폭격이 주로 이루어졌다.
결국 만주를 넘어 현재의 북한 일부 지역에 소련군이 진격하고, 핵 두 발을 맞고 나서야 일본은 8월 15일 정오에 연합군 측에 무조건적인 항복을 했다. 한국은 8.15 광복을 맞았고 이 무렵 동시에 일제 치하 조선에서 비밀결사로 활동했던 독립운동 단체 조선건국동맹이 조선건국준비위원회로 발전해 자체적으로 치안, 행정 활동에 들어갔으나, 조선총독부는 본국의 지시로 건준에 내어주기로 되어 있던 행정권, 치안권 등을 제대로 이양하지 않았고 조선군을 동원해 행정 기관들을 봉쇄하여 이로 인해 당시 경성부에서는 행정의 공백 혹은 중첩이 생기기도 했으며[80], 결국 조선총독부 총독 아베 노부유키는 그해 9월 초 전권을 미 군정에게 이양하였다. 조선총독부는 미군정이 38선 이남을 인수하는 1945년 9월 8일 전까지 공식적으로는 계속하여 업무를 수행했고, 존 하지 장군 휘하의 미군이 서울에 진공하고 이반 치스차코프 장군 휘하의 소련군이 평양에 진공하였으며 미군과 소련군이 38선에서 조우한 이후인 9월 9일이 되고 나서야 아베 노부유키 총독이 항복 문서에 서명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35년간 지속되었던 일제강점기가 막을 내리고, 잠시 동안의 신탁 통치 기간을 거쳐 비록 분단되었고 강대국들의 눈치를 봐야 했으나 한민족에 의한 자주적인 정부가 한반도에 들어서게 되었다.
하지만 태평양 전쟁 말기부터 해방 직후까지 총독부는 재무국장 미즈타 나오마사의 지휘 아래 혼란 상태였던 조선에 무려 10만엔짜리 위폐(가짜 화폐)를 무책임하게 뿌리며[81] 인플레를 일으키는 등 조선의 경제를 막장으로 몰아넣었고, 일본에서 건너온 일반 일본인들을 반쯤 방기하고,[82] 미군에게는 여러 유언비어를 퍼트리는 등 떠날 때까지도 끝까지 민폐를 끼치고 떠났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현재까지도 일제강점기 체제의 잔재가 완전히 청산되지 않고 있으며, 문화적, 사회적 악영향과 친일파 민족배반자에 얽힌 논란[83]은 해소되기까지 갈 길이 멀다.
여담이지만, 당시 일제는 황궁 이전을 포함해서, 제국의 수도를 경기도 용인시 근처로 옮기려 했다는 주장이 있다. 일본 본토는 지진이 많기 때문이기도 하고, 당시 일본 제국의 영토였던 만주국, 조선, 일본 제국을 전체적으로 볼 때, 조선의 경기도 정도가 거리 관념으로 대략 중심이었기 때문이다. 제국의 수도를 용인시로 옮긴 다음, 대규모 인구 이동을 계획했다고 한다. 일본인들은 지진에서 비교적 안전한 조선반도로 대거 이주시키고, 조선인들은 만주로 강제로 추방시키는 안이었다는 것인데, 실제로 도시 건설 계획을 위한 측량 작업까지 했지만, 태평양 전쟁에서 원자폭탄 2방을 맞고 항복하면서 모든 계획은 당연히 백지화되었다는 것. #
한일병합은 순전히 일본의 이익과 패권만을 위한 것이었다. 일본은 조선인들에게 경제적 착취, 제도적 차별, 민족문화 말살, 독립운동 탄압 뿐만 아니라 3.1 운동 당시 일본 군경의 학살, 서대문형무소를 비롯한 고문과 처형, 관동대학살, 간도 참변, 강제 징용과 일본군 '위안부', 731 부대의 생체실험, 일본군 징집과 조선인 카미카제 동원과 같은 잔인한 전쟁 범죄들을 수없이 자행했고, 일제강점기 35년 동안 수 많은 조선인이 죽었으며[84] 2등 시민 취급으로 시작되었다가 민족말살통치시기에 내선일체를 강조하고 조선인을 강제로 일본인으로 동화시키고 창씨개명, 한국어 사용 금지, 강제 일본화, 황국신민서사 암송과 신사 참배를 강요하며 한민족의 문화와 정체성을 파괴하는 한편 전술한대로 군국주의 체제 유지와 전쟁을 지속하기 위해 수 많은 조선인들을 희생시킨 잔인한 전쟁 범죄들을 자행했고 일제말기의 조선인 피해는 식민지배 수준을 넘어선 제노사이드에 버금가는 수준이었으며 국제적으로 일본의 조선 식민지배는 문화적 제노사이드(Cultural genocide)의 한 사례로 알려져있다. 때문에 현재까지도 일본 우익 세력이 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장하며 일본의 전쟁 범죄와 함께 끊임없이 미화하고 부정하려고 노력하는 사안이다. 이로 인해 일제강점기는 해방 80주년에 다가가는 현재까지도 한일관계, 북일관계에 심대한 악영향을 끼치는 가장 주요한 역사적 사건이다.
![]() 사대문 안의 명동, 충무로 일대의 상업중심지역은 일명 혼마치로 불리며 일제강점기 문화의 중심지였다. | ![]() 현대의 한국 은행이 위치한 명동. 당시 일본인들은 남촌, 용산, 명동일대에서 거주하였다. |
![]() 1930년대의 빈민가인 토막민촌 | ![]() 1930년대 동대문 앞 |
일제강점기의 사회 분위기는 계층별로 복합적이었고 그 기저에는 일제의 민족말살정책과 친일파 양성정책, 조선을 편리하게 이용하려고 했던 개발 의도와 군수공장과 요새로 사용하려고 한 병참기지화가 혼합되어 있었다. 으레 모든 식민지가 그렇듯 각 도시의 중심은 지배자를 위한 인프라가 구축되었고 말을 잘따르는 구 귀족계층은 지주가 되어 총독부의 배려를 받았다. 이렇다보니 재산만 관리하는 일본인 대지주와 그 밑의 조선인 지주는 본토에 쌀을 팔며 호의호식하고 대다수의 소시민들은 50~70%를 착취당하는 전근대적 지주제 체제하에 살아갔다고 보면 된다. 당장 알제리, 네덜란드령 동인도, 아일랜드 등 수많은 식민지들의 사례를 봐도 식민지 조선과 유사한 경제체제로 굴러갔다. 제국주의 국가의 경제체제에서 식민지인은 교육받고 국가발전에 힘써야되는 대상이 아니라 통제와 관리의 대상일 뿐 지배자를 위한 인프라와 교육을 누릴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다. 주로 신경써주는 건 바나나 공화국 마냥 플랜테이션 농업으로 이루어진 식민지 체제를 지지해주고 저가의 원료를 공급해주는 중간 계층인 지주들이고 이들만이 제대로된 교육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차이가 있다면 플랜테이션 농업의 핵심인 상품작물이 조선에는 생산되지 않았고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는 식민지였다는 것이다.
조선 인구의 80%를 차지한 농민의 생활이 얼마나 비참한가를 아직까지는 추상적 숫자로 그 일단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더니, 이번에 총독부 농무과에서 전 조선에 걸쳐 세밀히 조사한 바에 의하면, 조사 완료한 5 개 도만 보더라도 궁민 (窮民: 보릿고개에 먹을 식량이 다 떨어지는 농민)의 비율이 다음과 같다.
경기도 53.5%
충청북도 57.0%
전라북도 62.0%
경상남도 46.5%
경상북도 20.5%동아일보, 1931년 8월 5일자,
일부는 그래도 조선보다는 잘먹었고 나았을 것 아니냐는 생각을 가지겠지만 당시 조선인 신장과 신생아의 체중이 줄었고 영양 섭취 수준 여부가 아직도 학계에서 논란 대상이라는 것, 춘궁민들로 이루어진 보릿고개가 존재하고 <수자조선연구> 등 그 수가 수백만에 달한다는 조사가 존재한다는 점, 지주와 마름들의 횡포가 존재한다는 점, 여전히 전염병으로 죽는 사람이 많았다는 점 등 전근대 보다 개인이 살기에 훨씬 나아졌다고 쉽게 단정하기 힘든 요소가 산재했다. 일제시대에 영양 결핍으로 한국인들의 키가 줄어드는 등 먹는 것은 확실히 부실해졌으며 키가 3cm가 줄었다라는 역사적 연구 자료[85]가 남아 있다.
일제강점기 아래에서는 일상생활의 유지에 필요한 생활비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을 정도로 민중의 생활 상태는 매우 열악했다. 이들의 삶은 하루를 벌어 하루를 연명하기에도 벅찼으며 간신히 생계를 이어나가는 수준이었다. 수입의 70% 이상은 하루 먹고 소비하는 정도의 식비로 지출되었고 의식주에 들어가는 기본적 비용은 수입 전체의 100%에 가까웠던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 따라서 질병에 쉽게 노출되었을 것이고 당연히 의료비도 감당할 수 없었으며 체계적인 교육을 받는 것은 상상 조차할 수 없는 일이었다.
조선총독부에 따르면 빈민의 범주는 자신의 생계를 겨우 유지할 수 있는 '세민', 생계가 매우 곤란해서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궁민', 또는 부랑자나 걸인 등 다분히 추상적으로 분류를 하였다. 그러나 이미 1920년대 일본에서는 일반적으로 월수입 20원 이하인 자를 빈민으로 간주했는데 이와 같은 기준을 조선에 적용한다면 당시 조선인 대부분은 빈민의 범주를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당시 경성부 사회과 조사에 따르면 1936년 11월 현재 서울에 거주하는 조선인 실업자와 '세궁민'은 10만 5천여 명으로 조사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조사에서 빠진 사람들과 걸인까지 합하면 적어도 11만 명 이상을 넘었을 것으로 보인다. 서울 인구가 60만 명이었던 점을 감안한다면 6명 가운데 1명꼴로 사실상 빈민이었다고 할 수 있다.
거기다가 당시에는 스페인 독감, 대공황, 만주사변, 2차 세계대전 등 국내외로 편할날이 거의 없으며 무엇보다 일제의 식민지배 기간이 매우 짧았다. 따라서 하루아침에 나라를 빼앗긴 기성세대, 독립 따위는 관심없고 하루 먹고살기 바쁜 소시민들, 친일파 양성정책의 혜택을 받은 지주 및 자본가들, 민족말살정책과 병참기지화 정책의 피해자들, 일제의 지배에서 독립하려는 독립운동가들이 혼재해 있었으며 이들이 느낀 사회 분위기가 각자 달랐다.
일부는 일제강점기가 35년이나 지속된 것에 대해 다수의 조선인들이 노예근성에 사로잡혀 이를 묵인하고 침묵했기에 이뤄질 수 있었다고 당시 조선의 분위기를 왜곡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일제강점기에 대한 무지의 결과다. 일제는 한일강제병합 이전부터 을미사변으로 왕의 부인도 자기들 맘대로 죽였으며[86] 고종도 왕좌에서 끌어내리는[87] 만행을 보여줬다. 거기다 이후 을미의병, 을사의병 등 의병봉기는 3~5년 단위로 줄줄이 일어났는데 이들은 자신들을 진압하는 진위대는 무시하고 오직 일본군만 노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1907년 정미 7조약에 반발한 정미의병과 해산된 군대까지 참여한 13도 창의군을 제압하기 위해 2개 사단과 순양함을 동원해 초토화 작전을 펼쳤으며 의병들의 뿌리를 뽑기위해 지역사회를 도륙내고 마을을 불태워 일본에 대한 저항 분위기를 두려움으로 바꿔 버렸다.## 냉병기가 주축이 된 임진왜란 당시에는 의병이 빛을 발휘했지만 근대 이후 이런 무차별 공격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무기와 타국의 지원이 필수인데[88] 러일전쟁이 끝났을 당시 조선을 도와줄 열강은 어디에도 없었으며 대한제국 군인들마저 탄약고를 전부 일본이 관리했기에 공세를 오래 이어나가지 못했다. 그리고 일본의 국권 침탈과 잔혹한 공격에 책임이 있는 이토 히로부미가 1909년 하얼빈에서 안중근에게 저격당한 건 이런 시대적 배경이 한몫했다.
거기다 안으로는 국채보상운동 같이 어떻게든 국권 침탈을 피해보려는 시도에 일본은 주모자에게 온갖 혐의를 씌어 구속하는 방식으로 대응했고 나라에 힘이 없기에 일본 손에 철저히 놀아나길 반복했다. 결국 남한 대토벌 작전을 끝으로 의병문제를 처리한 일본은 바로 합병을 진행시켰고 1910년대에 첫 번째 총독이 된 데라우치 마사타케 총독은 대만에서 하던 대로 헌병 경찰 통치를 하며 범죄즉결례로 재판도 없이 경찰이 맘에 안 드는 조선인들에게 바로 태형을 가한 것을 시행하여 더욱 사회 분위기를 복종하게끔 만들었다. 어느 정도냐면 소규모 만남도 무작정 정치단체로 보고 잡아다 구타하기 일쑤였고 집회 취체령이 시행된 당시 모든 집회와 공개적인 장소에서 문서·도화의 게시나 낭독과 언어, 표현까지 금지시켰다. 그리고 소위 일본 통치의 안녕과 질서를 위협하다고 판단되는 학교와 교회 집회는 보안법상 해산시킬 수도 있었다. 물론 3.1 운동으로 참다 못한 조선인들의 반발이 대거 터졌을 때 일제는 일단 총칼로 유혈진압을 했지만, 조선인들의 저항 의지가 만만찮다는 것을 깨닫고 무조건 내리찍기보다는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신문지법과 출판법으로 저항 여론은 언론을 탈 수도 없던 시기였고 치안유지법은 독립운동가들을 감옥으로 보내서 불구로 만들거나 순국하게 했다.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은 중일전쟁과 태평양 전쟁 말기로 치닫을수록 최하부까지 애국반으로 조선인 가구들을 묶어서 감시하고 통제하게 했다. 왕가는 물론이고 일반인 가구 1세대까지 다 장악하는 이같은 제국주의적 폭력과 학살과 탄압 분위기 속에서 다수의 일반 조선인 개개인은 속으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살았는지 다 알 순 없으나 총칼의 공포와 암울한 사회 분위기 속에 힘든 나날을 보냈던 것이다. 이런 상황임에도 일제하의 조선 사회가 다수의 조선인들의 묵인으로 지배계급만 양반에서 일본인들로 바뀌었을 뿐 평화로웠다고 말하는 자들은 영국의 인도 식민지배와 나치 독일의 프랑스 지배가 평화로웠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멍청함을 드러낼 뿐이다.
반면 지주와 자본가들은 일제의 포섭 대상이 되었고 이 중에서 친일로 빠진 이들은 일제가 법적, 물질적으로 제공한 풍족함을 영위했다. 이들의 양복으로 대표되는 의문화와 서양식과 일식이 혼합된 식문화, 서양건축과 적산가옥이 포함된 주택 문화, 신소설, 영화, 음악 등 예술 문화로 꾸며진 생활 양식은 앞에서 말한 대다수의 일반 사람들과 딴판으로 호화로운 삶을 살았기에 친일도 용납했을 뿐더러 일제의 앞잡이가 되어 천황폐하를 위해 황군에 입대하여 피를 뿌리자고 일반 조선인들을 선동할 수 있었다.[89] 정작 조선지원병 항목에 있듯이 자신의 가족들은 일본군에 지원하지 않았다. 2008년 영화 <모던 보이>에서 나오는 주인공 이해명(박해일 배우)의 삶이 그런 분위기를 대변해주고 있다.
당시 조선 내에서 사실상 처음으로 취미 잡지를 표방하며 나온 별건곤[90]의 창간취지를 보면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당대 조선인들이 소수의 유산자와 대다수의 무산자로 나뉘어 생활과 문화를 극단적으로 다르게 영유했음이 드러난다.
일제강점기 아래에서는 일상생활의 유지에 필요한 생활비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을 정도로 민중의 생활 상태는 매우 열악했다. 이들의 삶은 하루를 벌어 하루를 연명하기에도 벅찼으며 간신히 생계를 이어나가는 수준이었다. 수입의 70% 이상은 하루 먹고 소비하는 정도의 식비로 지출되었고 의식주에 들어가는 기본적 비용은 수입 전체의 100%에 가까웠던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 따라서 질병에 쉽게 노출되었을 것이고 당연히 의료비도 감당할 수 없었으며 체계적인 교육을 받는 것은 상상 조차할 수 없는 일이었다.
조선총독부에 따르면 빈민의 범주는 자신의 생계를 겨우 유지할 수 있는 '세민', 생계가 매우 곤란해서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궁민', 또는 부랑자나 걸인 등 다분히 추상적으로 분류를 하였다. 그러나 이미 1920년대 일본에서는 일반적으로 월수입 20원 이하인 자를 빈민으로 간주했는데 이와 같은 기준을 조선에 적용한다면 당시 조선인 대부분은 빈민의 범주를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당시 경성부 사회과 조사에 따르면 1936년 11월 현재 서울에 거주하는 조선인 실업자와 '세궁민'은 10만 5천여 명으로 조사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조사에서 빠진 사람들과 걸인까지 합하면 적어도 11만 명 이상을 넘었을 것으로 보인다. 서울 인구가 60만 명이었던 점을 감안한다면 6명 가운데 1명꼴로 사실상 빈민이었다고 할 수 있다.
거기다가 당시에는 스페인 독감, 대공황, 만주사변, 2차 세계대전 등 국내외로 편할날이 거의 없으며 무엇보다 일제의 식민지배 기간이 매우 짧았다. 따라서 하루아침에 나라를 빼앗긴 기성세대, 독립 따위는 관심없고 하루 먹고살기 바쁜 소시민들, 친일파 양성정책의 혜택을 받은 지주 및 자본가들, 민족말살정책과 병참기지화 정책의 피해자들, 일제의 지배에서 독립하려는 독립운동가들이 혼재해 있었으며 이들이 느낀 사회 분위기가 각자 달랐다.
일부는 일제강점기가 35년이나 지속된 것에 대해 다수의 조선인들이 노예근성에 사로잡혀 이를 묵인하고 침묵했기에 이뤄질 수 있었다고 당시 조선의 분위기를 왜곡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일제강점기에 대한 무지의 결과다. 일제는 한일강제병합 이전부터 을미사변으로 왕의 부인도 자기들 맘대로 죽였으며[86] 고종도 왕좌에서 끌어내리는[87] 만행을 보여줬다. 거기다 이후 을미의병, 을사의병 등 의병봉기는 3~5년 단위로 줄줄이 일어났는데 이들은 자신들을 진압하는 진위대는 무시하고 오직 일본군만 노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1907년 정미 7조약에 반발한 정미의병과 해산된 군대까지 참여한 13도 창의군을 제압하기 위해 2개 사단과 순양함을 동원해 초토화 작전을 펼쳤으며 의병들의 뿌리를 뽑기위해 지역사회를 도륙내고 마을을 불태워 일본에 대한 저항 분위기를 두려움으로 바꿔 버렸다.## 냉병기가 주축이 된 임진왜란 당시에는 의병이 빛을 발휘했지만 근대 이후 이런 무차별 공격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무기와 타국의 지원이 필수인데[88] 러일전쟁이 끝났을 당시 조선을 도와줄 열강은 어디에도 없었으며 대한제국 군인들마저 탄약고를 전부 일본이 관리했기에 공세를 오래 이어나가지 못했다. 그리고 일본의 국권 침탈과 잔혹한 공격에 책임이 있는 이토 히로부미가 1909년 하얼빈에서 안중근에게 저격당한 건 이런 시대적 배경이 한몫했다.
거기다 안으로는 국채보상운동 같이 어떻게든 국권 침탈을 피해보려는 시도에 일본은 주모자에게 온갖 혐의를 씌어 구속하는 방식으로 대응했고 나라에 힘이 없기에 일본 손에 철저히 놀아나길 반복했다. 결국 남한 대토벌 작전을 끝으로 의병문제를 처리한 일본은 바로 합병을 진행시켰고 1910년대에 첫 번째 총독이 된 데라우치 마사타케 총독은 대만에서 하던 대로 헌병 경찰 통치를 하며 범죄즉결례로 재판도 없이 경찰이 맘에 안 드는 조선인들에게 바로 태형을 가한 것을 시행하여 더욱 사회 분위기를 복종하게끔 만들었다. 어느 정도냐면 소규모 만남도 무작정 정치단체로 보고 잡아다 구타하기 일쑤였고 집회 취체령이 시행된 당시 모든 집회와 공개적인 장소에서 문서·도화의 게시나 낭독과 언어, 표현까지 금지시켰다. 그리고 소위 일본 통치의 안녕과 질서를 위협하다고 판단되는 학교와 교회 집회는 보안법상 해산시킬 수도 있었다. 물론 3.1 운동으로 참다 못한 조선인들의 반발이 대거 터졌을 때 일제는 일단 총칼로 유혈진압을 했지만, 조선인들의 저항 의지가 만만찮다는 것을 깨닫고 무조건 내리찍기보다는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신문지법과 출판법으로 저항 여론은 언론을 탈 수도 없던 시기였고 치안유지법은 독립운동가들을 감옥으로 보내서 불구로 만들거나 순국하게 했다.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은 중일전쟁과 태평양 전쟁 말기로 치닫을수록 최하부까지 애국반으로 조선인 가구들을 묶어서 감시하고 통제하게 했다. 왕가는 물론이고 일반인 가구 1세대까지 다 장악하는 이같은 제국주의적 폭력과 학살과 탄압 분위기 속에서 다수의 일반 조선인 개개인은 속으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살았는지 다 알 순 없으나 총칼의 공포와 암울한 사회 분위기 속에 힘든 나날을 보냈던 것이다. 이런 상황임에도 일제하의 조선 사회가 다수의 조선인들의 묵인으로 지배계급만 양반에서 일본인들로 바뀌었을 뿐 평화로웠다고 말하는 자들은 영국의 인도 식민지배와 나치 독일의 프랑스 지배가 평화로웠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멍청함을 드러낼 뿐이다.
반면 지주와 자본가들은 일제의 포섭 대상이 되었고 이 중에서 친일로 빠진 이들은 일제가 법적, 물질적으로 제공한 풍족함을 영위했다. 이들의 양복으로 대표되는 의문화와 서양식과 일식이 혼합된 식문화, 서양건축과 적산가옥이 포함된 주택 문화, 신소설, 영화, 음악 등 예술 문화로 꾸며진 생활 양식은 앞에서 말한 대다수의 일반 사람들과 딴판으로 호화로운 삶을 살았기에 친일도 용납했을 뿐더러 일제의 앞잡이가 되어 천황폐하를 위해 황군에 입대하여 피를 뿌리자고 일반 조선인들을 선동할 수 있었다.[89] 정작 조선지원병 항목에 있듯이 자신의 가족들은 일본군에 지원하지 않았다. 2008년 영화 <모던 보이>에서 나오는 주인공 이해명(박해일 배우)의 삶이 그런 분위기를 대변해주고 있다.
당시 조선 내에서 사실상 처음으로 취미 잡지를 표방하며 나온 별건곤[90]의 창간취지를 보면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당대 조선인들이 소수의 유산자와 대다수의 무산자로 나뉘어 생활과 문화를 극단적으로 다르게 영유했음이 드러난다.
보라! 오늘날 조선 사람치고 인간적 취미를 가지고 생활하는 자 몃 사람이나 되는가? 월급 푼에 팔려서 다이푸라이타 모양으로 살아가는 관공리(官公吏) 급(及) 교원(敎員), 회사원이 잇스니 그네들에게는 인간적 취미가 풍부타 할가? 물론 먹고는 살 것이다. 그러나 먹고 사는 것뿐이 생활의 취미는 아니다. 상리(商利)에 몰두되여 점포에서 공장에서 로로역역(勞勞役役)하는 상공업자가 잇스니 그네들에게 인간적 취미가 풍부타 할가? 그 역(亦) 먹고는 살 것이다. 그러나 먹는 것뿐이 생활의 취미는 아니다. 진실로 그럿타. 우리 조선에 활동사진관(活動寫眞館)이 몃 개지만 그것이 노농대중에게 무슨 위안을 주엇스며 무도(舞蹈), 음악이 유행하지만 그것이 또한 노농대중에게 무슨 취미가 되엿느냐? 박물관, 동물원, 공원, 극장이 다 그러하다. 그것은 다 일부 인사의 독점적 향락(享樂) 기관(機關)이 되고 마랏다. 우리의 노농대중은 언제부터 언제까지든지 이 빈취미증(貧趣味症)을 면(免)해 볼 길이 업다. 이제 만성(慢性)에서 운명을 재촉할 뿐이다. 화류계에 출입하며 가무고취(歌舞鼓吹)와 주지육림(酒池肉林)에 흥겨워 노는 것을 위안으로 하는 사람도 잇지만 돈업는 사람은 천만부당한 일, 등산, 기차 여행 등을 취미로 아는 사람도 잇스나 그것을 실혀하는 사람도 잇고 그것이 못되는 사람도 만타하면 민중적 취미는 못될 것이다. 온천, 약수도 또한 그러하다. 삐이오린, 만또린, 오루간, 피어노를 가춰놋코 사이사이 한 곡조 울리는 것을 유일한 취미로 아는 신사숙녀가 잇지만 그는 더욱 유산계급의 향락소위(享樂所爲)이고 대중적 취미는 못될 것이다.
그의 고향은 대구에서 멀지 않은 K군 H란 외딴 동리였다. 한 백 호 남짓한 그곳 주민은 전부가 역둔토를 파먹고 살았는데, 역둔토로 말하면 사삿집 땅을 붙이는 것보다 떨어지는 것이 후하였다.[91] 그러므로 넉넉지는 못할망정 평화로운 농촌으로 남부럽지 않게 지낼 수 있었다. 그러나 세상이 뒤바뀌자 그 땅은 전부가 동양척식회사의 소유에 들어가고 말았다. 직접으로 회사에 소작료를 바치게나 되었으면 그래도 나으련만, 소위 중간 소작인이란 것이 생겨나서 저는 손에 흙 한 번 만져 보지도 않고 동척엔 소작인 노릇을 하며 실작인에게는 지주 행세를 하게 되었다.[92] 동척에 소작료를 물고 나서 또 중간 소작인에게 긁히고 보니 실작인의 손에는 소출의 삼 할도 떨어지지 않았다. 그 후로 '죽겠다', '못 살겠다' 하는 소리는 중이 염불하듯 그들의 입길에서 오르내리게 되었다. 남부여대하고 타처로 유리하는 사람만 늘고 동리는 점점 쇠진해 갔다. ... "이야기를 다 하면 무얼 하는기오." 하고 쓸쓸하게 입을 다문다. 내 또한 너무도 참혹한 사람살이를 듣기에 쓴물이 났다. "자, 우리 술이나 마저 먹읍시다." 하고 우리는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한 되 병을 다 말리고 말았다. 그는 취흥에 겨워서 우리가 어릴 때 멋모르고 부르던 노래를 읊조렸다. "볏섬이나 나는 전토는 신작로가 되고요, 말마디나 하는 친구는 감옥소로 가고요, 담뱃대나 떠는 노인은 공동묘지 가고요, 인물이나 좋은 계집은 유곽으로 가고요..."
이외에도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 유치진의 소, 김유정의 봄·봄, 채만식의 레디메이드 인생 등 당시 문학작품을 통해 경성의 소시민, 지방의 소작농, 대공황 시기의 인텔리의 삶이 어땠는지 간접적으로 체험해 볼수 있다.
- [윤봉길 의사 처형 직전 모습]
윤봉길 의사의 처형 직전 모습.
평범한 조선인들보다 더 억압받고 친일파들이 누린 이득과는 거리가 더 먼 삶을 살았던 독립운동가들이 느꼈을 사회적 분위기는 더 상상하기 힘들다. 그러나 독립운동가들은 언제 일제에게 발각될지 모르는, 발각됐을 경우 처참한 고문에 처해진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일제에 대한 저항의식과 광복이 될 것이란 희망이 있었고, 몇몇은 일제로부터 안전한 제3국에 있었다.
현재 조선은 실력이 없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일본에 반항하여 독립함은 당장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강국피폐(强國疲弊)의 시기가 도래하면 그때야말로 조선은 독립하고야 말 것이다.
현재의 강국도 나뭇잎과 같이 자연 조락의 시기가 꼭 온다는 것은 역사의 필연의 일로서
우리들 독립운동자는 국가성쇠의 순환을 앞당기는 것으로써 그 역할로 삼는다.
물론 한두 명의 상급 군인을 살해하는 것만으로는 독립이 용이하게 실행될 수 없다.
따라서 이번 사건 같은 것도 독립에는 당장 직접 효과가 없음을 매우 잘 알고 있지만,
오직 기약하는 바는 이에 의하여 조선인의 각성을 촉구하고
다시 세계로 하여금 조선의 존재를 명료히 알게 하는 데 있다.
현재 세계지도에 조선은 일본과 동색으로 채색되어 각국인은 조선의 존재를 추호도 인정하지 않는 상황에 있다.
그러므로 차제에 조선이라고 하는 개념을 이러한 사람들의 뇌리에 깊이 새겨 넣는 것은
장래 우리들의 독립운동과 관련 결코 헛된 일이 아님을 굳게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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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 2. 16. 일본 도쿄. 이승만 대통령이 도쿄 하네다 공항 도착 사진. |
중앙에 있는 김구와 오른쪽 아래에 중절모를 쓴 이시영을 보자. 임시정부의 주석이었던 김구는 광복이 되었음에도 무념무상의 표정이고, 나중에 부통령이 되는 이시영은 그 동안의 고생과 광복에 눈물을 닦고 있다. 당시 독립운동가들이 느끼었던 복합적인 감정을 표현해주는 사진이다.
이러한 사회의 각각 다른 방향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일제가 조선지원병을 모집했을 때 나타난 상황이다. 대다수의 조선인들은 반 강제적으로 말만 의용이지 사실상 징집되었다. 그런데 이 중에는 진짜로 자발적으로 지원한 인물들도 있었다. 물론 이들이 친일반민족행위자라기보다는 사실 자발적 지원자들도 각각 궁핍한 경제사정 때문에, 명예욕 등의 신분상승을 위해 지원한 이들이 대다수였고, 조선지원병 문서의 우수용 회고록에서 본인이 언급하듯 자신의 참여로 조선의 자치를 좀더 강화해, 일본 내 조선의 영향력을 키우려 했던 이들도 있었다. 여하튼, 중요한 점은 일제강점기를 평가할 때는 위의 세 부류의 사람들을 모두 고려하는 것이 올바르다는 것이다. 물론 강요된 침묵 속에서 상황에서 가만히 있던 사람이 절대 다수인 와중에도 그들과 달리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이를 깨고 적극적으로 항거하거나 부역했기 때문에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이 더욱 높게 평가되고 친일파들의 행동은 비판받아야겠지만, 대부분은 그럴 힘도 없었고 설령 있었다 해도 현재 세계 모든 나라 사람들이 그렇듯 적극적으로 권력에 저항하거나 반대로 돕기는커녕 먹고살기 바빴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곁에 두고 싶었을 뿐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회 분위기가 다양했고 부분적으로 평온해보이는 분위기가 해당 시대 자체가 옳음을 증명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애초에 모든 사람이 모든 지역에서 모든 시점마다 부정적인 분위기를 보여야만 나쁜 시대이고 그렇지 않으면 좋은 시대인 것은 아니다.[94] 당장 중국 치하 티베트에서도 평온한 피지배 민족의 일상 같은 연출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
한인 이주의 원인
국내(한국)에서 한인 생활조건의 악화는 그들을 집단 이주로 몰아 넣었다. 한국내에서 평균적으로 대부분의 이주민들의 경작지는 1.5∼2데샤찐(미터법 이전의 러시아에서의 지적단위 : 1,092㏊에 해당)를 넘지 않았다.
본국에서 이중적인 압박 : 국내 지주와 일본 제국주의가 한인 이주의 주요 원인이다. 한인 농민은 좋은 생활터전을 찾아서 자연스럽게 러시아 프리모리에 또는 중국 영토내 이주가 활발하지 않은 근접한 지역에 정주하게 된다. 러·일 전쟁은 한인 상황을 특히 예리하게 드러내었고, 그 결과로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최근 일본은 고유의 일본 제국주의화와 한국의 일본화 정책을 엄중하게 수행하기 시작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한인들의 이주는 인접한 국가의 국경지역으로 가속화되었다. 일본측에 따르면, 현재 한국 밖에 거주하는 한인 수는 - 약 백만 명이 존재하며, 그들 가운데 15만명이 봉천 주에 거주하고 있으며, 길림 주에 50만명, 프리모리에 주에 17만∼18만명이 상주하고 있다.소련 연해주 토지청 토지개량과의 보고서 "극동 크라이에서 한인문제". 정확한 문서 작성 시점은 불명이나 1920년대 말에서 1930년대 초로 파악됨.
In 1910, Japan began a 35-year period of colonial rule over Korea.
1910년, 일본은 한국에 대한 35년간의 식민 통치를 시작했습니다.미 국무부에서 설명하는 미국과 대한민국의 관계 #
今世紀の日韓両国関係を回顧し、我が国が過去の一時期韓国国民に対し植民地支配により多大の損害と苦痛を与えたという歴史的事実を謙虚に受けとめ、これに対し、痛切な反省と心からのお詫びを述べた。
이번 세기의 일한관계를 돌아보면, 우리나라가 과거 한때 한국 국민에 대하여 식민지 지배로 크고 많은 손해와 고통을 안겨주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이면서, 이에 대하여 통절한 반성과 마음에서 우러나온 사죄를 했다.김대중 오부치 선언 내용 中
일본의 식민통치 비판에 반감을 지닌 몇몇 한국, 일본인은 1910년 체결된 한일병합조약이 합법적인 국가 간 병합(annexation)이며, 조선은 일본 제국의 영토로 통합되었을 뿐 제국주의적 의미의 '식민지'가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일제강점기라는 표현은 한국의 민족주의자들이 만들어낸 허상이며 일본의 내선일체(內鮮一體) 정책과 적극적인 동화 정책을 근거로, 조선을 식민지로 분류하는 것은 부정확하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러한 주장은 나치 독일의 오스트리아 병합이나 영국과 스코틀랜드의 통합(그레이트브리튼 왕국)에 비유하면서, 병합의 합법성과 상호 동의를 강조하는 방향으로 전개되곤 한다.[95]
近年拓務省設置以来我国植民地を総称する官庁用語として「外地」なる語を用ふるに至った。蓋し本国を「内地」と呼ぶに相対する用語である。
근래에 척무성[96] 설치 이래로 우리나라 식민지를 총칭하는 관청 용어로 외지(外地)라는 용어를 사용하게 되었다. 본국을 내지(内地)라고 부르는 것에 상대적인 용어이다.[97]야우치하라 타다오(矢内原忠雄)植民及植民政策 6版 1937년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제국주의 시대의 식민지 지위의 개념적 모호성과 몰이해를 이용해 조선의 실질적인 피지배 상태와 일제의 식민 지배 구조를 축소 또는 왜곡하려는 시도이며 식민지 수혜론으로 논란을 일으킨 뉴라이트 계열 경제학자들 조차 하지 않는 주장이다.[98] 애초에 수탈론을 떠나서 경제, 정책적으로도 전형적인 식민지, 식민자본주의의 형태를 띄었다는게 서구권은 물론 일본 학계의 공통적인 의견이다. 다시말해 합병했다거나 내지의 연장선으로 봤으니 식민지가 아니다식 주장들은 수정주의는 거녕 학술의 문턱조차 진입 못하는 발언이며 당장 멀리 갈것도 없이 브리태니커 대백과사전 부터가 한국이 식민지로 병합되었다고 일관되게 표기하고 있다.
그리고 1910년 병합 직후부터 조선은 일본은 물론 외국에서도 명백한 ‘식민지’로 인식되었다. 조선의 지위는 일본 정부와 제국의회, 언론, 국내외 공문서 및 외교 문서 등에서 일관되게 식민지, 식민지 교육, 식민지 무역 등으로 표현되었으며, 이를 뒷받침 하는 기록이 수없이 존재한다.##### 또한 ‘내선일체’ 구호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1920년대 말에서 1930년대 초 전시체제기에 이르러서인데, 이 시기에도 일본 정부는 조선을 외지(外地)로 분류하는 동시에‘식민지’라는 용어를 계속해서 병행 사용하였다.
그리고 1910년 병합 직후부터 조선은 일본은 물론 외국에서도 명백한 ‘식민지’로 인식되었다. 조선의 지위는 일본 정부와 제국의회, 언론, 국내외 공문서 및 외교 문서 등에서 일관되게 식민지, 식민지 교육, 식민지 무역 등으로 표현되었으며, 이를 뒷받침 하는 기록이 수없이 존재한다.##### 또한 ‘내선일체’ 구호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1920년대 말에서 1930년대 초 전시체제기에 이르러서인데, 이 시기에도 일본 정부는 조선을 외지(外地)로 분류하는 동시에‘식민지’라는 용어를 계속해서 병행 사용하였다.
식민지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문헌상의 견해, 실제 사실에 입각한 해석, 또는 법제상의 관점에서 어떻게 논하는 것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오늘날 학자들이 일반적으로 인정하는 정의를 말씀드리면 '식민지란 본국에 종속된 영토로서, 행정은 본국과 다르지만 그 사이에 정치적 또는 법적 연쇄가 존재하는 것을 말한다'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즉 이 정의로 본다면 일본 제국 내에 있으면서 내지와 다른 행정을 하는 지역, 즉 조선, 대만, 사할린의 식민지임은 물론이고, 홋카이도, 류큐도 2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식민지라고 불러야 할 것입니다. 즉, 식민지라는 명칭은 오늘날에는 행정상의 편의상 붙여진 명칭이며,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별다른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법률은 어디까지나 국회에서 만드는 것이고, 총독이 내리는 것을 법률이라 하면 그것은 전제 정치가 되기 때문에, 명칭을 바꾸어 법률과 같은 효력을 가지는 것으로서 조선에서는 “정령”, 대만에서는 “율령”이라 불리는 것을 내렸습니다. 조선과 대만의 법령 제도는 정령과 율령입니다. 대만은 이후 약간 사정이 바뀌어 법률이 우선하는 구조로 전환되었지만, 오랫동안 원칙적으로는 “정령과 율령이 법률에 우선한다”는 형태로 정치 제도, 사회 제도의 구조가 형성되었습니다. 이런 실태로 인해 “법역(法域)”이 달랐습니다. 일본 본토와 조선, 대만은 법역이 달랐던겁니다. 영토로서는 대일본제국의 영토로서 지배되고 있었지만, (실상은)법역이 다릅니다. 사실 법학자의 관점에서 보면 “법역이 다른 곳이야말로 식민지”입니다. 법률은 정치, 사회의 기본적인 방식을 규정하지요. 만약 그것이 본국과 다르다면, 그곳이 식민지인 겁니다.미즈노 나오키 교토대학 교수 강연 中 2002년 6월 13일#
그시기 일본 부터가 서구 열강의 법체계와 정책을 베끼고 변용하며 따라가는데 열심히였고 식민정책학 같은 학문 또한 도입하여 식민정책학자를 동원해 대영제국의 자치주의(간접지배)[100] 혹은 프랑스 식민제국의 동화주의(직접지배·내지연장주의)[101]영문위키 링크 정책을 자신들의 상황에 맞게 참고, 적용하였다.
그렇기에 식민지를 자국 영토의 일부로 간주하려는 시도는 일본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며, 다른 제국주의 국가들 역시 식민지를 자국 영토로 간주하고 통합하려는 동화정책을 시도해왔다. 한 예시로 이라크, 시리아는 오스만의 속주였으며, 네덜란드는 1922년 수정헌법 1조에서 식민지라는 표현을 삭제해 버리고 네덜란드는 네덜란드, 네덜란드령 인도, 스리랑카 등을 포함한다고 표기한다. 이것은 20세기의 영국 프랑스 등 다른 열강들 또한 비슷하다. 단지 일본의 동화정책은 민족적 연관성을 강조하는 특징이 더해졌으며 이는 현지인 회유를 목적으로 하는 전형적인 제국주의 통치의 연장선이었다. 병합이니 식민지가 아니라는 주장도 무의미한게, 당장 벨기에의 레오폴드 2세는 콩고 자유국을 "식민지로 병합"(annexed as a colony)# 했으며 뉴질랜드도 병합된건 마찬가지였고(annexed as a colony)# 아예 장래에 독립이 약속된 필리핀 조차 미국에 병합되었지만 그 지위는 병합된 텍사스와는 같지 않은 식민지로 간주된다.
애초에 오스트리아 병합, 그레이트브리튼 왕국과 달리 천황의 긴급칙령을 통해 의회를 무시하고 권한을 휘두를수 있는 총독을 임명하고 대일본제국 헌법 명시된 권리를 적용받지 못한다는 것 부터가 조선은 식민지 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거기다 프랑스가 작정하고 본토 일부로 만드려고 총독부 조차 두지 않았고 프랑스 헌법까지 적용한 알제리[102] 조차 현대에 들어 식민지로 간주된다.
그렇기에 식민지를 자국 영토의 일부로 간주하려는 시도는 일본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며, 다른 제국주의 국가들 역시 식민지를 자국 영토로 간주하고 통합하려는 동화정책을 시도해왔다. 한 예시로 이라크, 시리아는 오스만의 속주였으며, 네덜란드는 1922년 수정헌법 1조에서 식민지라는 표현을 삭제해 버리고 네덜란드는 네덜란드, 네덜란드령 인도, 스리랑카 등을 포함한다고 표기한다. 이것은 20세기의 영국 프랑스 등 다른 열강들 또한 비슷하다. 단지 일본의 동화정책은 민족적 연관성을 강조하는 특징이 더해졌으며 이는 현지인 회유를 목적으로 하는 전형적인 제국주의 통치의 연장선이었다. 병합이니 식민지가 아니라는 주장도 무의미한게, 당장 벨기에의 레오폴드 2세는 콩고 자유국을 "식민지로 병합"(annexed as a colony)# 했으며 뉴질랜드도 병합된건 마찬가지였고(annexed as a colony)# 아예 장래에 독립이 약속된 필리핀 조차 미국에 병합되었지만 그 지위는 병합된 텍사스와는 같지 않은 식민지로 간주된다.
애초에 오스트리아 병합, 그레이트브리튼 왕국과 달리 천황의 긴급칙령을 통해 의회를 무시하고 권한을 휘두를수 있는 총독을 임명하고 대일본제국 헌법 명시된 권리를 적용받지 못한다는 것 부터가 조선은 식민지 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거기다 프랑스가 작정하고 본토 일부로 만드려고 총독부 조차 두지 않았고 프랑스 헌법까지 적용한 알제리[102] 조차 현대에 들어 식민지로 간주된다.
주둔군 사령관은 명치 40년 9월 한국인 일반에 대한 고시(告示)를 발하여 한국황제의 성지(聖旨)를 받들어[103] 비도(匪徒)를 격멸해서 서민대중을 도탄에서 구하려고 한다는 목적을 밝히고, 비도에 대해서는 귀순하는 자는 감히 그 죄를 묻지 않고, 또 그것을 포박하거나 그 소재를 밀고하는 자에게는 반드시 중상을 줄 것이나, 만약 완고하게 깨닫지 못하고 비도에 투신하거나 또는 그것을 은피시키고 혹은 흉기를 장익(藏匿)시키는 자는 가차없이 엄벌에 처할 뿐 아니라, 그 책임은 현행범의 촌읍(村邑)으로 돌려 부락 전체를 엄중하게 처치할 것을 밝혀 깨우치게 하였다. 그러나 그들 폭도는 그 복장이 양민과 다름이 없는 자가 많을 뿐 아니라 시리(時利)가 없으면 곧 무기를 버리고 양민을 가장하여 우리의 예봉을 피하는 수단을 취하였다. 그리고 특히 사건 발생 초에 있어서는 원주민도 그들 폭도에 동정하여 그것을 비호하는 경향이 있었으므로, 토벌대는 이상 고시(告示)에 의하여 그책임을 현행범 촌읍으로 돌려 주륙(誅戮)을 가하고, 또는 전촌을 소각하는 등 처치를 단행하여 충청북도 제천(堤川) 지방 같은 곳은 거의 초토화되고 말았다.조선주차군사령부(1913), "조선폭도토벌지(朝鮮暴徒討伐誌)" 670 ~ 671p
양근, 이천 방면으로 파견된 明石 중대는 23일 양근에 도착, 24일 양근 동북 약 20리에 있는 폭도의 소굴인 장수동蓮安幕을 습격, 궤란하는 폭도를 습격하여 龍門寺 근거지를 무찔러 장래의 화근을 끊기 위하여 그것을 소각해 버렸다.조선주차군사령부(1913), "조선폭도토벌지(朝鮮暴徒討伐誌)", 692p
일본은 한국을 회유하고자 했고 일반의 지지와 지원을 얻고 싶었다. 적어도 한 지역에서의 주택소각(houseburning) 정책은 번창하는 공동체를 파괴하고, 반군에의 가담을 늘리며, 몇 세대까지도 잊히지 않을 원성의 씨앗을 뿌렸다.McKenzie, F.A. 1971. 「The Tragedy of Korea: A Journey to The ‘Righteous Army」
일각에서는 식민지 조선이 그 이전 시대보다 평화롭고 안정적이었으며, 조선인들도 이를 긍정했다는 증거로 식민지 조선 내의 적극적 무장투쟁운동의 부재했다고 주장한다.
이는 사실이 아니다. 오히려 식민지 조선은 타 식민지 이상으로 저항했던 편이다. 고종이 강제 퇴위된 1907년 7월 19일부로 한국 민군의 퇴위 반대 운동이 격심하게 일어나기 시작했고 이는 다시 남대문 전투와 정미의병으로 이어졌다. 특히 군대해산 이후 지방 대한제국군 진위대 해산병들이 각지의 의병에 가담하면서 일본은 기존의 토벌방식으로는 제대로 의병을 해산할 수 없었다. 의병들은 새로이 양총을 구입하고 해산 구한국군 장병들은 의병 전술을 일신했다. 그러자 일본은 기존에 한반도 남부에서 의병토벌을 전담하던 제12여단을 1개 여단 규모의 한국임시파견대로 교대하곤 1909년 9월과 10월 2개월에 걸쳐 조직적 집단학살을 자행한다.
이는 사실이 아니다. 오히려 식민지 조선은 타 식민지 이상으로 저항했던 편이다. 고종이 강제 퇴위된 1907년 7월 19일부로 한국 민군의 퇴위 반대 운동이 격심하게 일어나기 시작했고 이는 다시 남대문 전투와 정미의병으로 이어졌다. 특히 군대해산 이후 지방 대한제국군 진위대 해산병들이 각지의 의병에 가담하면서 일본은 기존의 토벌방식으로는 제대로 의병을 해산할 수 없었다. 의병들은 새로이 양총을 구입하고 해산 구한국군 장병들은 의병 전술을 일신했다. 그러자 일본은 기존에 한반도 남부에서 의병토벌을 전담하던 제12여단을 1개 여단 규모의 한국임시파견대로 교대하곤 1909년 9월과 10월 2개월에 걸쳐 조직적 집단학살을 자행한다.
(9) [한국 주재 일본군의 한국 양민 박해사건 실상 조사설에 관한 영국 주재 대사 電文 이첩 件]
來電第一○二號
明治四十年十一月二九日 午前一一時 東京發
明治四十年十一月二九日 午後二時二九分 京城着
林 外務大臣
伊藤 統監
(제258호) 몰래 들은 바에 의하면 영국정부는 한국 각 지방에 주둔하는 일본 군대가 한국인에 대한 행동에서 종종 지나치게 가혹한 일이 있다는 풍설이 있어 지금 그 사실을 조사 중이라고 함. 예를 들면 우리 군대에서 폭도 토벌 시에 촌락에서 폭도들을 숨겨주는 일로 인하여 그 촌락 전체를 소각해 버리게 되므로, 무고한 양민이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리고 있는 사례가 적지 않다는 보고를 전해온다고 함. 이것을 각하께서 참고하시도록 전보하며 다만 본건은 영국총영사에게는 비밀에 부치시기 바람. 자세한 사항은 추후 면담 시에 말씀드리겠음.
당시 전투상보 기록에 따르면 14연대는 의병을 체포 후 재판 없이 총살하거나 도주했다면서 총살, 마을 전체 소각, 사찰 방화 등을 벌였다. 전투상보에서 가장 많이 등장했던 표현은 도주를 꾀하여 참살로, 포로 살해 이유를 포로 측에 전가하는 것이었다.
밀정이나 체포한 의병을 고문하여 얻어낸 정보를 바탕으로 의병의 가옥에 방화하는 방식의 학살 역시 자주 발생하였다. 가령 기삼연부대의 중군장 이진사의 경우, 그의 집은 물론이고 그의 부모의 집까지 일본군에게 불타 사라졌다. 의병을 비호한다며 사찰과 마을 전체를 집단적으로 파괴한 경우 역시 적지 않은데, 대표적인 사례가 광주 연곡사다. 1906년에는 제천 시가지가 소각당해 사라졌다. 1907년 말에는 양평군 용문산 일대가 파괴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용문사가 소실되었다. 양평읍 시가지와 관아 역시 이때 불타버려 옛 모습을 찾을 수 없다.
일단 1913년 조선주차군이 직접 작성해 편찬한 의병 토벌 보고서라 할 수 있는 조선폭도토벌지(朝鮮暴徒討伐誌)에서는 1906년부터 1911년 5년 사이 의병 약 1만 7천 명을 사살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일본군 전투상보와 여타 기록들을 조합해 보면 이는 축소되었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으며, 조선폭도토벌지 내에서도 집계 오류가 발견된다. 일례로 조선폭도토벌지는 정미의병이 발발한 1907년 8월 1일부터 8월 31일까지 의병 198명을 사살했다고 보고했으나 막상 이 시기 의병들의 전사자 수를 다 합쳐 보면 400명이 넘어간다. 이마저도 경기와 충북, 그리고 강원 일대에만 한정되어 있으며 신돌석이 활동하던 경상도 지역이 집계되지 않았다. 또한 이 수치에는 의병들을 포로로 잡은 후 처형한 경우나 재판에 회부하여 사형한 경우가 함께 집계되지 않았으며 1911년 이후 벌어진 토벌작전도 누락되었다. 가령 1911년 9월부터 벌어진 일본 제2사단의 황해도 평정작전은 본지에 언급되지 않는다.
그리하여 현재 학계에서는 조선폭도토벌지에서 명시한 희생자 수보다 최소 두 배, 학자에 따라서는 최대 4배에서 5배 정도의 희생자가 발생했다고 간주한다. 즉 한말의병전쟁 당시 일본군에 의해 최소 2만에서 4만, 최대 10만이 죽었다고 추산된다. 대략 반세기 후 벌어진 보도연맹 학살 사건의 희생자 수가 최소 6만에서 최대 30만, 일반적으로는 약 10만 가량으로 추산되는데, 인구비례를 생각하면 이와 거의 유사한 셈.
한국의 의병들 역시 가만히 있지는 않아서 해산된 구한국군 장병들을 받아들이거나 해외에서 무기를 밀수하고, 고종의 밀지와 내탕금을 받아 항쟁을 이어나갔다. 일부는 일본의 주요 요인들에 대한 암살도 시도하였는데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한국 독립운동사의 최고 쾌거로 꼽히는 안중근 의사 하얼빈 의거다. 이러한 의병 운동이 일본의 헌병 무단 통치로 인해 국내에서 완전히 뿌리뽑힌 것은 1915년 채응언이 체포되면서이다. 1907년에서 1915년 8년간 한국인들은 국내에서 격렬히 투쟁했다. 살아남은 이들은 만주와 연해주로 장소를 옮겨 독립운동을 이어나갔다.
결국 '조선인들은 식민지배를 긍정적으로 바라보았으며, 저항의 부재는 그 증거'라는 주장은 1910 ~ 1945년 사이의 역사에만 의도적으로 초점을 맞춤으로써 경술국치와 구한말의 경계에 걸친 사건을 감추는 것이다. "기억의 사각지대에서 잊혔다"는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손기영 교수의 표현처럼, 이는 연인원 14만이 넘었던 의병 투쟁과 최소 2만에 가까운 희생자들의 존재를 역사에서 지워버림으로써 일본의 식민지배를 옹호하는 아주 노골적인 정치적 목적을 띈 행위라 할 수 있다. 즉 당시 일본이 무력을 동원해 한국을 식민지로 전환하면서 자행한 일은 독일 제국의 헤레로족 학살이나 영국의 보어 전쟁 못지않게 잔혹하였으며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이를 전혀 긍정적으로 바라보지 않았다. 즉 이런 주장은 애초부터 본인들이 저항한 것에 대해 알지 못하거나 모른 척하기에 나오는 말일 뿐이다.
밀정이나 체포한 의병을 고문하여 얻어낸 정보를 바탕으로 의병의 가옥에 방화하는 방식의 학살 역시 자주 발생하였다. 가령 기삼연부대의 중군장 이진사의 경우, 그의 집은 물론이고 그의 부모의 집까지 일본군에게 불타 사라졌다. 의병을 비호한다며 사찰과 마을 전체를 집단적으로 파괴한 경우 역시 적지 않은데, 대표적인 사례가 광주 연곡사다. 1906년에는 제천 시가지가 소각당해 사라졌다. 1907년 말에는 양평군 용문산 일대가 파괴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용문사가 소실되었다. 양평읍 시가지와 관아 역시 이때 불타버려 옛 모습을 찾을 수 없다.
일단 1913년 조선주차군이 직접 작성해 편찬한 의병 토벌 보고서라 할 수 있는 조선폭도토벌지(朝鮮暴徒討伐誌)에서는 1906년부터 1911년 5년 사이 의병 약 1만 7천 명을 사살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일본군 전투상보와 여타 기록들을 조합해 보면 이는 축소되었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으며, 조선폭도토벌지 내에서도 집계 오류가 발견된다. 일례로 조선폭도토벌지는 정미의병이 발발한 1907년 8월 1일부터 8월 31일까지 의병 198명을 사살했다고 보고했으나 막상 이 시기 의병들의 전사자 수를 다 합쳐 보면 400명이 넘어간다. 이마저도 경기와 충북, 그리고 강원 일대에만 한정되어 있으며 신돌석이 활동하던 경상도 지역이 집계되지 않았다. 또한 이 수치에는 의병들을 포로로 잡은 후 처형한 경우나 재판에 회부하여 사형한 경우가 함께 집계되지 않았으며 1911년 이후 벌어진 토벌작전도 누락되었다. 가령 1911년 9월부터 벌어진 일본 제2사단의 황해도 평정작전은 본지에 언급되지 않는다.
그리하여 현재 학계에서는 조선폭도토벌지에서 명시한 희생자 수보다 최소 두 배, 학자에 따라서는 최대 4배에서 5배 정도의 희생자가 발생했다고 간주한다. 즉 한말의병전쟁 당시 일본군에 의해 최소 2만에서 4만, 최대 10만이 죽었다고 추산된다. 대략 반세기 후 벌어진 보도연맹 학살 사건의 희생자 수가 최소 6만에서 최대 30만, 일반적으로는 약 10만 가량으로 추산되는데, 인구비례를 생각하면 이와 거의 유사한 셈.
한국의 의병들 역시 가만히 있지는 않아서 해산된 구한국군 장병들을 받아들이거나 해외에서 무기를 밀수하고, 고종의 밀지와 내탕금을 받아 항쟁을 이어나갔다. 일부는 일본의 주요 요인들에 대한 암살도 시도하였는데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한국 독립운동사의 최고 쾌거로 꼽히는 안중근 의사 하얼빈 의거다. 이러한 의병 운동이 일본의 헌병 무단 통치로 인해 국내에서 완전히 뿌리뽑힌 것은 1915년 채응언이 체포되면서이다. 1907년에서 1915년 8년간 한국인들은 국내에서 격렬히 투쟁했다. 살아남은 이들은 만주와 연해주로 장소를 옮겨 독립운동을 이어나갔다.
결국 '조선인들은 식민지배를 긍정적으로 바라보았으며, 저항의 부재는 그 증거'라는 주장은 1910 ~ 1945년 사이의 역사에만 의도적으로 초점을 맞춤으로써 경술국치와 구한말의 경계에 걸친 사건을 감추는 것이다. "기억의 사각지대에서 잊혔다"는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손기영 교수의 표현처럼, 이는 연인원 14만이 넘었던 의병 투쟁과 최소 2만에 가까운 희생자들의 존재를 역사에서 지워버림으로써 일본의 식민지배를 옹호하는 아주 노골적인 정치적 목적을 띈 행위라 할 수 있다. 즉 당시 일본이 무력을 동원해 한국을 식민지로 전환하면서 자행한 일은 독일 제국의 헤레로족 학살이나 영국의 보어 전쟁 못지않게 잔혹하였으며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이를 전혀 긍정적으로 바라보지 않았다. 즉 이런 주장은 애초부터 본인들이 저항한 것에 대해 알지 못하거나 모른 척하기에 나오는 말일 뿐이다.
한국에서 일하고 있는 가장 유력한 일본인 중의 한 사람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의 말은 전적으로 사견임을 먼저 알아주십시요. 그러나 만일 당신이 일본정책의 결과가 어찌될 것인가를 나에게 개인적으로 묻는다면 나는 당신에게 한 가지 목적을 알려드리릴 수는 있습니다. 그 목적을 이루는 데에는 몇 세대가 걸리겠지만 꼭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들은 일본어를 사용하게 될 것이고 일본의 생활 습속대로 생활할 것이고 우리의 일부분을 이룰것입니다. 식민지 통치에는 오직 두 가지의 길이 있을뿐입니다. 하나는 상대 민족을 외국인으로 그대로 간주한 채로 통치하는 것입니다. 당신의 조국인 영국은 인도에서 이와같은 방법으로 통치했으며 결국 이와같은 제국은 오래 견딜 수가 없습니다. 인도는 당신들의 지배를 벗어날 것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두번째 방법은 상대 민족을 동화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방법을 취할 작정입니다. 우리는 한민족에게 일본어를 가르치고 우리의 제도를 이곳에 이식함으로써 그들을 우리와 일체가 되도록 만들 것입니다.[104]
이것이 곧 일본의 자비심 많은 계획이다. 한국의 국토를 병탄하고, 모든 산업을 일본인들이 장악하고, 토착민들을 벌목꾼이나 물지게꾼으로 만들어서 정복자들을 위해 봉사하도록 만들려는 것은 가장 일반적으로 취해지는, 그러나 유치하기 짝이 없는 생각이다. 한국인은 일본인과는 수준이 전적으로 다른 나약한 겁장이라고 그 일본인은 생각하고 있다. 그는 한국인을 형편없는 존재로 생각하고 있으며, 또 그러한 생각속에서 한국인을 다루고 있다.-프레더릭 매켄지 <대한제국의 비극>
일본의 식민지 지배는 동화주의를 추구했다. 대만, 조선, 만주에 일본의 제도를 이식하고, 가능한 한 본토와 점령지를 동질화해서 결국에는 일본의 한 지방으로 편입하고자 한 것이다. 이는 조선을 완전히, 영구히 일본의 일부로 만들려고 했던 것이다.
이러한 방침은 일본 열도의 서쪽에 있는 두 섬의 이름을 따서 당시 '조선의 시코쿠(四国), 큐슈(九州)화'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정치적인 측면에서 보면 조선인의 정치적 권리는 인정되지 않았고, 조선인에 대한 억압과 차별이 지속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동화주의는 식민지 지배를 합리화하는 구호에 불과했다.
한편으로 정치적인면을 제외한 경제적인 측면에서 보면 일본의 제도가 거의 그대로 조선에 이식되어 지역 통합이 이루어진 단계로 변모했다고 할 수 있다.
첫째, 화폐가 통합되었다. 둘째, 시장이 통합되었다. 조선과 일본 간에는 거의 모든 관세가 폐지되었다. 몇 개 품목은 예외로 두었지만, 그것도 점차 폐지되었다. 그리고 조선과 일본을 제외한 지역 간의 무역에는 일본의 관세율이 그대로 적용되었다. 그 결과 조선과 일본의 시장은 완전히 통합되었다. 셋째, 일본의 사법 제도가 조선에 이식되었다. 일본에서 시행되는 법령이 모두 조선에 시행된 것은 아니고, 선별하여 시행되었다.
예컨대 대표적인 법령으로 1912년에 시행된 <조선민사령>을 들 수 있다. 그에 따르면, 일부의 예외 조항을 두면서도 일본의 민법, 상법, 각 시행령, 민사소송법 등 23개의 법률을 조선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만약 해당 법령이 일본에서 개정되면, 그 개정된 내용이 자동으로 조선에도 적용되게 된다. 이를 통해 경제 활동을 일본 또는 조선에서 어느 쪽에서 하든지 차이가 없도록 두 지역의 법적 환경을 통합한 것이다. 다른 한편, 조선인의 정치적 권리에 관련된 <중의원 선거법>을 들 수 있는데, 조선에서는 이를 시행하지 않았다. 이렇게 보면 일본의 동화주의는 정치적 권리는 억압하면서 경제면에서는 동화를 지향한, 편의주의적 접근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지역 통합은 일본 제국 전체로 확대되었다. 일본의 지역통합은 식민지에 대한 제국주의적 지배의 한 형태이다. 이에따라 조선의 물자와 노동력을 쉽게 수탈하기 위함이지만, 역내의 각 지역이 완전히 개방되어 상품과 자본과 노동이 보다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 역내의 경제 변화가 급속히 촉진되었다.
일제강점기는 조선인에 대한 차별, 예컨대 교육과 직업 선택의 불평등, 사회・법 제도의 불이익, 신민화 정책을 위한 민족 문화의 말살 및 왜곡, 일본의 전쟁 수행을 위한 강제동원(징병 포함)[106], 산미증식계획 등 병참기지로서의 착취, 일본군 위안부 등 전쟁 범죄 문제 등이 얽혀 있는 데다가 그 이후의 한반도에 있어서 좋지 못한 유산을 많이 남겼기 때문에 한국에서 일제강점기가 대화의 주제가 되었을 때 저절로 분노하지 않는 한국인은 드물다. 한국의 주류 사학계 또한 민족의 암흑기라는 입장이다.
일본 극우사관 학자들이나 넷 우익들은 일본 제국 내 조선인에 대한 명문화된 차별은 없었다라고 주장한다. 오히려 합병 조건에 명시된 대로 법적으로 일본인 국적을 부여해주고 동등한 지위가 약속되어있다는 게 주장의 요지다.
일본군부 합방 후 조선통치와 제국헌법과의 관계[107]라는 문서에서 양국통치자의 ‘합의’에 의하여 성립한 병합조약에 의하여 일본국이 조선이기는 하지만 “조선의 민정·풍속 및 관습 등은 제국내지와 판이하고 문화 정도가 일본과와 동일하지 않기 때문에 다른 속령과 같이 일본헌법의 적용범위 외에 두어 조선총독의 ‘명령’으로 통치하여야 한다는 것을 확인하고 있다. 이는 대만일치시기의 특별통치주의를 내세운 대만 총독부의 논리와 유사하다. 즉, 말로만 동등한 지위를 약속했을 뿐 실제로는 대일본제국 헌법의 적용 밖이었고 총독부의 조선 민사령을 적용받았다.#
이에 대해 당시 공법학자 야마다 산료(山田三良)는 “합병 후에 있어서 조선인의 법적 지위는 외견상은 일본국적을 취득하나 이 때문에 조선인이 전적으로 일본인과 동일하게 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국내법에서는 차별대우가 가능하다. 다만 외국에 대해서만 일본인이 되는 것에 불과하다”고 밝히고 있다.# 그래도 외국에서는 일본인이 되는 것이 좋은것 아닌가 싶지만 명목적 일본 국적 덕에 해외 주재 독립운동가을 송환해서 조선 민사령상 내란죄를 적용할 수 있었다. 그리고 외지 조선인은 이민이 허용도 안된다.[108] 즉 일본인으로서 권리는 없는데 필요에 따라 의무만 부여되는 지위였다.
그리고 이를 반론할 수 있는 사례는 따로 책을 엮어서 밀들어 낼수 있을 정도이니 차별이 없다는 말은 흘려 듣는 게 좋다. 전기, 수도 비용을 조선인만 비싸게 받는 것 부터 교육분야 까지 민족분리와 쿼터제로 입학생을 받던게 일제시대다. 그리고 미즈호 학살 사건이나 이봉창 의사의 일화, 간토 대지진 시기 조선인 학살사건 등을 보면 직간접적인 사회 차별까지 만연했다. 제도적으로 일본 제국 신민의 구분은 내지인, 식민 통치 기관이 설립된 지역의 거주민, 정식 영토가 되지 않은 지역의 거주민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이들에겐 각각 다른 법률이 적용되었는데, 사할린, 조선, 대만처럼 식민 통치 기관이 설립된 곳에 있는 사람들까지는 신민으로 취급했으나 대일본제국 헌법이 적용되지 않았다. 기본법도 없이 조선의 총독, 대만의 총독, 가라후토청 장관이 천황의 명을 받아 그냥 자의적으로 해당 지역을 다스렸다.
넷 우익들은 조선인을 대우했다는 증거로 내선일체라는 선전성 구호를 내세우지만, 그 실상은 좋게 봐야 2등 국민, 대부분은 불령선인 신세였다. 그것도 독립운동가 같은 일부 체제 저항세력만 그런 것이 아니라, 제국의 고위직에 오른 극소수의 친일반민족행위자를 제외한 모든 조선인을 잠재적 불령선인 취급했다. #, # 조선인 노무자의 미불금 피해 실태를 보면 심지어 돈도 덜 주는데, 거기서도 또 사기를 쳐서 3분의 2 정도를 빼돌렸다. 특히 내선일체의 실체는 의무는 평등하지만 권리는 불평등 그 자체였다. 그럼에도 외형상 조선인을 일본인화 시킨다는 것이었기에 엉뚱하게도 조선인뿐 아니라 일본인들 사이에서도 반발이 많았다. 근데 일본인들의 반발은 제국주의를 반대하거나 조선의 독립을 지지해서 반대한 것이 아니라, "왜 조선인들이 우리랑 똑같은 대우를 받아야 하냐"라는 차별적인 시각 때문이란 게 포인트.
만일 일제강점기가 지속되었다면 상술한대로 조선인들의 생활권은 한반도에서 만주국으로 쫓겨났을 가능성이 있다. 설령 비명을 찾아서처럼 일제 정부가 적당히 처세를 하고, 일제 본토는 물론 식민지까지 전시에 동원하는 태평양 전쟁이라는 막장이 없는 상황에서 일제시대가 계속된다고 해도, 명목상 2등 시민일 뿐 조선인의 처우는 사실상 부라쿠민 수준으로 전락하게 될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당장 현실을 봐도 오키나와는 옛날부터 일본과 교류했으며 일본어와 비슷한 류큐어를 사용했고 조선보다 훨씬 이전에 본토에 편입되었지만 현재에도 앙금이 조금 남아 있다. 만약 오늘날까지 한국인이 '한국인'이 아니라 '일본 외지 조선인'으로 남았다면, 영국의 아일랜드 지배시기나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나 오스트레일리아의 백호주의처럼, 조선 출신에 대한 심각한 차별이 1980~90년대까지 엄존했고, 이후에는 국제 사회에서 이것을 비판할 뿐 아니라 미국 흑인들과 비슷하게 한국인과, 차별에 반대하는 일본인들이 중심이 된 인권 운동이 활발했을 것이다. 특히나 제국헌법이 조선에 적용되지 않았던 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계속해서 해외 활동을 지속했을 것이란 점을 미루어 볼 때 내지 일본인과 달리, 여권, 비자 발급이나 해외여행에 있어서도 출국제한, 사상교육 등 차별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일본의 우파 사학계와 넷우익, 한국의 뉴라이트 계열 학자들은 일제의 전시동원체제[109] 하에서 이루어진 폐해에 대해서는 일부는 어느 정도 인정하는 사람이 있기도 하다. 이후 한국이 한국인을 대표해 일본에 배상을 받는 과정이 또 상당한 논란거리였는데, 이는 한일기본조약 문서 참조. 하지만 이러한 시기를 제외하면 일제강점기에 조선의 발전 자체가 이루어졌음 자체는 부정할 수 없다고 본다. 식민지 근대화론 참조. 물론 일제강점기 경제성장의 수혜는 히키아게샤를 비롯한 조선에 거주한 일본인들과 극소수 친일반민족행위자 조선인에게 돌아갔으며, 일제 본토 또한 산미증식계획이나 동척회사, 식산은행 등을 통해 조선 경제성장의 수혜를 받았다. 그리고 한반도가 온전할 수 있었던 이유는 미국과 한반도 사이에 일제 본토가 있었기 때문인 동시에 소련이 한반도에 도달하기 전에 일제가 항복했기 때문이지 일제가 한반도를 애지중지해서가 아니다. 당초 조선도 약간이긴 하지만 미국의 폭격을 받은 적도 있었다. 이오지마 전투에서의 일본군의 행적으로 보면 조선에서라고 같은 짓을 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다. 무려 오키나와에서 1억 총옥쇄라는 미친 소리를 한 자들에게 뭘 기대하겠냐마는. 비유하자면, 비록 소고기를 얻기 전에 주인이 죽었다 해도, 좋은 소고기를 얻기 위해 축사를 개선한 것이 어떻게 소를 위한 일이겠는가? 때문에 한국이 한반도를 불법 점령하고 한민족을 착취한 일본에게 고마워할 이유는 전혀 없다. 일본이 비록 한반도에 공장을 짓고 철도를 까는 등 근대화를 하였으나, 그 수혜 대상은 한반도의 식민지인을 위해서가 아닌, 일본인들만을 위한 근대화였다는 의미이다. 당연히 근대화의 혜택을 누릴 대상은 2등 국민 조선인들이 아니었다. 진짜 일본이 한국을 위해서 근대화를 해줬다면 밑에 교육 문제에서 밝힌 대로 일제 치하의 조선인들 중 절대 다수가 왜 그렇게 가난하고 문맹률이 높았는지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부터가 의문이 된다. 넷 우익들은 이런 반론을 들으면 우생학까지 들고와 한국인들의 DNA 드립을 치며 교육으로도 미개함은 어쩔 수 없더라라는 주장만 반복한다.
참고로 전후 본국 정부나 총독부가 지은 시설들과 재한 일본인들이 설립한 기업들을 비롯한 자산을 모두 몰수해 3년 후에 성립되는 대한민국 제1공화국 정부에 주었고, 자금이 없었던 정부는 민간에 팔아 자산가들이 헐값에 매입하였는데 이는 지금도 이름만 들어도 알법한 재벌그룹의 시초이다. 연합군 최고사령부는 이 자산의 규모를 당시 가치로 60억 불을 산정하였다. 당시 이러한 행위는 전후 민간인의 재산 약탈을 금지한 헤이그 육전조약 위반이었기에, 연합군 최고사령부는 자산 규모를 축소했으면 축소했지 과대평가할 여지는 없다고 보아야 한다. 그럼에도 식민지 근대화론이 한국에서 평가절하되는 가장 큰 이유는 경제성장을 주도한 일제의 의도가 철저히 착취를 전제로 한 자기중심적 사고에서 비롯된 점, 그리고 6.25 전쟁으로 인해 산업 기반의 상당수가 폭격으로 파괴된 점에서 기인한다.
사실 다른 식민지 제국들과의 식민 지배와 비교해도 일본 제국의 조선 통치는 상당히 납득하기 어려울 정도로 악랄하고 어정쩡한 수준이었다. 일반적으로 식민지 제국들은 아프리카 대륙의 식민지처럼 체급이 좀 작은 지역은 철저한 탄압 후 강제동화정책을 펼치거나, 남아시아 처럼 덩치가 너무 큰 경우 현지 지배층 세력을 포섭하고 자치권을 주거나 권력을 주거나 하는데 일본의 조선 통치는 이도저도 아니었다. 강압 통치로 조선인을 말살시키기에는 조선의 인구수가 2천만을 넘어가고 있었기에 사실상 불가능했음에도 강압적인 탄압 정책을 펼쳤고, 그렇다고 문화 통치 이후 대일본제국 헌법을 적용한 헌정 체제도 아니고, 친일 성향의 지식인들을 모아 자치권을 주거나 처우개선을 하는 식의 포섭 노력조차도 제대로 하지 않았으며 일본 제국 자체가 이토 히로부미 암살 이후 군부와 정계를 아우를 거물 정치인이 부재하는 상황이 되면서 막장가도를 달려가고 있었기에 일제의 조선 통치는 다른 식민제국과 비교해서 본토민과 식민지 주민의 괴리가 심각하게 차이가 날 정도였다. 이와 비슷한 사례로 영국의 아일랜드 지배가 꼽히고 있다. 실제로도 아일랜드인들은 3.1 운동과 같은 한국인의 독립운동을 자신들의 상황과 동일하게 바라보며 공감을 표했던 기록이 남아 있으며# 많은 학자들도 일본의 조선 식민지 통치와 영국의 아일랜드 통치의 유사점이 많다고 본다.
이와 관련하여 일제강점기/조선인 참정권 문제 참조.
일본 극우사관 학자들이나 넷 우익들은 일본 제국 내 조선인에 대한 명문화된 차별은 없었다라고 주장한다. 오히려 합병 조건에 명시된 대로 법적으로 일본인 국적을 부여해주고 동등한 지위가 약속되어있다는 게 주장의 요지다.
일본군부 합방 후 조선통치와 제국헌법과의 관계[107]라는 문서에서 양국통치자의 ‘합의’에 의하여 성립한 병합조약에 의하여 일본국이 조선이기는 하지만 “조선의 민정·풍속 및 관습 등은 제국내지와 판이하고 문화 정도가 일본과와 동일하지 않기 때문에 다른 속령과 같이 일본헌법의 적용범위 외에 두어 조선총독의 ‘명령’으로 통치하여야 한다는 것을 확인하고 있다. 이는 대만일치시기의 특별통치주의를 내세운 대만 총독부의 논리와 유사하다. 즉, 말로만 동등한 지위를 약속했을 뿐 실제로는 대일본제국 헌법의 적용 밖이었고 총독부의 조선 민사령을 적용받았다.#
이에 대해 당시 공법학자 야마다 산료(山田三良)는 “합병 후에 있어서 조선인의 법적 지위는 외견상은 일본국적을 취득하나 이 때문에 조선인이 전적으로 일본인과 동일하게 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국내법에서는 차별대우가 가능하다. 다만 외국에 대해서만 일본인이 되는 것에 불과하다”고 밝히고 있다.# 그래도 외국에서는 일본인이 되는 것이 좋은것 아닌가 싶지만 명목적 일본 국적 덕에 해외 주재 독립운동가을 송환해서 조선 민사령상 내란죄를 적용할 수 있었다. 그리고 외지 조선인은 이민이 허용도 안된다.[108] 즉 일본인으로서 권리는 없는데 필요에 따라 의무만 부여되는 지위였다.
그리고 이를 반론할 수 있는 사례는 따로 책을 엮어서 밀들어 낼수 있을 정도이니 차별이 없다는 말은 흘려 듣는 게 좋다. 전기, 수도 비용을 조선인만 비싸게 받는 것 부터 교육분야 까지 민족분리와 쿼터제로 입학생을 받던게 일제시대다. 그리고 미즈호 학살 사건이나 이봉창 의사의 일화, 간토 대지진 시기 조선인 학살사건 등을 보면 직간접적인 사회 차별까지 만연했다. 제도적으로 일본 제국 신민의 구분은 내지인, 식민 통치 기관이 설립된 지역의 거주민, 정식 영토가 되지 않은 지역의 거주민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이들에겐 각각 다른 법률이 적용되었는데, 사할린, 조선, 대만처럼 식민 통치 기관이 설립된 곳에 있는 사람들까지는 신민으로 취급했으나 대일본제국 헌법이 적용되지 않았다. 기본법도 없이 조선의 총독, 대만의 총독, 가라후토청 장관이 천황의 명을 받아 그냥 자의적으로 해당 지역을 다스렸다.
넷 우익들은 조선인을 대우했다는 증거로 내선일체라는 선전성 구호를 내세우지만, 그 실상은 좋게 봐야 2등 국민, 대부분은 불령선인 신세였다. 그것도 독립운동가 같은 일부 체제 저항세력만 그런 것이 아니라, 제국의 고위직에 오른 극소수의 친일반민족행위자를 제외한 모든 조선인을 잠재적 불령선인 취급했다. #, # 조선인 노무자의 미불금 피해 실태를 보면 심지어 돈도 덜 주는데, 거기서도 또 사기를 쳐서 3분의 2 정도를 빼돌렸다. 특히 내선일체의 실체는 의무는 평등하지만 권리는 불평등 그 자체였다. 그럼에도 외형상 조선인을 일본인화 시킨다는 것이었기에 엉뚱하게도 조선인뿐 아니라 일본인들 사이에서도 반발이 많았다. 근데 일본인들의 반발은 제국주의를 반대하거나 조선의 독립을 지지해서 반대한 것이 아니라, "왜 조선인들이 우리랑 똑같은 대우를 받아야 하냐"라는 차별적인 시각 때문이란 게 포인트.
만일 일제강점기가 지속되었다면 상술한대로 조선인들의 생활권은 한반도에서 만주국으로 쫓겨났을 가능성이 있다. 설령 비명을 찾아서처럼 일제 정부가 적당히 처세를 하고, 일제 본토는 물론 식민지까지 전시에 동원하는 태평양 전쟁이라는 막장이 없는 상황에서 일제시대가 계속된다고 해도, 명목상 2등 시민일 뿐 조선인의 처우는 사실상 부라쿠민 수준으로 전락하게 될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당장 현실을 봐도 오키나와는 옛날부터 일본과 교류했으며 일본어와 비슷한 류큐어를 사용했고 조선보다 훨씬 이전에 본토에 편입되었지만 현재에도 앙금이 조금 남아 있다. 만약 오늘날까지 한국인이 '한국인'이 아니라 '일본 외지 조선인'으로 남았다면, 영국의 아일랜드 지배시기나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나 오스트레일리아의 백호주의처럼, 조선 출신에 대한 심각한 차별이 1980~90년대까지 엄존했고, 이후에는 국제 사회에서 이것을 비판할 뿐 아니라 미국 흑인들과 비슷하게 한국인과, 차별에 반대하는 일본인들이 중심이 된 인권 운동이 활발했을 것이다. 특히나 제국헌법이 조선에 적용되지 않았던 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계속해서 해외 활동을 지속했을 것이란 점을 미루어 볼 때 내지 일본인과 달리, 여권, 비자 발급이나 해외여행에 있어서도 출국제한, 사상교육 등 차별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일본의 우파 사학계와 넷우익, 한국의 뉴라이트 계열 학자들은 일제의 전시동원체제[109] 하에서 이루어진 폐해에 대해서는 일부는 어느 정도 인정하는 사람이 있기도 하다. 이후 한국이 한국인을 대표해 일본에 배상을 받는 과정이 또 상당한 논란거리였는데, 이는 한일기본조약 문서 참조. 하지만 이러한 시기를 제외하면 일제강점기에 조선의 발전 자체가 이루어졌음 자체는 부정할 수 없다고 본다. 식민지 근대화론 참조. 물론 일제강점기 경제성장의 수혜는 히키아게샤를 비롯한 조선에 거주한 일본인들과 극소수 친일반민족행위자 조선인에게 돌아갔으며, 일제 본토 또한 산미증식계획이나 동척회사, 식산은행 등을 통해 조선 경제성장의 수혜를 받았다. 그리고 한반도가 온전할 수 있었던 이유는 미국과 한반도 사이에 일제 본토가 있었기 때문인 동시에 소련이 한반도에 도달하기 전에 일제가 항복했기 때문이지 일제가 한반도를 애지중지해서가 아니다. 당초 조선도 약간이긴 하지만 미국의 폭격을 받은 적도 있었다. 이오지마 전투에서의 일본군의 행적으로 보면 조선에서라고 같은 짓을 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다. 무려 오키나와에서 1억 총옥쇄라는 미친 소리를 한 자들에게 뭘 기대하겠냐마는. 비유하자면, 비록 소고기를 얻기 전에 주인이 죽었다 해도, 좋은 소고기를 얻기 위해 축사를 개선한 것이 어떻게 소를 위한 일이겠는가? 때문에 한국이 한반도를 불법 점령하고 한민족을 착취한 일본에게 고마워할 이유는 전혀 없다. 일본이 비록 한반도에 공장을 짓고 철도를 까는 등 근대화를 하였으나, 그 수혜 대상은 한반도의 식민지인을 위해서가 아닌, 일본인들만을 위한 근대화였다는 의미이다. 당연히 근대화의 혜택을 누릴 대상은 2등 국민 조선인들이 아니었다. 진짜 일본이 한국을 위해서 근대화를 해줬다면 밑에 교육 문제에서 밝힌 대로 일제 치하의 조선인들 중 절대 다수가 왜 그렇게 가난하고 문맹률이 높았는지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부터가 의문이 된다. 넷 우익들은 이런 반론을 들으면 우생학까지 들고와 한국인들의 DNA 드립을 치며 교육으로도 미개함은 어쩔 수 없더라라는 주장만 반복한다.
참고로 전후 본국 정부나 총독부가 지은 시설들과 재한 일본인들이 설립한 기업들을 비롯한 자산을 모두 몰수해 3년 후에 성립되는 대한민국 제1공화국 정부에 주었고, 자금이 없었던 정부는 민간에 팔아 자산가들이 헐값에 매입하였는데 이는 지금도 이름만 들어도 알법한 재벌그룹의 시초이다. 연합군 최고사령부는 이 자산의 규모를 당시 가치로 60억 불을 산정하였다. 당시 이러한 행위는 전후 민간인의 재산 약탈을 금지한 헤이그 육전조약 위반이었기에, 연합군 최고사령부는 자산 규모를 축소했으면 축소했지 과대평가할 여지는 없다고 보아야 한다. 그럼에도 식민지 근대화론이 한국에서 평가절하되는 가장 큰 이유는 경제성장을 주도한 일제의 의도가 철저히 착취를 전제로 한 자기중심적 사고에서 비롯된 점, 그리고 6.25 전쟁으로 인해 산업 기반의 상당수가 폭격으로 파괴된 점에서 기인한다.
사실 다른 식민지 제국들과의 식민 지배와 비교해도 일본 제국의 조선 통치는 상당히 납득하기 어려울 정도로 악랄하고 어정쩡한 수준이었다. 일반적으로 식민지 제국들은 아프리카 대륙의 식민지처럼 체급이 좀 작은 지역은 철저한 탄압 후 강제동화정책을 펼치거나, 남아시아 처럼 덩치가 너무 큰 경우 현지 지배층 세력을 포섭하고 자치권을 주거나 권력을 주거나 하는데 일본의 조선 통치는 이도저도 아니었다. 강압 통치로 조선인을 말살시키기에는 조선의 인구수가 2천만을 넘어가고 있었기에 사실상 불가능했음에도 강압적인 탄압 정책을 펼쳤고, 그렇다고 문화 통치 이후 대일본제국 헌법을 적용한 헌정 체제도 아니고, 친일 성향의 지식인들을 모아 자치권을 주거나 처우개선을 하는 식의 포섭 노력조차도 제대로 하지 않았으며 일본 제국 자체가 이토 히로부미 암살 이후 군부와 정계를 아우를 거물 정치인이 부재하는 상황이 되면서 막장가도를 달려가고 있었기에 일제의 조선 통치는 다른 식민제국과 비교해서 본토민과 식민지 주민의 괴리가 심각하게 차이가 날 정도였다. 이와 비슷한 사례로 영국의 아일랜드 지배가 꼽히고 있다. 실제로도 아일랜드인들은 3.1 운동과 같은 한국인의 독립운동을 자신들의 상황과 동일하게 바라보며 공감을 표했던 기록이 남아 있으며# 많은 학자들도 일본의 조선 식민지 통치와 영국의 아일랜드 통치의 유사점이 많다고 본다.
이와 관련하여 일제강점기/조선인 참정권 문제 참조.
% | % | |||
11,397,840 | 80.28 | 16,533 | 3.73 | |
905,468 | 6.38 | - | - | |
223,649 | 1.58 | 7,231 | 1.63 | |
1,393,273 | 9.81 | 99,198 | 22.37 | |
48,317 | 0.34 | 138,771 | 31.30 | |
199,484 | 1.41 | 155,154 | 34.99 | |
22,064 | 0.16 | 19,248 | 4.34 | |
7,374 | 0.05 | 7,230 | 1.63 | |
합계 | 14,197,469 | 100 | 443,365 | 100 |
한편 총독부측은 그때그때의 필요에 따라 보통학교 보급을 진척시켰다. 특히 전시체제에 돌입하는 1937년 이전 시기에는 학교 증설에 대하여 소극적이었다. 그것은 한국인의 부담을 늘리는 방법으로 학교 증설 비용을 충당한다든지 수업연한의 연장을 지연시켰던 데서 드러난다. 총독부의 교육방침은 일본어를 통하여 조선인 전체에게 근대화의 은혜를 체득하도록 하는 데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의 필요에 맞는 인재를 육성하는 데 있었다. 1937년 이후의 취학률과 일본어보급이 급속하게 증가한 것은 바로 징병제도 실시라는 궁극적인 목적에서 연유한 결과이다.제2기 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 제4권 p264 《식민지 조선에서의 근대화와 일본어 교육》야마다 간토(山田寛人)
일제는 처음부터 조선인들에게 고등교육처럼 문명화된 지식인 양성 교육을 시킬 생각이 없었다. 애초에 다른 식민지들도 열강들의 필요에 의한 통제된 교육만이 이루어졌음을 생각하면 그다지 놀라운 일은 아니다. 일제 또한 식민지 운영에 필요한 정도의 조선인 인력(특히 농업)이 필요했지, 고급 조선인 인력과 그에 따른 조선인 주도의 자본 확대는 오히려 정치적 요구를 확대시키고 더 나아가 식자층 사이에서 민족주의가 퍼져버리면 독립을 불러올 수 있으므로 조선교육령의 반포하에 조선인들에게 초중등교육 및 실업교육을 보급하는 데 주력했다.
조선인 학제는 1차 조선교육령(1911~1922)에서 보통학교 4년, 고등보통학교[C] 4년, 여자고등보통학교 3년, 실업학교와 전문학교로 편제되어 일본 내 학제와 차별되었고, 조선어와 조선사 교육이 배제되고 일본어 보급이 강화되었다. 또한 이 시기 교원들은 잘 알려져있듯이 제복을 입고 검을 소지해서 조선인 학생들을 위력으로 압박했다. 총독부가 세운 공교육 체제 외의 사립학교들은 이미 1908년의 사립학교령으로 총독부의 인가를 얻은 학교들만 있었으며, 1915년의 사립학교 규칙으로 인가 조건이 더 강화되어 민간주도의 교육 확대는 사실상 불가능 하였다. 이는 조선의 교육은 무조건 총독부 통제하에 두어야된다는 원칙에서 나온 정책으로 조선민립대학설립운동의 실패에서 알 수 있듯이 조선인의 자체의 사립학교나 대학 설립은 이뤄지기 힘들었다. 이것은 근대화의 필수인 의무교육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는데 그럼에도 비싼 학비를 내서라도 입학을 원하는 조선인들이 많았고 이것은 보통학교 입시경쟁이라는 웃지못할 형태로 나타난다.
반면 조선에 보편적으로 있던 서당의 경우 처음에는 그대로 방치하여 신교육을 방지하는 데 쓰려고 했으나, 사립학교 규제에 대한 반발로 서당들에서 근대적 교육이 일기 시작했고 종국에는 2만곳에 달하는 서당이 생겨난다. 이에 총독부는 1918년 서당규칙을 만들어 허가제로 운영하게 하고 1930년에는 서당령으로 전국의 서당을 폐지해 버린다.
3.1 운동 이후 조선인들의 반발을 무마하고자 시행된 2차 조선교육령(1922~1938)으로 보통학교 6년, 고등보통학교 5년, 여자고등보통학교는 4년에서 5년까지 수업연한은 연장되었다. 그러나 3면 1교주의를 시행해서 학교 수가 턱도 없이 부족했고, 1교실에 60명씩 우겨 넣은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조선어와 조선사를 필수과목으로 돌리긴 했으나 수업 시수가 적었고, 조선사는 식민사관으로 점철된 내용이었다. 게다가 일본어와 일본사, 일본지리의 수업 시수는 더 확대되었다. 1924년 경성제국대학이 설립되지만 조선인은 학생 총원의 3분의 1만 입학할 수 있었고 전공도 많지 않았다.
3차 조선교육령(1938~1943)은 내선일체, 일선동조, 황국신민화 선전이 일어나던 1937년 중일전쟁 후부터 시행됐다. 내선일체의 구색을 맞추고 조선인들도 전쟁에 동원해야 했으므로 종전의 분리됐던 학제를 통일시켰다. 그리고 조선어는 수의과목으로 바꾸고 조선사와 조선지리 교육은 금지됐다. 또한 이때부터 황국신민서사를 강제로 외우게 만들었고 무사도 등 일본 정신교육을 강화했다. 1941년부터 심상소학교를 '황국신민을 양성한다'는 의미로 국민학교로 개칭하게 되는데, 국민학교는 광복 후에도 쓰이다가 지금의 초등학교로 개칭되게 된다.
4차 조선교육령(1943~1945)은 전시체제에 맞춰 조선인 학생들을 완전히 병사와 군수인력으로 동원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수업연한을 (구제)중학교[C] 4년, 고등여학교 4년으로 줄였고, 그나마 수의과목으로 남아 있던 조선어까지 완전 폐지시켰다. 목도를 들고 군사훈련을 하는 체련과가 중시됐으며 학도근로령을 내려서 학생들을 군수산업에 동원시키거나 전쟁터에 징병했다. 징병되었다가 일본군에서 도망쳐 광복군이 된 사례로 고려대학교 총장이었던 고 김준엽 교수가 있다.
이 시기의 국민학교 취학율은 남자 아동의 절반을 차지할 정로도 늘어났으나 수업시간 대부분을 북한 마냥 전쟁 지원을 위한 활동에 소모하였다. 이건 어디까지나 그 목적은 일제강점기 총독부의 식민지 교육으로 조선인들은 우민화되다가 공장 부품과 총알받이로 쓰인 것이며, 그 피해는 광복 후까지도 이어졌다. 일제의 우민화 교육과 식민사관이 얼마나 철저하고 효과적이었는지, 광복이 되어 기뻐서 태극기를 흔드는 어른들에게 학교를 다니던 어린이들이 일본을 자기 나라로 착각하고 왜 기뻐하냐며 슬퍼했다던 일화가 있을 정도다.
교육기회의 불평등만 봐도 해방 때까지 35년 동안 조선인 출신으로 이공학 박사를 받은 인물은 우장춘, 리승기를 포함해 단 12명에 불과했으며, 내지의 제국대학 박사를 딴 인물은 불과 2명뿐이었으니 당시 조선인들이 박사 학위를 딴다는 것은 정말 드문 일이었음을 알 수 있다.
1944년 한국에 거주하는 인구 중 3 %만이 일본인이었으나 종합대학 졸업자의 50%, 단과대, 사범대, 기술전문대 졸업자의 47 %, 중등학교 졸업자의 44 %, 2년제 중학교 졸업자의 73%가 일본인이었다.[박효선] 당장 초등 교원의 40% 이상, 중등 교원의 과반수가 일본인이라서 해방 직후 부족한 교원을 충원하기 위해 각종 강습과, 임시교원양성과들을 설치해서 2~12개월 만에 교원을 마구잡이로 충원하는 판이었다.
이를 통해 유추해보면 일제강점기 조선인들의 '근대화 학습'이란 '매우 극소수'에게만 해당되었다는 사실을 잘 알 수 있다. 실제로 1938년까지 일제는 내지와 조선의 교육과정에 차등을 두어, 식민지 조선인들이 엘리트 계층으로 진출하는 것을 근본적으로 틀어막았다. 이러다보니 학제가 달라, 구제중학교가 아닌 고등보통학교를 나온 조선인은 당시 일제 본토 기준으론 '구제중학교 졸업자 미만'이었던 게 엄연한 현실이다. 연희전문학교, 보성전문학교, 이화여자전문학교 등등 역시 전문학교라기보다 '각급학교'로 취급되었다. 따라서 조선인은 구제고등학교 과정을 마치고 제국대학에 입학하거나, 일반대학에 설치된 대학예과 과정을 밟아야만 제대로 된 대학생 취급을 받을 수 있었다.[113] 유독 일제강점기 유학생들의 출신이 OO대학 전문부·예과가 많은 것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사실상 국내에는 경성제국대학 말고 제대로 된 대학이 없었기 때문에 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많은 이들은 일본으로의 유학을 타진하기도 했다. 하지만 일본 본토의 대학들의 경우 조선인에게 할당되는 티오가 쥐꼬리수준이었기때문에 일본인들과 경쟁하기에 매우 불리한 환경이기도 했다. 일제가 끝난 이후 문맹률[114]도 엄청나게 높았다. 사실 일제 내내 일본어만 할 줄 아는 조선인까지 포함하여 문맹률이 80%에서 변동이 거의 없었다. 즉 일본어를 말할 줄은 알아도 읽고 쓸 줄을 몰랐단 얘기다. 심지어 일제에 의해 사적으로 조선인들을 교육하던 1910년의 2, 241개 초등학교가 1940년에는 391개교가 되어 30년 동안 82%나 되는 사립초등학교가 폐교되었다. 해당 출처에 의하면 국가적으로도 조선인들이 미개하다면서 교육을 기피한 모양. 당시 대만 등 다른 식민지들도 비슷한 문맹률을 보였다.[115] 일본인들은 국가에 의해 "조선인은 미개하다"라는 차별적 교육을 강요받았다.[116] 문맹이 아닌 한글 수준도 이후 조사에 따르면 이름과 숫자만 알면 통과하는 수준으로 그리 높지 않았다고 한다.[117] 주로 친일파 양반들이나 중인들이 혜택의 수혜자라 일본으로부터 독립에 실패하였다면 많은 사람들이 문맹 상태에 있었을 수도 있다. 물론 민주주의와 인권의 시대가 와서 점차 개선이 되었을 수도 있다. 일단 그 악명높은 중국도 소수민족들 및 광동인 등 남방 한족들에게 표준 중국어를 강요하긴 하지만 명분은 문맹 퇴치인 점을 보면, 일본의 조선인 어문정책은 그냥 실패라고 볼 수밖에 없다. 일본인은 조선인 80%가 문맹일 때 2%만이 문맹이었다.[118]
다만 조선인들에게 일본어 보급은 꽤나 했다고 하나, 같은 식민지인인 대만인 80%가 일본어를 할 수 있다고 과장한 면도 있어서 알 수 없다. 친대만 성향 넷 우익의 역사 왜곡과는 달리 당시 대만인들 다수는 일본어 수준이 그렇게까지 높지는 않아서 기준이 낮거나 과장일 가능성이 높다. 조선의 경우처럼 입말만 할 줄 알고 읽고 쓰기가 불가했을 수 있다. 대만인이 공식적으로 일본어를 잘하게 된 시기는 대만이 민주화되고 난 이후, 친일 성향이 늘어나게 된 이후였다. 이는 식민지 조선에서도 비슷했을 것으로 보이는데, 위의 문맹률이 보여주듯 중등교육 이상을 받은 사람들이 아니면 전근대 문어체 일본어를 잘 이해하지 못했으며, 대다수는 귀동냥을 통해서나 소학교(혹은 국민학교)에서 배운 구어체 회화만 가능한 수준이었다.[119] 여기에 해방 및 건국 이후, 한국에서는 일본어의 잔재를 어문생활에서 지워버리기 위한 국가 및 민간 차원의 노력이 이루어졌으며, 이는 2세대(약 60년)도 되지 않아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일본어는 개인이나 소규모 집단 차원의 기억으로 남은 채 공용어로서 생명력을 빠르게 잃었다.[120] 이로 인해 한국에는 일제강점기 당시 기록물이 방대하게 남아 있으나, 해독 가능자의 부족으로 인해 사료화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오역 역시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 또한 일부 통계에 의하면 일제강점기의 영향을 받은 노인세대들의 지적 능력과 그 이후 세대들의 지적능력을 비교해 본 결과, 그 격차가 심각할 정도로 크다는 통계도 있다.#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은 공립학교의 수와 그 수학률의 증가를 보여주는 통계만을 두고 교육의 근대화를 주장하지만 정작 그 공립학교의 운영방식이 영리적이었으며 차별적이었으며, 그로 인해 고급 인재들의 격차가 컸다는 점[121]을 무시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우익 정치인으로 유명한 이시하라 신타로는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일제가 의무교육을 시켰으며 그것 때문에 도야마 사관학교에 다녔다고 증언한 적 있는데 그 이후로 인터넷 상에서 일제 때 조부모가 일제덕분에 교육을 받았다는 썰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일제는 의무교육을 시행한 적이 없고 박정희 대통령은 만주국 군관학교(+ 일본육군사관학교 2년)를 제외하면[122] 그 어느 사관학교에도 다닌 적이 없다.
조선인 학제는 1차 조선교육령(1911~1922)에서 보통학교 4년, 고등보통학교[C] 4년, 여자고등보통학교 3년, 실업학교와 전문학교로 편제되어 일본 내 학제와 차별되었고, 조선어와 조선사 교육이 배제되고 일본어 보급이 강화되었다. 또한 이 시기 교원들은 잘 알려져있듯이 제복을 입고 검을 소지해서 조선인 학생들을 위력으로 압박했다. 총독부가 세운 공교육 체제 외의 사립학교들은 이미 1908년의 사립학교령으로 총독부의 인가를 얻은 학교들만 있었으며, 1915년의 사립학교 규칙으로 인가 조건이 더 강화되어 민간주도의 교육 확대는 사실상 불가능 하였다. 이는 조선의 교육은 무조건 총독부 통제하에 두어야된다는 원칙에서 나온 정책으로 조선민립대학설립운동의 실패에서 알 수 있듯이 조선인의 자체의 사립학교나 대학 설립은 이뤄지기 힘들었다. 이것은 근대화의 필수인 의무교육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는데 그럼에도 비싼 학비를 내서라도 입학을 원하는 조선인들이 많았고 이것은 보통학교 입시경쟁이라는 웃지못할 형태로 나타난다.
반면 조선에 보편적으로 있던 서당의 경우 처음에는 그대로 방치하여 신교육을 방지하는 데 쓰려고 했으나, 사립학교 규제에 대한 반발로 서당들에서 근대적 교육이 일기 시작했고 종국에는 2만곳에 달하는 서당이 생겨난다. 이에 총독부는 1918년 서당규칙을 만들어 허가제로 운영하게 하고 1930년에는 서당령으로 전국의 서당을 폐지해 버린다.
3.1 운동 이후 조선인들의 반발을 무마하고자 시행된 2차 조선교육령(1922~1938)으로 보통학교 6년, 고등보통학교 5년, 여자고등보통학교는 4년에서 5년까지 수업연한은 연장되었다. 그러나 3면 1교주의를 시행해서 학교 수가 턱도 없이 부족했고, 1교실에 60명씩 우겨 넣은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조선어와 조선사를 필수과목으로 돌리긴 했으나 수업 시수가 적었고, 조선사는 식민사관으로 점철된 내용이었다. 게다가 일본어와 일본사, 일본지리의 수업 시수는 더 확대되었다. 1924년 경성제국대학이 설립되지만 조선인은 학생 총원의 3분의 1만 입학할 수 있었고 전공도 많지 않았다.
3차 조선교육령(1938~1943)은 내선일체, 일선동조, 황국신민화 선전이 일어나던 1937년 중일전쟁 후부터 시행됐다. 내선일체의 구색을 맞추고 조선인들도 전쟁에 동원해야 했으므로 종전의 분리됐던 학제를 통일시켰다. 그리고 조선어는 수의과목으로 바꾸고 조선사와 조선지리 교육은 금지됐다. 또한 이때부터 황국신민서사를 강제로 외우게 만들었고 무사도 등 일본 정신교육을 강화했다. 1941년부터 심상소학교를 '황국신민을 양성한다'는 의미로 국민학교로 개칭하게 되는데, 국민학교는 광복 후에도 쓰이다가 지금의 초등학교로 개칭되게 된다.
4차 조선교육령(1943~1945)은 전시체제에 맞춰 조선인 학생들을 완전히 병사와 군수인력으로 동원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수업연한을 (구제)중학교[C] 4년, 고등여학교 4년으로 줄였고, 그나마 수의과목으로 남아 있던 조선어까지 완전 폐지시켰다. 목도를 들고 군사훈련을 하는 체련과가 중시됐으며 학도근로령을 내려서 학생들을 군수산업에 동원시키거나 전쟁터에 징병했다. 징병되었다가 일본군에서 도망쳐 광복군이 된 사례로 고려대학교 총장이었던 고 김준엽 교수가 있다.
이 시기의 국민학교 취학율은 남자 아동의 절반을 차지할 정로도 늘어났으나 수업시간 대부분을 북한 마냥 전쟁 지원을 위한 활동에 소모하였다. 이건 어디까지나 그 목적은 일제강점기 총독부의 식민지 교육으로 조선인들은 우민화되다가 공장 부품과 총알받이로 쓰인 것이며, 그 피해는 광복 후까지도 이어졌다. 일제의 우민화 교육과 식민사관이 얼마나 철저하고 효과적이었는지, 광복이 되어 기뻐서 태극기를 흔드는 어른들에게 학교를 다니던 어린이들이 일본을 자기 나라로 착각하고 왜 기뻐하냐며 슬퍼했다던 일화가 있을 정도다.
교육기회의 불평등만 봐도 해방 때까지 35년 동안 조선인 출신으로 이공학 박사를 받은 인물은 우장춘, 리승기를 포함해 단 12명에 불과했으며, 내지의 제국대학 박사를 딴 인물은 불과 2명뿐이었으니 당시 조선인들이 박사 학위를 딴다는 것은 정말 드문 일이었음을 알 수 있다.
1944년 한국에 거주하는 인구 중 3 %만이 일본인이었으나 종합대학 졸업자의 50%, 단과대, 사범대, 기술전문대 졸업자의 47 %, 중등학교 졸업자의 44 %, 2년제 중학교 졸업자의 73%가 일본인이었다.[박효선] 당장 초등 교원의 40% 이상, 중등 교원의 과반수가 일본인이라서 해방 직후 부족한 교원을 충원하기 위해 각종 강습과, 임시교원양성과들을 설치해서 2~12개월 만에 교원을 마구잡이로 충원하는 판이었다.
이를 통해 유추해보면 일제강점기 조선인들의 '근대화 학습'이란 '매우 극소수'에게만 해당되었다는 사실을 잘 알 수 있다. 실제로 1938년까지 일제는 내지와 조선의 교육과정에 차등을 두어, 식민지 조선인들이 엘리트 계층으로 진출하는 것을 근본적으로 틀어막았다. 이러다보니 학제가 달라, 구제중학교가 아닌 고등보통학교를 나온 조선인은 당시 일제 본토 기준으론 '구제중학교 졸업자 미만'이었던 게 엄연한 현실이다. 연희전문학교, 보성전문학교, 이화여자전문학교 등등 역시 전문학교라기보다 '각급학교'로 취급되었다. 따라서 조선인은 구제고등학교 과정을 마치고 제국대학에 입학하거나, 일반대학에 설치된 대학예과 과정을 밟아야만 제대로 된 대학생 취급을 받을 수 있었다.[113] 유독 일제강점기 유학생들의 출신이 OO대학 전문부·예과가 많은 것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사실상 국내에는 경성제국대학 말고 제대로 된 대학이 없었기 때문에 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많은 이들은 일본으로의 유학을 타진하기도 했다. 하지만 일본 본토의 대학들의 경우 조선인에게 할당되는 티오가 쥐꼬리수준이었기때문에 일본인들과 경쟁하기에 매우 불리한 환경이기도 했다. 일제가 끝난 이후 문맹률[114]도 엄청나게 높았다. 사실 일제 내내 일본어만 할 줄 아는 조선인까지 포함하여 문맹률이 80%에서 변동이 거의 없었다. 즉 일본어를 말할 줄은 알아도 읽고 쓸 줄을 몰랐단 얘기다. 심지어 일제에 의해 사적으로 조선인들을 교육하던 1910년의 2, 241개 초등학교가 1940년에는 391개교가 되어 30년 동안 82%나 되는 사립초등학교가 폐교되었다. 해당 출처에 의하면 국가적으로도 조선인들이 미개하다면서 교육을 기피한 모양. 당시 대만 등 다른 식민지들도 비슷한 문맹률을 보였다.[115] 일본인들은 국가에 의해 "조선인은 미개하다"라는 차별적 교육을 강요받았다.[116] 문맹이 아닌 한글 수준도 이후 조사에 따르면 이름과 숫자만 알면 통과하는 수준으로 그리 높지 않았다고 한다.[117] 주로 친일파 양반들이나 중인들이 혜택의 수혜자라 일본으로부터 독립에 실패하였다면 많은 사람들이 문맹 상태에 있었을 수도 있다. 물론 민주주의와 인권의 시대가 와서 점차 개선이 되었을 수도 있다. 일단 그 악명높은 중국도 소수민족들 및 광동인 등 남방 한족들에게 표준 중국어를 강요하긴 하지만 명분은 문맹 퇴치인 점을 보면, 일본의 조선인 어문정책은 그냥 실패라고 볼 수밖에 없다. 일본인은 조선인 80%가 문맹일 때 2%만이 문맹이었다.[118]
다만 조선인들에게 일본어 보급은 꽤나 했다고 하나, 같은 식민지인인 대만인 80%가 일본어를 할 수 있다고 과장한 면도 있어서 알 수 없다. 친대만 성향 넷 우익의 역사 왜곡과는 달리 당시 대만인들 다수는 일본어 수준이 그렇게까지 높지는 않아서 기준이 낮거나 과장일 가능성이 높다. 조선의 경우처럼 입말만 할 줄 알고 읽고 쓰기가 불가했을 수 있다. 대만인이 공식적으로 일본어를 잘하게 된 시기는 대만이 민주화되고 난 이후, 친일 성향이 늘어나게 된 이후였다. 이는 식민지 조선에서도 비슷했을 것으로 보이는데, 위의 문맹률이 보여주듯 중등교육 이상을 받은 사람들이 아니면 전근대 문어체 일본어를 잘 이해하지 못했으며, 대다수는 귀동냥을 통해서나 소학교(혹은 국민학교)에서 배운 구어체 회화만 가능한 수준이었다.[119] 여기에 해방 및 건국 이후, 한국에서는 일본어의 잔재를 어문생활에서 지워버리기 위한 국가 및 민간 차원의 노력이 이루어졌으며, 이는 2세대(약 60년)도 되지 않아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일본어는 개인이나 소규모 집단 차원의 기억으로 남은 채 공용어로서 생명력을 빠르게 잃었다.[120] 이로 인해 한국에는 일제강점기 당시 기록물이 방대하게 남아 있으나, 해독 가능자의 부족으로 인해 사료화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오역 역시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 또한 일부 통계에 의하면 일제강점기의 영향을 받은 노인세대들의 지적 능력과 그 이후 세대들의 지적능력을 비교해 본 결과, 그 격차가 심각할 정도로 크다는 통계도 있다.#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은 공립학교의 수와 그 수학률의 증가를 보여주는 통계만을 두고 교육의 근대화를 주장하지만 정작 그 공립학교의 운영방식이 영리적이었으며 차별적이었으며, 그로 인해 고급 인재들의 격차가 컸다는 점[121]을 무시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우익 정치인으로 유명한 이시하라 신타로는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일제가 의무교육을 시켰으며 그것 때문에 도야마 사관학교에 다녔다고 증언한 적 있는데 그 이후로 인터넷 상에서 일제 때 조부모가 일제덕분에 교육을 받았다는 썰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일제는 의무교육을 시행한 적이 없고 박정희 대통령은 만주국 군관학교(+ 일본육군사관학교 2년)를 제외하면[122] 그 어느 사관학교에도 다닌 적이 없다.
보통교육은 보통의 지식과 기능을 가르치며 특히 국민으로서의 성격을 함양하고 국어를 보급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普通敎育ハ普通ノ知識技能ヲ授ケ特ニ國民タルノ性格ヲ涵養シ國語ヲ普及スルコトヲ目的トス제1차 조선교육령(1911) 제5조
일본 우익들의 흔한 주장 중 하나가 식민통치 시절에 조선인들에게 한글 및 조선어를 교육했으므로 조선총독부가 한글을 보급한 셈이라는 선동인데, 이런 주장의 가장 큰 오류는 갑오개혁 이후 이미 조선/대한제국에 근대적 공교육 제도가 도입된 상태였다는 점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조선시대에도 식자를 할 수 있는 인구는 한글도 쓸 줄 알았다는 사실을 차치하더라도, 식민지화 이전에도 조선인들은 학교에서 한국어와 한글을 '국어'로 배웠다. 한일병합 이후 총독부는 조선인들에게 일본어를 국어로 보급하려 했으므로 병합 초기의 조선어 수업 시수는 국어(일본어)의 절반 수준이었다. 그 후에도 조선교육령의 개정에 따라 점진적으로 축소 되었으며, 1938년에는 선택과목으로 떨어졌고, 1943년에는 아예 조선어 교육이 금지되었다. 조선어 수업을 했던 것도 조선어 능력이 사회생활을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라, 조선어조차도 못하는 문맹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이 현실적으로 힘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조선어 수업을 제외한 다른 모든 수업은 일본어로 진행되었다. 예를들어 보통학교에서는 구구단을 일본어로 외우도록 교육했고, 고등보통학교의 지리나 역사 교과서에는 조선을 빼놓은 일본사와 일본지리만이 들어있었다.
일제강점기를 통해 대한민국과 북한에는 나이 한 살 차이만으로도 반말과 존댓말을 가르는(군대 기수문화의 영향) 등의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던 악습이 생성되거나 이미 존재하던 악습이 강화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조선의 악습의 경우 대부분이 동시대 대부분이 나라들이 가졌던 전근대적 신분제의 특성을 가졌기 때문에 타국에 비해 유별나지 않았다는 것이 한국-북한과의 차이점이다. 사실 대한민국의 악습들이 모두 일제에서 유입된 것은 아니나 조선시대에 이미 잔존했던 권위주의가 일제의 영향으로 기존에 없었던 요소까지 융합해 부정적인 시너지를 일으켜 악화되었다.
똥군기와 병영국가화 된 사회 분위기도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거기에 이 유산들은 군사독재와 결부되어 일제의 잔재가 더 좋지 못한 방향으로 발전하였고, 지금도 여기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123] 군대나 과거 교사가 몽둥이까지 쓰던 교육 분야의 똥군기는 확실히 일본에서 유래한 것이 크고, 과로를 숭상하며 위계적이던 직장 문화에도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으며, 선후배나 병원의 직위에 따른 똥군기의 논란이 있는 의료계 문화[124]의 경우에도 일제강점기에도 이미 '조선인은 원래 해부학적으로 야만인에 가깝다'고 교수가 학생에게 폭언을 하던 식의 문화가 있어 지금까지 그 문화의 잔재가 내려오고 있다. #
북한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일본의 안 좋은 유산이 꽤나 많이 남아 있다. 대표적으로 북한의 주체사상과 경제 체제는 천황제 파시즘과 일본 민족주의의 연장판이라는 견해인데 의외로 이영훈 교수가 이것에 동의하고 있다. 여기에 주제사상을 창시한 황장엽이 천황제를 많이 참고했다고 증언하면서 이에 대한 견해를 뒷받짐 해준다. 이런 한국과 북한의 악습은 일제를 제외하고는 동시대의 다른 나라에서조차 찾아보기 힘들다는 특성이 있다. 그나마 대한민국은 1987년 6월 민주항쟁을 통해 민주화가 되고, 고도의 경제성장과 함께 국력이 상승되면서, 과거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려고 시도하고 있으며, 호주제 폐지 등을 통해 어느 정도 성과를 보고 있다.
똥군기와 병영국가화 된 사회 분위기도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거기에 이 유산들은 군사독재와 결부되어 일제의 잔재가 더 좋지 못한 방향으로 발전하였고, 지금도 여기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123] 군대나 과거 교사가 몽둥이까지 쓰던 교육 분야의 똥군기는 확실히 일본에서 유래한 것이 크고, 과로를 숭상하며 위계적이던 직장 문화에도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으며, 선후배나 병원의 직위에 따른 똥군기의 논란이 있는 의료계 문화[124]의 경우에도 일제강점기에도 이미 '조선인은 원래 해부학적으로 야만인에 가깝다'고 교수가 학생에게 폭언을 하던 식의 문화가 있어 지금까지 그 문화의 잔재가 내려오고 있다. #
북한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일본의 안 좋은 유산이 꽤나 많이 남아 있다. 대표적으로 북한의 주체사상과 경제 체제는 천황제 파시즘과 일본 민족주의의 연장판이라는 견해인데 의외로 이영훈 교수가 이것에 동의하고 있다. 여기에 주제사상을 창시한 황장엽이 천황제를 많이 참고했다고 증언하면서 이에 대한 견해를 뒷받짐 해준다. 이런 한국과 북한의 악습은 일제를 제외하고는 동시대의 다른 나라에서조차 찾아보기 힘들다는 특성이 있다. 그나마 대한민국은 1987년 6월 민주항쟁을 통해 민주화가 되고, 고도의 경제성장과 함께 국력이 상승되면서, 과거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려고 시도하고 있으며, 호주제 폐지 등을 통해 어느 정도 성과를 보고 있다.
신분제가 법적으로 철폐된 것은 고종 시기인 1894년 갑오개혁 때이다. # 그럼에도 족보를 중심으로 뿌리내린 관습은 일제강점기에도 계속 이어졌고 신분이 사라졌다고 천민이었던 이들에게 먹고 살만한 새로운 일자리가 주어진 것도 아닌지라 대부분은 기존 지역의 유지들 믿에서 여전히 소작농 일을하며 살았다. 기존에 재산이 많은 양반들은 그들끼리 지주층을 형성하였고에 총독부 또한 조선내 일본인과 함께 핵심 계층으로서 이들의 편의를 많이 봐주었다. 소작농들의 반발에도 전근대적인 소작료가 계속 유지된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실제로 조선총독부는 천민들에 대한 사회적 차별과 냉대를 존속시켰다. 대표적으로 총독부는 새 호적을 만들면서 백정 출신을 호적에 도한으로 써 넣거나 붉은 점을 찍어 차별[125]하였다. 그래서 백정들은 학교를 다니려고 해도 입학이 거부되거나 중도에 학교를 그만두는 일도 많았다. 이에 백정들이 반발하여 일어난 운동이 형평 운동이다. 사실 천민 차별은 일본도 마찬가지라 일본에서도 수평 운동이 일어났다. 의외로 조선이나 일본이나 양반, 사무라이 같은 귀족 출신들[126][127]보다 평민들이 천민들에 대한 반발[128]이 특히 심했다. 조선에서도 그런 반발로 농민 같은 평민들에 의한 반형평 운동이 일어났는데, 1923년 5월 13일 형평사 창립축하식 다음날에 진주 지방의 농민 2,500명[129]은 바로 형평사 본부를 습격했다. 이런 반형평운동은 진주를 넘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평민들은 백정들에게 신분을 나타내는 모자인 ‘평량립’을 쓸 것을 강요했고 백정들에 대한 교육을 거부했다.
심지어 홍산사건으로 음식점에서 중국인이 시비를 붙은 형평사원을 폭행하자 평민들은 오히려 중국인에 동조하여 백정을 폭행하였다. 다른 예로, 1925년에 수천 명의 농민이 예천형평분사를 습격한 ‘예천사건'의 대응이 있다. 1925년 8월 9일 예천청년회장은 축사를 하던 중 다음과 같은 발언을 하면서 일어났다. “백정을 압박하는 것이 하등의 죄악이 될 것이 없다. 어느 시대·국가를 물론하고 국법이 있는 것이다. 그 국법을 어기다가 백정이 된 것이다. 그러니 백정을 압박하는 것이 결코 개인의 죄악이나 사회의 죄악이 아니다. 또 조선왕조 오백 년은 그와 같은 압박을 받았지마는 지금은 좋은 시대를 만나 형평 운동이 일어나기 전부터 칙령으로 차별을 철폐하였으니 형평사는 조직할 필요가 없다. 아무쪼록 돈을 많이 모아 공부만 잘하면 군수도 될 수 있다.” 평민들은 이 발언에 동조하여 형평운동이 필요없다며 형평분사를 공격하였다. 사건은 점점 확대되어 군중들이 형평사원의 집을 약탈하고 형평사원을 구타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일제는 자신들도 천민 출신들을 탄압[130][131]하고 있어서 그런지 백정에 대한 조선 평민들의 뿌리 깊은 차별의식을 더욱 부추겼는데, 형평 운동이 전국적으로 세력이 더 늘어나고 기관지 세광 등을 통하여 백정에 대한 인식을 바꾸려고 하자 발간 후 얼마 되지 않아 발매금지 처분을 내렸다. 그래도 일본과 달리 형평 운동에 동조하는 조선 양반들[132]이 점점 늘어나자 일제는 곧 제대로 된 형평운동 탄압에 나섰다. 일제는 1927년 ‘고려혁명당사건’과 1933년 ‘형평청년전위동맹사건’을 일으켰다.
일제강점기에는 조선인 천민은 물론이고 평민조차도 그러한 신분상승의 사례가 많지 않다. 기껏 상승해봤자 동네 이장이나 헌병 수준까지만 허락되었다. 홍사익과 같은 극소수의 신분상승 사례가 있긴 했으나, 당대 일본인들마저도 이를 경이로워하며 극히 이례적인 일로 여길 만큼 조선인의 신분상승은 여러 차별과 견제로 가로막혀 있었다.
실제로 조선총독부는 천민들에 대한 사회적 차별과 냉대를 존속시켰다. 대표적으로 총독부는 새 호적을 만들면서 백정 출신을 호적에 도한으로 써 넣거나 붉은 점을 찍어 차별[125]하였다. 그래서 백정들은 학교를 다니려고 해도 입학이 거부되거나 중도에 학교를 그만두는 일도 많았다. 이에 백정들이 반발하여 일어난 운동이 형평 운동이다. 사실 천민 차별은 일본도 마찬가지라 일본에서도 수평 운동이 일어났다. 의외로 조선이나 일본이나 양반, 사무라이 같은 귀족 출신들[126][127]보다 평민들이 천민들에 대한 반발[128]이 특히 심했다. 조선에서도 그런 반발로 농민 같은 평민들에 의한 반형평 운동이 일어났는데, 1923년 5월 13일 형평사 창립축하식 다음날에 진주 지방의 농민 2,500명[129]은 바로 형평사 본부를 습격했다. 이런 반형평운동은 진주를 넘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평민들은 백정들에게 신분을 나타내는 모자인 ‘평량립’을 쓸 것을 강요했고 백정들에 대한 교육을 거부했다.
심지어 홍산사건으로 음식점에서 중국인이 시비를 붙은 형평사원을 폭행하자 평민들은 오히려 중국인에 동조하여 백정을 폭행하였다. 다른 예로, 1925년에 수천 명의 농민이 예천형평분사를 습격한 ‘예천사건'의 대응이 있다. 1925년 8월 9일 예천청년회장은 축사를 하던 중 다음과 같은 발언을 하면서 일어났다. “백정을 압박하는 것이 하등의 죄악이 될 것이 없다. 어느 시대·국가를 물론하고 국법이 있는 것이다. 그 국법을 어기다가 백정이 된 것이다. 그러니 백정을 압박하는 것이 결코 개인의 죄악이나 사회의 죄악이 아니다. 또 조선왕조 오백 년은 그와 같은 압박을 받았지마는 지금은 좋은 시대를 만나 형평 운동이 일어나기 전부터 칙령으로 차별을 철폐하였으니 형평사는 조직할 필요가 없다. 아무쪼록 돈을 많이 모아 공부만 잘하면 군수도 될 수 있다.” 평민들은 이 발언에 동조하여 형평운동이 필요없다며 형평분사를 공격하였다. 사건은 점점 확대되어 군중들이 형평사원의 집을 약탈하고 형평사원을 구타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일제는 자신들도 천민 출신들을 탄압[130][131]하고 있어서 그런지 백정에 대한 조선 평민들의 뿌리 깊은 차별의식을 더욱 부추겼는데, 형평 운동이 전국적으로 세력이 더 늘어나고 기관지 세광 등을 통하여 백정에 대한 인식을 바꾸려고 하자 발간 후 얼마 되지 않아 발매금지 처분을 내렸다. 그래도 일본과 달리 형평 운동에 동조하는 조선 양반들[132]이 점점 늘어나자 일제는 곧 제대로 된 형평운동 탄압에 나섰다. 일제는 1927년 ‘고려혁명당사건’과 1933년 ‘형평청년전위동맹사건’을 일으켰다.
일제강점기에는 조선인 천민은 물론이고 평민조차도 그러한 신분상승의 사례가 많지 않다. 기껏 상승해봤자 동네 이장이나 헌병 수준까지만 허락되었다. 홍사익과 같은 극소수의 신분상승 사례가 있긴 했으나, 당대 일본인들마저도 이를 경이로워하며 극히 이례적인 일로 여길 만큼 조선인의 신분상승은 여러 차별과 견제로 가로막혀 있었다.
한국인은 일본이 한국을 통치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저항을 멈추지 않았다. 일본은 한국인의 풍습, 문화, 언어를 말살하려 했지만 민족적 자부심을 갖고 있었던 한국인은 굳은 결의로 야만적인 압제자에게 항거했다. 일본은 수많은 한국인을 죽였지만 그들의 혼은 결코 꺾지 못했다.
상기 3대 강국은 한국 인민의 노예 상태를 유념해 적절한 시기에 한국이 자유와 독립 상태가 될 것을 결의한다.연합국의 카이로 선언
어느 나라 역사에서건 전쟁, 점령기 도중 상대편에 부역한 자가 있는 건 다 마찬가지이다. 일부 부역자가 나왔다는 이유만으로 그것을 확대해석하여 전체가 동조하였다고 몰아가는 것은, 약소국을 탄압했던 제국주의 국가들과 세계 2차 대전을 일으켜 수많은 사상자가 나오게 만든 전범들에게 면죄부를 주는 어리석은 물타기성 주장에 불과하다. 이런 논리대로면 중일전쟁 중 일본에 부역한 중국인도 있다는 이유로 중국도 전쟁범죄에 동조했다거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같은 유대인 동포를 학살하는 나치의 부역자였던 존더코만도의 예를 들어 유대인도 전쟁범죄에 가담했으니 오늘날 유대인들은 독일에 책임을 물 자격이 없다는 논리가 성립된다. 자세한건 카포, 유대인 경찰, 만주국, 아우슈비츠 수용소 항목 참조, 더 나아가 나치 부역자, 매국노 항목에서 보듯이 부역자가 나온 국가들 중엔 연합국과 유럽국가 전부 나왔으니 연합국도 추축국에 책임을 물 수 없다는 더더욱 말도 안되는 논리가 나온다. 이외에도 일본이 규탄하는 중국이 지배하는 티베트와 위구르에서도 중국 인민해방군에 부역한# 사람이 존재한다. 즉 피지배민족을 지배하기 위해 부역자들을 내세운 모습들은 '당시 일제가 동시대 나치와 현 시대 중국과 비슷한 수준이라는 것을 증명하며 결국 부역자와 앞잡이의 존재는 피지배 민족에 대한 이간질과 동족상잔, 세뇌와 전쟁에 휘말리게 자행한 침략국의 책임을 선명하게 하는 것이지 책임을 면피하거나 호도하는 주장이 될 수 없다.
과거 한국을 현대화된 일본과 비교하는 것은 과거 일본을 현대화된 한국과 비교하는 것처럼 불공정한 것이다. 일본을 예로 들면 과거 페리 제독이 일본을 처음 방문했을 때 일본은 정치적으로, 도덕적으로, 물질적으로 한국보다 훨씬 못했다. 정치적으로 일본은 수많은 분국으로 쪼개져 서로 싸움을 일삼고 있었으나 한국은 중앙정부의 일원적인 통치를 받고 있었다.[136]
물질적으로 보더라도 당시 일본은 이렇다 할 도로나 건물, 위생시설이 거의 없었다. 그러던 일본이 변하게 된 것은 전국적으로 서구문명을 도입한 뒤부터였다. 한국도 만일 한국이 자신의 계획대로 추진해 나가도록 허용했다면 한국은 일본이 이룩한 것을 당연히 이루어냈을 것이다.이승만 뉴욕타임즈 사설, '한국인들은 일본인들보다 명백히 우수하다', 1919. 5. 18. http://syngmanrhee.kr/46/?q=YToyOntzOjEyOiJrZXl3b3JkX3R5cGUiO3M6MzoiYWxsIjtzOjQ6InBhZ2UiO2k6Njt9&bmode=view&idx=288952&t=board
일제강점기에 대해 비판적 평가 외에 여러 의견들이 나오고 있으나 학계 이외에서의 반응은 싸늘하고 학계[137]에서조차 쉽게 언급하기를 꺼리는 경우가 많다. 일단 소위 '객관적 시각'으로 나온 미국과 소련 측 기록이 한국의 의견 표출 및 판단을 막아 놓은 채 아직 영향력이 남아 있던 일본의 흑색선전과 편견에 의해 작성된 자료도 많아 정확한 분석을 어렵게 만드는 것도 있고[138] 반대로 한국 내에서 일제의 침략 행위에 가담하여 일제가 침공한 지역의 현지인이나 연합군 병사들을 앞장서서 착취하고 수탈한 행적을 '당시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라고 넘기며 민감한 화제를 덮으려 하기 급급한 상황이다.[139]
하지만 이들이 이런 류의 의견을 무시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시대적 배경, 기록들을 불순물 취급하고 소위 통계, 수학적 모델 등 숫자로 표현된수 있는 실증적 자료만 신빙성있는 자료로 판단하고 이에 몰두한 끝에 정치적 중립성마저 잃어버려 그들이 그렇게 외치는 '객관적 시각' 마저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한국의 민족주의를 비판한다면서 일본의 국가주의 및 민족주의 논리에 치우친 논리에 빠지다가 끝내 그들의 논리에 동조 하며 이를 ‘객관적 시각’, '합리적 판단', ‘냉철한 견해’라 주장하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뉴라이트 사관에 빠져버린 일부 노교수들이 그러하다.
윗 문단에서는 일본의 지배 과정에서 보통교육 확대는 부정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고, 실제로 보통학교가 전국적으로 증설된 점은 사실이다. 문제는 일본은 근대화의 필수과정이라 할 수 있는 의무교육을 시행하지 않았고 농부를 양성하기 위한 교육정책에 몰두했으며 3.1운동 이후 학교가 저항의 중심이라고 보고 보통학교 증설을 늦췄고 동시에 서당령으로 일본의 통제하에 두는 게 불가능한 서당들을 폐교처리했다는 것을 간과하고 있다. 광복 직후 조사한 문맹률[140]이 80%였을 정도로 높았다는 점과 초등학교에 해당하는 보통학교에서조차도 수업료를 납부하게 하고 있었다는 점 등 일제강점기 '보통교육'의 열악한 실상을 간과하거니와, 일본 제국이 시행한 '보통교육'이 중일전쟁 및 태평양전쟁과 맞물려 촉진된 내선일체라는 강제적인 동화 정책과 맞물려 시행되었음을 간과한다. 무려 35년 동안 문맹 하나조차 해결 못했으면서 교육 혜택이니 근대화니 운운하는 것 자체가 넌센스다. 즉 3차 조선교육령의 성과를 감안해서 일제강점기 조선의 교육을 평가한다 하더라도 '획기적 진전'이라 하기에는 낯간지러운 열악한 현실에 머물렀던대다, 급격하고 무리한 동화 교육 정책으로 인해 실제 교육 행정에 있어서 주먹구구식 행정이 난무했음은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1938년 3차 조선교육령이 반포되면서 보통학교를 급격히 확충하고 동시에 일선에서 조선어를 쓰는 것을 금지했다. 이것은 학교에서부터 빨리 일본어를 주입시키기 위해서였지 조선인들의 교육 기회를 보장하려는 목적은 당연히 아니었다.[141] 문맹률은 해방 직후에서 부터 문맹 퇴치 운동을 통해 급격히 떨어졌으며, 당시 한반도 인구에서 극소수를 차지하는 일본인들이 고등교육 과정으로 갈수록 절대다수를 점유하는 불공정한 모습을 보였음은 아무도 부정하지 않는다. 간단한 예로, 조선 내에서 공인된 정규 대학은 경성제국대학 단 하나뿐이었고 일본인, 친일파, 자본가와 지주 자제가 아니면 진학이 거의 불가능했다.[142] 보통학교가 늘었으니 교육은 확대되었다는 주장은 수박 겉 핥기식 주장일 뿐이다.
식민지배의 긍정적인 관점을 추가하자는 이들의 논지를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조선시대보단 낫지 않냐'는 것인데, 즉 이들이 비교하는 대상은 국권을 피탈당하지 않았지만 수십년 간 아무런 변화도 발전도 없이 1910년 이전의 상태에 머물러있는 가상의 조선이다. 하지만 당장 국권피탈 직전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조선-대한제국만 봐도 신분제 철폐, 근대 문물 및 제도의 도입 등 여러 변화가 진행되고 있었고, 정작 이들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이 주장하는 여러 변화와 발전 상당수는 이미 국권피탈 이전의 조선/대한제국에서 진행되었던 사안인 경우가 허다하다. 오히려 조선에도 없었던 현인신 숭배, 세습적 조선귀족 신분제의 도입 등은 명백히 퇴보라 할 수 있었다.
일제를 찬양하는 쪽의 배경적인 오해와 달리, 일본 제국은 자국민한테도 좋은 나라가 아니었으며, 근대 국가라는 배경에 걸맞지 않게 조선 시대와 비교해도 모든 면에서 월등히 좋았다고 보기 어렵다. 일본 제국은 세워질 때부터 영국 명예혁명, 프랑스 대혁명을 통해 세워진 인권 자유 민주주의 대신 성리학적 이념과 고대 중국의 군주주의 사상을 배경으로 했다. 대일본제국 헌법 같이 국가의 정치 시스템 또한 일본의 기념 이념은 헌법에 의해 지배되고 왕의 권력 또한 헌법보다 아래에 있었던 유럽의 근대 국가와 달리 헌법 자체가 군주의 권위 아래에 있었다.
일제강점기의 근간을 이루거나 긍정적으로 표현하는데 쓰여지는 논리들 상당수는 인종적 민족주의, 약육강식, 옥리엔탈리즘, 옥시덴탈리즘, 전체주의, 제국주의, 반서방, 유사역사학, 피해자 행세, 아시아주의, 중화사상[143] 등 그 자체로도 좋다고 볼 수도 없고 서로 맞지도 않고 특정 존재들을 위해 복종해야 한다는 결론을 위해 짜맞춘 모호하고 추상적인 내용들이며, 이런 논리들조차 기회주의적으로 사용하는 모습들을 보였다. 더 나아가 이 논리들로 일제강점기를 부정적으로만 보지 말자면 동시대 유럽의 제국주의, 티베트와 위구르를 지배하는 중국 제국주의들에도 우호적인 측면들을 찾아야 하지만 당대 일본은 물론이고 현재 일본도 이들을 비판적으로만 평가하는 것이 현 상태이며, 이 상태에서 굳이 일본에게만 유리한 부분들을 강조해야 할 이유는 없다.
흔히 말하는 혐중진영에서[144] 조공책봉 관계를 최대한 강조하여 어차피 한국은 역사적으로 중국의 속국이었는데 일본을 비난해야 하는가? 라고 주장하는데, 사실관계도 틀린 물타기다. 애초에 조공책봉관계에서 명나라, 청나라의 영향을 과장해봤자 조선이 중국과 분리된 외교권, 사법권, 행정권, 군사권을 가진 건 부정을 할 수가 없는 사실이며, 정말 중국의 식민지라고 볼 수 있는 한사군 설치도 한반도 북부 한정에 거의 1000년도 전의 일이다. 최대한 이전의 조선의 주권을 축소하고 비판한다 해도 주권 자체가 없는 일제강점기가 더 심하다는 결론에 이를 수밖에 없다.
조선의 중앙 행정은 총독의 독단(獨斷) 전제(專制)이다.
朝鮮に於ける中央行政は總督の獨斷專制である。일본 경제학자 야나이하라 다다오(矢内原忠雄)[145]
대한제국 시기 고종의 전제군주제 중심 근대화와 독립협회의 민권 중심 근대화 이론이 충돌하던 것에서 알 수 있듯, 당대의 한국인들은 새로운 서구적 질서 속에 한국이 걸어갈 길에 대해서 다양한 논의를 전개했다. 정상적인 상황이었다면 이러한 서로 다른 관점들이 정치적 공론장에 모여 의논하고 여론을 통해 현실정치에 영향을 끼치며 건설적인 결론을 도출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1904년 이래로 일제가 한국의 헤게모니를 장악하곤 통감부를 통해 한국의 정치적 의사결정을 일방적으로 좌지우지하는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한국인들은 그러한 정치참여의 기회를 40년 간 아예 박탈당하고 말았다. 국가의 개혁을 위해 국권의 피탈을 지향한 일진회같은 단체까지 등장했다는 사실이 당시의 극심한 정치적 혼란을 보여준다.
일단은 의병들의 계보를 이은 무장투쟁가들과 애국계몽운동을 추진한 개화세력을 주축으로 독립운동 세력이 구성되지만, 그들 내에서도 광복 후 조국의 지향점에 관해서는 의견이 분분했다. 비록 1919년 전후로 고종의 죽음과 함께 근황 세력이 소멸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탄생하며 난맥상이 어느 정도 정리되기는 했으나 임정과 다른 노선을 걷는 독립운동가들은 여전히 남았다. 1910년 이후 조선총독부의 전제적 식민통치에 놓인 조선 본토에서는 아예 독립이라는 단어조차도 함부로 꺼낼 수 없었기에 논의 자체가 불가능했다. 결국 '한국이 걸어가야 할 길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은 자그마치 수십 년 간이나 억눌려 있다가 해방된 이후에야 본격적으로 터져나올 수 있었다. 하지만 이마저도 미군정과 소련군정의 분할점령에 영향을 받으며 남북분단이라는 새로운 양상의 결렬 상태로 치닫고 말았다.
1912년에 공포된 조선형사령을 통해 형사 재판 제도가 개편되었다. 행정과 사법의 분리를 통한 전문주의, 몰(沒) 신분과 몰(沒) 친소의 평등주의, 죄형법정주의(罪刑法定主義), 증거주의, 일사부재리(一事不再理)의 원칙, 시효제도, 복심(覆審) 제도, 변호사 제도 등이 있다.
조선민사령이 적용한 일본 민법 제1조는 모든 사람을 사권(私權)의 주체로 공인하였다. 일본인뿐만 아니라 조선인, 기타 외국인도 마찬가지였다. 개인 또는 법인 간의 매매, 임대차, 고용과 같은 계약과 재산권 행사의 규칙을 정한 것이다.
1958년에 대한민국 민법이 제정되고 1960년에 시행되는데, 해방 전의 '조선민사령' 즉 일본의 민법과 내용상 큰 차이는 없다. 다만 민법안을 기초했고 초대 대법원장을 지낸 김병로(金炳魯)는 일본의 민법전과 민법학이 프랑스와 독일의 법을 이식한 것에 불과하며, 일본 고유의 것이 아니라고 답변했다.
일본 본토에서조차 사법체계의 전근대성은 극복되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민족말살통치시대 전시체제로 접어들수록 재산권 등 민법상의 권리들이 일본 본토에서도, 조선에서도 본격적으로 탄압받기 시작한다.
조선민사령이 적용한 일본 민법 제1조는 모든 사람을 사권(私權)의 주체로 공인하였다. 일본인뿐만 아니라 조선인, 기타 외국인도 마찬가지였다. 개인 또는 법인 간의 매매, 임대차, 고용과 같은 계약과 재산권 행사의 규칙을 정한 것이다.
1958년에 대한민국 민법이 제정되고 1960년에 시행되는데, 해방 전의 '조선민사령' 즉 일본의 민법과 내용상 큰 차이는 없다. 다만 민법안을 기초했고 초대 대법원장을 지낸 김병로(金炳魯)는 일본의 민법전과 민법학이 프랑스와 독일의 법을 이식한 것에 불과하며, 일본 고유의 것이 아니라고 답변했다.
일본 본토에서조차 사법체계의 전근대성은 극복되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민족말살통치시대 전시체제로 접어들수록 재산권 등 민법상의 권리들이 일본 본토에서도, 조선에서도 본격적으로 탄압받기 시작한다.
일제에 의해 근대적 경제 시설·기구·제도가 들어서고, 농업 성장을 중심으로 무역 확대와 산업고도화가 이루어졌으나, 사회 전반적으로 빈부의 격차가 매우 컸고, 경제전반에 걸쳐 일본에 종속된, 불완전하고 기형적인 구조를 가져왔다.[146]
남북의 공업 및 광공업 연평균 성장률[147] | 1914~1927 | 1928~1940 |
남한(공업) | 4.89% | 9.7% |
북한(공업) | 6.22% | 15.05% |
남한(광공업) | 4.87% | 9.34% |
북한(광공업) | 6.25% | 14.31% |
동국대학교 김낙년 교수[148]의 추계를 참고하면 1920년대 초반[149], 생산가액과 부가가치의 각각 과반이었던 농업이었던 반면 이후 공업이 급속도로 발달해감에 따라 1940년도에는 절반 이하까지 떨어지고, 공업이 30~40%, 광업이 10%에 못 미치게 되는 등 공업의 성장에 눈에 띄인다.
또한 쿠즈네츠가 권고한 경제성장률 3%를 넘김으로써 유의미한 성장을 한 것으로 보이며, 개항 이전 0.25%였던 것과 달리 인구증가율은 1%를 기록하여 적어도 사이먼 쿠즈네츠가 주장한 근대적 경제성장 요건까지는 갖춰진 것으로 보인다. 식민지 근대화론에 나와 있듯이 수치적으로 보면 아주 틀렸다고는 할 수 없긴 하다. 그러나 1940년 이후 일제의 전시경제정책과 해방 후 3년간의 혼란과 결정적으로 6.25 전쟁이 있었기에 '일제강점기의 경제유산'이 얼마나 이어졌는지는 의견이 분분하다.
당대 조선 산업의 대부분을 점유하던 농업 분야는 전근대적인 지주제가 해소되기보다는 더 강화되었다. 조선 농가의 소작지 면적은 1918년 50.4%, 1926년 50.7%였다. 소작지 면적은 이후 급상승해서 1932년에는 56%로 높아졌으며 중간계층이라 할 수 있는 자작농은 20년대 이후로 비중이 감소하기 시작했다.# 결론적으로 일제강점기의 한국의 농업은 근대 사회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농업 생산량의 증가를 찾아볼 수 없는 전근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아니 어떤 측면에서는 더욱 심각했는데 조선 시대 외거 노비의 소작료가 50%이고 세금을 면제 받은 것을 고려하면 당시 세금과 공출까지 감당 해야되었던 조선 소작농이 처한 현실은 세율 70%를 뜯기던 전국 시대 일본 농민과 하등 다를 바 없었다. 생산량이 늘어도 딱 숨만 쉴정도로 살려놓는 것이다. 이런 사회는 플랜테이션을 위시한 제국주의 식민지의 평균적인 모습이었으며 이것이 해결된 것은 독립 직후 이루어진 농지개혁법 그리고 한국전쟁으로 지주와 양반이 나란히 갈려나간 이후였다.
일본 제국 본토와 식민지 공업 지대에 값싼 식량을 공급하기 위해 산미증식계획 등의 쌀 중심의 증산 정책을 채택하고 지주제를 강화했다. 그러나 조선 농촌의 홍수와 가뭄 등 자연재해를 대비하는 데 실패했고, 경제대공황 등의 경제위기에도 대처하지 못했다. 이로 인해 매년 수많은 농민이 몰락해 농촌을 떠났다. 이들 중 경성 등의 주요 도시에 유입된 자들과 산으로 유입된 자 중 일부가 특정한 군집을 이루기 시작하면서, 각기 토막민과 화전민으로 불리게 되었다.
1920년대 일본에서는 일반적으로 월수입 20원 이하인 자를 빈민으로 간주했는데, 1930년 조선총독부 자료에 따르면 '소작농'의 연간 수입은 205원, ‘세농’은 12원이었다. 당시 소작농 가구가 약 150만 가구에 이르고 있음을 감안한다면 곡창지대인 전라도의 농민 가운데 절반 정도가 빈민의 범주에 포함되었을 것이고 조선인의 절대 다수는 사실상 빈민으로 분류된다 할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일련의 혼란으로 지주가 사라진 점이 한국의 민주화와 급격한 경제성장이 가능케 한 원인 중 하나로 꼽히고는 하는데 현대의 필리핀, 인도등 대부분의 독립 국가들은 식민지 시대부터 이어진 지역 유지 가문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으며 아직까지도 지역내 정치적 입김이 상당하다. 여기다 소작농의 투표에 자신의 영향 반영하게 압박하면서 민주적 선거를 방해하기 때문이다.


일본 제국 본토와 식민지 공업 지대에 값싼 식량을 공급하기 위해 산미증식계획 등의 쌀 중심의 증산 정책을 채택하고 지주제를 강화했다. 그러나 조선 농촌의 홍수와 가뭄 등 자연재해를 대비하는 데 실패했고, 경제대공황 등의 경제위기에도 대처하지 못했다. 이로 인해 매년 수많은 농민이 몰락해 농촌을 떠났다. 이들 중 경성 등의 주요 도시에 유입된 자들과 산으로 유입된 자 중 일부가 특정한 군집을 이루기 시작하면서, 각기 토막민과 화전민으로 불리게 되었다.
1920년대 일본에서는 일반적으로 월수입 20원 이하인 자를 빈민으로 간주했는데, 1930년 조선총독부 자료에 따르면 '소작농'의 연간 수입은 205원, ‘세농’은 12원이었다. 당시 소작농 가구가 약 150만 가구에 이르고 있음을 감안한다면 곡창지대인 전라도의 농민 가운데 절반 정도가 빈민의 범주에 포함되었을 것이고 조선인의 절대 다수는 사실상 빈민으로 분류된다 할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일련의 혼란으로 지주가 사라진 점이 한국의 민주화와 급격한 경제성장이 가능케 한 원인 중 하나로 꼽히고는 하는데 현대의 필리핀, 인도등 대부분의 독립 국가들은 식민지 시대부터 이어진 지역 유지 가문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으며 아직까지도 지역내 정치적 입김이 상당하다. 여기다 소작농의 투표에 자신의 영향 반영하게 압박하면서 민주적 선거를 방해하기 때문이다.

일부 기업 상당 수는 전범기업, 적산불하기업 과도 겹친다. 대중들에게 많이 알려진 기업들은 아래와 같다. 광복이후 한반도에서 대부분 철수 하거나, 국내 기업들과 기술제휴 형식으로 리메이크된 상품들이 한국에 출시되기도 한다. 이후 적산으로 된 곳도 있다.
- 유통 - 미츠코시 백화점(三越 百貨店)
- 금융, 중화학공업, 전기전자통신 - 미쓰비시 그룹(三菱グループ)
- 미쓰비시제철(三菱製鐵)
- 방송 - 경성방송국(京城放送局, JODK)
- 철도차량 - 일본차량제조(니혼샤료, 日本車輌製造)
- 철도차량 - 히타치제작소(日立製作所)
- 부동산업, 원자재 - 동양척식주식회사(東洋拓殖株式會社)
- 제지 - 오지제지(王子製紙)
- 시멘트 - 오노다(小野田)시멘트[152]
- 의약 - 모리시타인단(森下仁丹)
- 의약, 식료품 - 아지노모도(味の素)
- 의약 - 류카쿠산(龍角散)
- 식료품 - 다이니혼제당(大日本製糖)[154]
- 식료품 - 메이지(Meiji,明治)
- 식료품 - 모리나가 제과(森永製菓)
- 식료품 - 기린맥주(麒麟麦酒(キリンビール)株式会社)
- 타이어 - 브리지스톤(株式会社ブリヂストン)
- 생활화학제품 - 라이온
통감부가 들어선 이후 일확천금을 노린 일본인들은 한반도의 고분들을 상대로 경주와 개성을 중심으로 고분 도굴을 자행했다. 그들은 무리를 짓고 버젓이 고분들을 파헤쳤는데 특히 개성은 고려왕조 오백 년의 도읍인 까닭에 왕릉을 비롯해 고대 고분들이 집중되어 있었고 더욱이 이 고분들은 모두 그 후손들이 대를 이어 수호하고 있었던 무덤들이었다. 그렇기에 분형뿐 아니라 내부의 시설에서 고려자기 같은 부장품은 거의 틀림없이 보존되어 있었는데 고려 청자는 과거의 명성 덕에 일본인들이 열광적으로 수집하던 유물이었다. 특히 1대 통감인 이토 히로부미가 이것을 열광적으로 수집한바 있다. 그런데 이 고분들을 마구 파헤치고 그 속의 부장품들을 약탈하는 만행이 버젓이 행해진 것이었다. 일본 도굴꾼들의 도굴 과정을 목격한 조선인들은, 그들이 대략 마차 10대 분량의 부장품들을 싣고 갔다는 것을 목격했다고 한다. 상상도 안 될 정도의 규모의 유물들이 도굴당한 것이다.
이러한 모습을 지켜본 안중근 의사는 그의 자서전에 "일본의 침략이 마침내 우리 선조의 백골에 이르렀다."고 개탄했다. 고려청자들은 국내에 있는 수량의 배 이상이 일본에 있다고 추측되며 현재 한국의 국보급 유물 중 일정 부분은 일본의 도굴꾼들이 경매에 내놓은 것을 조선인이 구매하거나 개인적으로 그러한 유물을 소장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가서 구매한 것이다.[155]
현재에 이르러서는 정확히 어떤 고분들이 파헤쳐졌는지 어떤 유물들을 가져갔는지 파악이 안 되고 있다. 한예로 가루베 지온 처럼 유네스코 유산에 포함된 고분 까지 싹 털어간 인간도 있다. 이때문에 일본 제국이 태평양 전쟁에서 진 뒤 문화재 협정을 체결했지만, 강제성이 없기 때문에 대다수는 한국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만일 일본인들이 도굴을 저지르지 않았다면 국보들이 상당수 추가되었을 것이다.
비단 유물들 뿐만 아니라, 건축물 또한 훼손되거나 헐리는 등 피해를 입은 곳이 많다. 대표적인 것은 한양 도성 내 궁궐들인데, 경복궁의 경우 심각한 수준으로 전각들이 팔리고 헐려나갔다. 경복궁에서 과거 형태를 보존하고 있는 건물은 근정전, 근정문, 경회루 등 몇 채 되지 않으며, 광화문은 엉뚱한 곳으로 이전되었다. 또, 궁궐을 행사장으로 활용하며 이런저런 행사를 개최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궁궐 전면부를 통째로 밀어버리고 조선총독부 청사를 짓는 지경에 이르렀다. 현재 경복궁 내에 듬성듬성 있는 녹지는 대부분 사라진 전각들의 터라고 보아도 될 정도이다. 창경궁의 경우에는 궁궐 부지 내부에 창경원이라는 동물원이 들어섰고, 덕수궁의 경우 화재 사건 이후 가뜩이나 줄어든 전각들이 일제강점기 들어 또다시 훼손되었다. 또한, 창경궁과 종묘는 서로 가까이 연결되어 있었는데, 순종이 사망하자마자 '종묘 관통 도로'(現 율곡로)를 개통했다. 순종이 생전에 완강히 반대했던 것을 그가 사망하니 '옳다구나' 하고 착공해버린 것이다. 결국 두 건물 사이가 끊겨버렸고, 이러한 형태는 2022년 율곡로가 지하 차도로 바뀔 때까지 계속되었다.
사회 전반적으로 문화가 변화하기도 했다. 도시 지역에서는 본격적으로 20세기의 풍물들이 유입되기 시작했다. 영화, 극장 등 문화예술 분야의 활동이 점차 늘어났으며, 그외 자전거, 정구(테니스) 등의 스포츠, 라디오의 본격적인 유입 등 구한말부터 시작된 서구 문화의 유입이 활발하게 시작된 것이 이 시기 부터이다. 문학분야에서는 항일 정신을 담은 작품들, 친일 정신을 담은 작품 등 다양한 작품들이 나타났으며 현대한국문학이라고 부를 수 있는 작품들이 이 시기부터 시작되었다. 또한, 배달 문화의 발달로 설렁탕이 인기를 끌고, 대만에서 수입된 설탕[156]이나 아지노모토같은 새로운 조미료가 인기를 끄는 등 식문화의 변화도 나타났다.
이런 문화들은 주로 친일파, 경제적 여유를 가진 이들이 누렸지만, 완벽히 이들의 전유물이었던 것만은 아니다. 도시 지역의 중산층은 어느 정도 이런 변화를 누릴 수 있었으며, 대표적인 것이 1926년 나운규가 제작한 영화 아리랑이다. 이런 문화들이 오직 친일파, 상류층들의 전유물이었다면, 반일적인 주제를 담고 있는 이 영화가 흥행에 성공하는 일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변화는 주로 대도시를 중심으로 일어났으며, 진정하게 조선을 위한 근대화가 아니었기 때문에 시골 지역은 이런 변화를 거의 겪지 않았으며, 이들의 생활은 구한말 조선의 상황과 비교해도 변화가 없거나 적었다.
이러한 모습을 지켜본 안중근 의사는 그의 자서전에 "일본의 침략이 마침내 우리 선조의 백골에 이르렀다."고 개탄했다. 고려청자들은 국내에 있는 수량의 배 이상이 일본에 있다고 추측되며 현재 한국의 국보급 유물 중 일정 부분은 일본의 도굴꾼들이 경매에 내놓은 것을 조선인이 구매하거나 개인적으로 그러한 유물을 소장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가서 구매한 것이다.[155]
현재에 이르러서는 정확히 어떤 고분들이 파헤쳐졌는지 어떤 유물들을 가져갔는지 파악이 안 되고 있다. 한예로 가루베 지온 처럼 유네스코 유산에 포함된 고분 까지 싹 털어간 인간도 있다. 이때문에 일본 제국이 태평양 전쟁에서 진 뒤 문화재 협정을 체결했지만, 강제성이 없기 때문에 대다수는 한국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만일 일본인들이 도굴을 저지르지 않았다면 국보들이 상당수 추가되었을 것이다.
비단 유물들 뿐만 아니라, 건축물 또한 훼손되거나 헐리는 등 피해를 입은 곳이 많다. 대표적인 것은 한양 도성 내 궁궐들인데, 경복궁의 경우 심각한 수준으로 전각들이 팔리고 헐려나갔다. 경복궁에서 과거 형태를 보존하고 있는 건물은 근정전, 근정문, 경회루 등 몇 채 되지 않으며, 광화문은 엉뚱한 곳으로 이전되었다. 또, 궁궐을 행사장으로 활용하며 이런저런 행사를 개최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궁궐 전면부를 통째로 밀어버리고 조선총독부 청사를 짓는 지경에 이르렀다. 현재 경복궁 내에 듬성듬성 있는 녹지는 대부분 사라진 전각들의 터라고 보아도 될 정도이다. 창경궁의 경우에는 궁궐 부지 내부에 창경원이라는 동물원이 들어섰고, 덕수궁의 경우 화재 사건 이후 가뜩이나 줄어든 전각들이 일제강점기 들어 또다시 훼손되었다. 또한, 창경궁과 종묘는 서로 가까이 연결되어 있었는데, 순종이 사망하자마자 '종묘 관통 도로'(現 율곡로)를 개통했다. 순종이 생전에 완강히 반대했던 것을 그가 사망하니 '옳다구나' 하고 착공해버린 것이다. 결국 두 건물 사이가 끊겨버렸고, 이러한 형태는 2022년 율곡로가 지하 차도로 바뀔 때까지 계속되었다.
사회 전반적으로 문화가 변화하기도 했다. 도시 지역에서는 본격적으로 20세기의 풍물들이 유입되기 시작했다. 영화, 극장 등 문화예술 분야의 활동이 점차 늘어났으며, 그외 자전거, 정구(테니스) 등의 스포츠, 라디오의 본격적인 유입 등 구한말부터 시작된 서구 문화의 유입이 활발하게 시작된 것이 이 시기 부터이다. 문학분야에서는 항일 정신을 담은 작품들, 친일 정신을 담은 작품 등 다양한 작품들이 나타났으며 현대한국문학이라고 부를 수 있는 작품들이 이 시기부터 시작되었다. 또한, 배달 문화의 발달로 설렁탕이 인기를 끌고, 대만에서 수입된 설탕[156]이나 아지노모토같은 새로운 조미료가 인기를 끄는 등 식문화의 변화도 나타났다.
이런 문화들은 주로 친일파, 경제적 여유를 가진 이들이 누렸지만, 완벽히 이들의 전유물이었던 것만은 아니다. 도시 지역의 중산층은 어느 정도 이런 변화를 누릴 수 있었으며, 대표적인 것이 1926년 나운규가 제작한 영화 아리랑이다. 이런 문화들이 오직 친일파, 상류층들의 전유물이었다면, 반일적인 주제를 담고 있는 이 영화가 흥행에 성공하는 일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변화는 주로 대도시를 중심으로 일어났으며, 진정하게 조선을 위한 근대화가 아니었기 때문에 시골 지역은 이런 변화를 거의 겪지 않았으며, 이들의 생활은 구한말 조선의 상황과 비교해도 변화가 없거나 적었다.
수십년간의 식민 통치를 거치며 당시 한국인의 언어생활에는 상당 부분 일본어가 흡수되어 있었다. 이는 일본에서 재일 교포들이 사용하는 재일 한국어의 형태로 남아있으며, 대한민국에서도 해방 이후의 일상어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러한 영향은 의무교육의 보편화와 언어 순화 운동, 세대의 교체를 거치며 많이 사라지기는 했으나, 2000년대 현재까지도 한국어의 외래어/일본어, 일본식 한자어, 현장 용어, 경마 용어로 흔적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일본어 잔재설 문서를 참조.
1914년 오사카 태생으로 25살에 조선 남성과 결혼을 계기로 조선에 와서 해방 후 한국이 된 이후에도 살다가 2004년에 타계한 카도노 하루코 할머니의 동영상#이 남아있다. 이와 비슷한 대화는 드라마 파친코(드라마)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당대 시대상을 반영하여 오사카로 이주한 조선인 역 주인공들이 한국어-일본어 코드 믹싱과 코드 스위칭을 수시로 하는 모습이 작중에서 여러 차례 등장한다.
당시 일본어를 혼용했던 조선인 뿐만 아니라 조선내에 거주하고 있던 일본인이나, 조선에서 태어난 일본인 국적자 역시 이러한 언어적 피진이나 언어적 교류를 겪었기에 일본인임에도 조선어를 유창하게 하거나 심지어 조선출생의 일본인이 조선어를 거의 모국어로 인지했던 일본인들 역시 존재했다. 해방 이후 일본으로 돌아간 조선내 일본인들이 일본문화를 잘 모르거나 일본어가 어눌하다는 이유로 같은 일본인 임에도 차별 받았다는 기록마저 있을정도, 자세한것은 히키아게샤 문서 참조.
1914년 오사카 태생으로 25살에 조선 남성과 결혼을 계기로 조선에 와서 해방 후 한국이 된 이후에도 살다가 2004년에 타계한 카도노 하루코 할머니의 동영상#이 남아있다. 이와 비슷한 대화는 드라마 파친코(드라마)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당대 시대상을 반영하여 오사카로 이주한 조선인 역 주인공들이 한국어-일본어 코드 믹싱과 코드 스위칭을 수시로 하는 모습이 작중에서 여러 차례 등장한다.
당시 일본어를 혼용했던 조선인 뿐만 아니라 조선내에 거주하고 있던 일본인이나, 조선에서 태어난 일본인 국적자 역시 이러한 언어적 피진이나 언어적 교류를 겪었기에 일본인임에도 조선어를 유창하게 하거나 심지어 조선출생의 일본인이 조선어를 거의 모국어로 인지했던 일본인들 역시 존재했다. 해방 이후 일본으로 돌아간 조선내 일본인들이 일본문화를 잘 모르거나 일본어가 어눌하다는 이유로 같은 일본인 임에도 차별 받았다는 기록마저 있을정도, 자세한것은 히키아게샤 문서 참조.
"자네처럼 마케오시미 츠요이[157] 한 사람두 없을 걸세, 못추면 그냥 못 춘대지."이태준, 《패강랭》 中
사이상(崔さん, 최 씨), 오늘은 웬일이슈? 그러지 말구, 우리, 쟌쟝 사왕이[158]마쇼우요(じゃんじゃん騷(ぎ)ましょうよ, 걸지게 한번 놀아 봅시다)박태원, 《천변풍경》 中
"긴상(이상도 사실은 긴상[159]이다), 참 오래간만이슈. 건데 긴상 꼭 긴상 한번 만나 뵙자는 사람이 하나 있는데 긴상 어떡허시려우."
"거 누군구? 여자야? 남자야?"
"여자니까 일이 재미있지 않느냐 그런 말야."
"여자라?"
"긴상 옛날 옥상(奥さん, 아내)"이상, 《봉별기》 中
위의 문장들은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에 등장하는 사례이다.
광복 직후의 소설에서도 등장한다.
조석 때면 내 아내가 내게 들리라고 큰 소리로, "김구 밥 가져 왔어요." 하고 소리치는 것이 들리나 그때마다 왜놈이,
"깅가메 나쁜 말이 했소데. 사시이래(差入, 차입) 일이 오브소다."[번역]
하고 물리치는 소리가 들렸다. '깅가메'라는 것은 왜놈들이 부르는 내 별명이다.
위 문장은 역으로 한국어를 어설프게 배운 일본인이 구사하는 사례이다. 깅가메는 김구(金龜)의 음독, '했소데'는 '했소'+で(~해서; ~라서)', 사시이래는 교도소의 차입을 뜻하며 '오브소'는 '없소'를 뜻한다.
모시모시 아 모시모시(もしもし あ もしもし, 여보세요? 아 여보세요?)
(중략)
끊지 말어요~ 죠 죠 죠 죠또마떼(ちょ, ちょ, ちょ, ちょっと待て, 자 자 자 잠깐만 기다려)
1938년 발표된 만요(노래)에서도 쓰인다.
말한마듸 서로 주고바들때보면 朝鮮말, 日本말, 英語가 한데석겨 뒤범벅이되여 나온다. 그甚한例를 몇가지參考로 引用한다.
"얘, 정숙인 이번 니찌요비 겟곤 한다는데 아주 스바라시이 헌옷감이만트라" "정숙이가 아바다(곰보)인데도 신랑이 오·케 했다지?" "신랑이 호레루 한게 아니라 정숙이가 호레루 했대" "나루호도 새로운 뉴ー슨데"이것은 筆者가 最近에 어떤 女子生들이 街頭에서서 주고받든會話에 一節을 寫生한것이다 또 一例를 引用한다.
"어이 기미기미 가께우동 한턱 내라" "이자식아 해부노다" "나두, 쨍기네ー트다" "얘, 너 곤사이스 에이와지덴 후루혼야에가 파러서 젠사이 사먹자!"이것은 十七, 八歲의中學生들이 下宿房에서 하는 對話의 一節을 따온것이다.엄흥섭, <언어교육론> 中
위 내용은 1948년 엄흥섭이 거리에서 학생들이 나눈 대화 내용을 채록한 것이다. 이 글에서 엄흥섭이 문제 삼고 있는 것은 해방 3년이 되었어도 "朝鮮(조선)말, 日本(일본)말, 英語(영어)가 한데석겨 뒤범벅이되여 나오"는 현실이다.
말 한마디 서로 주고받을 때 보면 한국말, 일본말, 영어가 한데 섞여 뒤범벅이 되어 나온다. 그 심한 예시를 몇 가지 참고하여 인용한다.
"얘, 정숙인 이번 일요일 결혼 한다는데 아주 괜찮은[162] 옷감이 많더라" "정숙이가 곰보인데도 신랑이 OK했다지?" "신랑이 반한 게 아니라 정숙이가 반했대" "그렇군, 새로운 뉴스인데"이것은 필자가 최근 여학생들이 가두에 서서 주고받았던 회화의 한마디를 사생[163]한 것이다. 또 한 가지 예시를 인용한다.
"어이 너 너 가케우동 한턱 내라" "이 자식아 '해브 노(Have No)'다" "나도, '졘기 녜트(деньги нет)'[164]다" "얘, 너 콘사이스[165] 영일사전 헌책방에다 팔아서 단팥죽(ぜんざい) 사먹자!"이것은 17, 8세의 중학생[166]들이 하숙방에서 하는 대화의 한 마디를 따온 것이다.
일본 군부는 1944년 후반에 이미 패전이 불가피하다고 예측했다. 일본은 패망하더라도 한반도에 소련을 불러들여 소련과 미국의 대립 구도를 만들고 그 틈에서 재기의 발판을 마련하고자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든 소련이 한반도에 진입할 때까지 버티는 것이 필요했다. 이런 내용은 종전 전략을 담당한 해군 소장 다카기 소키치가 작성한 1945년 3월 종전 전략 보고서에도 나타난다. 소련을 개입시켜 미국이 혼자서 소련에 대응할 수 없다고 판단될 때만이, 일본의 가치를 미국이 인정할 것이고 그 길만이 일본이 다시 살아날 수 있는 유일한 방도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래서 미국으로부터 일본 본토 공격(원자폭탄 공격 포함)을 받더라도 끈질기게 버티다가, 소련이 한반도에 침투한 이후에 항복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일본의 이런 생존전략은 우리의 남북분단, 6·25전쟁으로 인한 수많은 인명피해, 민족분단의 비극을 발판으로 하는 것이다.
1945년 8월 6일 일본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되자, 소련은 8월 8일 일본을 상대로 선전포고하고 움직였다. 소련군은 총 한 방 쏘지 않고 함경북도 웅기에 상륙했다. 일본군은 ‘소련군이 1리 전진하면 일본군은 2리 퇴각하라’고 명령했다. 8월 9일 새벽 소련군의 침공이 시작된 지 30시간 만에 일본은 항복했다. 고노에 후미마로 수상은 “신이 일본에게 내려준 소련의 참전이라는 선물”로 이제 일본은 전쟁을 편히 마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했다.
일본은 패망하고도 소련을 견제해야 하는 미국이 패전국 일본을 가혹하게 지배할 수 없는 조건을 만들어냈다. 일본은 독일에 가해졌던 천문학적인 전쟁 배상금을 부과받지도 않았다. 일본 전략가들의 소원대로 한반도의 북쪽에는 소련이, 남쪽에는 미군이 주둔하여 결국 6·25전쟁까지 발발했다. 한국 전쟁이라는 로또복권을 유도한 일본은 6.25 전쟁에 군수물자를 납품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 패망의 손실을 간단히 회복했다. 요시다 시게루 수상은 노골적으로 제1차 세계대전의 승자 일본보다, 제2차 세계대전의 패자 일본이 더 낫다고 말했다. 일본은 패망했지만 생존하고 재건된 것이다.#
일본인이 자행한 범죄 행위는 이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일본은 55년간 남북의 허리를 잘라 놓은 민족 분단에도 ‘의도적이고 구체적으로’ 개입했다.
일본의 군국주의 세력이 태평양전쟁에서 패배해 한반도에서 물러나는 바로 그 순간까지 ‘대동아 공영’의 훗날을 기약하며 한반도 분할을 상정하고, 이를 위해 기민하게 움직였다는 사실을 입증한 역사학 논문 한편을 찾아냈다.논문의 필자는 고시로 유키코(小代有希子)교수. 미국에서 활동하는 동아시아사 전공자이자, 1999년에 출간된 <범태평양 인종주의와 미국의 일본 점령(Trans-Pacific Racisms and the U.S. Occupation of Japan>으로 ‘오히라 저작상’까지 수상한 바 있는 역사학자다. 오히라 저작상은 한·일 수교 당시 ‘김종필·오히라 각서’ 작성의 당사자이자 1978년부터 1980년까지 일본 총리를 지낸 오히라 마사요시(大平正芳)를 기리기 위해 제정한 학술상이다. 아시아 태평양 지역 국제 관계 분야에 두드러진 연구 업적을 남긴 연구자에게 수여되며 국제적으로 그 권위를 인정받고 있다.
한반도 분단이 일본의 치밀한 ‘항복 전술’의 산물이었다는 사실을 밝힌 논문은 <유라시아의 쇠퇴: 일본의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전략(Eurasian Eclipse:Japan’s End Game in World War Ⅱ)>으로, 지난해 4월 미국 역사학회가 발행하는 격월간 학술지 <미국 역사 학보> (제109호 2회)에 발표되었다.
베이츠 칼리지의 일본계 미국인 고시로 유키코(小代有希子)교수에 의하면, 한반도에 소련군을 끌어들인 것 자체가 일본의 의도였다고 한다. 이 주장에 따르면 북한 정권의 성립과 6.25 전쟁 자체가 일본이 의도적으로 촉발했다는 것이다. 이 논문대로라면 현재 남북한의 분단으로 인한 내전과 독재정권의 성립 또한 일본의 책임이 된다.
1945년, 일제의 항복으로 인해 한반도는 해방되었으나 한반도 북쪽은 김일성의 독재와 함께 공산화되었고, 남쪽 역시 북한과 마찬가지로 친일파 청산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한국 전쟁과 군사정권까지 거친 결과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지 못해 남북한 모두에게 악영향을 끼쳤으며 일제의 잔재는 아직까지 사회 곳곳에 남아 있다. 일단 남북한 모두 공통적으로 군사문화가 뿌리 깊게 박혔다. 이는 1987년 민주화 이후로 많이 개선되었지만, 사회 전반적으로 서열주의 문화가 남아 있는 것과 군 내부에 아직까지 병영부조리가 있는 것[167] 역시 일제강점기의 잔재가 그대로 지금까지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의 악영향이 남한보다 북한이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여기는 김일성 독재와 주체사상으로 인해 오히려 일제의 잔재가 좋지 않은 쪽으로 더 심화되었기 때문이다. 김일성은 일제강점기 당시 사회 문제가 된 친일파나 지주에 대한 증오를 부추기고, 누명까지 씌워 해방 정국에 숙청을 감행했으나, 정작 친일파 중에서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한 인물은 그대로 기용했다.[168] 거기에 김일성은 일제강점기와 한국 전쟁으로 인해 주민들이 외세의 침략에 대한 트라우마가 생겼다는 점을 악용해 주체사상과 김씨 세습에 대한 정당성을 확보했다.[169] 그러고서 80년대 이후에는 김일성 가문의 초상화를 일본 제국에서 천황의 어진을 숭배하듯이 그대로 아끼도록 했다. 이로 인해 일제처럼 북한도 김부자 초상화를 구하다 숨진 사람들이 영웅으로 우대가 되는 폐해가 일어났다.
분단 그 자체부터 일본의 강점으로 일어났다는 시각도 있다.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였기에 그 처리과정에서 분할이 논의된 것으로, 그렇지 않았다면 연합국 사이에서 아예 분할 자체가 논의가 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일제는 패전 직전까지 시간을 끌어 소련을 참전하게 하였고 그 결과 옛 조선의 영토는 소련과 미국이 점령하게 되어 분리되었다는 것이다. 이 강대국들은 자신의 이익을 대변하는 지도자를 선호하여 통일 국가를 만드는 것을 어렵게 하였고, 통일된 민족국가를 만들 역량이 쇠약해져 오스트리아 같이 합의하 통일도 이끌어내지도 못하고 전쟁까지 나는 사건에도 일정 부분 영향을 끼치게 된다.#
심지어 브루스 커밍스는 한국전쟁 자체부터가 북한이 아닌 일본의 책임이라고 주장하였다.# 북한에서 (비록 결함은 있을지언정) 친일파를 어느 정도는 숙청했지만 남한에서는 거의 그대로 기용했는데, 이것이 전쟁의 발단이 되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배하지 않았더라면 오랜 중앙집권 역사를 고려하면 분단도 없었을 것이고 당연히 한국전쟁도 있을리가 없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결국 일본은 한국전쟁 발발에도 책임이 있다고 볼 수 있다.
한국인들의 국가 운영 참여 경험이 무려 반세기 가까이 차단되었으며, 그 중에서도 본격적인 근대 국가 운영 경험은 아예 제로였던 점이 엄청난 악영향을 미쳤다. 이로 인해 광복 당시 한반도의 정치인이란 사람들은 하나같이 운동가에서 정식 정치인으로 변신한 것이지 제대로 된 정치적 경험과 경륜을 갖추지 못한 상태였고, 계파와 정파 간 협상과 논의를 통해 결론을 도출하는 제도권 정치에 매우 미숙했으며, 여기에서 해방공간의 온갖 비극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원래 독재국가였던 소련과 중화인민공화국의 영향을 받은 북한은 말할것도 없고, 심지어 미국에서 정식으로 역사, 정치학을 공부하고 미국 민주주의를 직접 보고 왔다는 이승만 같은 이들도 극단주의의 영향을 받아 온갖 테러와 독재 행각을 일삼기도 했다.[170]
정작 일본은 일본 제국 패망 이후로 미국에 의해 민주주의가 도입되며 징병제 등 군사주의를 표면적으로나마 청산하고 6.25 전쟁 등을 통한 특수로 경제가 발전하고 생활수준이 높아졌지만 진정성 있는 역사교육의 부재로 일본 제국이 남북한에 어떤 악영향을 끼쳤는지조차 모르고 있다. 도리어 남북한의 분단과 군사주의로 인한 악습을 조선시대 유교의 영향, 당파성론 등 식민사관의 논리로 오해하며 민족성 자체가 미개하기에 생겨나는 문제로 여기고 일반화하여 비하하는 경우도 있다.[171] 다만 일제의 군사주의 문화를 경험한 일본 노년층이나 중장년층 일부는 이해하거나 동감하는 경우도 있다.
베이츠 칼리지의 일본계 미국인 고시로 유키코(小代有希子)교수에 의하면, 한반도에 소련군을 끌어들인 것 자체가 일본의 의도였다고 한다. 이 주장에 따르면 북한 정권의 성립과 6.25 전쟁 자체가 일본이 의도적으로 촉발했다는 것이다. 이 논문대로라면 현재 남북한의 분단으로 인한 내전과 독재정권의 성립 또한 일본의 책임이 된다.
1945년, 일제의 항복으로 인해 한반도는 해방되었으나 한반도 북쪽은 김일성의 독재와 함께 공산화되었고, 남쪽 역시 북한과 마찬가지로 친일파 청산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한국 전쟁과 군사정권까지 거친 결과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지 못해 남북한 모두에게 악영향을 끼쳤으며 일제의 잔재는 아직까지 사회 곳곳에 남아 있다. 일단 남북한 모두 공통적으로 군사문화가 뿌리 깊게 박혔다. 이는 1987년 민주화 이후로 많이 개선되었지만, 사회 전반적으로 서열주의 문화가 남아 있는 것과 군 내부에 아직까지 병영부조리가 있는 것[167] 역시 일제강점기의 잔재가 그대로 지금까지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의 악영향이 남한보다 북한이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여기는 김일성 독재와 주체사상으로 인해 오히려 일제의 잔재가 좋지 않은 쪽으로 더 심화되었기 때문이다. 김일성은 일제강점기 당시 사회 문제가 된 친일파나 지주에 대한 증오를 부추기고, 누명까지 씌워 해방 정국에 숙청을 감행했으나, 정작 친일파 중에서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한 인물은 그대로 기용했다.[168] 거기에 김일성은 일제강점기와 한국 전쟁으로 인해 주민들이 외세의 침략에 대한 트라우마가 생겼다는 점을 악용해 주체사상과 김씨 세습에 대한 정당성을 확보했다.[169] 그러고서 80년대 이후에는 김일성 가문의 초상화를 일본 제국에서 천황의 어진을 숭배하듯이 그대로 아끼도록 했다. 이로 인해 일제처럼 북한도 김부자 초상화를 구하다 숨진 사람들이 영웅으로 우대가 되는 폐해가 일어났다.
분단 그 자체부터 일본의 강점으로 일어났다는 시각도 있다.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였기에 그 처리과정에서 분할이 논의된 것으로, 그렇지 않았다면 연합국 사이에서 아예 분할 자체가 논의가 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일제는 패전 직전까지 시간을 끌어 소련을 참전하게 하였고 그 결과 옛 조선의 영토는 소련과 미국이 점령하게 되어 분리되었다는 것이다. 이 강대국들은 자신의 이익을 대변하는 지도자를 선호하여 통일 국가를 만드는 것을 어렵게 하였고, 통일된 민족국가를 만들 역량이 쇠약해져 오스트리아 같이 합의하 통일도 이끌어내지도 못하고 전쟁까지 나는 사건에도 일정 부분 영향을 끼치게 된다.#
심지어 브루스 커밍스는 한국전쟁 자체부터가 북한이 아닌 일본의 책임이라고 주장하였다.# 북한에서 (비록 결함은 있을지언정) 친일파를 어느 정도는 숙청했지만 남한에서는 거의 그대로 기용했는데, 이것이 전쟁의 발단이 되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배하지 않았더라면 오랜 중앙집권 역사를 고려하면 분단도 없었을 것이고 당연히 한국전쟁도 있을리가 없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결국 일본은 한국전쟁 발발에도 책임이 있다고 볼 수 있다.
한국인들의 국가 운영 참여 경험이 무려 반세기 가까이 차단되었으며, 그 중에서도 본격적인 근대 국가 운영 경험은 아예 제로였던 점이 엄청난 악영향을 미쳤다. 이로 인해 광복 당시 한반도의 정치인이란 사람들은 하나같이 운동가에서 정식 정치인으로 변신한 것이지 제대로 된 정치적 경험과 경륜을 갖추지 못한 상태였고, 계파와 정파 간 협상과 논의를 통해 결론을 도출하는 제도권 정치에 매우 미숙했으며, 여기에서 해방공간의 온갖 비극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원래 독재국가였던 소련과 중화인민공화국의 영향을 받은 북한은 말할것도 없고, 심지어 미국에서 정식으로 역사, 정치학을 공부하고 미국 민주주의를 직접 보고 왔다는 이승만 같은 이들도 극단주의의 영향을 받아 온갖 테러와 독재 행각을 일삼기도 했다.[170]
정작 일본은 일본 제국 패망 이후로 미국에 의해 민주주의가 도입되며 징병제 등 군사주의를 표면적으로나마 청산하고 6.25 전쟁 등을 통한 특수로 경제가 발전하고 생활수준이 높아졌지만 진정성 있는 역사교육의 부재로 일본 제국이 남북한에 어떤 악영향을 끼쳤는지조차 모르고 있다. 도리어 남북한의 분단과 군사주의로 인한 악습을 조선시대 유교의 영향, 당파성론 등 식민사관의 논리로 오해하며 민족성 자체가 미개하기에 생겨나는 문제로 여기고 일반화하여 비하하는 경우도 있다.[171] 다만 일제의 군사주의 문화를 경험한 일본 노년층이나 중장년층 일부는 이해하거나 동감하는 경우도 있다.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이 조선을 지배하면서 받은 영향에 대해선 여러 가지 방향으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해석 역시 방향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일본 중앙정부가 조선총독부 측에게 지급한 재정 보충금이나 식민지 조선의 경상수지의 수치, 일본과 조선의 민간 교역 내용 등을 보면 '한국을 착취했지만, 일본이 일방적으로 이익만을 얻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정도의 해석도 있다. 식민지 통치는 자국의 경제에 어느 정도 부담을 주는 정책이기도 하였다.
사상적인 측면을 따져 보면 일제강점기는 일본인들의 상당수와 일본 정부를 비롯한 일본 사회에서 일본서기에서의 신공황후 신화와 더불어 한민족에 대한 멸시 및 우월의식 등을 비롯하여 한국은 언제나 일본보다 아래이며 일본을 위해서 희생해야 한다는 인식과 반한 정서가 만연하기 시작한 시대라 할 수 있다. 이런 사상이 정치에 영향을 끼쳐서 일본 정치권이 비리와 스캔들이 일어나면 여론몰이를 위해 혐한을 쉽게 할 수 있는 환경이 되었다.
일본은 일제강점기 전후로도 본인들의 점령을 정당화하기 위해 한국에 대한 온갖 악선전을 했고 타국의 한국 인식이 왜곡되는 데에도 기여했으며, 현재에도 진행중이다.#
사상적인 측면을 따져 보면 일제강점기는 일본인들의 상당수와 일본 정부를 비롯한 일본 사회에서 일본서기에서의 신공황후 신화와 더불어 한민족에 대한 멸시 및 우월의식 등을 비롯하여 한국은 언제나 일본보다 아래이며 일본을 위해서 희생해야 한다는 인식과 반한 정서가 만연하기 시작한 시대라 할 수 있다. 이런 사상이 정치에 영향을 끼쳐서 일본 정치권이 비리와 스캔들이 일어나면 여론몰이를 위해 혐한을 쉽게 할 수 있는 환경이 되었다.
일본은 일제강점기 전후로도 본인들의 점령을 정당화하기 위해 한국에 대한 온갖 악선전을 했고 타국의 한국 인식이 왜곡되는 데에도 기여했으며, 현재에도 진행중이다.#
식민지는 어디든지 식민 지배를 통해 인간을 그룹 A와 B로 나누고 A가 B를 통치하는 것입니다. A가 B를 차별하지 않고는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것을 어떻게든 정당화하려고, "일본은 뒤쳐진 조선을 근대화했다"라든지 "철도를 깔아 주었다"라는 "선정을 베풀었다"라고, 끈질기게 주장하는 경향이 아직 근절되지 않고 있습니다.
바꿔 말하면, 이웃 나라는 빈곤으로 “뒤처져 있었다.”라고 열심히 선전하고 그 기반을 혈안으로 긁어모아, 백 년 전의 나의 일본이 우월하다고 추어올리는 것입니다. 사람의 가난을 조롱하는 것은 저열하다는 표현이 어색하지 않고 인간을 민족을 가지고 조롱하는 것은 헤이트 스피치 그 자체입니다. 게다가 백 년 전의 일본을 아무리 추어올려도 자기 자신이 위대해지는 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닌건데, 그 쓸데없는 에너지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일본은 조선(대한제국)이라는 자발적 근대화를 진행하고 있던 곳을 병합했고, 때문에 “일본이 조선을 근대화했다”가 아니라, 조선이 근대화한 시기에 일본 제국이 지배자가 되었을 뿐입니다. 일본의 국방을 위해 어쩔 수 없었다는 주장은, 나를 위해서 타인을 밟아도 좋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견을 내는 나라가 이웃으로서 환영받을 수 있습니까? 한편, 일본의 식민지가 되지 않았다면 수탈도 차별도 받지 않았고, 일본의 전쟁에 동반자도 되지 않았습니다. 최소한 그 부분에서는 확실한 피해를 부정할 수 없습니다.#
서양의 식민통치와 비교할 때 두드러지는 일제 식민통치의 특징은 조선 주민의 정치적 의사를 원천적으로 배제하고 총독 개인에게 지나치게 많은 권력을 집중시킨 점에 있다. 그리고 식민지 행정기구 내에 조선 총독의 무단적, 독재적, 폭력적 통치를 견제하거나 제어할 수 있는 수단이 전혀 없기 때문에 조선인들의 이해는 언제나 뒷전에 밀릴 수밖에 없었다. 물론 서양 제국주의 국가들의 참정제도가 형식적이고 허울에 불과하기는 했으나 참정제도 자체를 만들지 않은 일본의 통치제도는 매우 억압적인 사례에 속한다.<세계사 속의 한국근현대사> 168쪽 #
"너희들은 외지에서 식민지 사람들을 착취하면서 온갖 호사를 누리고 살았으니, 지금 천벌받고 있는 것이다."본토 일본인들이 식민지에서 쫒겨난 일본인들을 비난했던 말#
외양간을 고치는 것은 절대 소들을 위한 것이 아니다.
일제강점기의 근대화의 방향성은 한민족의 삶의 질을 끌어올리는 과정의 근대화가 아닌, 제국의 중심부인 일본 열도를 풍요롭게 만드는 것에 맞춰진, 다시 말해 사실상 가짜 근대화이기에[172], 이 과정에서 한민족이 입을 수 있는 수혜는 상당히 한정되거나 일부 친일 고관 및 왕족, 귀족들에게 편중된 형태로 일어났다.
한반도 역시 일본 열도처럼 마땅한 지하자원이 없어[173][174] 저임금 노동력으로 산업혁명 초반의 국가 재정의 기반을 마련해야 하는 처지인데, 이러한 저임금 노동력으로 조선인들이 벌어들이는 국부가 한반도가 아닌 일본인 사업가들을 통해 본사가 있는 일본 본토로 쏠려들어가는 상황이 일본 제국시대 내내 반복되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는 서구에서 들여온 화학 비료의 도입으로 전 지구적인 인구폭등이 일어난 시기였고, 조선에서 일본이 이룩한 발달된 서구식 행정의 도입과 치안의 확보와 맞물려 인구가 2배에 가까이 증가하는 폭증이 일어났다. 하지만 단순히 인구만 늘렸을 뿐, 자본 투자처로서의 매력이 없는 가난한 농경국가 조선에는 대규모의 자본투자가 이뤄지지 않았고, 일본 제국의 정부 차원에서의 투자액도 조선보다 훨씬 작은 대만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인지라[175], 인구의 폭증에 합당한 일자리의 증가와 도시 인프라의 구축은 굉장히 더뎌질 수밖에 없었다.
또한 일본의 통치형태에 의해 조선의 낙후 현상이 장기간 유지된 면도 큰데, 산업화로 인해 이농현상이 일어나 농촌의 인구와 생산량이 급감한 일본은 조선 중남부의 쌀로 초중반의 제국을 부양하였기에, 조선의 쌀값을 저가로 묶어두기 위해 총독부가 조선의 대지주들과 짜고 조선 자영농들을 의도적으로 몰락시켜 이들을 노예에 가까운 저급여 소작농으로 전락시켰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전통적으로 조선 소작농들이 가지고 있던 최소한의 생존권인 '도지권' 등은 철저히 부정되었다. 중남미의 엔코미엔다식 식민착취 시스템과 흡사한 이 농촌 착취 구조를 '식민지 지주제'라고 한다.
특히 일본 제국 중반으로 넘어가면 일본 농촌이 화학비료의 보편적 보급과 기계화의 시작으로 인해 식량의 자급이 가능해져서 조선쌀에 대한 의존도가 급락했는데[176], 조선은 여전히 곡식 수출 외엔 경제를 유지할 방도가 없는지라, 결국 일본 곡식시장에서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해 쌀값을 저가로 장기간 동결해야했고, 당연히 그 피해는 고스란히 조선의 소작농들에게 전가되었다. 이 때문에 굉장히 많은 조선 농민들이 절대빈곤층으로 전락하고 말았고, 그나마 소작도 불가능한 극빈농들은 결국 집과 땅을 잃고 '유랑민', '토막민'이라는 처참한 상황으로 내몰리게 된다.
이는 조선 북부에 전개된 일본 제국의 공업지대에서도 똑같이 반복되었으며, 투자와 경영이 전부 일본 자본가 계급에 의해 이루어지던 일본 제국의 공업지대에서 조선인은 본토 일본인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낮은 임금과 가혹한 노동조건에 묶여 있어야 했다. 조선의 인구 폭증에 의해 값싼 노동력은 얼마든지 남아돌았기 때문에, 임금상승률은 거의 동결에 가까운 형국으로 장기간 유지되었다. 또한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고급 기술들은 대부분 일본인 기술자들의 영역이었고, 조선인은 가계빈곤에 의한 교육수준 미달이나 기술 보안적 측면의 불신 때문에 해방 직후까지도 조선인 고급 엔지니어링 인력은 수십명 단위에도 미치지 못했다.
신흥 국가인 일본 제국은 만성적 재정 빈곤에 시달리다보니[177] 주어진 상황에서 최대한 반란을 억제하기 위해서라도 조선인들을 죽을 수도 살 수도 없는 삶에 머무르도록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가난한 농촌의 집합체로 이루어진 한반도에 막대한 도시 인프라를 연결하여, 유지시킬 자본은 가난한 일본 제국에는 애초에 있지도 않았고, 원금손실이 뻔한 투자를 할 생각을 지닌 일본인 기업가도 있을 리가 없었다. 이러다보니 조선인들은 제대로 된 직업이라곤 소작농과 하부 노동자 외에는 가질 수가 없었고, 당연히 세금납부액도 본토에 비해 형편없었으며, 이런 재정 악순환으로 인해 조선총독부는 재정적자가 심각하여 지배기 대부분을 본토에 구걸해가며 적자예산으로 굴려야 했다.
즉 낙후된 조선 → 일자리 없음 → 돈 없음 → 통제는 해야됨 → 경찰에 예산 투입 → 교육비 없음 → 저임금 노동자 양산 → 실업자 → 적은 세수 → 총독부 재정고갈 → 투자저조 → 낙후된 조선 이라는 악순환이 무한 반복될 수밖에 없었다.
결정적으로 조선인의 자본축적이 힘들어진 이유는, 일제 본토에서 온 대기업의 큰손 사업가들의 외래자본에 기인한 측면이 큰데, 조선 땅에서 벌어지는 거의 모든 알토란 사업에 일본의 대자본이 직접 개입하면서 개미 사업가 조선인들은 마구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외래자본인 일본의 투자자본이 조선의 돈 되는 사업들로 벌어들인 이윤 역시 대부분 조선땅에 재투자되지 않고 일본 본사로 흘러들어갔다. 사업체들은 번성했지만 벌어들이는 이윤이 현지에 낙수효과를 일으키지 못해 지역 회사의 번창과 현지 경제의 발전이 정비례를 이루지 못하고 서로 단절되어버린 것. 즉 조선의 경제가 일본 투자자본의 유원지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이것을 근대화라 부를 수 있다면 오늘날 대한민국과 북한의 극심한 수도권 집중, 서울,평양 공화국 체제와 지방 인프라 황폐화 역시 발전이라 칭할 수 있다. 어쨌거나 무언가는 지어지고 있는 게 사실이니까.[178]
총칼로 일어난 일본 제국은 국력을 초과하여 무리하게 군대와 전선을 비대하게 확장해가는 과정에 엄청난 인적 물적 자원을 본토인 일본열도와 제2의 본토인 한반도에서 약탈해와야 했다. 특히 조선의 쌀은 전란기동안 추수하기 무섭게 전선으로 빨려들어갔으며, 납과 구리를 포함, 거의 모든 민간 물자들이 제국 정부에 강제 공출되었다. 이로 인해 제국의 후반부에 가면 조선의 농촌경제가 파탄 직전에 이르렀다.
이렇듯 일본 제국은 조선에 경제 구조적 착취를 가했다. 즉 대외적으로만 조선인을 일본 민족과 일시동인이며, 조상이 같고, 천황폐하의 동등한 적자이며, 신의 자손이고, 같은 시민권자이며, 해외에 나가면 같은 여권을 부여받는 '동등한 입장의 제국신민'임을 표방했지만, 내적으로는 조선인들에게 경제 구조적인 착취를 가한 것이다. 즉 경제에는 언제나 승자와 패자가 존재하기 마련인데, 일본 제국 치하에서 대자본을 굴리는 일본인은 언제나 승자였고, 소자본을 굴리는 조선인은 언제나 패자였던 것이다. 일본 제국의 경제 구조적 착취 때문에 한반도에서의 일자리가 고갈된 조선인들은 저임금 노동이라도 얻으려고 일본 열도로 몰려들었고, 조선인이 저임금 노동을 차지해 일자리와 임금이 줄어들고 거리가 슬럼화되자 일본인들은 조선인들에 분개해 멸시와 학대를 가했다. 제국 시대가 지속될수록 내선일체는 공허한 구호가 되어버리고, 경제구조적 문제에서 발생한 일본민족과 한민족의 갈등과 증오의 골은 임계점을 넘은 수준으로 깊어갔다. 관동 대지진 이후 발생한 대규모의 조선인 학살은 이러한 배경에서 일어난 것이다.
결국 진정한 의미의 한민족의 삶의 질의 상승을 가져온 근대화이자 산업화는 광복 후인 1960년대 개발독재부터 시작되었고, 일제시대의 경제구조는 민족이 질적으로 향상되려면 '민족자본 육성'에 왜 사활을 걸어야 하는지, 왜 식민지 근대화라는 것이 뿌리부터 한계가 명백한 것인지를 보여준다.
일부 근대화론자는 일본의 지배가 해방 이후 한국의 한강의 기적과 '직결'되는 막강한 영향을 끼쳤다고 주장하기도 하나, 이는 전후 한국의 자체적 노력을 경시한 허점이 많은 주장이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을 지배하기 위한 행정 시스템의 경우, 대한제국 시절부터 이어져 온 행정 조직[179]을 단순히 계승만 한 것 뿐 아니라 더 발전시키고 한 측면도 있으나 정작 행정조직을 운영하는 주요 주체는 일본인이었지 조선인 출신 관료들은 명예고문직인 중추원의 고문으로나 형식적으로 존재할 뿐, 조선인이 조선의 실무에 끼지 못하는 불합리한 상황이 지속되었다. 그리고 한강의 기적 역시도 해방되고도 십수년이 지난 뒤에야 시작되었다. 물론 그 사이에는 한국전쟁이 있긴 했지만 한국전쟁으로 인해 처참하게 무너진 상황에서 어떻게든 교육으로 인재를 양성하고 경제개발계획을 수립하는 등의 노력은 한국의 산물이다. 당장에 문맹률도 일제강점기와는 달리 이승만 정부를 거치며 크게 개선된다. 그리고 당연하지만 이들이 받은 교육은 모두 한국어지 일본어가 아니다. 즉 1공 시기는 명백하게 일본의 지배의 덕을 본 시기가 아니다.
때문에 해방 이후 이승만을 비롯한 광복 직후의 정치인, 관료들이 행정력 부재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많은 친일 부역자 출신 실무자들을 그대로 그 자리에 유지했음에도 불구하고[180] 일본의 통치가 끝나자마자 해방 이후 조선은 행정망 붕괴로 아노미에 시달렸으며 이승만 집권기 내내 행정능력 부족으로 고생하게 된다. 일제 시대에 양산된 인재들은 해방 이후 워낙 손이 부족했던 정부수립 이후 대한민국 정부에 중용되기도 했으나 근본적으로 일제가 조선 식민지인 교육에 무심했던 데다, 그나마 그런 식으로 나온 인재들조차 정치적, 경제적으로 출세할 길이 막혀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기에 실무능력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극렬한 반일주의자였던 이승만조차 현실적인 타협을 위해 친일부역자들을 이렇게 적극 기용했음에도 이정도 행정적 인력부족 사태였다는 것은 일제강점기 일본의 조선인 교육제도가 효과가 있었다는 주장이 얼마나 허황되었는지를 절실히 반증해주기도 한다.
이런 식의 주장들을 잘 들여다보면, 대체로 1950~60년대 세계적 식민대국이었던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국가들의 사례를 무리하게 한국에 끌어오는 경향을 보인다. 영국 식민지 출신의 엘리트들이 독립 후 국가 운영의 주축이었듯이 한국 역시 일본 식민지 체제에서 육성된 엘리트들이 오늘날의 번영을 이끌었다는 논리다. 그러나 아무리 늦어도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1950년대에 들어 기존 식민지들을 자치령 체제로 재편하면서 못해도 10년의 시간동안 현지인들에게 정치, 행정의 실권을 이양해간 영국 등 유럽 식민열강들과, 패망 당시까지도 조선인들에게 자치권 부여는 고사하고 자치 시행 구상조차 명확하게 수립되지 않았던 일본의 사례는 전혀 다르다. 심지어 어지간한 식민지에서 볼 수 있는 현지인 정당조차도 조선에서는 고작해야 정치결사라는 형태로 근근이 나타났을 뿐이다. 게다가 영국의 경우도 식민지배의 '수혜'를 제대로 입어 이후 선진국으로 도약한 것은 미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와 같은 앵글로색슨 이민국가나 싱가포르와 같은 도시국가, 전세계 유태계의 지원을 받은 이스라엘 정도에 불과하다.
이택선 교수의 저서 '취약국가 대한민국의 탄생'에 의하면 한국정부 수립 당시 관료들이 대부분 20대들이었으며, 친일관료들조차 본인들의 친일행위를 숨기려 직위를 버리고 도망친 것을 한국정부가 관료로 삼기 위해 쫓아다니는 촌극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는 이승만 정권 뿐 아니라 김구의 임정 세력들을 위시로 이루어진 우익청년단의 구성원들도 마찬가지었을 정도였으며, 북한의 경우에는 관료계급의 상당수를 일제시대때 그대로 친일파들을 대거 등용하는 등, 좌파가 우파의 인재를, 우파가 좌파의 인재를 서로 가져다 쓸 정도로 한반도의 인재의 절대치가 극심하게 부족한 상황이었다.[181]
경제계 역시 산업 엔지니어링의 중추를 담당했던 공장 고급 인력들 태반이 일본인 노동자들인지라, 상당수의 공장들이 가동되지 못하고 올스톱 상태가 되었으며, 미국이 일본으로 도망간 일본인 경영자들을 강압적으로 한국땅으로 끌고와 공장운영과 기계운용법의 인수인계를 한국인들에게 끝마칠때까지 한국땅의 공장들은 제대로 운영도 되지 못한 채 방치되어 있었으며, 북한은 아예 일본인 노동자 600여 명을 본국으로 귀환하지 못하게 강제 감금하여 공장을 운영토록 했다. 당장 일본인들이 떠나버리자 조선 철도는 기관사 및 정비인력과 자재의 태부족으로 마비상태에 이르렀고, 채만식의 역로 같은 당시 소설에서 이런 혼란상을 실감나게 묘사하고 있다.
군대의 경우 6.25 전쟁 당시 활약했던 만주 군관학교 출신 지휘관들이 존재하긴 하나, 홍사익 장군 등 극소수를 제외하곤 한직의 하급 위관급에 불과했으며, 이들이 상급 지휘권자로 파격 승진하게 된 건 해방 이후였다. 여담으로 군대의 상황도 일제강점기가 조선인들이 출세하기 어려운 환경이었음을 말해준다. 이승만 정부 초중기만 해도 사관학교 출신들은 출세가 엄청나게 빨랐는데 육사 7기생까지는 국군 조직의 확대가 겹치긴 했지만 20대에 별을 다는 등 초고속 출세를 거듭했다. 만일 일본이 교육에 있어 조선인에 대한 차별이 없었다면 이정도로 빠를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후 조국 근대화에 착수하여 현대 경제대국 한국을 만들어낸 인재풀은 일본, 미국에서 학위를 따고 돌아온 애국심에 불타는 초기 유학파 세대들이었으며, 이들은 개발독재 과정에서 크게 등용되어 한국경제의 파격적 성장을 가능케한 테크노크라트층의 중추를 이루었다. 일본 유학파 세대들은 제국시대에 형성된 현 일본 정경계 유력가들과의 인맥을 동원해 일본으로부터 막대한 지원을 이끌어냈다. 그러나 당시 한국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고 있던 것도 미국이었고 1세계를 주도하던 것도 미국이었기에 각종 행정제도나 이론 등은 미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일본 유학파보다 상대적으로 주도권에서 유리한 부분이 많았다. 특히 이승만은 1950년대와 자신이 하야 하는 1960년까지 다량의 인재들을 국비를 들여 미국으로 유학을 보냈다. 이게 어느 정도였냐고 하면 1956 ~ 1957년 기준 미국내 외국인 유학생 중에 한국인이 캐나다와 대만에 이어 3위를 차지할 정도였다.[182] 이들이 이후 박정희 시대 산업화와 경제 발전 시기에 맹활약하게 된다. 당장 학제만 봐도 일제강점기의 그것은 기후적 요건으로 어쩔 수 없이 살아남은 춘추제 정도를 제외하면[183] 어떠한 흔적도 남지 않았다.
봉건적인 조선 사회 구조를 타파했다는 인상과 달리, 일본 제국은 여전히 작위 귀족이 존재하는 신분제 사회의 영향력이 여전히 남아 있어, 백정들이 형평운동을 벌이는 등의 사회적 차별 구조는 여전했으며 농촌의 경우 생산량 향상이라는 목적으로 지역 토호들과 결탁해 대지주들이 소작농들을 관리하는 구조가 여전히 남아 있었다.[184] 해방 이후에도 이들의 영향력은 막강하였다. 오늘날 한국에서 본격적인 봉건적 사회구조의 붕괴는 6.25 전쟁으로 보는 경우가 많은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185] 이른바 식근론자들의 논리대로라면 오히려 6.25 전쟁으로 이런 전통 사회구조를 파괴한 김일성 정권을 긍정해줘야 하는 모순된 상황이 발생한다.
애초에 일본 제국이 '근대국가'였는지조차 논란의 대상이다. 메이지유신의 시발점이 된 존황양이, 근황토막부터가 이 식근론자들이 그토록 혐오하고 폄하하기에 바쁜 조선의 국시, 그것도 대놓고 조선에서 배워간 성리학에 기반한다는 점은 그 어떤 식근론자, 조선까도 거론하지 않는 불편한 진실이다. 심지어 유신 이후 메이지 덴노의 명의로 발표된 군인칙유와 교육칙어 역시 20세기 근대국가의 것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전근대적 성리학 규범에 모를 박고 있으며, 패전 후 일본 중의원에서는 아예 이 두 어명의 배제를 결의해야 했다.[186] 덴노를 '현인신'으로 받드는 신정일치적 요소에까지 닿으면 그저 근대적 외피를 뒤집어씌운 전근대국가나 다름 없다. 이러한 전근대적 체제 하에서 외견적이나마 근대적 제도의 총아라 할 수 있는 헌법과 의회의 시행조차 배제되고 칙령과 제령에 의해 지배된 식민지가 '근대 사회'였다는 주장은 그 근저부터 설득력을 잃는다.
한국과 일본에서 몇몇 지식인들은 일본의 식민 지배가 한국이 공산당 세력에 지배를 받는 것을 막았다는 주장을 하기도 하나, 당시 일본 제국 자체가 조선뿐 아니라 자국민들에게도 딱히 좋은 정권은 아니었기 때문에[187] 조선과 일제 본토의 좌파, 아나키즘 세력의 협력은 매우 활발히 이루어졌으며 오히려 중국 내 공산당 세력을 탄압하던 국민당 정부 하 중화민국을 침략하여 중국 공산당의 세력을 키워주었고 소련의 건국과정에서 1905년 러일전쟁의 영향을 볼 때 오히려 일본 제국은 동아시아에 공산주의를 확산시키는 데 큰 일을 했다. 중국과 동남아처럼, 전쟁 이전에는 공산권으로 분류되지 않았던 지역들이 일본의 침략 이후 상당수가 공산권으로 뒤집힌 것만 보면 일본이 공산주의를 퍼뜨린 것이라는 아니냐[188]는 촌극과도 같은 해석조차 가능해진다.
또한 중국 침략을 위해 북한지역에는 대규모 공업지대가 형성되었고, 당시 세계 최대 규모의 수풍발전소가 지어졌으나, 분단으로 전부 한국땅에서 떨어져나가고, 공업지대도 소련군에게 약탈당하거나 6.25전쟁을 거치며 대부분 파괴되었기에, 일제가 남긴 유산은 현대 한국에 끼친 순기능적 면에선 물질적 유산보다 측정하기 어려운 무형의 유산에 훨씬 치중되었다.
이렇게 일제강점기에서 한국의 경제 성장과 발전을 찾으려는 것은 2차대전 이후 등장한 수많은 개도국들 중 한국이 2020년대 기준으로 사실상 유일하게 한강의 기적이라는 이름으로 선진국에 진입했던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원인을 찾으려는 노력에서 나온 것으로, 자본주의 맹아론이나 식민지 근대화론이나 결국 방법론만 다를 뿐 이러한 목적에서 나온 것이라 볼 수 있다.
식민지 근대화론을 지지하는 인물들은, 일본 제국주의의 지배가 근대적 행정력을 구축하고, 1차 산업들[189]과, 민간용 군사용으로 갈고 닦아놓은 전 국토의 도로, 철로, 교량 등 기본 교통 인프라들을 깔아놓았고, 이것이 한반도 전체에 근대적인 뼈와 힘줄과 신경망의 역할을 한 것[190], 이후 한국 개발독재의 고도성장이 이 위에 근육과 혈관과 살을 완성하는 과정이었으며, 결국 한국의 경제성공은 3세계의 작은 개도국의 산업선진국으로의 진입이 가능했던 최후의 기회인 1960~1980년대 세계의 전후 복구시기의 막차를 타는 '속도전'이었음을 염두에 둘 때, 사실 한국의 근대화에 사실상 최초의 근대적 통치 시기였던 일제 시기의 유산의 영향이 큰 것 자체는 부정할 수는 없는 사실임이 확실하다고 주장한다.[191]
이들의 주장은 이 시기의 조선은 근대적 행정체계가 도입되었으며 근대화의 기반이 마련되었다는 것이다. 즉 "(의도가 무엇이든) 일제는 조선을 개발했고, 이에 따라 일정한 근대화가 이루어졌다"라는 것.
하지만 제국주의를 통해 대륙으로 뻗어나가려 했던 일제의 의도 역시 무시해서는 안 된다. 일본이 적자 식민지 조선을 유지한 것은 군사적인 이유였고 총독부가 예산 대부분을 철도를 시설에 투자한 것은 일본의 팽장주의 정책때문이었으며 2위가 피지배민족인 조선인을 통제하기 위한 경찰 예산이었다는 것만 봐도 일본의 의도는 명확하다. 그러나 일본이 여타 제국주의 국가들이 오직 자신들을 위해서 식민지에 인프라와 편의시설을 깔고 소작농을 쥐어짜고 사다리 걷어차기를 했다한들 이것 또한 역사의 한 단편임을 인지해야된다.
위에서 분야별로 이어진 논의를 종합하자면, 일본이 한반도에 근대적 하드웨어를 건설했을지언정, 그 근대적 인프라와 제도를 운영할 능력은 일본의 통치가 종료되는 그 순간까지도 전혀 갖춰지지도 허락받지도 못했다는 것이 핵심이다. 그 운영의 경험은 일본의 통치가 종식된 이후에야 미군정을 거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됨으로써, 그리고 이어진 한국전쟁을 수행하고 극복하는 과정을 거치면서야 비로소 시작되었다. 근대적 요소를 자체적으로 운영할 능력이 없는 사회를 근대사회라 부르는 것은 전혀 타당하지 못하다. 일본의 통치가 한반도를 '발전'시켰다고 주장하려면 이 경험의 상실을 벌충할 수준의 반대급부가 있어야 하지만 누차 지적했듯 일본은 이 적자투성이 식민지에 제대로 된 투자 자체를 꺼렸고, 일부 투자의 과실은 조선이 아닌 일본 내지로 흘러가 조선 내에서 순환되지 못했다.
또한 이러한 주장은 해방 직후, 한국 전쟁 직후 그야말로 아무것도 남지 않은 3세계 빈곤국가에 불과했던 대한민국의 '한강의 기적'의 원인을 지나치게 협소하게 바라보는 주장이며, 한강의 기적의 원인의 '절대가치'인 한국 민족이 스스로 치러야 했던 '막대한 노력과 희생의 가치'를 등한시한 굉장히 자학론적인 시각이다. 한강의 기적은 한국민족 자체의 처절한 '자강'의 결의가 없었으면 그 누구도 기대하지도 원치도 않는 결실이었다. 자유진영 국가인 미국과 일본은 한국의 중공업화를 탐탁치 않게 여겼으며, 미국의 경우 이미 수많은 3세계 국가들의 경제발전을 위해 투자금을 지원했다 전부 떼인 충격 때문에 박정희 정권의 중공업 산업 도전을 굉장히 회의적으로 보고 투자 자체를 꺼린 경향이 컸으며, 한국에 대한 지원은 대부분 식량 지원에 머물러 있었다. 또한 일본의 경우에도 한국이 해보지도 않은 자본집약 산업을 일으키다 망해 그 여파로 한반도 남부마저 적화될까 두려워했던 기색이 강했다.[192] 대한민국을 둘러싼 대륙 국가들은 전부 적성국가들이었고, 한민족은 이 가운데서 살아남기 위해 사력을 쏟아부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은 산업발전에 필요한 시드머니를 확보하기 위해 베트남전에서 서방세계를 위해 피를 흘려야 했고, 중동의 열사의 사막이나 동남아의 정글 등 돈이 되는 곳은 모조리 찾아다니며 산업화의 재원을 확보하는데 수십년간 민족의 사활을 걸고 매진해야 했다. 따라서 '일본의 전후 배상금과 차관, 산업기술 지원이 현대 한국의 경제성장에 큰 도움이 되었다'라는 논리는 옳아도, '일본 제국의 통치가 현대 한국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라는 주장은 대한민국 경제발전사의 윤곽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편협하고 무지한 주장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한국사 상식이 부족한 상태로 수혜론만 내세우는 일본의 우익들 또한 '다 된 남의 밥에 숟가락 얹기'라는 비난을 피할 수 없다.
일제강점기를 옹호하는, 혹은 이 시기에 나타난 '긍정적' 변화를 강조하는 이들의 가장 큰 허점은 결국 그 정당화를 위해 근대화에 나서지 않은 가상의 조선을 끌어들여 비교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런 조선은 이미 조선-대한제국 스스로도 근대화에 나선 시점에서 사라졌다. 물론 그 근대화에 여러 한계가 존재하고 많은 부분에서 외부의 도움을 받은 것도 사실이지만, 일제강점기에 도입된 근대적 체계들 역시 일본 스스로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서양이 만들어낸 것을 일본이 제공받아 재해석한 것일 뿐더러,[193] 그 근대적 체계들을 한국이 자국에 이식하는 과정에서 그 한국이라는 존재를 없애버린[194] 것이라는 가장 중요한 전제를 외면할 수 없다. 결국 "일본을 통해 이상하게 변질된 채 일방적이고 강압적으로 이식된 근대화가, 서양과 직접 교류하여 진행되는 근대화보다 무엇이 나은가?"라는 질문 앞에 무너질 수밖에 없는 논리다.
사실 일제강점기 조선은 세계사적으로도 굉장히 특수한 위치에 있는데, 사실상 제국주의 열강이 마지막으로 신규 획득한 직할 식민지이기 때문이다. 즉 1차대전을 계기로 열강 간에 전후처리로 기존 영토 혹은 식민지를 넘기거나[195] 아예 2차대전 전범행위로 획득한 식민지들을 제외하면 조선 이후에 열강이 기존의 독립국가 혹은 정치공동체를 멸망시키고 식민지로 편입한 사례는 찾기 힘들다.[196] 조선이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멸망한 국가가 아님에도 2차대전의 종전과 함께 독립한 것도 이런 특수성이 반영된 결과였다. 앞에서 일본의 한국 병합은 매우 급작스러웠다고 지적했지만, 반대로 일본이 한국 통치에 대한 내부논의를 완료하고 병합을 추진하려 했다면 이 때는 이 '논의'의 완료 시기에 따라 아예 병합 자체가 불가능해지고 최대 보호국 체제에 만족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고려 말의 원 간섭기와 비슷한 '일본 간섭기'가 되는 것이다.[197] 한국인들이 일제 지배에 대해 거부감을 보이는 것도 여기에서 기인하는데, 어찌됐건 좌충우돌하며 20세기 초까지 독립국가 체제를 유지하고 나름 근대국가 단계에도 발을 들여 본 나라가 하루아침에 식민지로 전락하고 반세기 가까이 사회의 주체로 활동할 길이 막혔으니 당연히 그 이후 일제 통치가 어떤 성과를 냈건 간에 '한국인'들이 스스로 근대화를 이룩할 기회를 빼앗겼다고 인식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특히 해방 직후 일본이 받았어야 할 분단이라는 전후 징벌을 짬처리당한 부분까지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다.[198]
이와 별도로 대한민국과 일본, 양국 민족의 민족관에도 큰 영향을 끼쳤는데, 일제시대 내내 일본 제국은 조선인과 일본인이 조상이 같은 동조동근론 내선일체론을 내세우며 지배해왔기 때문에 그에 맞는 사상을 일본인들에게 주입시켰는데, 전통 가부장 질서에 비추어볼 때 일본인들은 정실부인과 결혼해 낳은 종가집 정통계승자의 민족이고, 조선인들은 첩과 낳은 방계 서얼 민족이기에[199], 민족의 역사에서부터 시작해서 거의 모든 방면에서 서자의 민족인 한민족의 '열등성'을 강요받았다.[200] 유능한 형 일본이 없으면, 무능한 동생 조선은 자립할 수 없다는 논리로 전개된 조선민족관을 역사학적 측면에서만 고려할 때 식민사학이라고 일컫는다.
한반도 역시 일본 열도처럼 마땅한 지하자원이 없어[173][174] 저임금 노동력으로 산업혁명 초반의 국가 재정의 기반을 마련해야 하는 처지인데, 이러한 저임금 노동력으로 조선인들이 벌어들이는 국부가 한반도가 아닌 일본인 사업가들을 통해 본사가 있는 일본 본토로 쏠려들어가는 상황이 일본 제국시대 내내 반복되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는 서구에서 들여온 화학 비료의 도입으로 전 지구적인 인구폭등이 일어난 시기였고, 조선에서 일본이 이룩한 발달된 서구식 행정의 도입과 치안의 확보와 맞물려 인구가 2배에 가까이 증가하는 폭증이 일어났다. 하지만 단순히 인구만 늘렸을 뿐, 자본 투자처로서의 매력이 없는 가난한 농경국가 조선에는 대규모의 자본투자가 이뤄지지 않았고, 일본 제국의 정부 차원에서의 투자액도 조선보다 훨씬 작은 대만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인지라[175], 인구의 폭증에 합당한 일자리의 증가와 도시 인프라의 구축은 굉장히 더뎌질 수밖에 없었다.
또한 일본의 통치형태에 의해 조선의 낙후 현상이 장기간 유지된 면도 큰데, 산업화로 인해 이농현상이 일어나 농촌의 인구와 생산량이 급감한 일본은 조선 중남부의 쌀로 초중반의 제국을 부양하였기에, 조선의 쌀값을 저가로 묶어두기 위해 총독부가 조선의 대지주들과 짜고 조선 자영농들을 의도적으로 몰락시켜 이들을 노예에 가까운 저급여 소작농으로 전락시켰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전통적으로 조선 소작농들이 가지고 있던 최소한의 생존권인 '도지권' 등은 철저히 부정되었다. 중남미의 엔코미엔다식 식민착취 시스템과 흡사한 이 농촌 착취 구조를 '식민지 지주제'라고 한다.
특히 일본 제국 중반으로 넘어가면 일본 농촌이 화학비료의 보편적 보급과 기계화의 시작으로 인해 식량의 자급이 가능해져서 조선쌀에 대한 의존도가 급락했는데[176], 조선은 여전히 곡식 수출 외엔 경제를 유지할 방도가 없는지라, 결국 일본 곡식시장에서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해 쌀값을 저가로 장기간 동결해야했고, 당연히 그 피해는 고스란히 조선의 소작농들에게 전가되었다. 이 때문에 굉장히 많은 조선 농민들이 절대빈곤층으로 전락하고 말았고, 그나마 소작도 불가능한 극빈농들은 결국 집과 땅을 잃고 '유랑민', '토막민'이라는 처참한 상황으로 내몰리게 된다.
이는 조선 북부에 전개된 일본 제국의 공업지대에서도 똑같이 반복되었으며, 투자와 경영이 전부 일본 자본가 계급에 의해 이루어지던 일본 제국의 공업지대에서 조선인은 본토 일본인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낮은 임금과 가혹한 노동조건에 묶여 있어야 했다. 조선의 인구 폭증에 의해 값싼 노동력은 얼마든지 남아돌았기 때문에, 임금상승률은 거의 동결에 가까운 형국으로 장기간 유지되었다. 또한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고급 기술들은 대부분 일본인 기술자들의 영역이었고, 조선인은 가계빈곤에 의한 교육수준 미달이나 기술 보안적 측면의 불신 때문에 해방 직후까지도 조선인 고급 엔지니어링 인력은 수십명 단위에도 미치지 못했다.
신흥 국가인 일본 제국은 만성적 재정 빈곤에 시달리다보니[177] 주어진 상황에서 최대한 반란을 억제하기 위해서라도 조선인들을 죽을 수도 살 수도 없는 삶에 머무르도록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가난한 농촌의 집합체로 이루어진 한반도에 막대한 도시 인프라를 연결하여, 유지시킬 자본은 가난한 일본 제국에는 애초에 있지도 않았고, 원금손실이 뻔한 투자를 할 생각을 지닌 일본인 기업가도 있을 리가 없었다. 이러다보니 조선인들은 제대로 된 직업이라곤 소작농과 하부 노동자 외에는 가질 수가 없었고, 당연히 세금납부액도 본토에 비해 형편없었으며, 이런 재정 악순환으로 인해 조선총독부는 재정적자가 심각하여 지배기 대부분을 본토에 구걸해가며 적자예산으로 굴려야 했다.
즉 낙후된 조선 → 일자리 없음 → 돈 없음 → 통제는 해야됨 → 경찰에 예산 투입 → 교육비 없음 → 저임금 노동자 양산 → 실업자 → 적은 세수 → 총독부 재정고갈 → 투자저조 → 낙후된 조선 이라는 악순환이 무한 반복될 수밖에 없었다.
결정적으로 조선인의 자본축적이 힘들어진 이유는, 일제 본토에서 온 대기업의 큰손 사업가들의 외래자본에 기인한 측면이 큰데, 조선 땅에서 벌어지는 거의 모든 알토란 사업에 일본의 대자본이 직접 개입하면서 개미 사업가 조선인들은 마구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외래자본인 일본의 투자자본이 조선의 돈 되는 사업들로 벌어들인 이윤 역시 대부분 조선땅에 재투자되지 않고 일본 본사로 흘러들어갔다. 사업체들은 번성했지만 벌어들이는 이윤이 현지에 낙수효과를 일으키지 못해 지역 회사의 번창과 현지 경제의 발전이 정비례를 이루지 못하고 서로 단절되어버린 것. 즉 조선의 경제가 일본 투자자본의 유원지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이것을 근대화라 부를 수 있다면 오늘날 대한민국과 북한의 극심한 수도권 집중, 서울,평양 공화국 체제와 지방 인프라 황폐화 역시 발전이라 칭할 수 있다. 어쨌거나 무언가는 지어지고 있는 게 사실이니까.[178]
총칼로 일어난 일본 제국은 국력을 초과하여 무리하게 군대와 전선을 비대하게 확장해가는 과정에 엄청난 인적 물적 자원을 본토인 일본열도와 제2의 본토인 한반도에서 약탈해와야 했다. 특히 조선의 쌀은 전란기동안 추수하기 무섭게 전선으로 빨려들어갔으며, 납과 구리를 포함, 거의 모든 민간 물자들이 제국 정부에 강제 공출되었다. 이로 인해 제국의 후반부에 가면 조선의 농촌경제가 파탄 직전에 이르렀다.
이렇듯 일본 제국은 조선에 경제 구조적 착취를 가했다. 즉 대외적으로만 조선인을 일본 민족과 일시동인이며, 조상이 같고, 천황폐하의 동등한 적자이며, 신의 자손이고, 같은 시민권자이며, 해외에 나가면 같은 여권을 부여받는 '동등한 입장의 제국신민'임을 표방했지만, 내적으로는 조선인들에게 경제 구조적인 착취를 가한 것이다. 즉 경제에는 언제나 승자와 패자가 존재하기 마련인데, 일본 제국 치하에서 대자본을 굴리는 일본인은 언제나 승자였고, 소자본을 굴리는 조선인은 언제나 패자였던 것이다. 일본 제국의 경제 구조적 착취 때문에 한반도에서의 일자리가 고갈된 조선인들은 저임금 노동이라도 얻으려고 일본 열도로 몰려들었고, 조선인이 저임금 노동을 차지해 일자리와 임금이 줄어들고 거리가 슬럼화되자 일본인들은 조선인들에 분개해 멸시와 학대를 가했다. 제국 시대가 지속될수록 내선일체는 공허한 구호가 되어버리고, 경제구조적 문제에서 발생한 일본민족과 한민족의 갈등과 증오의 골은 임계점을 넘은 수준으로 깊어갔다. 관동 대지진 이후 발생한 대규모의 조선인 학살은 이러한 배경에서 일어난 것이다.
결국 진정한 의미의 한민족의 삶의 질의 상승을 가져온 근대화이자 산업화는 광복 후인 1960년대 개발독재부터 시작되었고, 일제시대의 경제구조는 민족이 질적으로 향상되려면 '민족자본 육성'에 왜 사활을 걸어야 하는지, 왜 식민지 근대화라는 것이 뿌리부터 한계가 명백한 것인지를 보여준다.
일부 근대화론자는 일본의 지배가 해방 이후 한국의 한강의 기적과 '직결'되는 막강한 영향을 끼쳤다고 주장하기도 하나, 이는 전후 한국의 자체적 노력을 경시한 허점이 많은 주장이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을 지배하기 위한 행정 시스템의 경우, 대한제국 시절부터 이어져 온 행정 조직[179]을 단순히 계승만 한 것 뿐 아니라 더 발전시키고 한 측면도 있으나 정작 행정조직을 운영하는 주요 주체는 일본인이었지 조선인 출신 관료들은 명예고문직인 중추원의 고문으로나 형식적으로 존재할 뿐, 조선인이 조선의 실무에 끼지 못하는 불합리한 상황이 지속되었다. 그리고 한강의 기적 역시도 해방되고도 십수년이 지난 뒤에야 시작되었다. 물론 그 사이에는 한국전쟁이 있긴 했지만 한국전쟁으로 인해 처참하게 무너진 상황에서 어떻게든 교육으로 인재를 양성하고 경제개발계획을 수립하는 등의 노력은 한국의 산물이다. 당장에 문맹률도 일제강점기와는 달리 이승만 정부를 거치며 크게 개선된다. 그리고 당연하지만 이들이 받은 교육은 모두 한국어지 일본어가 아니다. 즉 1공 시기는 명백하게 일본의 지배의 덕을 본 시기가 아니다.
때문에 해방 이후 이승만을 비롯한 광복 직후의 정치인, 관료들이 행정력 부재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많은 친일 부역자 출신 실무자들을 그대로 그 자리에 유지했음에도 불구하고[180] 일본의 통치가 끝나자마자 해방 이후 조선은 행정망 붕괴로 아노미에 시달렸으며 이승만 집권기 내내 행정능력 부족으로 고생하게 된다. 일제 시대에 양산된 인재들은 해방 이후 워낙 손이 부족했던 정부수립 이후 대한민국 정부에 중용되기도 했으나 근본적으로 일제가 조선 식민지인 교육에 무심했던 데다, 그나마 그런 식으로 나온 인재들조차 정치적, 경제적으로 출세할 길이 막혀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기에 실무능력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극렬한 반일주의자였던 이승만조차 현실적인 타협을 위해 친일부역자들을 이렇게 적극 기용했음에도 이정도 행정적 인력부족 사태였다는 것은 일제강점기 일본의 조선인 교육제도가 효과가 있었다는 주장이 얼마나 허황되었는지를 절실히 반증해주기도 한다.
이런 식의 주장들을 잘 들여다보면, 대체로 1950~60년대 세계적 식민대국이었던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국가들의 사례를 무리하게 한국에 끌어오는 경향을 보인다. 영국 식민지 출신의 엘리트들이 독립 후 국가 운영의 주축이었듯이 한국 역시 일본 식민지 체제에서 육성된 엘리트들이 오늘날의 번영을 이끌었다는 논리다. 그러나 아무리 늦어도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1950년대에 들어 기존 식민지들을 자치령 체제로 재편하면서 못해도 10년의 시간동안 현지인들에게 정치, 행정의 실권을 이양해간 영국 등 유럽 식민열강들과, 패망 당시까지도 조선인들에게 자치권 부여는 고사하고 자치 시행 구상조차 명확하게 수립되지 않았던 일본의 사례는 전혀 다르다. 심지어 어지간한 식민지에서 볼 수 있는 현지인 정당조차도 조선에서는 고작해야 정치결사라는 형태로 근근이 나타났을 뿐이다. 게다가 영국의 경우도 식민지배의 '수혜'를 제대로 입어 이후 선진국으로 도약한 것은 미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와 같은 앵글로색슨 이민국가나 싱가포르와 같은 도시국가, 전세계 유태계의 지원을 받은 이스라엘 정도에 불과하다.
이택선 교수의 저서 '취약국가 대한민국의 탄생'에 의하면 한국정부 수립 당시 관료들이 대부분 20대들이었으며, 친일관료들조차 본인들의 친일행위를 숨기려 직위를 버리고 도망친 것을 한국정부가 관료로 삼기 위해 쫓아다니는 촌극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는 이승만 정권 뿐 아니라 김구의 임정 세력들을 위시로 이루어진 우익청년단의 구성원들도 마찬가지었을 정도였으며, 북한의 경우에는 관료계급의 상당수를 일제시대때 그대로 친일파들을 대거 등용하는 등, 좌파가 우파의 인재를, 우파가 좌파의 인재를 서로 가져다 쓸 정도로 한반도의 인재의 절대치가 극심하게 부족한 상황이었다.[181]
경제계 역시 산업 엔지니어링의 중추를 담당했던 공장 고급 인력들 태반이 일본인 노동자들인지라, 상당수의 공장들이 가동되지 못하고 올스톱 상태가 되었으며, 미국이 일본으로 도망간 일본인 경영자들을 강압적으로 한국땅으로 끌고와 공장운영과 기계운용법의 인수인계를 한국인들에게 끝마칠때까지 한국땅의 공장들은 제대로 운영도 되지 못한 채 방치되어 있었으며, 북한은 아예 일본인 노동자 600여 명을 본국으로 귀환하지 못하게 강제 감금하여 공장을 운영토록 했다. 당장 일본인들이 떠나버리자 조선 철도는 기관사 및 정비인력과 자재의 태부족으로 마비상태에 이르렀고, 채만식의 역로 같은 당시 소설에서 이런 혼란상을 실감나게 묘사하고 있다.
군대의 경우 6.25 전쟁 당시 활약했던 만주 군관학교 출신 지휘관들이 존재하긴 하나, 홍사익 장군 등 극소수를 제외하곤 한직의 하급 위관급에 불과했으며, 이들이 상급 지휘권자로 파격 승진하게 된 건 해방 이후였다. 여담으로 군대의 상황도 일제강점기가 조선인들이 출세하기 어려운 환경이었음을 말해준다. 이승만 정부 초중기만 해도 사관학교 출신들은 출세가 엄청나게 빨랐는데 육사 7기생까지는 국군 조직의 확대가 겹치긴 했지만 20대에 별을 다는 등 초고속 출세를 거듭했다. 만일 일본이 교육에 있어 조선인에 대한 차별이 없었다면 이정도로 빠를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후 조국 근대화에 착수하여 현대 경제대국 한국을 만들어낸 인재풀은 일본, 미국에서 학위를 따고 돌아온 애국심에 불타는 초기 유학파 세대들이었으며, 이들은 개발독재 과정에서 크게 등용되어 한국경제의 파격적 성장을 가능케한 테크노크라트층의 중추를 이루었다. 일본 유학파 세대들은 제국시대에 형성된 현 일본 정경계 유력가들과의 인맥을 동원해 일본으로부터 막대한 지원을 이끌어냈다. 그러나 당시 한국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고 있던 것도 미국이었고 1세계를 주도하던 것도 미국이었기에 각종 행정제도나 이론 등은 미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일본 유학파보다 상대적으로 주도권에서 유리한 부분이 많았다. 특히 이승만은 1950년대와 자신이 하야 하는 1960년까지 다량의 인재들을 국비를 들여 미국으로 유학을 보냈다. 이게 어느 정도였냐고 하면 1956 ~ 1957년 기준 미국내 외국인 유학생 중에 한국인이 캐나다와 대만에 이어 3위를 차지할 정도였다.[182] 이들이 이후 박정희 시대 산업화와 경제 발전 시기에 맹활약하게 된다. 당장 학제만 봐도 일제강점기의 그것은 기후적 요건으로 어쩔 수 없이 살아남은 춘추제 정도를 제외하면[183] 어떠한 흔적도 남지 않았다.
봉건적인 조선 사회 구조를 타파했다는 인상과 달리, 일본 제국은 여전히 작위 귀족이 존재하는 신분제 사회의 영향력이 여전히 남아 있어, 백정들이 형평운동을 벌이는 등의 사회적 차별 구조는 여전했으며 농촌의 경우 생산량 향상이라는 목적으로 지역 토호들과 결탁해 대지주들이 소작농들을 관리하는 구조가 여전히 남아 있었다.[184] 해방 이후에도 이들의 영향력은 막강하였다. 오늘날 한국에서 본격적인 봉건적 사회구조의 붕괴는 6.25 전쟁으로 보는 경우가 많은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185] 이른바 식근론자들의 논리대로라면 오히려 6.25 전쟁으로 이런 전통 사회구조를 파괴한 김일성 정권을 긍정해줘야 하는 모순된 상황이 발생한다.
애초에 일본 제국이 '근대국가'였는지조차 논란의 대상이다. 메이지유신의 시발점이 된 존황양이, 근황토막부터가 이 식근론자들이 그토록 혐오하고 폄하하기에 바쁜 조선의 국시, 그것도 대놓고 조선에서 배워간 성리학에 기반한다는 점은 그 어떤 식근론자, 조선까도 거론하지 않는 불편한 진실이다. 심지어 유신 이후 메이지 덴노의 명의로 발표된 군인칙유와 교육칙어 역시 20세기 근대국가의 것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전근대적 성리학 규범에 모를 박고 있으며, 패전 후 일본 중의원에서는 아예 이 두 어명의 배제를 결의해야 했다.[186] 덴노를 '현인신'으로 받드는 신정일치적 요소에까지 닿으면 그저 근대적 외피를 뒤집어씌운 전근대국가나 다름 없다. 이러한 전근대적 체제 하에서 외견적이나마 근대적 제도의 총아라 할 수 있는 헌법과 의회의 시행조차 배제되고 칙령과 제령에 의해 지배된 식민지가 '근대 사회'였다는 주장은 그 근저부터 설득력을 잃는다.
한국과 일본에서 몇몇 지식인들은 일본의 식민 지배가 한국이 공산당 세력에 지배를 받는 것을 막았다는 주장을 하기도 하나, 당시 일본 제국 자체가 조선뿐 아니라 자국민들에게도 딱히 좋은 정권은 아니었기 때문에[187] 조선과 일제 본토의 좌파, 아나키즘 세력의 협력은 매우 활발히 이루어졌으며 오히려 중국 내 공산당 세력을 탄압하던 국민당 정부 하 중화민국을 침략하여 중국 공산당의 세력을 키워주었고 소련의 건국과정에서 1905년 러일전쟁의 영향을 볼 때 오히려 일본 제국은 동아시아에 공산주의를 확산시키는 데 큰 일을 했다. 중국과 동남아처럼, 전쟁 이전에는 공산권으로 분류되지 않았던 지역들이 일본의 침략 이후 상당수가 공산권으로 뒤집힌 것만 보면 일본이 공산주의를 퍼뜨린 것이라는 아니냐[188]는 촌극과도 같은 해석조차 가능해진다.
또한 중국 침략을 위해 북한지역에는 대규모 공업지대가 형성되었고, 당시 세계 최대 규모의 수풍발전소가 지어졌으나, 분단으로 전부 한국땅에서 떨어져나가고, 공업지대도 소련군에게 약탈당하거나 6.25전쟁을 거치며 대부분 파괴되었기에, 일제가 남긴 유산은 현대 한국에 끼친 순기능적 면에선 물질적 유산보다 측정하기 어려운 무형의 유산에 훨씬 치중되었다.
이렇게 일제강점기에서 한국의 경제 성장과 발전을 찾으려는 것은 2차대전 이후 등장한 수많은 개도국들 중 한국이 2020년대 기준으로 사실상 유일하게 한강의 기적이라는 이름으로 선진국에 진입했던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원인을 찾으려는 노력에서 나온 것으로, 자본주의 맹아론이나 식민지 근대화론이나 결국 방법론만 다를 뿐 이러한 목적에서 나온 것이라 볼 수 있다.
식민지 근대화론을 지지하는 인물들은, 일본 제국주의의 지배가 근대적 행정력을 구축하고, 1차 산업들[189]과, 민간용 군사용으로 갈고 닦아놓은 전 국토의 도로, 철로, 교량 등 기본 교통 인프라들을 깔아놓았고, 이것이 한반도 전체에 근대적인 뼈와 힘줄과 신경망의 역할을 한 것[190], 이후 한국 개발독재의 고도성장이 이 위에 근육과 혈관과 살을 완성하는 과정이었으며, 결국 한국의 경제성공은 3세계의 작은 개도국의 산업선진국으로의 진입이 가능했던 최후의 기회인 1960~1980년대 세계의 전후 복구시기의 막차를 타는 '속도전'이었음을 염두에 둘 때, 사실 한국의 근대화에 사실상 최초의 근대적 통치 시기였던 일제 시기의 유산의 영향이 큰 것 자체는 부정할 수는 없는 사실임이 확실하다고 주장한다.[191]
이들의 주장은 이 시기의 조선은 근대적 행정체계가 도입되었으며 근대화의 기반이 마련되었다는 것이다. 즉 "(의도가 무엇이든) 일제는 조선을 개발했고, 이에 따라 일정한 근대화가 이루어졌다"라는 것.
하지만 제국주의를 통해 대륙으로 뻗어나가려 했던 일제의 의도 역시 무시해서는 안 된다. 일본이 적자 식민지 조선을 유지한 것은 군사적인 이유였고 총독부가 예산 대부분을 철도를 시설에 투자한 것은 일본의 팽장주의 정책때문이었으며 2위가 피지배민족인 조선인을 통제하기 위한 경찰 예산이었다는 것만 봐도 일본의 의도는 명확하다. 그러나 일본이 여타 제국주의 국가들이 오직 자신들을 위해서 식민지에 인프라와 편의시설을 깔고 소작농을 쥐어짜고 사다리 걷어차기를 했다한들 이것 또한 역사의 한 단편임을 인지해야된다.
위에서 분야별로 이어진 논의를 종합하자면, 일본이 한반도에 근대적 하드웨어를 건설했을지언정, 그 근대적 인프라와 제도를 운영할 능력은 일본의 통치가 종료되는 그 순간까지도 전혀 갖춰지지도 허락받지도 못했다는 것이 핵심이다. 그 운영의 경험은 일본의 통치가 종식된 이후에야 미군정을 거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됨으로써, 그리고 이어진 한국전쟁을 수행하고 극복하는 과정을 거치면서야 비로소 시작되었다. 근대적 요소를 자체적으로 운영할 능력이 없는 사회를 근대사회라 부르는 것은 전혀 타당하지 못하다. 일본의 통치가 한반도를 '발전'시켰다고 주장하려면 이 경험의 상실을 벌충할 수준의 반대급부가 있어야 하지만 누차 지적했듯 일본은 이 적자투성이 식민지에 제대로 된 투자 자체를 꺼렸고, 일부 투자의 과실은 조선이 아닌 일본 내지로 흘러가 조선 내에서 순환되지 못했다.
또한 이러한 주장은 해방 직후, 한국 전쟁 직후 그야말로 아무것도 남지 않은 3세계 빈곤국가에 불과했던 대한민국의 '한강의 기적'의 원인을 지나치게 협소하게 바라보는 주장이며, 한강의 기적의 원인의 '절대가치'인 한국 민족이 스스로 치러야 했던 '막대한 노력과 희생의 가치'를 등한시한 굉장히 자학론적인 시각이다. 한강의 기적은 한국민족 자체의 처절한 '자강'의 결의가 없었으면 그 누구도 기대하지도 원치도 않는 결실이었다. 자유진영 국가인 미국과 일본은 한국의 중공업화를 탐탁치 않게 여겼으며, 미국의 경우 이미 수많은 3세계 국가들의 경제발전을 위해 투자금을 지원했다 전부 떼인 충격 때문에 박정희 정권의 중공업 산업 도전을 굉장히 회의적으로 보고 투자 자체를 꺼린 경향이 컸으며, 한국에 대한 지원은 대부분 식량 지원에 머물러 있었다. 또한 일본의 경우에도 한국이 해보지도 않은 자본집약 산업을 일으키다 망해 그 여파로 한반도 남부마저 적화될까 두려워했던 기색이 강했다.[192] 대한민국을 둘러싼 대륙 국가들은 전부 적성국가들이었고, 한민족은 이 가운데서 살아남기 위해 사력을 쏟아부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은 산업발전에 필요한 시드머니를 확보하기 위해 베트남전에서 서방세계를 위해 피를 흘려야 했고, 중동의 열사의 사막이나 동남아의 정글 등 돈이 되는 곳은 모조리 찾아다니며 산업화의 재원을 확보하는데 수십년간 민족의 사활을 걸고 매진해야 했다. 따라서 '일본의 전후 배상금과 차관, 산업기술 지원이 현대 한국의 경제성장에 큰 도움이 되었다'라는 논리는 옳아도, '일본 제국의 통치가 현대 한국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라는 주장은 대한민국 경제발전사의 윤곽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편협하고 무지한 주장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한국사 상식이 부족한 상태로 수혜론만 내세우는 일본의 우익들 또한 '다 된 남의 밥에 숟가락 얹기'라는 비난을 피할 수 없다.
일제강점기를 옹호하는, 혹은 이 시기에 나타난 '긍정적' 변화를 강조하는 이들의 가장 큰 허점은 결국 그 정당화를 위해 근대화에 나서지 않은 가상의 조선을 끌어들여 비교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런 조선은 이미 조선-대한제국 스스로도 근대화에 나선 시점에서 사라졌다. 물론 그 근대화에 여러 한계가 존재하고 많은 부분에서 외부의 도움을 받은 것도 사실이지만, 일제강점기에 도입된 근대적 체계들 역시 일본 스스로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서양이 만들어낸 것을 일본이 제공받아 재해석한 것일 뿐더러,[193] 그 근대적 체계들을 한국이 자국에 이식하는 과정에서 그 한국이라는 존재를 없애버린[194] 것이라는 가장 중요한 전제를 외면할 수 없다. 결국 "일본을 통해 이상하게 변질된 채 일방적이고 강압적으로 이식된 근대화가, 서양과 직접 교류하여 진행되는 근대화보다 무엇이 나은가?"라는 질문 앞에 무너질 수밖에 없는 논리다.
사실 일제강점기 조선은 세계사적으로도 굉장히 특수한 위치에 있는데, 사실상 제국주의 열강이 마지막으로 신규 획득한 직할 식민지이기 때문이다. 즉 1차대전을 계기로 열강 간에 전후처리로 기존 영토 혹은 식민지를 넘기거나[195] 아예 2차대전 전범행위로 획득한 식민지들을 제외하면 조선 이후에 열강이 기존의 독립국가 혹은 정치공동체를 멸망시키고 식민지로 편입한 사례는 찾기 힘들다.[196] 조선이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멸망한 국가가 아님에도 2차대전의 종전과 함께 독립한 것도 이런 특수성이 반영된 결과였다. 앞에서 일본의 한국 병합은 매우 급작스러웠다고 지적했지만, 반대로 일본이 한국 통치에 대한 내부논의를 완료하고 병합을 추진하려 했다면 이 때는 이 '논의'의 완료 시기에 따라 아예 병합 자체가 불가능해지고 최대 보호국 체제에 만족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고려 말의 원 간섭기와 비슷한 '일본 간섭기'가 되는 것이다.[197] 한국인들이 일제 지배에 대해 거부감을 보이는 것도 여기에서 기인하는데, 어찌됐건 좌충우돌하며 20세기 초까지 독립국가 체제를 유지하고 나름 근대국가 단계에도 발을 들여 본 나라가 하루아침에 식민지로 전락하고 반세기 가까이 사회의 주체로 활동할 길이 막혔으니 당연히 그 이후 일제 통치가 어떤 성과를 냈건 간에 '한국인'들이 스스로 근대화를 이룩할 기회를 빼앗겼다고 인식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특히 해방 직후 일본이 받았어야 할 분단이라는 전후 징벌을 짬처리당한 부분까지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다.[198]
이와 별도로 대한민국과 일본, 양국 민족의 민족관에도 큰 영향을 끼쳤는데, 일제시대 내내 일본 제국은 조선인과 일본인이 조상이 같은 동조동근론 내선일체론을 내세우며 지배해왔기 때문에 그에 맞는 사상을 일본인들에게 주입시켰는데, 전통 가부장 질서에 비추어볼 때 일본인들은 정실부인과 결혼해 낳은 종가집 정통계승자의 민족이고, 조선인들은 첩과 낳은 방계 서얼 민족이기에[199], 민족의 역사에서부터 시작해서 거의 모든 방면에서 서자의 민족인 한민족의 '열등성'을 강요받았다.[200] 유능한 형 일본이 없으면, 무능한 동생 조선은 자립할 수 없다는 논리로 전개된 조선민족관을 역사학적 측면에서만 고려할 때 식민사학이라고 일컫는다.
이태왕(고종)과 이왕(순종 → 영친왕)은 천황이 하사한 작위일 뿐 통치권은 전혀 없었다. 근왕파들이 남아있엇지만 고종이 의문사하고 구심점이 사라져 독립운동가 중 구 대한제국 황실의 복원을 꾀하는 근왕파를 소멸시키는 결과를 낳았다.[201] 그리고 실제로 이왕가에서는 죽을때까지 일제에 저항하며 틈틈히 망명할려던 고종,대한민국 임시정부로 망명 및 참여를 시도한 의친왕[202] 등 극소수를 제외하면 대다수는 순순히 일제에 순응했으며 적극적인 친일파도 제법 나왔다. 이것은 대한제국 황실 복원론에 대해 사람들이 시큰둥해 하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203]
- 덕수궁 이태왕
- 창덕궁 이왕
일제강점기는 그야말로 격동과 암흑의 시대였던 만큼 드라마틱한 이야기가 끊임없이 나올 수 있고 한국은 물론 중화권, 동남아시아, 일본까지 시장으로 삼을 수 있으며[206] 고증을 위한 자료까지 많이 남아 있어 영화, 연극, 드라마 등 공연예술에서 시대배경으로 가장 많이 채택되고 있다. 특히 영화의 경우, 1980년대까지만 해도 시대적 여건과 제작환경의 한계로 '일본은 나쁜 놈' 이상의 주제의식이 없는 퀄리티 낮은 반일반공[207] 민족주의물이 다수였으나[208] 21세기부터는 주제의식과 완성도, 작품성과 대중성을 둘 다 잡는 꽤 괜찮은 영화들이 만들어지고 있다. 일본 작품의 경우 일본 제국을 배경으로 한 작품조차도 다이쇼 로망 작품 일부나 2차대전 당시의 일본 본토만 나오고 식민지 조선은 아예 나오지 않는 경우가 많은 편이다. 물론 흑무경담처럼 아예 작품이 없는 건 아니나 적은 편이다.
- 일제강점기/창작물 참조
- 35년(만화)
- 구미호뎐1938(드라마)
- 감격시대: 투신의 탄생(드라마)
- 경성 스캔들(드라마)
- 경성크리처(드라마)
- 경성학교: 사라진 소녀들(영화)
- 곱게 자란 자식(만)
- 절정(드라마)
- 대체역사물
- 새벽의 여명(소설)
- 2009 로스트 메모리즈(영화)
- 비명을 찾아서(소설)
- 일 베티사드 - 한반도(일 베티사드)(게임)
- 갬블링 1945(소설)
- 대통령 각하 만세(소설)
- 한국 독립 전쟁(소설)
- 대호(영화)
- 덕혜공주(영화)
- 도적: 칼의 소리(드라마)
- 동주(영화)
- 말모이(영화)
- 모던 보이(영화)
- 무정(소설)
- 무지개를 이은 왕비(드라마)
- 미스터 션샤인(드라마): 1902년에서 1907년까지의 구한말 시기를 다루고 있다. 마지막회 최후반부에 1910년으로 넘어간다.
- 밀정(영화)
- 바람의 아들(드라마)
- 박열(영화)
- 봉오동 전투(영화)
- 안중근 관련 미디어
- 아가씨(영화)
- 아나키스트(영화)
- 암살(영화)
- 야망의 신화(게임)
- 야화, 야화 2 (게임): 1996년과 1999년에 FEW에서 만든 게임으로 김두한과 시라소니를 선택하여 일제시대 당시 주먹계를 평정하려는 사투를 그린 액션게임. 하야시가 최종보스 이며 1편은 벨트스크롤 액션게임과 전략 시뮬레이션의 두 파트로 나뉘어 있고 2는 아예 RPG액션으로 바뀌어 있다.
- 여명의 눈동자(드라마)
- 이몽(드라마)/(영화)
- 일본군 위안부 관련 미디어
- 청연(영화)
- 해어화(영화)
- 815(게임): 1998년에 클라리온 소프트에서 제작한 게임으로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광복군과 일본군의 대결을 그린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이다. 비록 고전 게임이라 완성도는 떨어지지만 대한민국 광복 50주년을 기념한 작품이기 때문에 자료 고증이 잘 되어 있는 편이다.
- 항거: 유관순 이야기(영화)
- 조선인 여공의 노래(영화)
- MazM: 페치카(게임)
- 마이웨이(영화)
- 파친코(드라마)
- 흑무경담(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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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한제국의 병합 직후 칙령(勅令) 제318호 '한국의 국호를 고쳐 조선으로 칭하는 건(韓國ノ國號ヲ改メ朝鮮ト稱スルノ件)'이 발령되면서 이름이 '조선'으로 환원되었다. 이후 조선은 일본 제국의 행정구역(외지)으로서의 이름으로 간주되었다.[2] 일제강점기 조선이나 조선총독부 그 자체를 상징하는 깃발은 따로 없었고, 본국인 일본의 깃발인 일장기만이 공식적으로 통용됐다. 다만 조선총독부의 전신인 한국통감부의 상징 깃발은 있었고, 조선총독부의 공식 문장은 아니지만 봉함지에 쓰이는 문양 정도는 있었다. 조선총독부 문서 참조.[3] "천하의 여덟 방향을 하나의 집으로 한다"라는 뜻으로, 일본 제국의 표어로서 자주 사용되었다.[4] 8월 15일은 일본이 옥음방송을 통해 일본의 무조건항복을 촉구한 포츠담 선언을 수락한 날짜이고, 다음날인 8월 16일에는 건국준비위원회가 경성중앙방송을 통해 「海外·海內 3천만 동포에게 고함」전국방송 이후 서대문 형무소 및 전국의 28개 형무소에서 재소자들이 석방되었고 한국인 경찰이 출근하지 않는 등 총독부의 경찰력, 행정력이 마비되고 각지의 한국인 단체들이 치안을 담당하기 시작하는 등 8월 15일을 실질적인 해방날로 인식하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8월 15일을 광복절로 정의하며 일제의 강점으로부터 벗어난 날이라고 하였으며, # 국경일에관한법률을 제정하며 8월 15일을 광복절로 하였다. 일본 또한 8월 15일을 종전기념일로 정하였다.[5] 유교, 불교, 그리스도교, 천도교 등 국가신토를 제외한 나머지 종교들은 직간접적으로 차별받고 탄압당했다.[6] 대일본제국 헌법은 겉으로는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였으나, 외지(식민지)에는 헌법이 제한적으로만 적용되었으며, 심지어 헌법이 적용된 내지에서조차 국가신토의 탄압을 받아 종교의 자유를 온전히 누릴 수 없었다.[7] 약 600만 신자를 보유한 한반도 최대 종교였다.[8] 상해임시정부에 가장 많은 독립자금을 제공한 종교이다.[9] 1936년에 조선총독부에서 '유사종교해산령'을 발표함에 따라 강제로 해체되었다.[10] 일제강점기 당시 전체 인구의 97퍼센트를 차지했다.[11] 전체 인구의 2~3%에 불과했으나 지배층, 대지주, 부유층들이 주류였다. 1945년 8월 15일 무조건 항복 이후 대부분 일본으로 철수, 귀국. 그 중 잔류를 원하는 극소수 일본인들 또한 미군정과 소련군정에 의해 결국 본국으로 추방되었다. 하지만 조선인인 척하며 몰래 남은 일본인들도 있었다.[12] 본국과 달리 조선은 조선 총독이 입법, 사법, 행정의 전권을 행사하며 심지어 일본 국회의 통제도 받지 않았다. 다만 1940년대부터 내외지 행정 일원화 조치로 총독의 권한이 제한되었으며, 1944년에는 내각의 관리감독 하에 두었다.[13] 무단 통치기 시작[14] 문화 통치기 시작[15] 민족 말살 통치기(일제의 조선어 말살정책, 창씨개명 등) 시작[16] 조선어학회 사건 발발, 징병제, 학도병 지원제 실시[17] 8.15 광복[18] 한국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쓰이는 명칭으로, 일본 제국주의 강제점령기의 준말.[19] '한국(韓國)' 국호의 어원과 의미 분석. 윤명철 127쪽[20] 일부 의견에서 말하는 일제강점기에 피해를 본 건 조선이지 한국이 아니라는 건 해당 명칭의 변천과정조차 반영하지 않은 오류이다.[21] 박정희는 남로당 출신이기에 공산주의 행적을 지녔다고 비판을 받기도 했으나, 최소한 자신의 집권기에는 대외적으로 반북, 반공을 강조했다. 이 시기에 해당 단어가 쓰였다는 기록이 일제강점기라는 용어가 반공주의가 팽배해 있던 시절에도 사용되었다. 당장 이승만이나 장준하와 같은 반공주의자들도 일본 제국주의에는 극도로 부정적이었다.[22] 1980년대까지도 동네에서는 일본어를 잘 하는 노인을 찾아보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이들이 소, 청년일 때 일본어를 학교에서 배워 사용했기 때문으로,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에도 '신구와 노인 배우가 일제시대 사람이라서 일본어를 배웠다'는 내용이 나오며 일본어로 연기를 코믹하게 한다.# 원로배우 이순재도 방송에서 일제시대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실제로 여러민족이 사는 나라의 경우 다양한 나라의 말들이 사용된다.[23] 다만 해당 법률 자체는 강제동원에 관한 것이므로 1938년 4월 1일부터 1945년 8월 15일 사이의 시기만을 대상으로 한다.[24] 대표적인 단체로 '일본반제동맹', '일본노동조합전국협의회', '수평사' 등이 있다.[25] 영문 위키백과 항목의 제목으로, 일본 측 용어인 '日本統治時代の朝鮮'(일본통치시대의 조선)을 그대로 영역한 것이다.[26] 물론 다른 방법도 있기는 하지만,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나 한국사능력검정시험에서 수험생들의 편의를 위해 3분법을 정식 채택하면서 사실상 대세가 되었다.[27] 그 당시 사람의 수명으로 따지면 개인의 일생 전반을 차지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28] 세는나이 계산법의 악영향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1980년대말 교육부에서는 제4차 교육과정 개편 때 초중고 교과서에 35년으로 정정했다.[29] 이 조약이 체결되고 나서, 1주일 뒤 공표하며 대한제국은 일본 제국에게 대한제국의 국권을 상실하게 된다.[30] 寺內正毅 てらうち まさたけ 1910년 7월 메이지 덴노한 임명한 3대 한국 통감으로 한일병합조약을 목적으로 옴[31] 이 이왕가는 일제 패망 이후 연합군 최고사령부에 의해 화족정리가 이루어지기 전까지 지속된다. 일본 황실로의 편입은 명목상이고, 실제로는 왕가로 격하되었을 뿐이다.[32] 武斷統治. 무력으로 억압한 통치라는 뜻인데 여기서 무단을 無斷, 그러니까 국제법적으로 또는 외교적으로 천부당만부당한 불법 통치를 자행한 시기라서 무단 통치라 한다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한자에 익숙지 않은 청소년들이 특히 그러하며, 따라서 '헌병경찰통치'라는 이칭은 이러한 혼동을 예방하기 위한 성격도 있다.[33] 정상숙의 <러일전쟁 전후 일본의 대륙정책과 데라우치>(2006), 정연태의 <조선총독 寺内正毅의 한국관과 식민통치-점진적 민족동화론과 민족차별 폭압정책의 이중성>(2004), 권태억의 <1910년대 일제 식민통치의 기조>(2004) 참조[34] 당시 러일전쟁이 불과 5년 전 일이었고 원래라면 아무리 서양열강들 사이에서는 후진적이었다고 여겨지는 러시아도 그래도 서구열강이었던 만큼 체급에서도 상대도 안될 일본이었지만 영미의 지원과 피의 일요일 사건이라는 러시아 내부의 정치적 문제로 간신히 이긴 것이었다. 그마저도 막대한 배상금을 뜯어냈던 청일전쟁과 달리 전후 배상금을 얻어내지 못했고 재빨리 미국의 중재를 받아 평화협정을 맺은 것이기에 사실상 무승부였다. 당연히 러시아 내부에서는 일본에 대한 적개심이 강했고 일본은 제2차 러일전쟁의 발발 가능성을 항상 염두에 둬야 했다. 러시아 혁명으로 소련이 건국되어서도 말이다.[35] 그렇다고 이런 요인이 없었더라도 일제는 결국 조선을 식민화했을 것이다. 당시 제국주의 식민지 대부분은 영토확장으로 대중들의 민족우월심리를 만족시거나 전략적 완충지대를 확보하기 위해 식민지를 확보하는 등 경제적 이득 보다는 정치적인 면이 더 많이 작용하고는 했다. 거기다 일본은 을사조약 이래로 한국통감부를 설치하고 식민지배를 준비 중이었다. 다만 앞서 말했듯 당시 일제의 경제적 여력이 본토의 사정만으로도 녹록치 않았기에 우선 외교권을 강탈하고 친일적인 정부를 구성해 식민화로의 연착륙을 계획한 것이다. 그러나 헤이그 특사와 같은 고종의 저항, 정미의병, 13도 창의군 (+만주철도 이권을 둘러싼 미일러간의 암투) 등으로 그러한 구상이 어렵게 되어 결국 조기병합으로 노선을 변경한 것이다.[36] 한반도 면적 223,892㎢ 혼슈 면적 227,943km²[37] 대한제국 말 인구 1,293만, 일본 인구 4,918만[38] 이것으로 일진회가 토사구팽당했다[39] 식민지는 투자에 비해 현지인들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치안, 국방 비용이 많이 들어간다는 딜레마가 있다. 이 때문에 많은 국가들이 2차 대전 후 식민지를 독립시키고 자유무역 체제로 전환하여 본토의 이익을 늘리고자 한 것이다.[40] 다만 헌병으로 치안활동을 했던 것은 비용문제는 아니었는데 당시 일본은 징병령을 실시했으나 헌병은 육군 상등병에서 지원자를 뽑아 시험을 통해 선발했다. 대우도 좋아서 1920년대 기준으로 가장 낮은 계급인 헌병 상등병의 월급(50엔-2020년 기준으로 약 250만 원)이 일본 경찰 순사 초급(45엔)보다 많았다. 또한 일제는 조선인 헌병보조원도 대거 채용했는데 기본적으로는 순사 봉급과 같은 수준이었다.출처 당시 채용된 조선인 순사보의 월급은 약 40엔이었다.[41] 다른 시기에서 조선총독부의 운영은 매번 적자로 본토의 원조가 필요했다.[42] 기사[43] 푸에르토리코의 주민들은 미국 시민권이 있지만 대통령 선거권은 없다. 또 연방 의회에 하원의원 1명을 뽑아 선출해 파견하지만 표결권은 없다.[44] 조선총독부제령 제11호, 1912.3.18. "제42조 이 영 시행 후 효력을 가지는 구 한국법규의 형은 다음 예에 따라 이 영의 형명으로 변경한다. (중략) 태형 20일 이하의 구류 또는 과료" # 극소수의 국가를 제외하고 근대 형법 체제에서 거의 사라지다시피 한 신체형인 태형을 식민지 조선에서 부활한 게 문제인 이유는, 대한제국에서 폐지한 형벌의 부활이라는 점에 있어서도 문제지만, 대한제국에서 폐지 전까지 재판소 확정 판결이 후에야 집행할 수 있던 형벌을 헌병과 경찰이 재판 없이도 즉결처분권을 사용하여 행사할 수 있도록 허락한 점에 있다. 시간이 걸릴 게 뻔한 재판 과정을 극도로 축소시키거나 아예 거치지 않고도 이들의 자의적인 판단에 따라 언제든지 매타작을 벌일 수 있도록 했으니, 사실상 고을의 수령이 사법권을 전담했던 조선시대로 돌려버린 것이나 다름없는 셈이다.[45] 주의할 것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으로 풍부했다는 것으로, 아무리 천연자원을 많이 뽑아도 조선의 경영비용을 메울 수 없었다. 이는 일제가 만주와 중국으로 적극적으로 팽창하게 되는 직접적인 동기가 된다.[46] 정연태, 식민권력과 한국농업, 서울대학교 출판문화원, 2014[47] 대체로 식량은 조선, 상품성 작물은 대만.[48] 하지만 정작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의 의도는 패전국의 식민지를 해체시켜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것으로, 승전국인 일본의 식민지는 건드리지 않으려 했다.[49] 1910년대 일제의 폭압적인 무단통치에 대한 폭발이기도 하였다[50] 특히 일본 내각은 이 기회에 그간 일본 천황 직속으로 일본 내각에서 독립적이던 조선 총독을 대만 총독처럼 내각이 통솔할 수 있겠끔 만들려고 시도했다. 다만 대만과 달리 중국과 육지로 연결되어 대륙침략의 전진 기지라는 지정학적 요인과 일본 육군의 반발로 실패하였다.[51] 헌병 경찰과 군인을 통한 무력으로 지배하던 무단통치에 대응하는 말로 일본이 자칭한 것이 시초다. 실제로 문화통치에 맞게 조선인의 기본권이 제한적으로 허용되는 등 식민지배기간 중 나름의 조선인 언론출판계의 황금기라는 점에서 쓸 수도 있으나 그 실상은 언론을 통한 조선인 동향 감시와 친일파의 육성을 목적으로 하는 만큼 민족주의 사학 입장에서는 민족분열통치로 부르는 편이다. 그러나 그 실질적 의미는 확실히 문화적 분해와 동화를 목적으로 하는 등 조선 문화에 대한 전략이 핵심적인 부분이었으므로 선전의 목적이 아니더라도 문화 통치로 부를 만 하다.[52] 무단통치 시기에는 일본 육해군 대장 출신만이 총독에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문관 총독이 임명된 대만과는 달리 조선에서 문관 출신의 총독이 임명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그나마 사이토 마코토가 유일하게 해군 대장 출신이다. 다이쇼 데모크라시에 따라 일본 정부에서는 문관을 조선총독으로 파견하려고 후보까지 물색하여 2~3인을 준비했으나 일본 육군이 거세게 반발해서 결국 문관총독을 보내지 못했다. 심지어 일본 정부는 1939년 독소 불가침조약 직전까지도 조선에 문관 총독을 보내려 했었다. 조선총독부가 계속 일본 내각 말을 안 들어먹으니 견제 차원이었던 것. 하지만 독소 불가침조약이 성립되면서 제2차 세계 대전이 터지자 일본 정부는 조선총독을 군부가 차지하는 것을 인정하고 만다. 사연이 조금 복잡한데, 1939년 히틀러가 폴란드로 쳐들어갔을 때 일본 제국은 나치 독일을 비난하고 폴란드 제2공화국을 지지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폴란드 전선에 집중하느라 조선총독 문제를 버리게 된 것이다.[53] 창간 당시에는 시대일보였다. 이후 중외일보-중앙일보-조선중앙일보로 신문사 명칭이 바뀌었다.[54] 이를테면, 충청남도와 충청북도를 통틀어 공주고등보통학교, 대전여자고등보통학교가 설립된 것이다.[55] 이 법은 조선을 강압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일본에서 '당근(보통선거권)과 채찍'을 내걸었던 것 중 '채찍'으로 일본 내의 사상범(사회주의자, 무정부주의자, 공화주의자(천황제 반대) 등) 탄압을 주목적으로 제정된 법으로, 시행시기도 한반도보다 일본열도가 더 먼저 적용되었다. 이 때문에 일본 열도에서도 사상 탄압이 한반도만큼 극심했다.[56] 이는 조선총독이라는 자리가 덴노 직속의 독립적 지위이기 때문에 문관들이 거머쥔 일제 본토 내의 권력구도에서 벗어나 총리가 되기 위한 '무관들의 출세 코스'로 여겨진 탓이기도 하다. 이것이 일본의 대만 통치와의 차이다.[57] 일반적인 편견과 달리, 단순 도망이 아닌 합법적으로 중국이나 만주 등 해외로 출국하는 조선인들이 당시에도 꽤 많았다. 조선에서야 일본인 다음 2등 신민이었지만 해외에서는 일본인 신분이었고 일본영사관의 관할하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오히려 그런 일본인 신분을 악용하여 중국인 등에게 패악질을 일삼는 악질적인 사람들 또한 생각보다 많았기에 중국의 반한감정이 시작된 유래가 되기도 했다. 그런 이유로 중국국민당 정권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조선인들의 항일운동을 다소 미심쩍게 보는 성향 또한 있었는데, 윤봉길 의사 의거 이후 그런 의심이 상당히 희석되었다.[58] 溝口敏行(Mizoguchi Toshiyuki)&梅村又次(Umemura Mataj), 구일본식민지경제통계 제3부 표8[59] 영상에는 숭례문을 시작으로 당시 혼마치(本町)로 불리던 충무로 일대, 용산의 조선신궁, 창덕궁, 경복궁, 조선총독부 청사, 구서울특별시청, 용산의 조선호텔, 조선은행, 경성우편국, 용산기지의 일본군 막사를 보여준다. 즉, 현대의 종로구, 용산구, 중구 일대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서울의 노른자 지역인 만큼 영상이 당시 조선인의 삶을 대표하지는 않는데 거의 모든 식민지가 그렇듯 근대적 인프라가 제공되는 남촌, 용산, 명동 일대는 지배층인 일본인 거주지였다. 반면 대다수 조선인은 동대문 밖, 을지로, 운좋으면 북촌에서 거주했다.[60] 溝口敏行(Mizoguchi Toshiyuki)&梅村又次(Umemura Mataj), 구일본식민지경제통계 제3부 표8[61] 이당시 경제성장률은 식민지 치고 높은 3%대의 성장을 보여준다. 당연하지만 전쟁하는 군대는 결국 물자를 소모하는 집단이지만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돈은 돈대로 찍고 시설과 자금은 계속 투입되기 때문.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당시 제재에도 높은 경제성장률을 보이는 러시아가 좋은 예시다.# 한계에 다다르거나 전쟁이 끝면 스태그플레이션으로 돌아올수 있다. 41년도 기점으로 경제가 망가지는 일본과 구한말 이전 수준으로 지표가 악화된 조선이 그 예.[62] 이 시기는 우가키 가즈시게 총독의 시대로 소위 문화 통치기와 민족 말살 통치기 겹친다.[63] 한국의 독립운동가이자 조선의용대에서 활동했던 김학철은 임시정부에 합류하고자 중국 상하이로 건너갔는데, 상하이에 임시정부가 없어 김원봉의 의열단에 합류했다.[64] 만주, 간도 일대 거주하던 조선인 출신 사회주의 계열 인사들 중심으로 독립운동 전개가 되었으나, 민생단 사건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된다. 이후 30년대 후반 가면서는 간도의 조선인 출신 사회주의자들과 중국인들이 연합해 동북항일연군 결성해 활동하기도 하였으나, 이마저도 1930년대 후반~1940년대 초반무렵 크게 타격받는다.[65] 당시 지주들의 소작인 착취가 악랄할 정도로 심했으며 일본 제국도 지주들의 편을 들어 소작인을 탄압했다.[66] 조선경제연감 1948[67] 조선경제연감, 1949[68] 조선은행 조사부와 조선경제통계요람 1949[69] 태평양 전쟁 문서를 보면 알 수 있지만 일제는 중일전쟁을 하던 중 석유를 얻기 위해 했던 일련의 행동들이 당시 중립을 고수하던 미국의 심기를 건드리면서 단일전선에서 이중전선으로 확대되는 결과를 낳는다. 이 때문에 안 그래도 부족한 전력이 더 부족해지게 되면서 식민지와 본토를 가리지 않고 수탈이 극에 달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70] 당시 일본은 이미 중국 전선에서 가용가능한 청년층의 상당수를 투입하고 있었다. 그런데 미국과 전쟁을 하게 되면서 징병에 부적합한 40% 안팎을 제외한 나머지가 모두 징집대상이 되었고, 그럼에도 인력이 부족해지자 조선인과 대만인을 징집하기로 한 것이다. 일본은 가급적 조선인이나 식민지인에게 무기를 허락하지 않았는데 그 총구가 일제 자신들에게 이어져 반란이 일어날까 내심 불안했기 때문이다. 그나마 초기에는 지원이었으나 1944년 이후 강제징집으로 바뀌었다.[71] 사실 경술국치 이후에도 조선인들은 일본 국적이긴 했으나 완전한 일본인으로 인정받은 것은 아니다. 외지인이라고 해서 별도로 구분했다. (타이완의 경우는 본도인) 이 시기부터는 아예 조선인을 완전한 일본인으로 흡수하기 위해 강압적 동화정책을 실시하고, 장기적으로 정식 일본 시민권 부여를 통해 형식상 차별은 없애는 방안이 예정되어 있었다.[72] 2등 신민 대우나 강제 징용, 학병 제도, 뒤이어 이뤄진 강제 징병 등은 모두 조선인의 정체성을 말살하고 일본인으로 완전히 바꿔놓기 위해 이뤄진 계획의 일환이었다. 최유리의 <일제말기 식민지 지배정책연구>에 따르면 조선인을 일본인처럼 세뇌해야만 제대로 된 군인으로 징집하여 쓸 수 있다는 점을 들어 의무교육제도를 1946년부터 실시할 예정이었다고 한다.[73] 헌법의 법제상 징병령(徵兵令)을 실시하여 국방의 의무를 부과하게 될 대상은 시민이고, 이 시민에게는 참정의 권리도 따라온다. 의도치 않게 조선인의 참정권을 인정해줘야 하는 상황에 직면한다. 대일본제국 헌법을 개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식민지를 늘리다 생긴 허점 중 하나였다. 한국인 뿐만 아니라 대만인 등에 대해서도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인정해야 하고 전쟁이 불리해지는데도 불구하고 일본 제국의회에 식민지를 위한 추가 의석까지 마련해야 할 판이었다. 그러나 제국의회 확대안은 쇼와 덴노가 계속 미루다가 패전과 함께 무산되었다.[74] 당시 일본 군부는 식민지 출신 장병들의 반란 가능성을 우려하여 내각의 조선인 징병 제안을 계속 거부하였다. 안 그래도 조선 본토, 중국에서 항일운동이 계속되는데, 조선인을 징병하여 사격술을 가르치고 총기를 쥐어준다는 것은 일본 입장에서는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전황 악화와 병력 부족에 따라 결국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게 된다.[75] 이때 뜯긴 것이 안성선 안성역-장호원역 구간과 경북선 점촌역-안동역 구간. 해방 후 경북선은 점촌-영주역으로 노선이 바뀌면서 다시 안동까지 이어졌으나 안성선은 끝내 복구되지 못하고 1980년대 후반 나머지 구간도 폐선된다. 오늘날 안성 버스 37이 비슷한 선형을 가지고 있다.[76] 이 당시까지는 주로 변기가 많이 없었기 때문에 집안마다 요강을 썼다.[77] 특히 일본 제국은 조선인을 열등하게 여기고 차별했다. 어려운 처우를 개선할 생각은 하지않고 무자비한 탄압으로 일관하여 일본 제국에 대한 조선인들의 적개심은 매우 높았다.[78] 개중에는 실제 전쟁 진행 양상을 거의 정확하게 맞힌 내용도 존재했다.[79] 일제 본토도 이와 비슷한 문제로 피폐해져가고 있었다.[80] 지방에서는 건국준비위원회의 행정, 치안 활동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81] 직전 조선의 최고액 화폐는 갑 1000엔짜리였다. 즉 무려 100배에 달하는 초고액 화폐를 뿌려댄 것. 직전 한반도 전체 보유액은 40억 엔 정도로 추산되었으나, 광복 직후에는 140억엔까지 치솟는다.[82] 일본인들에 대한 과격한 폭력과 사회 혼란이 이어진 것으로 오해할 수 있으나 당시에는 광복의 사실을 몰랐거나 광복을 기뻐하거나 하는 국민보다 그 사실을 이용해서 득세한 소련을 위시한 공산주의자와 미군정 체제에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결탁한 친일파 그리고 귀국 전에 인플레이션을 일으키고 문제를 일으킨 일본인이 문제였다. 여러 군데서 폭력적인 일이 벌어졌을 거라 예상되지만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이 각각의 체제를 신봉하며 재집권하고 일본인을 공격하려기보다는 광복의 개념을 잘 이해하지 못한 농민과 인부가 대다수였다.[83] 특히 이 문제는 상당수 독립운동가들과 그 후손들에 대한 푸대접 논란과 종종 결부되기도 한다.[84] 3.1운동 당시 학살, 관동 대학살, 간도 참변 등 무단 통치기, 문화 통치기에 학살된 인명을 모두 합산해도 최소 수 만명에 달하고, 독립운동으로 목숨을 잃은 순국선열도 확인된 사례만 15만 명이며 # 위안부 사망자 14만명이 확인되었으며 # 강제징용으로 희생된 조선인도 그 수가 조금씩 밝혀지고 있고 합산 결과 수백만에 달한다는 것이 밝혀졌다. 일제강제징용피해자지원재단의 공식자료, #, #, #, # 정확한 통계는 불분명하지만 35년 동안 최소 100만 명 이상이 죽은 것은 확실하며 2차 대전 한정 뿐만 아니라 관동대지진 등 학살로 인한 사망자, 강제노역·징병·징용 등으로 인한 사망자 등을 모두 합하면 최대 수백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한반도 전체의 조선인 인구가 2천만임을 감안하면 절대 적은 수가 아니다.[85] 이 연구에 따르면 1900년대, 1910년대생도 각각 그 이전 출생자보다 키가 작아 신장이 계속 작아진 걸로 나타났다. 신장은 성장기의 영양 상태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이들이 청소년기인 1910, 1920년대 영양 상태가 각각 전보다 나빴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사할린 거주 조선인은 노무자로 끌려간 이가 대부분으로, 키가 조선에서 다 자라고 성인이 된 뒤 사할린으로 갔기 때문에 이들의 신장은 사할린이 아니라 조선에서의 영양 상태를 보여준다일제때 조선인 키 3cm이상 줄어[86] 이는 지금도 끔찍한 짓이지만 당대관점에서는 더욱 의미가 큰데 당시에만 해도 서구에도 왕정, 제정이 많이 남아 있었기에 당시에는 신분>인종이라서 아무리 식민지인이라고 해도 왕족이나 왕이라면 서구 열강들도 식민지인이라고 차별하거나 하지 않았다. 이런 와중에 잡범도 아니고 명색이 외교관이라는 사람이 밤중에 졸개들을 몰고 왕비를 살해한 사건은 충격이 아닐 수 없었고 실제로도 세상에 사건이 드러나자 일본은 비난에 시달렸으며 결국 주모자인 미우라 고로를 잠시 가둬야 했다.[87] 이게 그냥 고종이 굴복해서 제위를 내려놓았다면 강압적이었지만 이 정도는 서구 열강들도 한 것이라 그들과 같은 선에서 봐줄 수 있겠지만 일본은 그 정도에서 그친 게 아닌 게 문제다. 정확히 말해서 고종은 양위하겠다는 말을 한 적이 없다. 대리청정이나 그런 말은 몰라도 양위는 하지 않았다. 당연하지만 양위식도 대리인 두 사람을 내세워서 가라로 진행했다. 즉 당대 관점에서 보면 고종은 그냥 어느 쪽으로 봐도 일본에게 제위를 뺏긴 것이다.[88] 알제리 독립운동의 경우 소련의 지원을 받아 전국민 대부분이 사망했음에도 독립을 이뤄냈으며 베트남은 프랑스와 일본군이 부재한 사이 그들이 무기로 재무장하여 독립했다.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당시에는 소련을 엿먹이기 위한 CIA의 지원이 있었으며 반대로 미국과의 전쟁 중에는 수많은 반미국가의 지원이 있었다. 반면 러시아의 남하를 막길 원한 열강은 일본 편이었으며 조선은 먹힌다 해도 상관없는 국가에 불과했다.[89] 이런 분위기를 잘 보여주는 게 태평천하다. 암울한 일제강점기지만 지주에 돈으로 족보를 사고 손자 둘을 군수와 경찰서장으로 만들려고 기를 쓰는 윤 직원은 태평천하라 말하며 철저한 친일 성향을 보인다.[90] 방정환의 잡지이다. 종합지였던 <개벽>이 일제의 탄압으로 폐간되자, 정치색과 사회색을 최대한 빼다 보니 취미 잡지로 출간하게 된 것이다.[91] 역둔토는 둔전을 말하며 둔전은 나라에서 관리한다. 즉 지주들 땅을 파먹는 것보다는 당연히 남는 게 많을 수밖에 없다.[92] 이런 구조는 마름과 조금 비슷하다.[93] 처형 사진이므로 접기처리하였다.[94] 현재 유튜브에서도 일제강점기에 불편한 진실이라는 이름으로 일제가 건설한 공장이나 건물들 앞에서 행복한 미소를 짓는 당시 한국인들 사진을 보여주면서 일제덕분에 한국인들 삶의 질과 행복도 상승한 것처럼 묘사하며 은근슬쩍 한국독립을 폄하하는 연출을 보여준다.[95] 심한 경우 조선지원병이나 홍사익, 일제시대에 중의원에 당선된 박춘금의 예를 들며 식민지 였으면 이런게 가능할리 없다는 무지에 기반한 주장을 하기도 한다.[96] 일본제국에서 식민지의 개척을 담당한 정부 부처[97] 내선일체의 “내(内)“가 내지, 즉, 당시 일본제국을 칭하던 말이다.[98] 이들은 자본주의 맹아론을 기반으로 두는 수탈론을 부정할 뿐이지 일단 조선이 제국주의 식민지 경제체제 하에 있었으며 식민무역을 했다는건 인정하고 있다.[99] 1926년, 조선총독부의 어용신문인 경성일보에 입사한 식민학자. 부사장 직을 맡다가 1927년부터 31년까지 경성일보 사장이었다.[100] 식민지를 통합하여 동화를 지향하기보다 동일 제국 내에 묶어두면서 본국과는 별개의 실체로 인정한다는 입장이 전제되어 있다. 식민지 통치의 권한은 본국에 집중되기보다는 식민지 측에 위임되었다.[101] 인도차이나 등 거리가 먼 식민지와 달리 프랑스와 가까운 아프리카 식민지의 총독은 본국정부의 강력한 지휘와 감독을 받고 있었다. 또한 현지인들에게 동화를 요구하여 지배체제를 강화하는 방식을 채용했다.[102] 심지어 이슬람교를 포기할시 시민권이 부여되었다. 거기다 프랑스는 90년대 까지 알제리 독립전쟁을 질서 유지 작전이라고 주장해왔다.[103] 당시 황제는 순종이었다. 이미 정미7조약과 보안법 등을 통하여 한국의 내정이 완전히 한국통감부에 떨어진 상태였기에, 의병 진압 명령을 꼭두각시로 옹립된 순종의 뜻으로 볼 수는 없다. 전형적인 책임 회피 수법이다.[104] 아이러니 하게도 일본의 패전으로 조선은 인도보다 2년 일찍, 그리고 같은 8월 15일에 독립한다.[105] <寺內正毅 關係文書>, 山田三良 答申書.[106] 남한 대토벌, 관동대학살, 간도참변 등을 제외한 2차 세계대전 때 피해자만 48만 명이 넘는다.#[107] <寺內正毅 關係文書>書439∼455쪽[108] 호적을 통해서 본 국적 - 엔도 마사타카 2023. (와세다대학)[109] 징용, 징병, 정신대, 위안부.[C] 110.1 110.2 남학교[박효선] (2010년 6월 24일). 《한국군의 평생교육》 1판. 학이시습. 16쪽[113] 사실 예과 과정의 경우 이 당시 일본 제국의 대학 학제 시스템이 예과 3년 - 본과 3년 과정으로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누구나 거쳐야 하는 과정이었다. 그래서 주로 이 당시 일본으로 유학 간 조선인들의 경우 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구제고등학교나 일본 내의 사립 와세다대학, 게이오기주쿠대학, 릿쿄대학, 도시샤대학 등의 예과에 지망하는 경우가 많았다.[114] http://theme.archives.go.kr/next/koreaOfRecord/illiteracy.do, http://www.newdaily.co.kr/site/data/html/2014/02/03/2014020300054.html 일본은 오히려 조선인들의 교육을 방해했다고도 한다.[115] http://la.koreatimes.com/article/20160607/991981[116] http://db.history.go.kr/download.do?levelId=kn_051_0040&fileName=kn_051_0040.pdf[117]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252569[118] https://globe.asahi.com/article/12738692[119] 옥음방송을 듣고서 방송 당일에 바로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이 많았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120] 그나마 가족끼리 돈 이야기나 부부싸움 등의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해야 할 때는 일본어가 사용되기도 했다고 한다. '오까네가 나이(お金がない - 돈이 없어)'라든가, '우루사이 온나다나(煩い女だな - 귀찮은 여편네로군)' 등 해방전후 문학작품에서 자주 등장하는 일본어 문장들은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121]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은 조선시대의 문맹률을 과장하며 조선시대보다 일제강점기에 문맹률이 완화되었다는 주장을 펴는데, 위의 통계에서 보듯 일제강점기 태생 세대들이 조선시대 태생 세대에 비해 큰 문맹 해결에 있어 진전이 없거나 부분적으로 더 퇴보한 모습까지 보였다는 점에서 아무 근거없는 억측에 불과하다. 조선시대에도 돈에 따라 서당에 다니며 교육의 격차가 있었다는 점에서는 일제강점기와 비슷하지만 정부단위의 억압이 없었다는 점을 보면 도리어 상황은 악화된 셈이다. 무엇보다 일본령 조선 내 일본인의 교육수준이 조선인보다 월등히 좋았다는 점에서 다른 핑계를 될 여지도 없다.[122] 만주국육군군관학교 제4기까지는 성적 우수자에게 일본육사로 편입학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123] 특히 박정희 집권 시기에 이러한 경향이 더 심해졌는데, 이는 일제강점기에 만주군에서 근무하고 교사까지도 했기 때문에 사상적으로 일본 제국의 영향을 꽤 받았다고 생각할만한 점이 많았고, 집권기간 동안 당대 일본의 자금지원을 받기도 하는 등 이래저래 일본에게서 상당히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이다. 10월 유신을 강행했을 때 굳이 쓸 이유가 없었던 '유신(維新)'이라는 용어를 굳이 차용한 일도 있었다는 것, 국민교육헌장도 교육칙어에서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근거로 든다.[124] 일본 의료계에서는 생체실험까지 있을 정도로 비윤리적인 일이 많이 자행되고는 하였다. 도제식 수련의 특성이 군기가 원래 강했던 일본의 도제 문화와 결합하여, 군국주의적인 사회상과 더불어 똥군기가 심해졌다. 그래서 군사나 교육 분야 못지 않게 대표적으로 똥군기가 특히 심한 분야였다.[125] http://contents.history.go.kr/mobile/ta/view.do?levelId=ta_h71_0060_0050_0020_0040[126] 이들은 조선에서나 일본에서나 주로 방관하는 쪽에 가까웠다.[127] 귀족들에 대한 편견과 달리, 전쟁범죄 등도 당시 귀족들 사상이나 정신에 어긋나는 것들은 오히려 귀족들이 대부분 하지 않았다. 일본 귀족들이 부하들보다도 더 막장인 식인귀 두목처럼 묘사된 소문 등은 대부분 날조일 확률이 매우 높다. 그래서 처벌도 잘 받지 않았는데 과장되었거나 진짜로 안 했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딱히 일본에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라 영국 같은 곳들의 귀족들도 민중적 관점이나 민중사관에 의해 날조된 게 많다. 프랑스에서 민중 출신 장교들도 미화가 많이 되었으나 현실로 보자면 일부 개인을 제외하면 진짜 목숨조차 걸고 싸우는 영국이나 독일 등의 귀족 장교들보다 훨씬 못난 인간들이었다.[128] http://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levelId=kc_o403500&code=kc_age_40[129] 이들은‘형평사에 관계가 있는 자에 대하여 백정과 동일하게 대우할 일, 우육은 절대로 비매(非買)동맹할 것. 진주청년회에 대하여 형평사와 절대로 관계가 없도록 할 것’ 등을 내걸며 반형평을 주장했다.[130] 예를 들어, 일본과 조선에서의 일본인 문맹률은 대부분 일본 천민들이 차지했다.[131] 이영훈 교수가 쓴 칼럼에서는 일제가 조선인들을 때려잡은 덕에 백정이 학교에 간 사례가 있다고 하는데, 그 반례는 차고 넘친다.[132] 물론 친일파 양반들보다는 주로 독립운동하던 양반들이었다.[133] 이전에는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본 한국인은 일본군복을 입고 싱가포르를 함락시킨 침략의 협력자였다."라고 말했지만, 그것이 오해였음을 인정하는 내용이다. 이전 버전에선 앞 부분만 놓고서 리콴유가 한국도 공범이라 했다는 것만 왜곡했다.[134] 이것조차 일본의 입김이 크게 작용했다.[135] 한국이 받았던 취급은 타 식민지나 점령지들보다 약간 낫고 승전국보단 못하다고 볼 수 있다. 당시 추축국에 점령되었던 타 지역국가들의 경우 아예 토착민들의 입장이 배제된 채 연합국의 신탁통치를 받았으나 한국의 경우 모스크바3상 회의에서 임시정부를 지원할 논의가 있었고, 점령지 국민들의 재산이 불하되어 토착민 기업인들에게 주어지는 등의 혜택이 있었고 이후 한일기본조약에서 사과 아닌 사과를 받았다. 물론 이정도조차 한국이 승전국이 되었을 경우 받았을 배상보다 훨씬 초라하다는 건 부정할 수 없다.[136] 엄밀히 말하자면 일반적으로는 지방분권 및 봉건제보다 중앙집권제가 더 발전된 정부라고 보지만 장단점도 있고 반드시 중앙집권제가 우월한 것은 아니다.[137] 상당수의 일본 역사학계조차 일제강점기는 비판적으로 평가한다.[138] 일례로 6.25 전쟁 당시 미국은 일본 자위대를 전쟁에 동원하려 할 때 일본 자위대가 주둔하면 한국인들은 그들에게 친숙하니까 불만 없이 받아들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승만이 이 사실을 알자 "일본군이 한반도에 상륙하면 그 즉시 한국군이 총부리를 돌리는 꼴을 보고 싶냐!"고 쏘아붙이며 반대했을 정도로 미국은 한반도 정세에 무지했다. 사실 미국은 이때뿐만이 아니고 이후에도 현지의 사정 등에 무지해 일을 그르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139] 이 문제는 제국주의 시절 식민지인들이 제국의 일부로서 가해를 가한 것이며 종주국이 식민지 통치를 쉽게 하기 위해 다른 식민지의 민족을 지배자로 만들어 간접관리를 하는 방식으로 이미 서구 열강에서 신나게 써 먹은 전례가 있는 전통적 방식의 종주국의 식민지 가해자 공범 만들기 작업으로 식민제국에서 독립한 이후 가해자와 피해자의 위치를 흔들리게 만드는 흔한 사례들 중의 하나이다. 분명 도덕적으로 올바르지 않으나 정치적, 역사적 이해관계 때문에 쉬쉬하는 것까지도 똑같다. 물론 이런 일로 인해서 르완다 내전 같은 불미스러운 일도 많이 발생했다.(정작 해당 국가의 국민들을 찾아가 보면 그게 자기네들이 문제를 싸놓은 건지 잘 모른다. 예시로 든 사건 역시도 그거에 대해서 벨기에 인이 안타깝다는 얘기를 하자 미국인이 "그거 니네들이 저지른 일이 원인이었잖아" 라고 했는데 정작 벨기에인은 그걸 듣고도 뭔 소린지 몰랐다고 하며 다른 식민지 출신 국가나 신생 독립국의 경우 종주국의 식민지 공범 만들기 문제 등에서 한국이 안고 있는 문제들과 비슷하거나 더 심각한 문제들을 많이 안고 있다.[140] 일본어, 조선어 중 어느 하나도 제대로 읽고 쓸 수 없는 인구 비율.[141] 물론 대다수의 조선인 학생들은 식민지화가 된 지 한세대가 지난 시기였음에도 조선어를 여전히 모국어로 쓰고 있었으며, 당연히 일본어로만 수업이 정상적으로 진행될 리 만무했다. 대부분의 학교는 마지 못해서 조선어를 사용할 때마다 학생을 처벌하면서도 조선어도 병행해야 하는 이중성을 보여줬다. 이는 조선총독부가 무리한 동화에만 급급해 ‘규제와 제재’만 가해 기본적인 현장도 파악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142] 일제강점기부터 있었다고 주장하는 다른 대학교들은 실은 전문학교 과정이었으며, 당시 일본 제국 법률 상으로도 대학이 아닌 한 등급 아래의 구제전문학교로 취급되었다. 조선을 떠나며, 대한매일신보 등에 의하면 일본인들은 일본인 거주촌을 만들어 아예 따로 살았고, 그들과 어울리던 친일파들은 조선인을 열등하게 보기도 했다. 그들은 권세와 부귀영화를 누렸는데, 이항구와 이완용의 사위인 홍운표는 기생들과 놀다 7살짜리 사내아이를 치어 다리를 절단내고도 그냥 넘어갔다.[143] 흔히 일제가 반중이니 중화사상과 관련이 없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존황양이 부터가 중국의 중화사상에서 황제의 자리에 천황을 집어넣은 것이다.[144] 사실 제대로 된 혐중도 아닌 것이, 이런 식으로 자국 역사를 중국에게 종속시켜서 중국에 불리한 것은 하나도 없다.[145] 출처:「식민정책의 새로운 기조(植民政策の新基調)」 p.353, 1927년(쇼와 2년)#[146] 연평균 공업성장률 8.9%, 서성철, Growth and Structure Changes in the korean Economy, 1910-1940. Havard University Press, 1978. 반면 농업성장률은 2.2%에 그침. 연평균 순생산(Net product) 성장률 3.7% 열강 중 선두였던 일제 본토보다 높다. 참고로, 한국은행에 따르면 1960~2015 모든산업 총생산 연평균 성장률은 5.946%, 순생산 성장률은 4.896%. 쿠즈네츠의 권장 성장률은 연3%.[147] 溝口敏行(Mizoguchi Toshiyuki), 대만/조선의 경제성장, 1975[148] 참고로 김낙년 교수는 지난 100년간의 국민소득 추이를 통계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2014년도에는 그간 통계청의 가계동향 조사가 심각하게 왜곡돼 있으며 한국의 소득 불평등이 그동안 학계나 정치권이 추정하는 것보다 훨씬 심각하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한 적도 있다. 딱히 어떤 이념이나 노선이 아니라 철저하게 실증주의적 방법론을 추구하는 인물이다.[149] 1910년대의 추계는 정확도가 다소 떨어진다는 사학계 등의 일반적 생각이나 식민지 조사가 이루어진 20년대 수치부터는 충분히 참고할 만하다.[150] 현 미즈호은행[151] 현 야스다은행[152] 현 태평양시멘트(太平洋セメント). 1998년 닛폰시멘트와 통합하여 현 사명으로 변경.[153] 현 야마하 주식회사(ヤマハ株式会社)[154] 현 DM미쓰이제당홀딩스(DM三井製糖ホールディングス株式会社). 이후 1996년 메이지제당(明治製糖)과 합병하여 대일본메이지제당(大日本明治製糖株式会社)을 출범하였으며 2022년 미쓰이제당(三井製糖)과 합병되었다.[155] 대표적인 것이 고구려 불꽃무늬 금관이다. 금관 항목을 보면 고구려 금관 이외에 일제강점기에 도굴당한 금관들이 있다.[156] 이로 인해, 설탕을 넣은 냉면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인 조선인 할 것 없이 인기 있는 여름 간식이었다.[157] 負け惜しみ強い, 억지 부리는 성질이 강한; 지기 싫어하는. 負けず嫌い(마케즈기라이)라는 표현도 있다.[158] 이 부분에 비탁음화가 적용되어 사와기가 사왕이로 들리게 된다.[159] 이상의 본명은 김해경(金海卿), 일본식으로는 긴상(金さん)이다. 본문에서도 잘 소개해 주고 있다.[번역] 김구 나쁜 말을 했소. 차입은 일이 없소.(김구가 망언을 했으므로 현재 물품 반입은 할 수 없습니다.) 깅가메는 김구의 한문자 金龜를 대충 きん(金)+かめ(龜)일본식으로 훈독한 것이다. 당시 백범은 이름에 거북 구(龜)를 썼고, 아홉 구(九)로 개명한 것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합류한 후의 일이다. 김 가(哥)+め('놈', '자식' 이라는 뜻의 일본어) 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일본에는 '김가 놈'과 같이 쓰는 경우가 없으므로 한국말이 서툰 일본인이 이런 숙련된 한국어를 구사했을 가능성은 낮다. 여담으로, 저 이름을 음독으로 읽으면 '긴키'가 된다.[161] 김윤진, <해방기 엄흥섭의 언어의식과 공동체의 구상>[162] 원문에 '스바라시이 헌옷감'이라고 적혀있어 괜찮은 헌옷으로 착각할 수 있으나 띄어쓰기가 정립되기 이전인지라 다르게 띄어쓰기된 것이다. '~허다' 는 아래아의 흔적으로 볼 수 있으며, 현재는 '하다' 로 통합되었으므로 현대 문법으로는 '스바라시이한 옷감'으로 끊어 읽으면 된다.[163] 寫生, 들은대로 적었다는 뜻이다. 현대 한국어에서는 생소한 단어인데 '사생화'를 떠올려보면 이해가 갈 것이다.[164] 러시아어로 졘기(деньги)는 '돈'을 뜻하고, 녜트(нет)는 '없다'의 뜻이다. 화자의 의도는 '돈이 없음'을 나타내고 싶은 것이겠지만 러시아어는 존재의 주격과 부재의 생격을 구분하기 때문에 졘기 녜트라고 하면 돈이 있다는 건지 없다는 건지 알 수 없게 되고 만다. 돈이 없다고 하려면 생격을 써서 "денег нет(졔니크 녜트)"이라고 해야한다.[165] Concise Oxford English dictionary. 과거 유명했던 영어사전 브랜드. 지금도 출판되고 있다.[166] 당시의 중학교는 영국식의 Primary School - Secondary School 체제를 따라한 일본 학제에서의 Secondary School에 해당한다. 현행 6-3-3 학제는 1951년 미국을 따라 도입된 것.[167] 그나마 530GP 사건과 윤일병 사건 그리고 임병장 사건을 통해 병영부조리가 그나마 완화되고 일과 후 병사 휴대전화 사용까지 허용된 계기가 되었으나, 각 군에서 병영부조리와 관련된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아 아직까지 갈 길이 멀었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168] 애당초에 일본이 없었으면 김일성 일가는 일제에 맞서 싸우는 과정에서 자신이 펼친 공적을 과장도 할 수가 없었다. 소련은 특히 일본의 식민지에 불과하던 조선의 사정을 깊게 알지 못하는 바람에 김일성이 '마적단 출신'이라는 소문이나 아예 북한 주민이 그를 가짜로 여기려는 행보와 같은 힌트에도 김일성이 가면 뒤에 어떤 인품을 지녔는지 몰랐고, 그가 실제로는 숙청의 구실로 추진하던 토지개혁 같은 정책의 함의를 깨닫지 못했다.[169] 공산주의는 원래 세습을 배격하나 많은 사람들이 공산주의를 제대로 배우지 못해 이것이 잘못된 것인 줄 아는 경우가 많지 않았다. 여기도 일제강점기에 교육열이 나쁘지 않아 이광수, 백석 등의 지식인이 유명하기도 했는데 말이다.[170] 이는 식민통치를 겪은 아프리카 국가들에도 보이는 특징들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로버트 무가베.[171] 동아시아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지식이 부족한 서양인들도 비슷하게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172] 당연할 수밖에 없는 것이, 조선인에게 투표권이 없었다는 것이다. 투표권이 없는 사람들에게 정치인들이 잘보일 이유가 하등 없는 것이며, 때문에 조선의 복리복지 향상에 대한 예산배분은 바닥 수준인데다, 사회 법조망에서 소외되어 노동 3권조차 보장이 안되는 것이 당시 조선인들이었다.[173] 현재는 희귀한 금속이나 지하자원이 많이 있다는 것이 밝혀졌으며 석탄, 텅스텐, 석회석 같은 건 당시에도 매장량이 상당하였으나, 문제는 당시 일본 제국에 채굴 및 정련, 제조 기술이 부족했고 희토류 금속 같은 것은 쓰일 용도가 없었다.[174] 텅스텐은 당시에도 세계 1위 채굴량을 자랑했는데 일본 정부가 새로운 재질에 관심이 하도 없어서 안 썼다.[175] 제국의 첫 식민지인 대만에 막대한 투자를 했지만 엄청난 원금손실과 장기 재정적자를 본 터라 일본 제국이 2번째로 얻은 식민지인 조선에는 대만의 선례 때문에 투자를 두려워한 경향이 심했다.[176] 무엇보다 값싼 조선쌀의 유입으로 일본 열도의 쌀의 가격이 급락하여 이로 인해 큰 손해를 본 일본 농민들의 반발이 컸다.[177] 국방비를 경제력에 맞지 않게 비정상적으로 높게 유지하다보니 재정적자가 심해질 수밖에 없었다.[178] 심지어 일제강점기의 경제는 언어,문화,정체성 전부 다른 집단을 위한 집중화였다.[179] 물론 이는 일본의 차후 식민 지배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계산도 있어서, 당시 통감이었던 이토 히로부미 시대에 고종황제를 압박해서 일본이 만들게 강요한 것들이 대부분이다.[180] 친일 부역자 출신을 모두 처벌하자니 국가를 이끌 중하류층은 대거 날아간다. 당장에 부역자의 정의를 정말 광범위하게 넓히면 법조인은 말할 것도 없고 말단 공무원과 하급 순사들도 모두 부역자로 처벌받아야 할 판이니 조직 자체가 뿌리뽑혀버린다. 실제로 콩고민주공화국과 적도 기니가 독립 후 식민지 잔재 청산 과정에서 말단 부역자까지 쫓아냈다가 국가 기반 자체가 뿌리뽑힌 케이스다. 물론 이 와중에 악질들까지 유지해준것은 변호할 수 없는 실책이며, 미진한 친일파 청산에 대한 비판도 정확히는 처벌할 수 없던 실무 부역자들이 아닌 처벌할 수 있던 악질 친일파들을 처벌할 기회를 놓친 아쉬움에 대한 한탄에 더 가깝다.[181] 북한의 경우 한국전쟁 당시 수많은 인사들을 납치 및 회유했다. 비날론을 개발한 리승기 역시도 북한의 회유에 월북했다.[182] "An Evaluation of the Uniqueness of Education growth in Korea", Noel F. McGinn, et al.,op. cit.,p.92[183] 이조차도 한국 환경으로 인해 일본식 4월 개학-3학기제가 아닌 3월 개학-2학기제로 철저하게 마개조되었다.[184] 통념과 달리 근대화는 농촌의 경우 미국 남부의 노예 농장이나 라틴 아메리카의 아시엔다 같이 암묵적 신분제를 역으로 강화시키는 경우도 흔하다. 도시 노동자들이 소비하는 막대한 농산물을 개별 자작농들이 적정 가격에 공급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소련을 비롯한 현실 사회주의 국가에서 여지없이 협동농장 체제가 들어선 것도 마찬가지다.[185] 한국전쟁으로 인해 한반도 전역이 쑥대밭이 되면서 기존 사회질서가 유지될 수 없었다.[186] 당연히 조선교육령 역시 이 교육칙어에 기반을 두고 있다.[187] 일본 제국 시절 본토인의 삶도 정부의 산업화 강행과 식민지 운영 등으로 인해 본토 일반 민중의 복지에 무관심하다 보니, 중하층민은 곤궁한 경우가 많았다. 애당초 조선의 식민화 자체가 당시 일본의 국제적 위치상 정부의 선전과 달리 전쟁에서 흘린 피값만큼의 보상을 받을 수가 없어서 분노한 국민들이 폭동을 일으키자 입에 물릴 수 있는 게 조선의 식민화 말고는 없었기 때문에 내부 의견조차 제대로 조율되지 못한 상황에서 빠르게 병합이 진행되었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일본의 조선 식민지 정책이 종잡을 수 없는 행보를 보이는 것도 어떻게 통치할 것인가 내부적으로 논의가 되기 전에 빠르게 병합을 진행했던 것이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다.[188] 이는 나치 독일 이후 유럽사와도 통하는 부분이 많다.[189] 수산업, 산림업, 농목축업, 광업, 수공업, 온천 등 관광업[190] 물론 일제가 35년의 비교적 짧은 세월간 집중 투자로 조선땅에 광범위한 근대 행정력을 구축하고, 교통 인프라를 열심히 깔아놓은 이유는, 막대한 군대를 한반도로 옮겨놓고, 남한지역에서 생산되는 군량미와 북한지역에서 생산한 군수물자로 무장시킨 후, 중국을 신속하게 침략, 정복하려는 제국주의적 의도에 기인한 것이며, 그 유산을 현명하게 발전시켜 오늘의 성공을 이룩한 것은 어디까지나 한민족 자체의 순수역량이라 할 수 있다. 게다가 이런 '지배와 착취'를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낸 기구들을 '도움을 줬다'라는 식으로 공식적으로 주장하는 '양심없는' 서방국가들은 일본을 포함해 오늘날 '단 하나도' 없다.[191] 이것도 한국 자체의 내부적 환경만 고려했을 경우이고 국제적인 환경까지 갈 경우에는 다른 나라에서 분쟁이 터질 때마다 주변국 뿐 아니라 과거 식민 지배 모국까지 우루루 엮이는 아프리카권 국가들, 자국 주위의 지역 열강과 내부적 민족문제 등이 복잡한 이베로아메리카, 동남아시아 국가들 등 2차대전 이후 국제정세에서 한국이 처한 외교적 환경이 그나마 단순한 편이었던 점도 무시하기 어렵다. 지금에야 북중러미일 관계에 공을 들이고 이리저리 순방도 나가고 하지만 60년대까지만 해도 외교관계는 단순하였다. 중국은 내전이 끝난 직후 대약진 운동, 문화대혁명 등 혼란스러워서 외부에 신경쓸 여력이 아니었고, 소련의 경우 미국이 상대하는 국가이고 국교도 없으니 미국이 외치는 것에 거수기 해주는 정도 밖에 하지 않았으며, 일본의 경우 해방된지 얼마되지 않았으니 데면데면한 관계였다. 즉 신경 쓸 나라라고는 북한 뿐인 셈. 대한민국이 국제외교에 신경을 쓴 것은 빠르면 유엔가입을 추진하던 70년대부터 늦으면 올림픽 이후인 1988년 이후 부터이다. 특이하게도 학계 쪽이 아닌 이상 일반적인 근대화 담론 수준에서는 민족주의자뿐 아니라 탈민족주의자들까지 조선과 일제와의 관계에는 주목해도 당시 조선과 일본을 둘러싼 국제적 정세에는 거의 주목하지 않는다. 물론 이는 한국의 고도성장기인 한강의 기적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며, 한국 주변의 산업화에 유리한 외교적 여건들은 거의 조명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192] 이후 1980년대 대한민국의 경제가 급성장하자 대한민국 경제가 일본 경제의 지분까지 집어삼킬까 두려워 투자를 동남아시아로 분산시켜 대한민국의 대항마를 키우는 견제행위를 시도하기도 했다.[193] 심지어 일본은 그 근대적 체계들을 기본적인 주권을 유지한 채 본인들에게 제공했으며 우호국으로 지냈던 서양을 적대국으로 간주하고 침략전쟁을 감행했다. 이 시점에서 일본은 타국의 주권을 빼앗은 채 들여온 발전된 문물을 강조하고 그것을 통해 호의적인 대우를 요구할 수조차 없다.[194] 물론 그 이식 과정에서 수많은 갈등들이 존재했지만 그것은 일본도 서양도 존재했던 과정이다. 이것을 가지고 발전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은 본인들의 과거 상황조차 애써 외면하는 것에 불과하다.[195] 이조차도 상당수는 직할 식민지가 아니라 국제연맹의 위임통치령 형태였다.[196] 굳이 찾자면 1920년 영국의 침공으로 멸망한 데르비시국, 1936년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으로 이탈리아의 식민지가 된 에티오피아 제국 정도지만 데르비시국은 영국은 소말릴란드 식민지에서 발생한 반란군 취급이었지 일본이 조선에게 그랬듯 명백한 독립국가로 인정한 것은 아니었으며,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지배는 5년밖에 가지 않았고 국제적으로 인정되지 않았다.[197] 당장 4년만 지나면 1차대전이 발발하고, 현대인, 특히 한국인들에게는 그야말로 정치적 립서비스와 바지저고리 취급 당하지만 어쨌든 민족자결주의의 대두와 국제연맹의 출범으로 국가 주권 보호에 대한 인식도 변화하기 시작한다. 기존 식민지인 조선의 독립운동을 탄압하는 정도는 가능해도 아예 국가 하나를 통째로 집어삼키는 것은 엄청난 부담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국가조차도 아니고 단지 한 지방에 불과한 만주에 대해서도 그랬다.[198] 만일 일본을 분단할 경우, 일본 열도의 절반이 대륙 공산세력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되어, 태평양을 내해로 삼아 북미대륙의 안보를 도모해야만 하는 미국에 있어 자살에 가까운 자충수가 되기 때문에 애초에 고려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199] 물론 조선총독부와 일본 제국 정부는 조선인과 일본인이 '동등한 천황 폐하의 적자'라고 선전했으나, 실제로는 조선인에 대한 차별이 심각하며 개선할 생각을 하지 않아서 조선인과 일본인 누구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흥미로운 점은 이 논리에 따르면 외려 일본인이 집나간 자식이다. 현대 연구로는 일본인의 혈통의 대부분은 한국에서 건너간 이들인 야요이인이기 때문이다. 즉 한국인은 한반도라는 본가에 계속 남은 자식들이고 일본인은 본가를 떠난 자식들인 셈이다.[200] 신화학적 측면에서도 일본 제국은 일본민족을 누이신 아마테라스의 민족이고, 한민족을 동생신 스사노오라고 여겨 남산(서울)에 아마테라스의 신궁을 지어 스사노오의 기를 누르겠다는 시도를 했던 일화는 유명하다.[201] 실제로 1919년 상해임시정부가 수립되었을 때, 복벽을 원하는 이들도 특별대우를 해 달라는 것 외에는 주장할 수 있는 것이 없을 정도로 근왕파의 세력이 줄었다.[202] 그것도 나라를 잃은 상황에서의 일본 황족으로 사는 것보다는 독립된 국가의 평민으로 살고 싶다고 의견을 피력했을 정도이다.[203] 참고로 '일제로부터 작위를 받거나 이를 계승한 행위'는 친일반민족행위자에 등재되는 조항 중 하나이다. 이들이 조선 국왕만 아니었다면, 일제로부터 받은 작위를 거절하려는 의사를 전혀 보이지 않은 이들은 어쩌면 친일반민족행위자에 등재되었을 가능성도 있다.[204] 사실상 이날을 망국일로 보기도 한다. 실제로도 경술국치보다는 을사늑약이 맺어졌을 때에 자살하거나 반대한 사람들이 더 많았다.[205] 1910년 8월 29일[206] 의외라면 의외겠지만,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주제로 한 암살이나 밀정 같은 영화도 일본에서 꾸준히 더빙까지 하여 상영되었다.[207] 반공이 생뚱맞을 수 있지만 이 시대 영화들은 기본적으로 고증이랄 게 없는 수준이었고, 검열당국의 개입이 워낙 심했으며, '아무튼 나쁜 놈'으로 몰아가기에는 일본 순사 못지않게 공산주의자들도 더할 나위 없이 수월한 대상이었기에 맥락 없이 반공 요소가 들어가는 경우가 허다했다.[208] 영화 다찌마와 리: 악인이여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라가 이 시절 황당했던 한국영화에 대한 오마주이다.[209] 각시탈은 애니메이션으로도 존재하지만 반공 애니메이션으로 각색되었기에 일제강점기는 아니다.[210] 1928년 경성이 배경이다.[211] 1926년 군산과 경성이 배경이다.[212] 1942년 4~5월 경성이 배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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