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고려 高麗 | Goryeo[1] | |||||||||||||||||||||||
▲ 14세기 중반 고려의 강역■ 1350년대 수복한 영토 ■ 1370년대 수복한 영토 (시대별 강역은 역사 단락 참조) | |||||||||||||||||||||||
시대 구분 | |||||||||||||||||||||||
성립 이전 | 멸망 이후 | ||||||||||||||||||||||
역사 | |||||||||||||||||||||||
지리 | |||||||||||||||||||||||
인문 환경 | |||||||||||||||||||||||
정치 | |||||||||||||||||||||||
| |||||||||||||||||||||||
기타 | |||||||||||||||||||||||
통화 | |||||||||||||||||||||||
현재 영토 | |||||||||||||||||||||||
언어별 명칭 | |
고려(高麗)[29], 고려 왕조(高麗王朝) | |
高麗[30]/高麗王朝(정체), 高丽 /王氏高丽 (간체) | |
高麗(코라이), 高麗(코마)[31] | |
Cao Ly(高麗, 까오리) | |
Корё | |
گوریو | |
كوريا, غوريو | |
Koryŏ, Goryeo, Korea, Corea | |
국호는 스스로 고구려의 계승국을 표방한 만큼 후기 고구려의 국호인 '고려(高麗)'를 그대로 이어받았다. 고려와 고구려는 사실상 같은 국명을 썼다.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기 이전에 존재했던 주몽이 건국한 고구려의 국호를 고구려에서 고려로 바꾸었고, 중국 사서에서도 장수왕 이후 고구려는 고려로 표기했다.[34]
고려시대는 중국식 역사서가 편찬될 만큼 한문학이 발달된 시기였기 때문에 후연, 후당, 후조 같이 자국을 고려(고구려)땅에서 일어난 나라라고 하여 왕건이 건국한 고려 역시 "후고려(後高麗)"라고 표현한 기록도 종종 발견된다. 사례를 보자면 태자사낭공대사비나 대각국사문집 등이 있다.
조선 초의 기록인 《동국정운》 기준으로 '高麗'의 중세 한국어 발음은 '고ᇢ롕〮(예일: kwòwlyéy)'였다.[35] 하지만 동국정운식 발음은 당대의 실제 발음과 차이가 크므로, 오히려 현대의 발음과 더 가까웠을 가능성이 크다.[36]
일각에서는 고려가 신라를 계승했다는 주장도 나온다. 무조건 억지라고만 볼 수 없는 이유는 단순히 중국 일각에서 주장하는 동북공정의 영향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있어왔던 인식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고려 서희와 요나라 소손녕과의 회담에서도 소손녕이 고려는 신라를 계승한 나라이니 통일 신라가 지배한 적이 없는 옛 고구려의 영토였던 한반도 북부의 영토 획득에 고려는 정당한 권리가 전혀 없음을 주장한 적이 있다. 그러나 이에 서희가 고려는 신라가 아닌 고구려를 계승하여 평양을 수도 중 하나인 서경으로 삼은 나라이니 거란이야말로 그들이 동경요양부(옛 고구려의 요동성, 현 랴오양시)로 삼은 고구려의 옛 땅을 정당한 권리도 없이 점거한 것이라고 반박하며, 소손녕의 오해를 정정했다. 그러자 소손녕 또한 서희의 주장에 수긍했는데, 이 일화가 와전되어 서희가 소손녕을 속였다고 아는 사람도 있지만 서희는 거짓말을 한 적이 없다. 고려의 국호 뿐만 아니라 분사 제도를 통해 고려의 수도 개경의 일부 관아들이 서경에도 설치되는 등 고구려의 옛수도 평양을 제 2의 수도로 대우했다. 서경의 특별 대우는 훈요 10조에도 명시되어 있으며, 이를 남긴 이는 다른 누구도 아닌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이다. 소손녕은 유목민족인 거란족이었기 때문에 비록 거란족의 요나라가 중국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세워진 나라이기는 하지만 엄연히 만주와 몽골에 거점을 둔, 한족과는 별개의 민족이기 때문에 '보편적인 당대 중국인의 시각'으로 볼 수 없다.
이후 서긍을 포함한 송나라인들의 인식을 비추어볼 때 오히려 한족 사회에서는 고구려의 정체성을 고려인들이 이었다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정통 중국이라 할 수 있는 송나라의 지식인인 소식은 고려를 비칭할 때 고구려를 비하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단어인 맥적(맥족 도적)을 그대로 사용했다. 마찬가지로 송의 서긍이 고려를 직접 방문하고 저술한 고려도경에서도 고려는 고씨 왕조가 망했다가 왕씨 왕조가 들고 일어난 것, 즉 고구려에서 고려로 그대로 이어지는 것처럼 서술했다. 그외 이후의 시대인 명나라 대에는 "북원의 요양성(遼陽省) 평장사(平章事) 유익(劉益)과 우승(右丞) 왕카라부카(王哈刺不花) 등이 명나라에 귀순하려 하였으나 그들은 명나라가 주민을 이주시킬까 근심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요양이 본시 우리 땅이었으므로 만약 고려가 청하면 이주를 모면할 수 있지 않을까 하여 사신을 파견하여 통보하여 왔다."라는 기록도 있다. 요양성은 옛 요동성을 가리키는데, 이에 의하면 원나라 장수와 고려 정부 모두 요동이 옛날에는 고려의 땅이었다, 즉 고구려와 고려는 같다 인식하고 있었다.
오늘날 주몽이 건국한 나라를 고구려로, 왕건이 건국한 나라를 고려로 표기하는 이유는 서로 구분하기 위함이다. 이렇게 구분할 필요를 느낀 건 고려 당대에도 마찬가지여서,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에는 중간에 국호 변경이 있다고는 적고 있지만 표기 자체는 쭉 고구려라고 기록했다. 참고로 궁예가 건국한 태봉의 초창기 임시 첫 국호 또한 후고구려 즉 고려였으나[37], 겨우 3년 동안만 사용하다 버리고 이후 국호를 마진, 그리고 마지막으로 태봉으로 변경하면서 완전히 태봉으로 성립되었다.
한국의 외국 이름인 'Korea'의 어원을 제공한 나라가 왕건이 건국한 고려일 수도 있지만, 장수왕 대에 정착된 고려에서 이미 어원이 형성됐을 가능성도 있다. 결론적으로 어느 쪽이든 KOREA라는 명칭의 근원이 고구려임은 같다. 코리아의 어원이 왕건이 건국한 고려라고 해도 그 고려라는 명칭이 고구려를 계승하면서 전달된 국호이기 때문이다.
고려의 계승의식은 고구려를 표방했지만 실질적인 세력권은 고구려의 옛 중심지를 차지했지만 북방영토는 대거 상실했고, 그 대신 백제와 신라 영토의 비중이 커졌다고 볼 수 있다. 즉, 고구려+신라+백제를 다 품은 것이다. 이는 한족의 개념이 하상주나 진이 아닌 한나라에서 나온 것과 비슷하다고 볼 수도 있다. 고려의 고구려 계승의식에 대해서는 고려/평가 항목에 보다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고려는 초기에는 태봉과 신라의 고유 관제를 바탕으로 광평성을 최고 중앙관부로 두었고, 이후 성종 때 당나라의 3성 6부제를 차용한 2성 6부제와 더불어 송의 중추원(추밀원), 삼사 등의 제도를 도입하였다.[38] 이에 태봉의 내의성, 광평성, 내봉성으로 이어지는 3성의 전통과 당의 3성 제도를 결합하였다.
- 내의성/광평성→ 내사문하성 → 중서문하성이되었으며,
현재 연구자 및 교과서에 따라 3성 6부, 2성 6부 등으로 표현하고 있다.
- 명예직 (최고 직위)
- 3사 - 태사, 태부, 태보 / 정1품
- 3공 - 태위, 사도, 사공 / 정1품
- 중서령 (내사령) - 중서문하성 소속, 인신지극, 수상을 역임한 사람에게 명예직으로 부여 / 종1품
- 상서령 - 상서성 소속, 왕족 종친(제왕)에게 수여 / 종1품
- 중서문하성 소속 재신 (5재, 8인)
- 중추원 소속 추신 (6추, 8인)
- 판중추원사 (판사) / 종2품
- 중추원사 (사) - 2인
- 지중추원사 (지사)
- 동지중추원사 (동지사)
- 중추원부사 (부사) - 2인 / 정3품
- 첨서중추원사 (첨서사)
중추원직학사 (직학사)- 충렬왕 때 추가[42]
- 상서성 소속
- 상서령(尙書令: 종1품)
- 좌우복야(左右僕射: 정2품) 각 1명
- 지성사(知省事: 종2품) 1명
- 좌우승(左右丞: 종3품) 각 1명
- 좌우사랑중(左右司郞中: 종5품) 각 1명
- 좌우사원외랑(左右司員外郞: 정6품) 각 1명
- 도사(都事: 종7품) 2명
- 조선시대의 영의정과 달리 고려시대의 문하시중이 항상 보임하지는 않았던 관계로 판이부사를 담당하는 사람을 수상 또는 총재라 일컬었다. 문하시중이 보임한 경우 판이부사를 겸하고 결원인 경우 차석의 평장사가 판이부사를 맡았다.
- 중서문하성은 종2품 이상의 재신과 간쟁과 봉박을 담당한 정3품 이하의 낭사(간관, 성랑)로 구성되었다. 문하시중 이하 지문하성사까지가 재신이며 간의대부 이하 정언까지를 말한다.
- 상서성은 종1품 상서령 및 정2품 좌우복야가 있었으나 실제로는 재신들이 6부 판사를 겸직하였고 추밀이 6부 상서를, 승선이 6부 지사를 겸직한 경우가 많아 재추에 의한 정치의 근거로 활용되어 왔다. 6부의 순서에서 고려는 사실 병부가 6부 중 2위에 있었다. 조선 때는 공조 바로 위로 강등되었다. 또한 예부 앞에 형부가 있었다. 즉 고려는 이부, 병부, 호부, 형부, 예부, 공부순으로 독자적인 구성을 갖추었다. 6부 내 구성원은 판사(재신)-상서(장관)-지사(승선)-시랑(차관)-낭중 등으로 보면 된다.
상서성의 위상을 중서문하성의 아래로 보는 견해가 있는데 이는 재신(재상)의 범위에 좌우복야, 지성사가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재추가 상서성의 좌우복야, 지성사를 겸직했다는 연구도 있으며 고려 정치의 복잡도가 당/송과는 다르기 때문에 오는 경향이라고 보는 설이 있다.
- 중추원(후에 추밀원)은 왕명의 출납 및 궁중의 숙위, 군기를 담당하였으며 종2품 이상의 추밀(추신)과 정3품 이하의 승선으로 구분되었다. 추밀(추신)은 재추16인에 포함되는 고려의 재상이었으며 추부에 있었고 정3품 이하의 승선(조선시대의 승지)은 왕명의 출납을 담당하며 승선방에 입직하였다.
- 어사대는 시정을 논하고 풍속을 교정해 백관의 부정과 비위를 규찰하고, 탄핵하는 역할이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어사대의 독자적인 활동보다는 중서문하성의 간관(諫官)인 낭사(郎舍)와 상호불가분한 관계에서 직무가 수행되었다.
따라서 본래의 임무에 봉박(封駁)·간쟁(諫諍)·시정논집(時政論執)·서경(署經) 등의 간관임무가 더해져 그 기능은 광범위하고 다양했다. 이러한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 어사대의 관원에게는 불체포·불가범(不加犯)·면계(面戒: 면전에서 충고함.) 등의 특권과 여러 은전이 부여되었다. 또한 청요직(淸要職)으로서의 임무를 수행할 학식·출신성분·인품·외모 등의 여러 가지 자격과 조건이 요구되었다. 즉 역임자들은 과거 출신자로서 인품이 청렴강직하고, 외모가 뛰어난 문벌귀족 출신이 대부분이었다.
고려시대의 어사대는 조선시대의 의금부와 사헌부의 기능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 법제와 왕실의 격식을 담당하는 식목도감이 있었으며 수상(총재)을 맡은 판이부사가 사를 맡았다. 이외 전곡(錢穀)의 입출과 회계를 맡은 삼사(송의 영향. 원 간섭기에도 존재), 천문을 보는 태사국 등의 중앙 행정기관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체제는 원 간섭기부터 즉, 충렬왕 대부터 제후국 체제로 관제가 격하되면서 변경되었다. 1275년(충렬왕 1) 중서문하성, 상서성의 2성이 통폐합되어 첨의부(첨의중찬)[43]로 개편되었고, 6부는 4사(판서)(이부와 예부가 통합되고 공부가 폐지)가 되었으며, 다시 1293년(충렬왕 19)에 첨의부(첨의중찬)가 도첨의사사(도첨의중찬)[44]가 되었다. 1298년(충선왕 즉위년) 관제를 개편하면서 도첨의중찬을 도첨의시중으로 고쳤고, 조금 뒤에 다시 도첨의중찬으로 고쳤다. 1308년(충렬왕 34) 도첨의중찬을 도첨의정승으로 고쳤다.
한편 추밀원은 밀직사가 되었고, 광정원으로 잠시 고쳤던 적이 있다. 충선왕 때는 밀직사가 첨의부와 동급이 되었다. 추밀원의 승선이 밀직사의 승지가 된 것이 조선시대 승정원 도승지 관직의 시작이다. 충선왕 때부터는 대언이라고 했었다. 금오대는 감찰사가 되었다가, 충렬왕 24년부터 사헌부가 되었다.
1354년(공민왕 3) 도첨의정승을 시중으로 고쳤고, 조금 뒤에 다시 우정승, 좌정승으로 고쳤다. 1356년(공민왕 5) 원나라의 간섭이 약화되자 첨의부를 중서문하성으로 관제복구하면서 문하시중·수시중으로 고쳤다. 1362년(공민왕 11) 중서문하성을 도첨의부로 고치고 문하시중과 수시중 또한 첨의우정승, 첨의좌정승으로 고쳤다. 1363년(공민왕 12) 첨의좌시중, 첨의우시중으로 고쳤다. 1369년(공민왕 18) 도첨의부를 문하부로 개편하며 문하좌시중, 문하우시중으로 고쳤다. 창왕 때에 다시 시중, 수시중으로 고쳤다.
1354년(공민왕 3) 도첨의정승을 시중으로 고쳤고, 조금 뒤에 다시 우정승, 좌정승으로 고쳤다. 1356년(공민왕 5) 원나라의 간섭이 약화되자 첨의부를 중서문하성으로 관제복구하면서 문하시중·수시중으로 고쳤다. 1362년(공민왕 11) 중서문하성을 도첨의부로 고치고 문하시중과 수시중 또한 첨의우정승, 첨의좌정승으로 고쳤다. 1363년(공민왕 12) 첨의좌시중, 첨의우시중으로 고쳤다. 1369년(공민왕 18) 도첨의부를 문하부로 개편하며 문하좌시중, 문하우시중으로 고쳤다. 창왕 때에 다시 시중, 수시중으로 고쳤다.
고려의 지방 행정 구역은 최초에는 8목이었으며, 성종 (995년) 때는 당나라를 모방한 10도 12군 체제였다.
10도는 관내도(關內道, 개경의 수도권), 중원도(中原道), 하남도(河南道), 강남도(江南道), 영남도(嶺南道), 영동도(嶺東道), 산남도(山南道), 해양도(海陽道), 삭방도(朔方道), 패서도(浿西道)였다.
한편 12군은 8목에서 늘린 12목에서 명칭을 바꾼 것으로, 양주(楊州)·광주(廣州)·충주(忠州)·청주(淸州)·공주(公州)·진주(晋州)·상주(尙州)·전주(全州)·나주(羅州)·승주(昇州. 훗날의 순천시)·해주(海州)·황주(黃州)로써 이 도시들은 조선 시대까지도 지방의 중심 도시 역할을 수행했다. 조선 태종 때 행정 구역을 개편하면서 원래 주요도시를 의미하는 州가 붙은 도시들이 필요 이상으로 많다는 이유로 덜 중요하다고 판단한 지역들의 州자를 山 또는 川으로 변경했는데, 이 도시들은 대부분 州 호칭을 유지한 것도 알 수 있다.
또한 도읍 개경에 고려가 계승한 고구려의 도읍 서경(평양성)에 더해 신라의 도읍 서라벌이었던 경주시를 동경으로 삼아(성종 6년) 삼경을 이루었다. 문종대에는 서울 강북 역시 남경으로 승격해 삼경의 한 축을 이루었다. 다만 서경의 지위는 동경, 남경과 같은 일반적인 '지방 3경'이 아닌 개경에 버금가는 '제2의 수도', 혹은 '또 다른 수도'였다. 원나라의 대도-상도의 이중 수도 시스템에 비슷했다. 서경의 수도로서의 확고한 지위는 훈요십조, 분사제도, 서희의 발언, 서경별곡의 가사 등 여러 방면에서 드러난다. 다만 그럼에도 개경보다 왕이 머무는 기간이 짧았고 주요 정쟁도 개경에서 벌어졌으며 고려왕릉 한 기도 평양 근교에 없기 때문에 '제1의 수도' 개경의 지위가 조금 더 높았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이러한 개경에 비한 은근한 차별의 결과가 바로 그 유명한 묘청의 난. 하지만 1136년 묘청의 난 이후 서경은 그저 그런 '지방 3경'의 지위로 격하된다. 이 역시 다르게 생각해보면 동경, 남경보다 여전히 우월한 서경의 위상을 잘 보여주는 사건이라 할 수 있다. 동경을 예로 들면 반란이 날 경우 일시적으로 일반 군현으로 나가떨어졌지만 서경은 같은 상황에도 3경 미만으로 격하당한 적이 없다. 묘청의 난 당시에도 따지고 보면 개경의 조정(중앙정부)에게 대놓고 반기를 드러낸 사건임에도 개경과 서경의 지위 사이에 선을 보다 확실하게 긋는 수준에 그쳤지 서경을 3경 미만의 지방 도시로 전락시키지는 않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후 현종 때는 5도 양계 및 경기 체제로 변경되었으며 5도는 경상, 전라, 양광[45], 교주[46], 서해[47]이며 양계는 북계[48]와 동계[49]였다.
경기는 수도 개경 주변을 일컬었다. 정확히 말해 경기'도'가 아니다. 이 당시 고려는 경기를 도와 별개의 지역으로 설정했다. 비슷하게 과거 일본의 행정 구역도 기(畿)와 도를 구분해서 크게 5기 7도의 행정 구역(홋카이도가 추가된 뒤 5기 8도.)으로 나누었다. 고려에서 경기 지역은 오늘날의 개성, 개풍, 장단, 연백 일대였다. 고려 말에는 경기가 더욱 확장되어, 현재의 황해도(북한이 설정한 행정 구역으로는 황해북도) 일대 및 경기도의 한강 이북 지역이 편입된다. 서경(평양)과 그 인근 지역에는 서경기를 설치해 수도로서의 서경을 존중하였지만 묘청의 난 진압 후 서경이 이전에 비해 푸대접을 받게 되면서 폐지됐다.
문종 21년에는 삼경에 더해 양주의 일부에 남경(지금의 서울 강북)을 설치했다. 당시 동경이라 불렸던 경주는 몇 차례의 반란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일반 군현으로 격하된 적이 있었으나 고려가 황제국 지위를 유지하는 동안 전체적으로 동경의 위상을 유지하였다.
그렇지만 남경으로 지정되었다 하더라도 후에 조선 왕조에 의해 왕도(王都)로 승격되고 대한민국의 수도로 있는 서울은 이때까지는 어디까지나 개경과 서경에 비해서 크게 밀리는 편이었다. 물론 단순한 지방 도시는 아닌 삼경 중 하나인 남경이었지만 지금과 같은 그런 큰 지위를 가지지 않은 곳이었다. 이런 곳이 후에 조선 왕조에 들어서 왕도로 지정되어서 이후 대한민국이 되는 오늘날까지도 수도로서 기능하는 600년 전통의 대도시가 될 줄은 이때까지만 했어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50]
특히 고려의 3경은 서경, 동경, 남경이 각각 고구려, 신라, 백제의 고도에 위치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애초에 서경은 태조대에 고구려 계승 의식 차원 및 입지가 매우 우수해 집중적으로 육성시켰기에, 그리고 동경은 성종대에 서경 세력 견제와 신라의 고도에 대한 예우 및 경상도에서 손꼽히는 대도시였기에 지정된 것이다. 문종대 남경 설치의 경우 사실 백제의 고도에 대한 예우 차원보다는 풍수지리 및 대도시가 들어서기 좋은 입지라는 이유가 더 크기는 했으나 <고려사 지리지> 내 양광도 남경유수관에 대한 설명에서 볼 수 있듯이 남경이 백제의 고도 한성에 위치하였다는 인식 또한 당대 고려인들에게 분명히 존재했다. 비록 설치 시기는 상이하지만 이렇게 고려 왕조가 의도적으로 삼국의 고도에 3경을 설치했다는 사실에서 고려의 삼한일통 의식이 엿보인다.
추가적으로 흥미로운 점이 있다면 고려가 삼경 중에서 특별히 서경을 우대했다. 서경의 경우 반란에도 강등당하지 않았고 1308년 동경과 남경이 강등당했을 때도 서경만은 강등을 면하였다. 하지만 묘청의 난 이후 개경-서경 사이에는 또 명확한 선을 그었다는 사실이 고려가 삼한일통 의식을 내세워 삼국을 모두 계승하였지만 그 중에서도 고구려를 더 특별 취급을 해주었고, 그럼에도 본인들은 또한 삼한일통에 기반한 초월적인 정체성을 내세우며 이전의 고구려와 또 미묘하게 차별화를 시도했다는 점과 묘하게 맞아 떨어진다는 점이다. 사실 애초에 고려 왕실이 노린 바일 수도 있다. 고려는 고구려의 장수왕 이후 국명 '고려'를 그대로 따왔지만 정작 본인들이 삼국사기를 저술할 때에는 고구려를 고려라 하지 않고 장수왕 이전의 국명인 고구려로 명명해 본인들과 또 미세한 선을 그었다. 게다가 삼국 중 신라본기가 가장 앞에 온다는 점은 덤.[51] 사실 애초에 고려 왕실이 노린 바일 수도 있다.
5도는 그 아래에 주현과 속현이 있었는데, 주현은 규모가 큰 도시에 지방관이 파견된 고을을 말하고, 속현은 그 주현의 지휘를 받는 지방관이 없는 고을을 가리킨다. 고려 시대에는 주현보다는 속현이 많았으며[52] 지방에 외사정을 파견한 신라보다도 중앙 집권 체제가 철저하지 못했다. 고려의 태생 자체가 호족들이 연합해서 세워졌기 때문이다. 다만 그렇다고 신라가 고려보다 엄청나게 중앙 집권 체제가 강했던 건 아니었고 한국사에서 중앙 집권 체제가 철저하게 이루어졌던 나라는 오로지 조선뿐이었다. 그 이전 국가들은 시대적, 지리적 한계상 재지 세력들을 철저하게 통제하는 것 자체가 힘들어 연맹왕국 단계를 넘어서도 봉건제적 요소가 꽤 남아있었다. 한반도는 산지가 70%를 넘는 지형이라 지리적 구분이 상당히 공고했다. 괜히 삼국이 수백 년을 싸워도 당나라가 개입하기 전까진 결판이 안 났고 그 와중에 가야, 마한의 소국들이 한반도 남부에서 오랜 시간 동안 잔존할 수 있었던 게 아니다.
이건 철저한 관료제를 통해 중앙 집권 체제의 선두국이었던 중국을 제외한 전 세계 대부분의 나라들이 골머리를 앓았던 문제였기 때문에 이상할 건 없다. 물론 그 중국 또한 각 왕조의 말기에 가면 통제를 잃고 지방에서 반란 터지고 난리 나는 건 똑같았다. 조선의 경우도 몽골군의 침략과 고려말의 대혼란으로 한반도 지방 세력들의 사회 공동체가 와해되고 기반이 완전히 박살난 뒤였기에 중앙 집권 체제가 수월하게 자리잡을 수 있었다. 조선을 세운 전주 이씨 왕가도 원래는 전주 지역의 호족 가문이었으나 몽골군의 침략으로 전 국토가 박살이 난 뒤에는 강원도로 이주했다가 함경도 끝단까지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오는 등 광범위한 이동성을 보인다. 고려 초중기 때만 해도 본관은 폼이 아니라 그 자체로 연고, 신분, 세력 등을 드러내는 등 지역과 가문이 극도로 밀착된 모습을 보여줬는데 몽골군에 의해 대혼란이 찾아온 뒤로는 그러한 개념은 무너져 버린다. 고려에서 조선으로의 교체기에, 할거하거나 독자정체성을 주창하며 일어난 지방세력이 전혀 없이, 쉽게 말해 후삼국시대가 재현되지 않았던 점도 이와 연관이 깊다고 보인다.
도 아래에는 군, 현이 주를 이루었으나 특수 행정 구역인 향, 소, 부곡도 있었다. 이것들은 주로 천민들이 거주하는 지역이었는데 종류에 따라 수공업과 농업 기능을 가졌다고 2011년 기준으로 2년 ~ 3년 전까지의 국사 교과서에서 말해 왔다. 하지만 전부터 향, 소, 부곡민에 대해선 논쟁의 대상이었다. 학계에서는 이미 1960년대 이래 향, 소, 부곡민이 양민이었다는 설이 나오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향, 소, 부곡이 천민이 아니라 '신량역천', 즉 천민의 일을 하던 양인들이 살던 곳이라고 하는 주장이 나온다. 이것은 양인에 대한 해석에서 나온 것인데 양인은 국역을 지고 독립된 가호로서 존재하여 개인에 종속되어 국역을 지지 않는 천인과는 구별된다. 부곡민의 경우 중국의 부곡과 달리 주가의 호적에 부적되지도 않았던 데다 국가에 각종 공역을 지고 있다. 이는 분명 천인과는 다른 모습이다. 향, 부곡은 농사를, 소는 수공업을 생산하는 기능을 한다는 해석이 발표되었다. 또 소에선 일부만 수공업에 종사하고 소의 주민 대부분은 농사를 짓는다는 설도 존재한다. 또 소에서 수공업을 하는 주민은 소의 주민이 아니라 진정한 소의 주민은 농사를 짓는 주민들이란 설도 존재한다. 실상 사료가 적은 탓에 이리저리 많은 설들이 난무한다. 이러한 특수 지역은 고려 말이 되면 주민들의 저항과 생산력이 발전하면서 사실상 향, 소, 부곡 제도가 붕괴되어 다른 지역과 실질적으로 차이가 없어졌다. (웅진 지식 하우스, <미래를 여는 한국의 역사> 참조)
양계(북계, 동계)는 특수 군사 지역으로 그 아래에는 군현 대신 도호부와 진이 있었다. 속현이 많은 5도 지방과 다른 점은 대부분 진에 지방관이 파견되었다는 점인데 국방을 위해 당연한 조치라고 할 수 있겠다. 5도 양계였던 시절 동계는 특이하게 국경선에서 한참 떨어진 현재의 강원도 영동 지방까지 관할 지역으로 걸쳐 있었는데, 이는 여진족 해적들 때문이었다.
5도 양계 이외에 지금의 함경도 지역에 여진족들을 직간접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기미주현을 설치하여 고려와 인접했던 여진족들을 관리하였다. 이곳에는 실제로 고려 관리들을 파견하여 고려 민호로 등록하고, 이 지역에 고려법을 적용하는 등 이곳을 관리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실제로 수천에서 만 명 이상 규모의 여진족들이 지금의 길주군 이북지역에서도 귀화하려고 했으나 고려에서는 길주 이북까지는 관리의 어려움으로 귀화를 거부하였다. 하지만 금나라를 세운 완안부와의 갈등으로 이 지역을 중심으로 동북 9성을 설치하였고, 이후 결국 동북 9성의 반환과 금나라의 건국으로 이 지역에 대한 고려의 영향력은 줄어들게 되었다.
고려 전기 서경의 지위는 다른 3경과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높다는 점을 제외하면 수도인 개경 외에도 따로 부(副) 수도들이 존재했다. 흔히 고려 3경이라고 부르는데 사용되는 맥락에 따라 개경 + 부수도 2곳('개경, 서경, 동경' 또는 '개경, 서경, 남경')을 가리키거나 개경을 제외한 나머지 세 곳(서경, 동경, 남경)을 지칭할 수도 있다. 개경을 포함한 3경에는 동경과 남경이 동시에 들어간 시기가 매우 짧아서 시대에 따라 둘 중 하나가 빠졌다가 다시 포함되었다가를 반복했다.
고려사 '혹리열전'의 서문을 보면 '고려는 나라를 관대하게 통치해 참혹한 형벌이 없었으나, 변란이 잦아진 이후로 일 처리에 밝은 관리를 임용하면서 잔혹(殘酷)한 풍조가 비로소 일어났다.'라고 밝히고 있고, 또 고려사 권 84, 지제 38, 형법(刑法)1의 서문을 보면 고려왕조 5백년 동안의 형법 제도에 '그러나 그 폐해를 살펴 보면, 법망을 제대로 펴지 못해 형벌이 느슨하고 사면이 잦은 까닭으로 간사하고 흉악한 무리들이 법망을 빠져 나와 제멋대로 행동해도 이를 금지할 도리가 없었으니, 고려 말기에 이르러서는 그 폐해가 극심해졌다.'라고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어서 고려의 형벌제도가 고려왕조 5백 년 기간 내내 매우 너그러웠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또 중종실록 중종 13년(1518년) 10월 23일 기사를 보면 권벌이라는 신료가 '또 전조(前朝)에서는 가법(家法)이 아름답지 못하여 동성(同姓)과 결혼하여 기강(紀綱)이 없었지만 죄없는 사람을 함부로 죽이지 않았으니 이는 취할 만합니다.'라는 이야기를 해 고려왕조가 형법과 사형에서 너그럽고 훌륭했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고려 인종 당시에 1개월간 고려를 방문하고 돌아가 고려의 정치, 경제, 사회, 군사, 문화 제도들을 설명한 책인 고려도경을 쓴 송나라 사신 서긍도 '고려도경' 제16권 관부(官府) 영어(囹圄)편에서 '태장(笞杖)은 매우 가벼워 백 대에서 열 대까지 그 경중에 따라 가감(加減)한다, 오랑캐들의 성격이 본디 인자하여, 죽을 죄라도 거의 용서하여 산골이나 섬으로 유배(流配)하고, 사면해 주는 것은 세월의 다소와 죄의 경중을 헤아려 용서하여 준다.'라고 말해 우리나라를 오랑캐라고 대놓고 비하하는 짓을 했어도 고려가 형법과 사형 집행에서 매우 너그러운 사실은 분명히 인정할 정도였다.
물론, 여기서 고려에서는 중죄인의 경우 '결박하여 앉힌 다음에 등을 계속 세게 눌러 가슴과 넓적 다리가 계속 닿게 해서 피부가 터진 다음에야 그만둔다.'라는 말을 하기는 했으나, 실제로 고려사에 적힌 형법의 종류에서 이런 형법은 없었고, 또 서긍이 자신의 책에서 우리나라를 대놓고 '오랑캐'로 비하하는 것을 모두 감안하면 이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믿을 수는 없을 것이다. 이게 당시 기준으로는 혹형이라 볼수없었는게 피부 파열같은 경우에는 재생이 잘 되어서 이후 충분히 치료를 받는다면 이후 생활에 별 지장이 없을 만큼 충북히 회복가능하므로 십자가형이라던지 궁형같이 아예 병신으로 만드는 형벌보다 훨씬 신체에 부담이 적기 때문이다. 애초에 수십년전 학교 체벌만해도 몽둥이 몇대만 맞으면 피부가 터지는 수준이었다. 해당 형법이 없었다고 보는 이유는 잔인해서가 아니라 딱히 기록이 없어서 였을 뿐이다.
그리고 고려시대 사극에서도 흔히 나오는 주뢰, 압슬, 낙형 같은 조선 시대에 비로소 나왔던 혹형이 나오는데 이 역시 전혀 사실이 아니다. 고려사 형법지 '형장의 규격' 부분을 보면 고려시대 고문의 방법은 등에 때리는 곤장과 엉덩이에 때리는 곤장, 또 얇은 몽둥이로 엉덩이를 때리는 태형, 이 3가지밖에 없는 것으로 나오고, 압슬의 경우 두산백과에서는 조선시대 때 시행된 고문으로 설명하고 있으며, 흔히 단근질로 이야기되는 낙형의 경우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의 낙형 편을 보면 조선시대때 시행된 고문으로 나올 뿐이다. 고려사 지의 '사형의 두 종류' 편을 보면 교수형과 참형밖에 없다고 나온다.
꽤나 현대적이었던 점도 있는데 재판은 3명 이상의 재판관이 모여 실시했고 사형에 처해야 할 건은 3번을 재판해서 결정했다. 또한 죄인을 다루는 것도 조심스러워, 임신한 여자를 투옥해야 할 경우에는 출산할 때까지 집행을 연기 또는 정지해 주고 사형수라도 부모가 세상을 떠났을 때에는 장례를 치를 수 있도록 7일 동안 감시를 붙여 풀어주었다.
또 중종실록 중종 13년(1518년) 10월 23일 기사를 보면 권벌이라는 신료가 '또 전조(前朝)에서는 가법(家法)이 아름답지 못하여 동성(同姓)과 결혼하여 기강(紀綱)이 없었지만 죄없는 사람을 함부로 죽이지 않았으니 이는 취할 만합니다.'라는 이야기를 해 고려왕조가 형법과 사형에서 너그럽고 훌륭했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고려 인종 당시에 1개월간 고려를 방문하고 돌아가 고려의 정치, 경제, 사회, 군사, 문화 제도들을 설명한 책인 고려도경을 쓴 송나라 사신 서긍도 '고려도경' 제16권 관부(官府) 영어(囹圄)편에서 '태장(笞杖)은 매우 가벼워 백 대에서 열 대까지 그 경중에 따라 가감(加減)한다, 오랑캐들의 성격이 본디 인자하여, 죽을 죄라도 거의 용서하여 산골이나 섬으로 유배(流配)하고, 사면해 주는 것은 세월의 다소와 죄의 경중을 헤아려 용서하여 준다.'라고 말해 우리나라를 오랑캐라고 대놓고 비하하는 짓을 했어도 고려가 형법과 사형 집행에서 매우 너그러운 사실은 분명히 인정할 정도였다.
물론, 여기서 고려에서는 중죄인의 경우 '결박하여 앉힌 다음에 등을 계속 세게 눌러 가슴과 넓적 다리가 계속 닿게 해서 피부가 터진 다음에야 그만둔다.'라는 말을 하기는 했으나, 실제로 고려사에 적힌 형법의 종류에서 이런 형법은 없었고, 또 서긍이 자신의 책에서 우리나라를 대놓고 '오랑캐'로 비하하는 것을 모두 감안하면 이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믿을 수는 없을 것이다. 이게 당시 기준으로는 혹형이라 볼수없었는게 피부 파열같은 경우에는 재생이 잘 되어서 이후 충분히 치료를 받는다면 이후 생활에 별 지장이 없을 만큼 충북히 회복가능하므로 십자가형이라던지 궁형같이 아예 병신으로 만드는 형벌보다 훨씬 신체에 부담이 적기 때문이다. 애초에 수십년전 학교 체벌만해도 몽둥이 몇대만 맞으면 피부가 터지는 수준이었다. 해당 형법이 없었다고 보는 이유는 잔인해서가 아니라 딱히 기록이 없어서 였을 뿐이다.
그리고 고려시대 사극에서도 흔히 나오는 주뢰, 압슬, 낙형 같은 조선 시대에 비로소 나왔던 혹형이 나오는데 이 역시 전혀 사실이 아니다. 고려사 형법지 '형장의 규격' 부분을 보면 고려시대 고문의 방법은 등에 때리는 곤장과 엉덩이에 때리는 곤장, 또 얇은 몽둥이로 엉덩이를 때리는 태형, 이 3가지밖에 없는 것으로 나오고, 압슬의 경우 두산백과에서는 조선시대 때 시행된 고문으로 설명하고 있으며, 흔히 단근질로 이야기되는 낙형의 경우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의 낙형 편을 보면 조선시대때 시행된 고문으로 나올 뿐이다. 고려사 지의 '사형의 두 종류' 편을 보면 교수형과 참형밖에 없다고 나온다.
꽤나 현대적이었던 점도 있는데 재판은 3명 이상의 재판관이 모여 실시했고 사형에 처해야 할 건은 3번을 재판해서 결정했다. 또한 죄인을 다루는 것도 조심스러워, 임신한 여자를 투옥해야 할 경우에는 출산할 때까지 집행을 연기 또는 정지해 주고 사형수라도 부모가 세상을 떠났을 때에는 장례를 치를 수 있도록 7일 동안 감시를 붙여 풀어주었다.
![]() |
고려의 대외무역도. |
숙종(肅宗) 7년(1102) 9월 제서(制書)를 내리기를,
“사민(四民)이 각각 그 생업에 오로지 종사하게 되면 진실로 나라의 근본이 되는데, 지금 듣건대 서경(西京)의 습속이 상업(商業)에 종사하지 않아서 민(民)이 그 이익을 잃고 있다 하니, 유수관(留守官)은 그 아뢴 대로 화천별감(貨泉別監) 2명을 차정(差定)하여 날마다 시장의 가게[市肆]를 감독하게 하여 상인들로 하여금 모두 힘써 무역의 이익을 얻게 하라.”
라고 하였다.
고려는 고려를 건국한 개국군주이며 초대 국왕 태조 왕건부터 상업으로 세력을 키운 호족 가문 출신으로 건국 초기부터 상업에 우호적이었다. 태조 2년(919년)에 개경의 궁성 동문인 광화문에서 남대가(南大街)를 따라 십자가(十字街)에 이르는 중심 도로변에 시전(市廛)이라는 시장을 설치했고 여기서 지배층 및 사찰과 연계된 상인들이 상업 활동을 했다. 고려 말을 기준으로 개경에는 최소한 1,200여 칸 이상의 시전 행랑에서 2,400명 ~ 3,600명 이상의 시전 상인이 영업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정부는 시전 운영에 적극 관여해서 각 시전의 판매 품종을 지정했고, 활동하는 상인에 대한 장부를 만들어 철저히 관리했다.(고려사 권85, 지39, 형법2, 금령, 공양왕 2년 4월).
화폐 유통 시도는 996년(성종 15년)에 처음 있었으며, 중국 동전을 본뜬 건원중보[53] 철전과 동전을 주조해 유통하게 한 것이다. 미약하게 통용을 시도해 보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흐지부지되었다. 이후 1102년(숙종 7년)에도 본격적인 화폐유통 시도가 있었는데 송나라 유학에서 돌아온 대각국사 의천이 숙종에게 화폐 유통을 적극 건의하면서 해동통보로 대표되는 여러 종류의 동전[54]을 다량 주조하여[55] 유통을 시도하였다. 하지만 대도시권에서 조금 돌다가 사장되는 수준에 그쳤다.
시전 이외에 국가에서 운영하는 주점, 다점(찻집), 식미점 등 관영 상점이 있었는데 이들은 화폐의 민간 통용을 장려하기 위한 시설로 이용되었다. 개경 외 서경, 동경 같은 주요 도시에 설치되었다. 또한 상행위를 감독하기 위해 경시서를 설치했고, 경시서는 도량형을 감독하고 물가를 조절하며 불법 상행위를 단속하는 일을 했다.
화폐 유통 시도는 996년(성종 15년)에 처음 있었으며, 중국 동전을 본뜬 건원중보[53] 철전과 동전을 주조해 유통하게 한 것이다. 미약하게 통용을 시도해 보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흐지부지되었다. 이후 1102년(숙종 7년)에도 본격적인 화폐유통 시도가 있었는데 송나라 유학에서 돌아온 대각국사 의천이 숙종에게 화폐 유통을 적극 건의하면서 해동통보로 대표되는 여러 종류의 동전[54]을 다량 주조하여[55] 유통을 시도하였다. 하지만 대도시권에서 조금 돌다가 사장되는 수준에 그쳤다.
시전 이외에 국가에서 운영하는 주점, 다점(찻집), 식미점 등 관영 상점이 있었는데 이들은 화폐의 민간 통용을 장려하기 위한 시설로 이용되었다. 개경 외 서경, 동경 같은 주요 도시에 설치되었다. 또한 상행위를 감독하기 위해 경시서를 설치했고, 경시서는 도량형을 감독하고 물가를 조절하며 불법 상행위를 단속하는 일을 했다.
고려의 고사(故事)에, 매양 사신이 이르게 되면 사람들이 모여 큰 저자를 이루고 온갖 물화를 나열하는데,… (중략)… 대개 그 풍속이 사람이 살면서 장사하는 가옥은 없고 오직 한낮에 시장을 벌여(惟以日中爲虛) 남녀ㆍ노소ㆍ관리ㆍ공기(工技)들이 각기 자기가 가진 것으로써 교역(交易)하고, 돈을 사용하는 법은 없다. 오직 저포(紵布)나 은병(銀鉼)으로 그 가치를 표준하여 교역하고, 일용(日用)의 세미한 것으로 필(疋)이나 냥(兩)에 미치지 못하는 것은 쌀로 치수(錙銖)를 계산하여 상환한다. 그러나 백성들은 오래도록 그런 풍속에 익숙하여 스스로 편하게 여긴다. 중간에 조정에서 전보(錢寶 화폐)를 내려 주었는데, 지금은 모두 부고(府庫)에 저장해 두고 때로 내다 관속(官屬)들에게 관람시킨다 한다.고려도경, 권3 무역.
위 인용문 중 ‘허(虛)’는 허시(虛市), 즉 시장을 의미하는데 특정한 시설물이 없이 빈 터에 장이 섰다가 사라졌기 때문에 허시라고도 했다. 이러한 허시를 지역 시장으로 해석하는 의견도 있으나 지역 시장이 아닌, 시전과 별도로 개성에서 임시로 열린 시장으로 해석하는 의견도 있다. 다만 고려 말기 문신 이숭인의 문집 도은집에 촌시(村市)가 언급되어 지역 시장이 존재는 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 시대에는 사찰에서 여행객의 편의를 위해 원(院)이라는 일종의 숙박 시설을 별도로 마련했는데, 이 원은 단순한 숙박 시설을 넘어 물자 유통, 거래 중계 등이 가능한 상업 중심지 역할을 했다. 예를 들어 서울 강남구의 한강변에 있었던 사평원은 많은 배가 오가는 중요한 교역처였다. 고려의 지배 이념이자 종교였던 불교 역시 상업 활동에 호의적이고 사찰이 상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물론 육로 교통도 전국으로 이어지며※ 이때 도로망이 조선까지 이어졌다. 국내 조운도 활발했는데, 현재 발굴된 침몰선 중 대부분이 고려 대의 것이고 대표적으로 마도 1~3호선 등을 꼽을 수 있다.
다만 고려도경에서는 귀족들의 횡포와 사치로 인하여 백성들의 집은 하찮다고 묘사되어 있다. 이는 고려사에서 묘사된 '왕성이 비록 크기는 하나, 자갈땅이고 산등성이어서 땅이 평탄하고 넓지 못하기 때문에, 백성들이 거주하는 형세가 고르지 못하여 벌집과 개미 구멍 같다. 풀을 베어다 지붕을 덮어 겨우 풍우(風雨)를 막는데, 집의 크기는 서까래를 양쪽으로 잇대어 놓은 것에 불과하다. 부유한 집은 다소 기와를 덮었으나, 겨우 열에 한두 집뿐이다.' 라는 기록과 동일하다. 몽골 귀족까지 군림하던 원 간섭기, 그리고 이후의 고려 말 왜구의 침입까지 고려하면 고려 백성들의 삶은 오랜 기간 동안 좋지는 않았다.
고려 시대의 무역은 공무역(公貿易) 중심이었기 때문에 통일신라 시기보다 사무역이 쇠퇴하였다. 하지만 화북의 이민족 왕조를 견제하기 위해 고려에 어느 정도 의존하던 송의 외교 상황과 맞물려 문화적 교류는 더욱 활발하였다. 개경에는 국제무역항인 벽란도를 둬서 활발한 무역활동을 했다. 송나라와 일본의 상인은 물론이고 교지국, 섬라곡국, 마팔국, 심지어 대식국의 이슬람 상인들까지도 거쳐갔다고 한다.
고려는 벽란도 뿐만 아니라 수도 개경과 가까운 예성강 하구를 국제무역로로 육성하였다. 이곳에는 송나라 사신을 접대하는 순천관이 있었고, 외국상인들을 위한 오빈관 등 10개나 되는 외국인용 숙소가 있었다. 이곳에서 개경까지는 동서로 도로를 만들어 놓았고, 뱃사공을 배치하여 사신이 개경에 갔다 올 때까지 선박을 지키게 하였다. 고려의 대학자 이규보는 벽란도의 붐비는 풍경을 이렇게 묘사했다.
고려는 벽란도 뿐만 아니라 수도 개경과 가까운 예성강 하구를 국제무역로로 육성하였다. 이곳에는 송나라 사신을 접대하는 순천관이 있었고, 외국상인들을 위한 오빈관 등 10개나 되는 외국인용 숙소가 있었다. 이곳에서 개경까지는 동서로 도로를 만들어 놓았고, 뱃사공을 배치하여 사신이 개경에 갔다 올 때까지 선박을 지키게 하였다. 고려의 대학자 이규보는 벽란도의 붐비는 풍경을 이렇게 묘사했다.
물결은 밀려왔다 다시 밀려가고, 오가는 뱃머리 서로 잇대었네
潮來復潮去 來船去舶首尾衡相連
아침에 여기서 떠나면 한낮이 못 되어 남만에 이른다네
朝發此樓底 未午棹入南蠻天
우리나라는 문물과 예악이 흥행한 지가 이미 오래되었으며 장삿배가 연이어 내왕하여서 값진 보배가 날마다 들어오니, 중국과 교통하여도 실제로 소득이 없을 것입니다. 거란과 영구히 절교하지 않을 터이면 송 나라와 교통함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하니 따랐다.<고려사절요 문종 12년>
한국의 비한자계 외국어 명칭이 코리아(Korea)가 되어 조선 시대를 거쳐 현대까지 사용되는 것도, 이때 이슬람 상인들이 '고려'를 그들 식으로 발음한 것이 어원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사실 고려와 고구려는 같은 말인데, '구려'는 옛말로 성, 읍, 나라의 뜻을 가진 단어고 한 글자로 줄여서 부를 때 '려'로 불렀다. 백제나 신라처럼 끝글자인 려를 사용했다. 여제, 나제동맹처럼. 이는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기 이전 중국 사서에서도 고구려를 고려라 표기한 흔적에서도 나타난다. 고려의 ㅕ가 탈락하면서, 현대 우리말에도 '고을'이라는 단어로 나타난다.
대신 고려가 이슬람 사서에 기록된 것은 총 2회뿐이다. 물론 사서에 명시되지 않았다고 비중이 적어졌다고 보긴 힘들 것이다. 앞서 말한 송나라의 상황이나 코리아의 근원, 쌍화점을 보면 민간에 끼치는 영향은 적지 않았을 수준이었을 것이다.
고려가 가장 빈번하게 교역한 나라는 송나라였다. 당나라에 있던 신라방처럼 송나라에, 특히 저장성, 푸젠성 같은 강남지역의 해안지역에 고려인 거주지역이 있었다. 중국과의 교류에서 주로 압록강을 건너는 육로를 택했던 조선 시대와 달리 고려시대에는 초기에는 산둥 반도의 등주에서 거의 직선 코스로 대동강 어구의 초도, 옹진군, 예성강으로 이르는 길이 중심, 그리고 거란족의 위협을 느낀 이후로 전라도 방향으로 항해하기도 했다. 활발하던 양국 간의 무역은 남송 시대 이후 차츰 쇠퇴했다.
일본은 907년 견당사 파견을 중단한 이후 쇄국정책을 유지하며 왕건의 국서에 황제국 용어가 쓰였다며 국서를 거절했다. 하지만 현종대 여진해적들에게 잡혔던 일본인 포로를 송환하면서 관계가 본격적으로 성립되었다. 이후 다자이후와 진해를 중심으로 지역적인 경제교류가 진행되었다. 또한 고려는 대마도와 이키섬에 지방관들에게 관직을 주고 규슈지역의 지방관들의 조공을 받으며 왜구방지와 고려인의 해상활동을 보호했다.
거란과는 초창기 이후 국교를 트긴 했지만 교역은 송나라 방면에 비해 활발하지 않았다. 거란은 무역장 설치를 요구하는 등 비교적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여진족과의 교류는 금나라가 성립되기 훨씬 전부터 있었는데, 고려사에 따르면 10세기 초반에서 11세기 초반까지 여진의 추장이 무역을 위해 고려에 온 것이 230여 회나 될 정도로 자주 왕래했다. 고려로서는 경제적 부담이 있었으나, 안보적 측면을 고려해 여진과 교역했다. 금나라 건국 후에는 국경선 부근에 무역장(각장)을 설치해 비교적 활발하게 교역했다. 금나라는 각장에 세금도 부과하고 유출금지 품목이나 동전유출도 금지하였다.
아라비아(대식국, 大食國)인과의 교역도 고려 대에 종종 이루어졌다. 당, 송 시대 이래로 무슬림들은 광저우 등 남중국을 중심으로 무역을 했으며, 송나라는 중국 역사상 가장 해외 무역을 장려하는 왕조였기에 이들이 고려에까지 진출했다. 1020년대에서 1040년대에 걸쳐 3차례 100여 명의 대규모 상단이 방문한 것이 확인되며, 그 이후에도 계속된 것으로 추측된다. 이들은 수은, 향료, 상아 등 고려에서 귀한 사치품을 팔았다. 그러나 아라비아 상인단은 송나라의 시박사(市舶司)의 통제를 받았기 때문에 고려와 1대1로 활발하게 교역하기는 어려웠고 주로 송을 매개로 간접적으로 교류하는 쪽이 주류였다.
이후 원 간섭기에 고려는 세계 제국 원나라와 단일 경제권이자 제1번국에 속하게 되는데, 정통성이 모자랐던 쿠빌라이 칸에게 태자 시절 원종이 스스로 들어가 신하를 자처하자 쿠빌라이가 "당나라도 무릎꿇리지 못했던 고(구)려가 스스로 내게 왔으니 이는 하늘의 뜻이다!"라면서 대외적 정통성을 강화하고 패권을 차지할 수 있었다. 이때부터 원나라에서 고려의 대우가 제법 괜찮아졌다 하며, 간섭과 수탈도 심했지만 고려 후기의 대외 교역은 양적으로 현대 이전 한국사의 어느 때보다 활발했다. 당시 대표적인 유물이 신안선으로, 대량의 원나라 물건이 양국을 오갔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러한 대외 교역은 원말명초에 이르면 쇠퇴하는데, 몽골 제국의 무역로인 실크로드의 중심 중 하나였던 중앙아시아에서 흑사병이 발발, 그대로 원나라까지 들어와서 수백만명이 사망, 경제권이 한순간에 무너졌다. 이로 인해 원-일본 가마쿠라 막부는 연쇄적인 경제 위기를 겪게 되고 홍건적과 왜구 등의 도적떼가 빈번하게 발생, 결과적으로 세 나라 전부 나라가 뒤집혀 명나라-조선-무로마치 막부로 국가가 교체된다.
이때의 영향으로 훗날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세워진 이후에도 주변 국가인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조선을 가리켜 여전히 '고려'라고 부르기도 했다. 조선을 건국한 개국군주이며 초대 국왕 이성계가 주원장과의 알력으로 명나라 황제의 책봉을 받지 못하자 고려를 건국한 개국군주이며 초대 국왕 왕건 때부터 전해 내려온 '고려권지국사'라는 명칭을 사용한 적도 있다. 당나라가 망한 뒤에도 일본에서 중국을 여전히 당이라고 부른 것이나, 일본이 일본이란 국호를 만들었음에도 다른 동아시아국가들로부터 왜(倭)라고 불린것과 진나라가 망했음에도 중국이 차이나라고 불리는 것과 같은 경우다. 조선 측에서는 이러한 이름을 부담스러워 했고, 바뀌는 데 시일이 걸렸으나, 한자문화권에서는 나라 이름을 조선으로 바꾸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조선과 이슬람권 간의 교역이 없었기에, 이슬람과 서양 쪽에 굳혀진 고려라는 이름은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대한제국은 영미권에서 Korean Empire로 불렸는데, 대한제국(조선) 입장에서는 자신들이 멸망시킨 전 왕조의 이름이었기 때문에 기겁하고 Empire of Dai Han 같은 이름을 대외적으로 내세웠으나 끝까지 관철되지는 못했다. 러시아쪽도 마찬가지라서 러시아어로 우리 민족을 조선이 아닌, 고려로 불렀다.
현재 대외적으로 한국을 가리키는 명칭은 고려에서 비롯된 비한자 계통 외국어 이름인 'Korea'가 되어버리고, 지리적으로도 '고려 반도'라는 뜻의 'Korean Peninsula'로 굳어졌다. 어떻게 보면 한자문화권을 제외한 전세계 대부분의 국가들에서 한국을 여전히 '고려'라고 부르고 있는 셈이다.
고려가 자리잡았던 10~13세기는 동아시아에는 다원적 천하질서가 자리잡았던 시대였다. 13세기 몽골의 등장으로 다원적 천하질서가 점차 붕괴되어 갔고 1227년 서하의 멸망, 1234년 금나라 멸망, 1270년 고려의 출륙과 개경 환도, 1271년 원의 건국으로 4세기에 걸친 다원적 질서는 종말을 고했다. 그 이전에는 송, 요/금, 서하, 고려, 일본, 대월, 대리국 등 모두 자국의 군주를 천자나 그에 준한 존재로 자칭하고 있었으며 따라서 이 시기의 국제관계는 각 국의 독자성을 기초로 형성되었다. 그러나 당시 동아시아에서 국가 간의 질서가 다중심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해서 국가 간의 차등적인 위상이 배제되었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일례로 송과 요는 실질적으로는 대등한 대적국의 위치였으나 형식적으로는 상호 형제국으로 송이 형, 요가 아우의 위치에 있었으며 그 대가[56]로 송은 요에게 해마다 공물의 성격을 지닌 막대한 세폐와 비단, 은을 헌납하며 평화를 구걸해야 했다. 이에 형식적 위상은 실제 힘의 차이에 따른 관계와 괴리되어 있었다.[57][58]
요나라와의 관계를 먼저 살펴보면 만주를 포함한 북방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두고 서로 다투는 사이였으며 고려가 여요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북방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따라서 고려가 요에 대해 취한 신하로서의 위치는 명목상에 불과했다고 여길 수 있는 부분. 실제로 고려는 전쟁 이후 요와의 관계를 화친 관계로 규정했고 그것이 당시 실정에 부합하기도 했다. 실제 요, 금의 사신이 입경할 경우 왕이 북면을 하는 것이 아니라 서면을 하는 것으로 일종의 손님을 맞는 예를 갖추었다. 고려사에 보면 북조의 사신을 맞는 예와 명의 사신을 맞는 예가 달리 기술되어 있다. 여기서 화친관계란 양국 간의 전쟁 이후 맺어진 평화적인 국제관계를 의미하며 주로 정치적인 관계를 중심으로 형성된 국제 평화 질서와 밀접한 관련을 갖는 개념이다. (한국역사연구회시대사 총서 고려시대사 참조.) 고려의 해동천자, 해동천하 개념의 확립은 여요전쟁 승리 후 북방 제번에 대한 통할력이 생긴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할 수 있다.
고려와 송나라 사이도 역시 국제 관계의 형식과 내용이 괴리되고 있었다. 송이 고려에 대해 갖는 영향력은 극히 제한적이었다. 일단 육로로는 요에 의해서 끊겨 있고 바다로만 오가는 사이었기도 하고 역대 중국 통일왕조 중 가장 면적도 좁고 문약했기 때문이다. 외교의 단절 및 통교의 주도권은 항상 고려가 지니고 있었으며 송은 그를 저지할 힘도 명분도 부족했다. 고려의 송에 대한 관계는 통교 관계 이상이라 볼 수 없다. 통교관계는 무역, 통상, 무역교류 등을 중심으로 한 관계로 정부 대 정부의 성격은 약한 관계를 말한다. 송은 고려와의 외교 수준을 국신사로 정리하여 진행하였으며 이는 당대 요와의 관계와 동일한 수준이었다.
한편 일본은 동아시아 세계의 외곽에 있으면서 다른 여러 나라에게 주목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외교적 대상이 될 가능성이 있었지만 일본 자체가 고립을 선택했고 그 바탕에는 자기 세계에 대한 자족적 인식이 깔려있었다. 그러나 고려, 송 등과의 경제적 교류는 있었다.
이러한 고려 해동천하는 10세기~13세기 중엽까지 지속되었으며 1126년 금나라에 대한 사대 외교를 정하면서 그 방향이 서서히 바뀌기 시작했다. 북방의 요와 송이 동시에 금에게 갈려나가면서 고려는 1125년까지 국서에 표현하지 않던 신 이란 표현을 1126년부터 사용하기 시작한다.
고려가 북방의 번국으로 여기던 여진이 금국으로 독립하면서 북방의 영향력뿐만 아니라 번국의 상실은 해동천하의 붕괴를 의미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표면상 칭신사대였으나 고려에서는 화친으로 표현했으며 실제로도 그러하여 금과의 외교 관계 번반은 모두 이전 요와의 화친 격식에 준하여 성립되었고 금이 멸망할 때까지 지켜졌다. 금도 고려의 칭신사대가 꽤나 필요했었다. 당시 요, 송 등 중원에 자리잡은 왕조들을 그야말로 때려 잡고 잘나가던 시기에도 고려 전선에서는 꽤나 고전했었으니 고려에 대한 공포심이 생각보다 컸을 가능성이 높다. 오죽하면 금의 황제가 부하들로 하여금 고려의 국경을 침범하거나 사사로이 공격하는 것을 금지시켰을 정도. 물론 고려에 대한 공포심도 조금은 있었겠지만 그보단 한반도에 개입하고 싶지 않은 금의 의중이 반영되었을 것이란 시각도 있다. 실제로도 금의 관심은 언제나 중원에 쏠려있었고, 만주 쪽은 자신들의 초기 근거지에 불과했다. 원의 발흥으로 위기가 시작되었던 때에도 끊임없이 중원을 차지하기 위해 남송과 혈전을 벌였을 정도니. 그러나 한때 번국이었던 여진에 대한 화친수용 및 칭신사대에 대해 고려 내부의 진통이 없을 수 없었다. 그 예가 묘청의 난.
다원적 천하질서는 13세기 몽골의 발흥으로 그 수명을 다했으며 이후 명, 청으로 이어지는 강력한 중화제국과의 관계는 전통적인 해동천하관을 붕괴시켰고 그에 따라 고유의 천하관을 포기한 조선의 외교정책 수립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조선도 철저한 사대관계를 따르기는 했지만, 왕의 묘호에 '조'나 '종'을 사용하는 등 소극적으로는 표시했었다. 하지만 구한말 이전에 단 한번도 외왕내제를 시도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고 대내적으로도 스스로를 해동천자라는 자주의식을 가지기보다는 명/청의 번방으로 인식했는데 이는 조선 특유의 성리학적 모화사상과 더불어 원나라 이후 다원적 질서의 종말 때문이기도 하다.
몽골 제국(원나라)과의 관계는 여몽관계, 원 간섭기 참고.
요나라와의 관계를 먼저 살펴보면 만주를 포함한 북방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두고 서로 다투는 사이였으며 고려가 여요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북방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따라서 고려가 요에 대해 취한 신하로서의 위치는 명목상에 불과했다고 여길 수 있는 부분. 실제로 고려는 전쟁 이후 요와의 관계를 화친 관계로 규정했고 그것이 당시 실정에 부합하기도 했다. 실제 요, 금의 사신이 입경할 경우 왕이 북면을 하는 것이 아니라 서면을 하는 것으로 일종의 손님을 맞는 예를 갖추었다. 고려사에 보면 북조의 사신을 맞는 예와 명의 사신을 맞는 예가 달리 기술되어 있다. 여기서 화친관계란 양국 간의 전쟁 이후 맺어진 평화적인 국제관계를 의미하며 주로 정치적인 관계를 중심으로 형성된 국제 평화 질서와 밀접한 관련을 갖는 개념이다. (한국역사연구회시대사 총서 고려시대사 참조.) 고려의 해동천자, 해동천하 개념의 확립은 여요전쟁 승리 후 북방 제번에 대한 통할력이 생긴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할 수 있다.
고려와 송나라 사이도 역시 국제 관계의 형식과 내용이 괴리되고 있었다. 송이 고려에 대해 갖는 영향력은 극히 제한적이었다. 일단 육로로는 요에 의해서 끊겨 있고 바다로만 오가는 사이었기도 하고 역대 중국 통일왕조 중 가장 면적도 좁고 문약했기 때문이다. 외교의 단절 및 통교의 주도권은 항상 고려가 지니고 있었으며 송은 그를 저지할 힘도 명분도 부족했다. 고려의 송에 대한 관계는 통교 관계 이상이라 볼 수 없다. 통교관계는 무역, 통상, 무역교류 등을 중심으로 한 관계로 정부 대 정부의 성격은 약한 관계를 말한다. 송은 고려와의 외교 수준을 국신사로 정리하여 진행하였으며 이는 당대 요와의 관계와 동일한 수준이었다.
한편 일본은 동아시아 세계의 외곽에 있으면서 다른 여러 나라에게 주목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외교적 대상이 될 가능성이 있었지만 일본 자체가 고립을 선택했고 그 바탕에는 자기 세계에 대한 자족적 인식이 깔려있었다. 그러나 고려, 송 등과의 경제적 교류는 있었다.
이러한 고려 해동천하는 10세기~13세기 중엽까지 지속되었으며 1126년 금나라에 대한 사대 외교를 정하면서 그 방향이 서서히 바뀌기 시작했다. 북방의 요와 송이 동시에 금에게 갈려나가면서 고려는 1125년까지 국서에 표현하지 않던 신 이란 표현을 1126년부터 사용하기 시작한다.
고려가 북방의 번국으로 여기던 여진이 금국으로 독립하면서 북방의 영향력뿐만 아니라 번국의 상실은 해동천하의 붕괴를 의미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표면상 칭신사대였으나 고려에서는 화친으로 표현했으며 실제로도 그러하여 금과의 외교 관계 번반은 모두 이전 요와의 화친 격식에 준하여 성립되었고 금이 멸망할 때까지 지켜졌다. 금도 고려의 칭신사대가 꽤나 필요했었다. 당시 요, 송 등 중원에 자리잡은 왕조들을 그야말로 때려 잡고 잘나가던 시기에도 고려 전선에서는 꽤나 고전했었으니 고려에 대한 공포심이 생각보다 컸을 가능성이 높다. 오죽하면 금의 황제가 부하들로 하여금 고려의 국경을 침범하거나 사사로이 공격하는 것을 금지시켰을 정도. 물론 고려에 대한 공포심도 조금은 있었겠지만 그보단 한반도에 개입하고 싶지 않은 금의 의중이 반영되었을 것이란 시각도 있다. 실제로도 금의 관심은 언제나 중원에 쏠려있었고, 만주 쪽은 자신들의 초기 근거지에 불과했다. 원의 발흥으로 위기가 시작되었던 때에도 끊임없이 중원을 차지하기 위해 남송과 혈전을 벌였을 정도니. 그러나 한때 번국이었던 여진에 대한 화친수용 및 칭신사대에 대해 고려 내부의 진통이 없을 수 없었다. 그 예가 묘청의 난.
다원적 천하질서는 13세기 몽골의 발흥으로 그 수명을 다했으며 이후 명, 청으로 이어지는 강력한 중화제국과의 관계는 전통적인 해동천하관을 붕괴시켰고 그에 따라 고유의 천하관을 포기한 조선의 외교정책 수립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조선도 철저한 사대관계를 따르기는 했지만, 왕의 묘호에 '조'나 '종'을 사용하는 등 소극적으로는 표시했었다. 하지만 구한말 이전에 단 한번도 외왕내제를 시도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고 대내적으로도 스스로를 해동천자라는 자주의식을 가지기보다는 명/청의 번방으로 인식했는데 이는 조선 특유의 성리학적 모화사상과 더불어 원나라 이후 다원적 질서의 종말 때문이기도 하다.
몽골 제국(원나라)과의 관계는 여몽관계, 원 간섭기 참고.
고려시대 연구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점은 후대의 조선시대와 비교했을때 상대적으로 그 사료의 양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고려는 조선만큼 인쇄술이 보편화되지 않아 서적 편찬량이 많지 않았는데 전란은 상대적으로 더 많이 겪어서 사료의 양에서 조선보다 상대적으로 더 적을 수밖에 없다. 특히 고려 초는 더 심해서, 몇백 년 전인 7세기 삼국통일 당시보다도 사료가 더 적은 편이다. 이 시기는 한중일 3국이 모두 엮여서 기록이 적은 삼국시대 중 유일하게 그나마 기록이 풍부한 시기다. 물론 고려 이전의 정말로 사료와 기록 그 자체가 매우 부족한 삼국시대와 비교하면 역으로 고려시대의 사료들이 상대적으로 훨씬 더 많이 남아있는 편이니 어디까지나 후대의 조선과 비교했을 때의 상대적인 평가라는 부분은 감안해야 한다.
고려시대를 다룬 주요 사서로는 고려가 남긴 고려실록 등의 기록을 바탕으로 조선 시대에 쓰여진 고려사와 그 고려사의 요약본인 고려사절요가 있으며 동시대 북송의 사신이었던 서긍이 쓴 고려도경과 구오대사, 신오대사, 요사, 금사, 송사, 원사, 명사 등 중국 정사의 외국열전 고려편이 중요 사료들로 꼽힌다. 이 중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는 후대인 조선시대에 고려실록 등 고려시절 기록들을 바탕으로 편찬된 고려의 역사서인데 고려에도 원본인 고려실록과 다른 여러 기록들이 있었으나 여요전쟁이나 여몽전쟁 등의 전란 때 몇차례나 소실된 것으로 추정되며, 남아있던 고려실록 또한 임진왜란 때 모두 다 불타버렸다. 즉,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는 조선 초에 남아있던 고려실록 등을 바탕으로 하여 당대의 고려의 기록들을 집대성해서 만든 고려시대 전반에 관한 내용을 총합 편찬한 유이한 정사(正史) 사서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료들은 모두 사료로서 가지는 기본적인 편파성이 있다. 일단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는 조선의 입장에서, 나머지 사료들은 5대 10국 시대의 각 국가들, 요나라, 금나라, 송나라, 원나라, 명나라의 입장에서 바라본 고려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다만 스스로의 역사를 총합적으로 서술한 예는 드물 수밖에 없다는 점은 감안해야 한다. 당대의 기록들을 제외한 멸망한 전 왕조에 대한 총합적인 역사서는 후대의 계승국들이 편찬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는 고려가 남긴 역사서들에서도 마찬가지인 부분으로, 고려시대에 그 이전 시대의 삼국을 바라본 역사서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조차 이러한 편파성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는 없다. 이 두 역사서는 모두 삼국시대의 고구려, 백제, 신라의 역사들을 서술했지만 엄연히 당대 고려의 시각에서 고대를 해석하여 정리하고 편찬한 고려의 입김이 들어간 사서들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후삼국시대 당시 왕건이 역성혁명을 일으켜서 고려를 건국한 이후 고려가 남긴 궁예에 대한 기록들에 대해서도 고려측의 고려를 건국한 역성혁명 정당화를 위한 왜곡과 편파성이 들어간 것이 아닌가 하는 학계의 비판적인 의견들[59]이 나올 정도로 이런 논란은 거의 대부분의 사서에서 항상 나오는 보편적인 논란들이다.
그나마 고려실록 등 고려측이 스스로 남긴 기록들을 바탕으로 세종대왕이 각별히 신경을 써서 편파성을 최대한 줄인 고려사와 그 고려사의 축약본인 고려사절요는 실록에서의 세종의 여러 발언들에서 알 수 있듯이 객관성을 최대한 유지한 편이다. 물론 고려가 멸망한 이후 조선 초기에 고려의 사초를 바탕으로 편찬되었는데, 아무래도 조선 건국의 정당성을 위해 당대 조선측의 시각이 들어갈 수밖에는 없었겠지만 말이다. 따라서 고려 말기의 사건들(특히 공민왕, 우왕, 창왕시기)은 고려사에서의 궁예에 대한 여러 논란들처럼 여러모로 다른 의견들도 존재하고 있는 상황이다. 거기다 원본인 고려실록을 바탕으로한 요약집이나 다름없어 텍스트 분량 자체가 조선왕조실록과 비교했을 때 많이 부족한 편이다. 물론 비교 대상인 조선왕조실록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방대한 양인 점은 고려해야 한다. 그외 고려가 스스로 남긴 다른 기록들이 고려와 그 이후에 겪은 여러 전란으로 크게 손실된 점 또한 안타까운 부분이다.
고려도경과 구오대사, 신오대사, 요사, 금사, 송사, 원사, 명사 외국열전 고려편의 경우, 사신단의 교류와 고려에 심어놓은 스파이를 통해 보고 들은 정보를 기록하여 5대 10국 시대의 군주와 요나라, 금나라, 송나라, 원나라, 명나라 황제에게 올린 보고서 성격의 사료이기 때문에 주마간산, 수박 겉 핥기 수준이다. 몇 가지만 들면, 고려도경에서는 고려의 역사와 관리 등급을 설명하는 부분이 고구려와 뒤섞여 있다. 또한 서긍은 고려가 바닷가에 위치해 있으면서 선박이 지극히 단순하고 조잡하며 작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고려는 여진족 해적을 토벌하면서 일본까지 원정을 갈 정도로 선박 / 항해 기술이 뛰어났고(과선 문서 참조), 근래 고려시대의 고선 발굴을 통해 대형선의 존재도 입증되었다. 물론 당시 서긍 일행이 타고 온 사신선인 신주(神舟)에 비하면 보잘 것 없을지 몰라도, 신주 자체도 당대 송나라의 엄청난 기술력과 자본을 투자해 만든 것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고려의 선박 수준은 전혀 낮은 수준이 아니다. 더구나 원래 문서에는 도경이란 표현처럼 그림이 첨부되어 있었는데, 이게 세월이 흐르면서 난리통에 다 날아갔다. 때문에 위의 사료들은 모두 사서라면 기본적으로 거쳐야 하는 철저한 교차검증이 필요하다.
고려에도 분명히 실록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지만, 안타깝게도 전부 유실되었다. 조선왕조실록 중 선조수정실록을 보면, 원래 한성 춘추관 사고에 고려 실록이 보존되어 있었는데 임진왜란 때 유실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불행 중 다행으로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는 안의, 손흥록 등이 보존하여 오늘날에 이를 수 있었다. 다만 조선왕조실록이 고려실록의 것을 전범으로 삼았다는 것은 확실해 보인다. 그 외에 이규보 등의 문집 등 고려시대 사람들이 남긴 기록들이 일부 있기는 하지만 이것만으로 고려시대 전체를 파악하는 것은 너무나 어렵다. 드물게 문중에서 고려 시대 문서가 나온다 해도 그 수는 손가락에 꼽을 정도. 오죽하면 고려 시대 관직 임명장은 나오면 보물급이라는 말까지 할 정도다. 이 때문에 고려사 연구자 대부분은 당연하지만 한문을 기본 소양으로 장착하고 그중 일부는 몽골어, 만주어 등 다양한 언어들까지 배우면서 사료 탐색에 열을 올리고 있다.
또한 다른 난관을 하나 뽑자면 고려 유적지 접근의 한계를 들 수 있다. 고려 수도인 개성은 현재의 북한령이라 북한과의 긴밀한 협력 없이는 만월대나 고려왕릉 등 주요 유적에 대한 고고학적 연구 진행 자체가 불가능하다. 따라서 고려시대 연구는 특히 남북관계가 진전되면 활성화되고 반면 남북관계가 경색되면 더뎌지는 독특한 특성이 있다. 그나마 고려 왕조가 강화도를 수도로 삼은 기간이 있어 위안이 되기는 하지만 문제는 강화도는 임시 수도격이었기 때문에 본 수도였던 개성과 기간 면에서나 남아있는 문화유산의 질적 수준에 있어서나 격차가 상당한 편이다.
남한에 남아있는 고려왕릉 중 가장 잘 보존된 무덤이 고종의 홍릉인데 아무래도 고려 국력이 약했을 시기이고 또한 왕실보다 최씨 무신정권의 권세가 막강했던 시기라 개성의 무덤들이나 조선 및 신라의 왕릉들과 비교해 보았을 때 양식도 간소하고 초라한 편이다. 병풍석도 안 둘러져 있고 인물석도 솜씨가 매우 투박하다. 솔직히 말하면 왕릉이란 요소를 제외하고 외관만 보았을 때는 조선시대 권세가 무덤보다도 허접한 편이다. 게다가 대상으로 삼은 홍릉이 남한 소재 고려왕릉 중 상태가 가장 나은 편이고 다른 무덤들은 더 심각한 편이다. 그런데 단순히 남한의 고려왕릉만이 그러한 게 아니라 북한에 소재한 대다수 왕릉 가운데에서도 왕건의 현릉, 공민왕의 현정릉, 그리고 주인이 불분명한 칠릉군의 몇 기 정도를 제외하고는 문인석 등의 석상이 신라왕릉이나 조선왕릉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매우 투박한 편이다. 자세한 내용은 고려왕릉에 대해 자세히 정리된 글에서 참고. 아무튼 이러한 연유로 고려시대 연구는 조선시대는 물론 삼국시대의 백제, 신라에 비해서도 상대적으로 제약이 많이 따르는 편이다.
고구려와 비교해도 연구의 접근성이 떨어질 정도인데 고구려의 유적, 유물들은 북한 지역 뿐만 아니라 요동 등 중국 지역에도 다수 분포해 있어서 이 곳을 통해 연구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한편 북한이 가난해지면서 평양과 개성 등의 수많은 문화재들을 중국에 팔고 있다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
고려시대를 다룬 주요 사서로는 고려가 남긴 고려실록 등의 기록을 바탕으로 조선 시대에 쓰여진 고려사와 그 고려사의 요약본인 고려사절요가 있으며 동시대 북송의 사신이었던 서긍이 쓴 고려도경과 구오대사, 신오대사, 요사, 금사, 송사, 원사, 명사 등 중국 정사의 외국열전 고려편이 중요 사료들로 꼽힌다. 이 중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는 후대인 조선시대에 고려실록 등 고려시절 기록들을 바탕으로 편찬된 고려의 역사서인데 고려에도 원본인 고려실록과 다른 여러 기록들이 있었으나 여요전쟁이나 여몽전쟁 등의 전란 때 몇차례나 소실된 것으로 추정되며, 남아있던 고려실록 또한 임진왜란 때 모두 다 불타버렸다. 즉,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는 조선 초에 남아있던 고려실록 등을 바탕으로 하여 당대의 고려의 기록들을 집대성해서 만든 고려시대 전반에 관한 내용을 총합 편찬한 유이한 정사(正史) 사서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료들은 모두 사료로서 가지는 기본적인 편파성이 있다. 일단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는 조선의 입장에서, 나머지 사료들은 5대 10국 시대의 각 국가들, 요나라, 금나라, 송나라, 원나라, 명나라의 입장에서 바라본 고려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다만 스스로의 역사를 총합적으로 서술한 예는 드물 수밖에 없다는 점은 감안해야 한다. 당대의 기록들을 제외한 멸망한 전 왕조에 대한 총합적인 역사서는 후대의 계승국들이 편찬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는 고려가 남긴 역사서들에서도 마찬가지인 부분으로, 고려시대에 그 이전 시대의 삼국을 바라본 역사서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조차 이러한 편파성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는 없다. 이 두 역사서는 모두 삼국시대의 고구려, 백제, 신라의 역사들을 서술했지만 엄연히 당대 고려의 시각에서 고대를 해석하여 정리하고 편찬한 고려의 입김이 들어간 사서들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후삼국시대 당시 왕건이 역성혁명을 일으켜서 고려를 건국한 이후 고려가 남긴 궁예에 대한 기록들에 대해서도 고려측의 고려를 건국한 역성혁명 정당화를 위한 왜곡과 편파성이 들어간 것이 아닌가 하는 학계의 비판적인 의견들[59]이 나올 정도로 이런 논란은 거의 대부분의 사서에서 항상 나오는 보편적인 논란들이다.
그나마 고려실록 등 고려측이 스스로 남긴 기록들을 바탕으로 세종대왕이 각별히 신경을 써서 편파성을 최대한 줄인 고려사와 그 고려사의 축약본인 고려사절요는 실록에서의 세종의 여러 발언들에서 알 수 있듯이 객관성을 최대한 유지한 편이다. 물론 고려가 멸망한 이후 조선 초기에 고려의 사초를 바탕으로 편찬되었는데, 아무래도 조선 건국의 정당성을 위해 당대 조선측의 시각이 들어갈 수밖에는 없었겠지만 말이다. 따라서 고려 말기의 사건들(특히 공민왕, 우왕, 창왕시기)은 고려사에서의 궁예에 대한 여러 논란들처럼 여러모로 다른 의견들도 존재하고 있는 상황이다. 거기다 원본인 고려실록을 바탕으로한 요약집이나 다름없어 텍스트 분량 자체가 조선왕조실록과 비교했을 때 많이 부족한 편이다. 물론 비교 대상인 조선왕조실록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방대한 양인 점은 고려해야 한다. 그외 고려가 스스로 남긴 다른 기록들이 고려와 그 이후에 겪은 여러 전란으로 크게 손실된 점 또한 안타까운 부분이다.
고려도경과 구오대사, 신오대사, 요사, 금사, 송사, 원사, 명사 외국열전 고려편의 경우, 사신단의 교류와 고려에 심어놓은 스파이를 통해 보고 들은 정보를 기록하여 5대 10국 시대의 군주와 요나라, 금나라, 송나라, 원나라, 명나라 황제에게 올린 보고서 성격의 사료이기 때문에 주마간산, 수박 겉 핥기 수준이다. 몇 가지만 들면, 고려도경에서는 고려의 역사와 관리 등급을 설명하는 부분이 고구려와 뒤섞여 있다. 또한 서긍은 고려가 바닷가에 위치해 있으면서 선박이 지극히 단순하고 조잡하며 작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고려는 여진족 해적을 토벌하면서 일본까지 원정을 갈 정도로 선박 / 항해 기술이 뛰어났고(과선 문서 참조), 근래 고려시대의 고선 발굴을 통해 대형선의 존재도 입증되었다. 물론 당시 서긍 일행이 타고 온 사신선인 신주(神舟)에 비하면 보잘 것 없을지 몰라도, 신주 자체도 당대 송나라의 엄청난 기술력과 자본을 투자해 만든 것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고려의 선박 수준은 전혀 낮은 수준이 아니다. 더구나 원래 문서에는 도경이란 표현처럼 그림이 첨부되어 있었는데, 이게 세월이 흐르면서 난리통에 다 날아갔다. 때문에 위의 사료들은 모두 사서라면 기본적으로 거쳐야 하는 철저한 교차검증이 필요하다.
고려에도 분명히 실록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지만, 안타깝게도 전부 유실되었다. 조선왕조실록 중 선조수정실록을 보면, 원래 한성 춘추관 사고에 고려 실록이 보존되어 있었는데 임진왜란 때 유실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불행 중 다행으로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는 안의, 손흥록 등이 보존하여 오늘날에 이를 수 있었다. 다만 조선왕조실록이 고려실록의 것을 전범으로 삼았다는 것은 확실해 보인다. 그 외에 이규보 등의 문집 등 고려시대 사람들이 남긴 기록들이 일부 있기는 하지만 이것만으로 고려시대 전체를 파악하는 것은 너무나 어렵다. 드물게 문중에서 고려 시대 문서가 나온다 해도 그 수는 손가락에 꼽을 정도. 오죽하면 고려 시대 관직 임명장은 나오면 보물급이라는 말까지 할 정도다. 이 때문에 고려사 연구자 대부분은 당연하지만 한문을 기본 소양으로 장착하고 그중 일부는 몽골어, 만주어 등 다양한 언어들까지 배우면서 사료 탐색에 열을 올리고 있다.
또한 다른 난관을 하나 뽑자면 고려 유적지 접근의 한계를 들 수 있다. 고려 수도인 개성은 현재의 북한령이라 북한과의 긴밀한 협력 없이는 만월대나 고려왕릉 등 주요 유적에 대한 고고학적 연구 진행 자체가 불가능하다. 따라서 고려시대 연구는 특히 남북관계가 진전되면 활성화되고 반면 남북관계가 경색되면 더뎌지는 독특한 특성이 있다. 그나마 고려 왕조가 강화도를 수도로 삼은 기간이 있어 위안이 되기는 하지만 문제는 강화도는 임시 수도격이었기 때문에 본 수도였던 개성과 기간 면에서나 남아있는 문화유산의 질적 수준에 있어서나 격차가 상당한 편이다.
남한에 남아있는 고려왕릉 중 가장 잘 보존된 무덤이 고종의 홍릉인데 아무래도 고려 국력이 약했을 시기이고 또한 왕실보다 최씨 무신정권의 권세가 막강했던 시기라 개성의 무덤들이나 조선 및 신라의 왕릉들과 비교해 보았을 때 양식도 간소하고 초라한 편이다. 병풍석도 안 둘러져 있고 인물석도 솜씨가 매우 투박하다. 솔직히 말하면 왕릉이란 요소를 제외하고 외관만 보았을 때는 조선시대 권세가 무덤보다도 허접한 편이다. 게다가 대상으로 삼은 홍릉이 남한 소재 고려왕릉 중 상태가 가장 나은 편이고 다른 무덤들은 더 심각한 편이다. 그런데 단순히 남한의 고려왕릉만이 그러한 게 아니라 북한에 소재한 대다수 왕릉 가운데에서도 왕건의 현릉, 공민왕의 현정릉, 그리고 주인이 불분명한 칠릉군의 몇 기 정도를 제외하고는 문인석 등의 석상이 신라왕릉이나 조선왕릉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매우 투박한 편이다. 자세한 내용은 고려왕릉에 대해 자세히 정리된 글에서 참고. 아무튼 이러한 연유로 고려시대 연구는 조선시대는 물론 삼국시대의 백제, 신라에 비해서도 상대적으로 제약이 많이 따르는 편이다.
고구려와 비교해도 연구의 접근성이 떨어질 정도인데 고구려의 유적, 유물들은 북한 지역 뿐만 아니라 요동 등 중국 지역에도 다수 분포해 있어서 이 곳을 통해 연구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한편 북한이 가난해지면서 평양과 개성 등의 수많은 문화재들을 중국에 팔고 있다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
| ||||||||||||||||||||||||||||||||||||||||||||||||||||||||||||||||||||||||||||||||||||||||||||||||||||||||||||||||||||||||||||||||||||||||||||||||||||||||||||||||||||||||||||||||||||||||||||||||||||||||||||||||||||||||||||||||||||||||||||||||||||||||||||||||||||||||||||||||||||||||||||||||||||||||||||||||||||||||||||||||||||||||||||||||||||||||||||||||||||||||||||||
| ||||||||||||||||||||||||||||||||||||||||||||||||||||||||||||||||||||||||||||||||||||||||||||||||||||||||||||||||||||||||||||||||||||||||||||||||||||||||||||||||||
| |||||||||||||||||||||||||||||||||||||||||||||||||||||||||||||||||||||||||||||||||||||||||||||||||||||||||||||||||||||||||||||||||||||||||||||||||||||||||||||||||||||||||||||||||||||||||||||||||||||||||||||||||||||||||||||||||||||||||||||||||||||||||||||||||||||||||||||||||||||||||||||||||||||||||||||||||||||||||||||||||||||||||||||||||||||||||||||||||||||||||||||||||||||||||||||||||||||||||||||||||||||||||||||||||||||||||||||||||||||||||||||||||||||||||||||||||||||||||||||||||||||||||||||||||||||||||||||||||||||||||||||||||||||||||||||||||||||||||||||||||||||||||||||||||||||||||||||||||||||||||||||||||||||||||||||||||||||||||||||||||||||||||||||||||||||||||||||||||||||||||||||||||||||||||||||||||||||||||||||||||||||||||||||||||||||||||||||||||||||||||||||||||||||||||||||||||||||||||||||||||||||||||||||||||||||||||||||||||||||||||||||||||||||||||||||||||||||||||||||||||||||||||||||||||||||||||||||||||||||||||||||||||||||||||||||||||||||||||||||||||||||||||||||||||||||||||||||||||||||||
| ||||||||||||||||||||||||||||||||||||||||||||||||||||||||||||||||||||||||||||||||||||||||||||||||||||||||||||||||
| |||||||||||||||||||||||||||||||||||||||||||||||||||||||||||||||||||||||||||||||||||||||||||||||||||||||||||||||||||||||||||||||||||||||||||||||||||||||||||||||||||||||||||||||||||||||||||||||||||||||||||||||||||||||||||||||||||||||||||||||||||||||||||||||||||||||||||||||||||||||||||||||||||||||||||||||||||||||||||||||||||||||||||||||||||||||||||||||||||||||||||||||||||||||||||||||||||||||||||||||||||||||||||||||||||||||||||||||||||||||||||||||||||||||||||||||||||||||||||||||||||||||||||||||||||||||||||||||||||||||||||||||||||||||||||||||||||||||||||||||||||||||||||||||||||||||||||||||||||||||
| ||||||||||||||||||||||||||||||||||||||||||||||||||||||||||||||||||||||||||||||||||||||||||||||||||||||||||||||||||||||||||||||||||||||||||||||||||||||||||||||||||||||||||||||||||||||||||||||||||||||||||||||||||||||||||||||||||||||||||||||||||||||||||||||||||||||||||||||||||||||||||||||||||||||||||||||||||||||||||||||||||||||||||||||||||||||||||||||||||||||||||||||||||||||||||||||||||||||||||||||||||||||||||||||||||||||||||||||||||||||||||||||||||||||||||||||||||||||||||||||||||||||||||||||||||||||||
| |||||||||||||||||||||||||||||||||||||||||||||||||||||||||||||||||||||||||||||||||||||||||||||||||||||||||||||||||||||||||||||||||||||||||||||||||||||||||||||||||||||||||||||||||||||||||||||||||||||||||||||||||||||||||||||||||||||||||||||||||||||||||||||||||||||||||||||||||||||||||||||||||||||||||||||||||||||||||||||||||||||||||||||||||||||||||||||||||||||||||||||||||||||||||||||||||||||||||||||||||||||||||||||||||||||||||||||||||||||||||||||||||||||||||||||||||||||||||||||||||||||||||||||||||||||||||||||||||||||||||||||||||||||||||||||||||||||||||||||||||||||||||||||||||||||||||||||||||||||||||||||||||||||||||||||||||||||||||||||||||||||||||||||||||||||||||||||||||||||||||||||||||||||||||||||||||||||||||||||||||||||||||||||||||||||||||||||||||||||||||||||||||||||||||||||||||||||||||||||||||||||||||||||||||||||||||||||||||||||||||||||||||||||||||||||||||||||||||||||||||||||||||||||||||||||||||||||||||||||||||||||||||||||||||||||||||||||||||||||||||||||||||||||||||||||||||||||||||||||||
[1] Korea의 어원이다. 다만, '고려'라는 국명 자체는 고구려 시절인 광개토대왕 또는 장수왕 때부터 이미 사용하던 국호였고 왕건이 고구려 시절 국호인 '고려'를 그대로 이어서 사용한 것이었다.[2] 고려의 의장기 중 하나인 봉기(鳳旗)로, 템플릿의 이미지는 1123년 북송의 사신 서긍이 저술한 선화봉사고려도경의 봉기 관련 서술과 조선시대의 벽봉기를 바탕으로 전쟁기념관에서 복원한 것이다.[3] 고려가 멸망하기 3년 전인 창왕 1년(1389)에 발급된 보물 제2062호 '최광지 홍패(崔匡之 紅牌)'에 찍힌 문양을 바탕으로 복원한 그림. 이 그림속 국새는 현존하는 단 2개뿐인 고려시대 국새 문양이다. ‘고려국왕지인(高麗國王之印)’이라고 적혀있으며, 이 홍패 덕분에 위 사진의 국새 문양이 복원될 수 있었다. 다만 이는 중국에서 하사받은 제후국용 국새이며 여러 기록으로 보이 황제국용 국새인 새(璽)와 보(寶)를 자체적으로 제작해 만들어 쓴 기록이 남아 있다.[4] 정확히는 함경북도 등 일부 지역들을 제외한 한반도 일대이다.(1896년 13도 체계를 기준으로 평안북도와 함경남도 그리고 함경북도의 지역들은 고구려와 발해의 멸망 이후 조선시대 때 4군 6진을 개척하고 나서야 다시금 한민족의 영토로 완전히 재편입되었다) 후기 이전까지는 압록강 ~ 동한만 이남에 이르는 영역으로 비정하고 있으나, 고려의 정확한 영토 경계에 대해선 아직 연구 중이다. 또한 동북 9성의 해석에 따라 동북지방에 대한 시기별 비정이 달라질 수도 있다. 단, 현재 학계의 주류 의견은 지도에서 보는 것과 같이 함경북도까지 고려의 통제력과 행정력이 미쳤다고 보지는 않는다.[5] 공민왕기 제1차 요동정벌 당시 요동 지역 일부를 일시적으로 점유하였지만 기간이 매우 짧고 점유 범위 또한 국소적으로 매우 작았다.[6] 본궐은 태봉국 철원성.[7] 전반부 본궐은 만월대. 임시로 연경궁, 수창궁이 쓰였다. 후반부 본궐은 만월대를 흡수한 연경궁, 공민왕 대엔 수창궁.[8] 대몽 항쟁기에는 강화도(강도, 江都)가 수도였다. 본궐은 고려궁지. 1270년 원종이 개경으로 환도한 뒤, 부수도가 되었고 충렬왕 34년엔 강화현으로 격하되어 부수도의 지위도 잃었다.[9] 우왕과 공양왕대 각각 5개월 정도 고려의 정식 수도였다. 원간섭기 이후로 남경에서 한양부로 격하되긴 했으나 이러한 기반 덕에 바로 뒤이은 조선이 한양부를 수도 한성부로 삼을 수 있었다.[10] 본궐은 장락궁. 의아하게 생각할 수 있겠지만 태조 ~ 인종 중반 기간 동안 서경의 지위는 고려의 '부수도'가 아닌 '또 다른 수도'였다. 1136년 묘청의 난 이후 수도가 아닌 부수도로 격하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하단의 지방 행정 부분 참조.[11]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주류 민족. 통일신라기에는 후삼국으로 분열할 만큼 종족 정체성이 유동적이었으나, 고려 후기에 고구려인 (+ 발해인), 신라인, 백제인 등의 독자적 정체성이 완전히 소멸한 것으로 보인다. 탐라인은 별도로 빈공과를 쳐야 했다.[12] 번인(藩人)[13]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한 광종은 황제였다. 이외에도 고려는 원 간섭기 이전까지 군주에게 황제격의 미칭을 사용하기도 했는데, 자세한 내용은 고려/외왕내제 여부 문서 참고.[14] 건국군주, 송도에 천도, 후삼국 통일, 북진 정책 실시, 호족 융합 정책 실시[15] 호족 대숙청, 노비안검법, 과거 제도 실시, 공복 제정[16] 12목 설치, 국자감 설치, 제1차 여요전쟁 발발, 강동 6주 획득[17] 2, 3차 여요전쟁 발발, 제도 정비, 초조대장경 조판, 고려실록 찬수, 천리장성 건설, 고려 전성기 시작[18] 공음전시법, 양전보수법, 삼심제 등 제정, 고려 전성기의 절정[19] 여진 정복, 국학에 양현고 설치, 실질적인 전성기의 마지막 군주[20] 이자겸의 난, 서경 천도 운동 발발, 삼국사기 간행, 고려 전성기의 끝[21] 무신정변으로 폐위, 문벌귀족 몰락 및 무신정권기 시작[22] 여몽전쟁 발발, 강화 천도, 팔만대장경 조판, 유학 장려[23] 무진정변, 개경 환도, 삼별초의 난 발발, 고려에서 마지막으로 묘호를 받은 군주이자 마지막 해동천자[24] 친원파 숙청, 쌍성총관부, 정동행성 폐지, 전민변정도감 설치, 고려의 마지막 명군이자 암군[25] 이성계 일파에 의하여 즉위, 고려 왕조의 마지막 군주[26] 고려는 대승 불교를 국교로 삼긴 했지만 이슬람 등 타 종교도 금하지 않고 자유로이 믿게 하는 등 종교의 자유를 어느 정도 인정하는 모습을 보였다. 또한 건국 초기부터 유학이 들어오기 시작해서 성종은 유교에 입각한 정치를 지향하기도 하였으며 원 간섭기 이후에는 성리학이 본격적으로 고려 내에 전파되기 시작하였다.[27] 고려 시대의 대표적인 동전. 이외에도 건원중보, 해동중보, 동국통보, 동국중보, 삼한통보, 삼한중보가 있다.[28] 함경북도 지역들은 조선 초기 4군 6진 개척으로 조선의 영토로 확실히 편입되기 이전에는 특정 국가들의 영향력이 잘 미치지 않던 야인들의 영역이었다.[29]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기 이전에 존재했던 주몽이 건국한 고구려가 고려로 이름을 바꾸었으나, 왕건이 건국한 고려와 구분하기 위해 그냥 고구려로 부르는 것. 실제로 중국 사서에서는 장수왕 이후 고구려를 고려로 표기했다. 조선 전기의 한글 문헌에서는 '고려'로 발음이 언급되는 바, 적어도 고려 후기에는 지금과 마찬가지로 고려라고 불렀을 것으로 보인다. 고려는 훗날 서양에는 Corea 내지는 Korea로 알려지게 된다.[30] 현대의 발음은 '가오리'지만 당송대의 중고한어 발음으로는 까우례(kɑu liᴇ) 또는 까우레이(kɑu lei)다.[31] 고구려 역시 코마라고 읽는 경우가 있다. 고구려 유민들이 세운 '코마 신사', 코마가와역 등.[32] Solongos, 중세 몽골어로는 ᠰᠣᠯᠤᠩᠭᠤᠰ, Solungɣus. 현대 몽골인들은 대한민국을 설렁거스(Солонгос)라고 부른다. Solongo는 몽골어로 '무지개'라는 뜻이 있으며, Solon (누런족제비)+go(~를 가진 사람)+s(복수형)를 합쳐 족제비 가죽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의미도 있다. 프랑스의 동양학자 P. 펠리오(1878-1945)는 설렁거스의 어원을 원과 고려가 족제비 가죽을 많이 거래했던 역사적 기록에 주목하여 후자로 보았으나, 의미적으로 무지개가 아름답기 때문인지 한국의 인터넷에서는 전자의 설이 많이 퍼져있다. 몽골 국립 할하 몽골어 학회에서는 Solongos가 '해 뜨는 동쪽의 나라'라는 뜻에서 유래되었다고 공식적으로 명시했다. 색동저고리에서 유래됐다는 설도 있으나, 근거없는 낭설이다.[33] 현대 몽골어로는 현대 한국과 구별하여 고려를 Kuryo라고도 한다.[34] 고구려의 국호는 건국 초기에는 고구려, 구려, 고려 등의 여러 가지로 불렸고, 장수왕 대부터 고려로 고정되었다. 따라서 당시 사람들에게는 고구려보다는 고려가 더 익숙한 명칭이었으므로 고려를 사용한 것이다.[35] 현대식 한글로 표기하면 '고우려이' 정도. 다만 이 당시 'ㅕ'는 지금의 (jʌ) 대신 (jə) 소리를 냈다.[36] 적어도 한자음에서는 ㄱ, ㅗ, ㄹ, ㅕ(앞에 ㄷ계나 ㅅ계 자음이 없을 경우 한정) 모두 비교적 안정적으로 유지된 발음이므로, 조선 초기 발음도 현대와 큰 차이 없었을 것이다.[37] 이쪽은 다른 고려들과 구분하기 위해 '후고구려'라 부른다.[38] 송이 중추원, 삼사 등의 기관을 부설한 까닭은 송초 중서성을 등용하고 상서성과 문하성의 권력을 축소시키고자 한 까닭이었다. 이후 신종 때 3성 6부제가 복구된다.[39] 어사도성의 전신을, 삼국사기는 내봉성이라 하고, 고려사는 광평성이라 하는데, 학계에서는 삼국사기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40] 문하시랑 동내사문하평장사의 후신.[41] 내사시랑 동내사문하평장사의 후신.[42] 같은 시기 삼사의 판사, 좌사, 우사도 추가되었다.[43] 수상은 첨의우중찬, 부수상은 첨의좌중찬.[44] 수상은 도첨의우중찬, 부수상은 도첨의좌중찬.[45] 양주시, 광주시. 오늘날의 경기도, 충청도.[46] 오늘날의 강원도 영서.[47] 오늘날의 황해도.[48] 오늘날의 평안도.[49] 오늘날의 강원도 영동과 함경남도.[50] 지정학적으로 보면 어느 정도 예측되는 부분이기도 한데 일단 수도 개경은 인구가 늘어나면서 대도시로서는 적합하지 않다는 이유로 내내 천도론이 제기되어 왔다. 그래서 큰 강을 끼고 있는데다 평야지대에 있어 대도시로서의 입지조건에 적합한 서경으로의 천도가 우선 제기되었으나 고구려 때와는 달리 요동반도를 차지하는 데 실패해 서경의 안보를 보장해 줄 적당한 완충지대를 가질 수 없었다(만약 기병부대가 의주쪽의 저지대만 통과하는 데 성공한다면 이후는 거의 평야지대이기 때문에 서경까지 빠르게 진격할 수 있었다. 이걸 병력을 때려박아 틀어막기에는 또 항상 대륙세력보다 고려의 인구가 훨씬 적었다). 결국 그 다음 후보로 국토의 거의 중앙에 위치하며 또한 큰 강을 끼고 있는 입지의 대도시였던 남경이 주목받기 시작했는데 고려 후기의 혼란통에 천도론은 흐지부지되었다가 조선 왕조가 들어서고 나서야 천도를 감행하게 된다. 이후 남경의 입지는 매우 적합했기 때문에 조선시대 내내 천도론은 거의 제기되지 않았다.[51] 사실 이건 당시 전해지던 건국연대상 신라가 가장 이르게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52] 심지어 조선 초까지도 속현이 존재했다.[53] 뒷면에 동국(東國)자를 새겨서 중국 동전과 구별하였다.[54] 해동중보, 삼한통보, 삼한중보, 동국통보, 동국중보도 동시기 혹은 비슷한 시기에 같이 주조되었다고 여겨진다.[55] 해동통보 주조량만 1만 5천 관(1500만 개)이라고 기록되어 있다.[56] '전연의 맹(澶淵之盟)' 그 조건은 다음의 3개조이다. 1.송(宋)은 군비(軍備)로서 요(遼)에 매년 비단 20만 필, 은(銀) 10만 냥을 지급한다. 2.양국 군주는 형제 관계가 되며, 진종이 성종보다 나이가 많으므로, 진종이 형이 된다. 3.양국의 국경은 현 상태로 하고, 양국의 포로 및 월경자(越境者)는 서로 송환한다. 이 조약은 송나라에게 굴욕적인 조약일 수 밖에 없었다. 이후, 요는 문화가 발달하고 경제상으로도 발전을 이룬다. 전연(澶淵)이란 전주(澶州)의 아명(雅名)이다.[57] 이 당시 동아시아의 패권국은 어디까지나 거란이 세운 요였었지 한족이 세운 송이 결코 아니었다. 역대 중원 왕조를 통틀어서 가장 부실한 군사력으로 대두되던 송의 군대 편제가 보병 중심인 반면에 거란 같은 유목제국(遊牧帝國)은 여러 오르두에서 차출한 기병 비율이 70~80%에 달했다. 전쟁이 일어나면 각 오르두의 제할사가 병력을 모집해 전선에 투입했다. 제할사들이 격문을 띄우고 군사를 모집하면 주현과 부족에서 징병을 하지 않아도 10만의 기병을 모을 수 있어서 전술적으로 기마 군단을 주력으로 삼는 요군은 기동전을 장기로 삼았다. 요군은 기동력을 이용해 양동 작전을 펼쳐 조공으로 적의 국경 방위 군단을 틀어막고, 주력군으로 적의 약한 후방이나 거점, 중심 도시를 강타했으며 주요 방어선을 우회해 허를 찌르는 전략도 자주 구사했다. 방어선을 무시하고 상대적으로 방어가 약한 곳을 급습, 순식간에 함락하고 포위한 일이 대표적인 사례이며 1004년에 송을 침공할 때는 양동과 우회 전술을 함께 구사했다. 요 성종과 예지황후가 직접 친정한 요의 20만 대군은 송의 군사 요충지인 정주(定州)를 우회한 뒤, 병력을 나누어 주력군은 계속 진격하고 조공으로 관남에 속한 영주(瀛州)를 포위했다. 조공이 포위하는 동안 주공은 송의 후방 거점들을 공략하고 전주(澶州)까지 진격했다. 전주에서 개봉까지는 300리(약 120km) 밖에 되지 않았고 황하가 얼어붙어 기마 군단이 며칠이면 개봉을 포위할 수 있었다. 이 가공할 기동력으로 요군은 송 조정에서 천도론까지 나올 만큼 송을 압박했다.[58] 송은 당대 패권국으로서의 위상이 주변국들에 완전히 그 힘을 인정받아 외부로 영향력을 행사할 만큼 공고하지 못하였고, 외부적 요인에 의해 송의 주력 부대는 강제적으로 보병이었다. 그리고 이런 보병 중심의 편제는 당시 기병 그것도 세계구급 기병 전력을 가지고 있었던 거란과의 전투에서 매우 불리한 요인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는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었던 것이 송은 주요 목초지인 서량-오르도스와, 운남, 요서-요동을 당 말기와 5대 10국 시대에 서하와 대리국과 요나라에 빼앗기면서 목초지가 부족해졌고 이에 따라 기병을 양성하기가 매우 힘들었다. 게다가 송의 주적인 요나라는 송의 '기마병 부족 현상'을 계속 유지시키기 위해 군마 수출을 제한하고 서하와 여진을 협박해 이들이 송에 군마를 수출하지 못하게 막았다. 이때문에 송은 내부는 물론, 외부에서도 군마를 구하기가 어려워진 것이다. 이렇듯 말이 부족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서 송은 요의 감시를 피해 서하와 여진으로부터 군마를 수입하려 했다. 서하와 여진이 요의 보복이라는 위험 부담을 감수하고 군마를 판매하게 만들기 위해 송은 이들이 판매하는 군마를 전부 비싼 값으로 사들였다. 말 한 필에 비단 수십 필을 내어주고 시세가 오르면 그에 맞춰서 비단을 더 내어 주었기에 서하와 여진은 비단을 확보하려고 요의 압박을 받음에도 몰래 송에 군마를 팔았다. 밀거래에 의존할 만큼 필연적으로 군마 부족 현상에 시달리던 이러한 송의 위치는 후에 요가 멸망하고 여진이 들어서는 금대에 이르러서는 남송으로 후진하며 패권을 쥐지 못한 중원국의 실상과 더불어 그 당시 강성한 정복 왕조들인 요, 서하, 금과 국경을 인접한 송의 불안정한 국제적인 위치를 여실히 드러낸다.[59] (최연식,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비를 통해 본 궁예 행적의 재검토」, 『목간과 문자』 제7호, 한국목간학회, 2011.06) , (김주성, 궁예와 고려 태조의 농민정책에 대한 재검토, 신라사학회, 신라사학보 제47호, 2019.12) , (최웅, 역사 기록과 구전 설화로 본 궁예, 강원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인문과학연구 제27집, 2010.12)
![]()
이 저작물은 CC BY-NC-SA 2.0 KR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단, 라이선스가 명시된 일부 문서 및 삽화 제외)
기여하신 문서의 저작권은 각 기여자에게 있으며, 각 기여자는 기여하신 부분의 저작권을 갖습니다.
나무위키는 백과사전이 아니며 검증되지 않았거나, 편향적이거나, 잘못된 서술이 있을 수 있습니다.
나무위키는 위키위키입니다. 여러분이 직접 문서를 고칠 수 있으며, 다른 사람의 의견을 원할 경우 직접 토론을 발제할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