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종(북송)

최근 수정 시각:
편집
IP 우회 수단(프록시 서버, VPN, Tor 등)이나 IDC 대역 IP로 접속하셨습니다. (#'30183489')
(VPN이나 iCloud의 비공개 릴레이를 사용 중인 경우 나타날 수 있습니다.)
잘못된 IDC 대역 차단이라고 생각하시는 경우 게시판에 문의하시길 바랍니다.
토론역사
[ 펼치기 · 접기 ]
조광제 | 태조 | 조광의 | 조정미 | 조광찬
조덕수 | 조덕소 | 조덕림 | 조덕방
6남
인종
3남(친자)
2남(양자)
영종(양자)
4남
신종
14남
철종 | 휘종 | 조필 | 조우 | 조사 | 조시
35남
흠종 | 고종
조심 | 조근 | 조훈
조부 | 효종(양자) | 조거(양자)
조기 | 조개 | 광종 | 조각
조정 | 영종
9남(친자)
3남(양자)
조순(양자) | 조횡 | 이종
조집 | 조역 | 조유 | 도종(양자)
조작 | 조서 | 조헌 | 조굉 | 단종 | 공제 | 소제
조완보
북송 제5대 황제
영종 | 英宗
1280px-Song Ying...
출생
북송 동경 개봉부 복왕 사저
(現 허난성 카이펑시 구러우구)
즉위
북송 동경 개봉부 변경 황궁
(現 허난성 카이펑시 구러우구)
붕어
1067년 1월 25일 (향년 34세)
북송 동경 개봉부 변경 황궁 복녕전
(現 허난성 카이펑시 구러우구)
능묘
영후릉(永厚陵)
재위기간
북송 황제
[ 펼치기 · 접기 ]
성씨
종실(宗實) → 서(曙)
부모
친부 복안의황
친모 선유현군
형제자매
22남 15녀 중 13남
배우자
자녀
4남 4녀
작호
거록군공(鉅鹿郡公)
묘호
영종(英宗)
존호
체천법도흠문총무성신효덕황제
(體天法道欽文聰武聖神孝德皇帝)
시호
체건응력융공성덕헌문숙무예성선효황제
(體乾應歷隆功盛德憲文肅武睿聖宣孝皇帝)
연호
치평(治平, 1064년 ~ 1067년)
절일
수성절(壽聖節)
 
 
 
 

1. 개요2. 생애
2.1. 즉위 전까지의 삶2.2. 짧은 재위기간과 붕어
3. 가족 관계4. 여담5. 대중매체에서6. 둘러보기

 
 
 
 

1. 개요[편집]

 
 
 
 
북송의 제5대 황제.

묘호는 영종(英宗), 시호는 체건응력융공성덕헌문숙무예성선효황제(體乾應歷隆功盛德憲文肅武睿聖宣孝皇帝). 휘는 종실(宗實) → 서(曙).
 
 
 
 

2. 생애[편집]

 
 
 
 

2.1. 즉위 전까지의 삶[편집]

 
 
 
 
송인종의 사촌 형제인 복왕 조윤양(趙允讓)의 13번째 아들로 인종의 종질이다. 초명은 종실(宗實)이었으나, 흔한 글씨여서 서(曙)로 고쳤다. 어린 시절 인종의 양자가 되어 제왕 교육을 받았지만, 1039년 인종의 친아들이 태어나면서 다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갔다. 이후 인종의 아들이 일찍 죽은 뒤에도 궁 밖에서 살다가 1063년 인종이 붕어하자 그 뒤를 이어 즉위했다. 이때 자신이 읽던 책들 외에는 궁으로 가져온 게 없을 정도로 검소했다고 한다.

사실 인종의 종질이면서 입양되었지만 즉위하는 과정에서 재상 문언박과 부필, 한기의 도움이 컸다. 문언박과 한기가 그를 지지해준 것은 일찍이 조종실(영종)이 인종의 양자가 되었고, 어려서부터 황자로서 갖춰야할 교육을 받은 그의 자질과 능력이 괜찮았던 까닭이 컸다. 또 나이도 다른 종실 남자 중 성년에 접어들었다는 점, 조종실이 평소 재상인 문언박과 부필, 한기를 비롯한 신하들을 존중해왔고 이미 조정 내에서 자신을 지지하는 대신들을 만들어뒀다는 점도 그가 영종의 즉위를 지지한 이유였다.

과거 정헌태후 유씨(유아)의 수렴청정을 경험한 인종은 황후 조씨가 평소 유아를 많이 본받으려고 해왔다는 점을 알고 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종은 여러 중신들이 건저 문제를 제기할 때마다 늘 “짐도 다 생각이 있소이다.”라고 말할 뿐 자신과 황후가 일찍이 궁으로 데리고 와서 기른 양자 조종실(조서)을 확정적으로 후계자로 삼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는 황자 조서(조종실)를 후계로 삼아도 ‘조황후의 조카가 조서의 부인이었기에 황후가 반대할 이유가 없고 , 이미 조서가 재상인 문언박과 부필, 한기 등의 지지를 받았기에 신하들도 반대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다고 한다. 또 정국 주도권 역시 조서가 신하들의 지지를 받고 나이도 있기에 조황후에게 내주지 않을거라고 생각했다.

이런 이유 외에도 종법 문제상의 번거로움 등도 있었기에 인종은 신하들 앞에서 공식적으로 말만 안 할 뿐 여러모로 뒤를 잇기에 무리가 없는 조서에게 사실상 뒤를 잇게 할 생각으로 직접적으로 말을 하지 않았다.[1] 이런 상황에서 인종이 갑자기 붕어하고, 조황후와 중신들은 인종이 죽고 다음날 황자 조서를 인종의 후계자로 삼았다.
 
 
 
 

2.2. 짧은 재위기간과 붕어[편집]

 
 
 
 
인종이 가우 8년(1063) 3월 29일 자정 후원 복녕전에서 갑자기 병세가 악화되어 사망하고 4월 1일 황후 조씨가 조정 중신들과 함께 인종의 붕어 사실을 알렸다. 아울러 인종과 조황후의 양자인 황자 조서를 후임 황제로 즉위하게 했다. 그런데 이날 황자 조서는 황후와 조신들의 즉위 요청에 대해 고개를 떨군 채 두려움에 떨며 “그렇게 할 수는 없사옵니다! 그렇게 할 수가 없사옵니다!”라고 말하며 돌아섰다. 이때 조신들이 조서 옆으로 다가가 억지로 조서의 땋은 머리를 푼 뒤, 어복을 입혀 보좌에 앉혀놓았고 그를 인종의 뒤를 이어 즉위시켰다.[2]

영종은 즉위 이후 친부 추봉을 추진했던 문제 등으로 재위 내내 양모 조태후와의 관계는 좋지 않았지만[3][4], 전체적으로는 인종 치세의 연장선과 비슷했다고 평가받는다. 하지만 영종 치평 연간 내내 친부(복왕 조윤양)의 호칭을 놓고 예법 논쟁이 벌어졌고[5], 이 대간 논쟁에서 사마광이 이름을 떨치며 주목을 받게 되었다.

영종은 즉위 직후, 친부 봉작 문제 못지 않게 양부 인종의 3년상을 고집하며 꾀병까지 부려가면서 이를 관철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런 영종의 시도는 신하들이 3년상을 치르는 것을 반대한 까닭에 실패했다. 영종은 국가 업무를 추진할 때마다 늘 절차를 중요시 여기고 선황들이 어떻게 비슷한 사무를 처리했는지 물은 뒤 신중히 결정했다. 이런 까닭에 그는 재상 한기, 문언박 등의 보좌를 받아 신하들과 관계를 돈독히 쌓을 수 있었고, 인종 대에 활약한 범중엄, 두연, 유항 등이 정무를 돕고 송기, 구양수, 부필 등이 요직에 올라 영종과 함께 했다. 이들의 도움을 받은 영종은 과거 사례를 비춰 문제점을 파악하고 송나라의 파탄난 경제와 재정을 재건하기 위해 개혁에 착수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의 즉위 연간동안 수많은 재해들이 발생하고[6] 영종 본인도 기관지쪽이 좋지 않고 병약해서[7] 즉위 4년만인 치평 4년(1067년) 정월 사망했다. 그 뒤를 이어 20살이었던 황태자 조욱이 즉위했다.

사망 후에 영후릉에 안장되었으며 1067년 1월에 존호로 체건응력문무성효황제(體乾膺歷文武聖孝皇帝)를 받았고 시호로는 헌문숙무선효황제(憲文肅武宣孝皇帝)가 추증되었다. 그러다가 1083년에 다시 시호가 체건응력융공성덕헌문숙무예성선효황제(體乾應歷隆功盛德憲文肅武睿聖宣孝皇帝)가 되었다.
 
 
 
 

3. 가족 관계[편집]

 
 
 
 
영종은 역대 송나라 황제 중 빈으로 책봉한 후궁이 없는 인물이자 정실부인과 부부 사이가 워낙 돈독하고 좋은 것으로 유명하다. 황후는 선인성렬황후 고씨이며 후궁은 소의 포씨와 수용 장씨가 있는데, 4남 4녀 중 생모의 신원이 확실하지 않은 공주 2명을 제외한 4남 2녀를 황후와의 사이에서 얻었다.

선인성렬황후 고씨는 명문가 출신이자 고준보의 딸로 그녀의 이모가 송 인종의 계후인 자성광헌황후 조씨(慈聖光献皇后 曹氏)이므로 아내를 통해서도 선 황제인 송 인종과 인척 관계로 연결되어있다.

영종의 아들들 중, 윤왕(潤王) 안(顔)은 요절했다.
 
 
 
 

4. 여담[편집]

 
 
 
 
영종은 인종의 조카로서 부필, 문언박, 한기라는 대신들의 추천을 받아 양자가 되어 즉위하였는데 기존 승계 원칙상 황제가 되기 힘들었으나 앞선 대신들이 영종의 즉위를 적극 주장하여 황제 자리에 올랐다. 이에 대해 영종은 매우 고마워 하였고 자신의 후계자인 송신종과 송철종도 이 고마움을 늘 간직했다. 이러한 황손들의 고마움이 나타난 사건들이 있는데 먼저 아들인 송신종은 이들이 왕안석의 신법을 반대하여 정권을 잡은 신법파에게 탄핵 당할뻔 했으나 중요 지방관으로 자리를 옮겨주어 명예를 지켜주었다. 그리고 손자인 송철종은 친정을 시작하고 정권을 잡은 신법파 출신 권신이자 송휘종 초기 재상 채경은 앞서 영종을 추대한 부필, 문언박, 한기를 원우당적인(元祐黨籍人)이라 하여 선인성렬황후 고씨가 수렴청정 시절 정권을 잡은 사마광, 소식등 구법파와 하나로 몰아 척결을 진행하였다. 이로 인해 사마광, 소식을 비롯한 구법파 출신들에 명예를 박탈시켰는데(추후 송휘종 시절 신법파가 다시 정권을 잡아 명예회복 되었다.) 이 때 철종의 후계자 휘종은 직접 채경에게 자신이 속한 대를 황제로 올려준 부필, 문언박, 한기를 원우당적인에서 빼고 명예를 지켜주라 명령하여 이들은 신법파 정권에서도 명예를 잃지않았다.
 
 
 
 

5. 대중매체에서[편집]

 
 
 
 
2020년 드라마 청평악에 등장한다. 어릴 때부터 똑똑했던 것으로 표현된다. 양자로서 궁에 들어왔고 아내가 될 고도도와 사이가 좋다.
 
 
 
 

6. 둘러보기[편집]

 
 
 
 
[ 본기(本紀) ]
1·2·3권 「태조기(太祖紀)」
4·5권 「태종기(太宗紀)」
6·7·8권 「진종기(眞宗紀)」
9·10·11·12권 「인종기(仁宗紀)」
13권 「영종기(英宗紀)」
14·15·16권 「신종기(神宗紀)」
17·18권 「철종기(哲宗紀)」
19·20·21·22권 「휘종기(徽宗紀)」
23권 「흠종기(欽宗紀)」
24·25·26·27·28·29·30·31·32권 「고종기(高宗紀)」
33·34·35권 「효종기(孝宗紀)」
36권 「광종기(光宗紀)」
37·38·39·40권 「영종기(寧宗紀)」
41·42·43·44·45권 「이종기(理宗紀)」
46권 「도종기(度宗紀)」
47권 「영국공기(瀛國公紀)」

※ 48권 ~ 209권은 志에 해당. 210권 ~ 241권은 表에 해당. 송사 문서 참고
[ 열전(列傳) ]
242·243권 「후비전(后妃傳)」
244·245·246·247권 「종실전(宗室傳)」
248권 「공주전(公主傳)」
249권 「범질등전(范質等傳)」
250권 「석수신등전(石守信等傳)」
251권 「한령곤등전(韓令坤等傳)」
252권 「왕경등전(王景等傳)」
253권 「절덕의등전(折德扆等傳)」
254권 「후익등전(侯益等傳)」
255권 「곽숭등전(郭崇等傳)」
256권 「조보전(趙普傳)」
257권 「오정조등전(吳廷祚等傳)」
258권 「조빈등전(曹彬等傳)」
259권 「장미등전(張美等傳)」
260권 「조한등전(曹翰等傳)」
261권 「이경등전(李瓊等傳)」
262권 「이곡등전(李穀等傳)」
263권 「장소등전(張昭等傳)」
264권 「설거정등전(薛居正等傳)」
265권 「이방등전(李昉等傳)」
266권 「전약수등전(錢若水等傳)」
267권 「장굉등전(張宏等傳)」
268권 「시우석등전(柴禹錫等傳)」
269권 「도곡등전(陶穀等傳)」
270권 「안간등전(顏衎等傳)」
271권 「마영종등전(馬令琮等傳)」
272권 「양업등전(楊業等傳)」
273권 「이진경등전(李進卿等傳)」
274권 「왕찬등전(王贊等傳)」
275권 「유복등전(劉福等傳)」
276권 「유보훈등전(劉保勳等傳)」
277권 「장감등전(張鑒等傳)」
278권 「마전의등전(馬全義等傳)」
279권 「왕계충등전(王繼忠等傳)」
280권 「전소빈등전(田紹斌等傳)」
281권 「여단등전(呂端等傳)」
282권 「이항등전(李沆等傳)」
283권 「왕흠약등전(王欽若等傳)」
284권 「진요좌등전(陳堯佐等傳)」
285권 「진집중등전(陳執中等傳)」
286권 「노종도등전(魯宗道等傳)」
287권 「양려등전(楊礪等傳)」
288권 「임중정등전(任中正等傳)」
289권 「고경등전(髙瓊等傳)」
290권 「조이용등전(曹利用等傳)」
291권 「오육등전(吳育等傳)」
292권 「이자등전(李諮等傳)」
293권 「전석등전(田錫等傳)」
294권 「장우석등전(掌禹錫等傳)」
295권 「윤수등전(尹洙等傳)」
296권 「한비등전(韓丕等傳)」
297권 「공도보등전(孔道輔等傳)」
298권 「팽승등전(彭乘等傳)」
299권 「적비등전(狄棐等傳)」
300권 「양해등전(楊偕等傳)」
301권 「변숙등전(邊肅等傳)」
302권 「왕진등전(王臻等傳)」
303권 「장온지등전(張昷之等傳)」
304권 「주위등전(周渭等傳)」
305권 「양억등전(楊億等傳)」
306권 「사필등전(謝泌等傳)」
307권 「교유악등전(喬維岳等傳)」
308권 「상관정등전(上官正等傳)」
309권 「왕연덕등전(王延德等傳)」
310권 「이적등전(李迪等傳)」
311권 「안수등전(晏殊等傳)」
312권 「한기등전(韓琦等傳)」
313권 「부필등전(富弼等傳)」
314권 「범중엄등전(范仲淹等傳)」
315권 「한억전(韓億傳)」
316권 「포증등전(包拯等傳)」
317권 「소항등전(邵亢等傳)」
318권 「장방평등전(張方平等傳)」
319권 「구양수등전(歐陽修等傳)」
320권 「채양등전(蔡襄等傳)」
321권 「정해등전(鄭獬等傳)」
322권 「하담등전(何郯等傳)」
323권 「울소민등전(蔚昭敏等傳)」
324권 「석보등전(石普等傳)」
325권 「유평등전(劉平等傳)」
326권 「경태등전(景泰等傳)」
327권 「왕안석등전(王安石等傳)」
328권 「이청신등전(李淸臣等傳)」
329권 「상질등전(常秩等傳)」
330권 「임전등전(任顓等傳)」
331권 「손장경등전(孫長卿等傳)」
332권 「등원발등전(滕元發等傳)」
333권 「양좌등전(楊佐等傳)」
334권 「등원발등전(滕元發等傳)」
335권 「충세형전(种世衡傳)」
336권 「사마광등전(司馬光等傳)」
337권 「범진전(范鎭傳)」
338권 「소식전(蘇軾傳)」
339권 「소철전(蘇轍傳)」
340권 「여대방등전(呂大防等傳)」
341권 「왕존등전(王存等傳)」
342권 「양도등전(梁燾等傳)」
343권 「원강등전(元絳等傳)」
344권 「손각등전(孫覺等傳)」
345권 「유안세등전(劉安世等傳)」
346권 「진차승등전(陳次升等傳)」
347권 「손고등전(孫鼛等傳)」
348권 「부즙등전(傅楫等傳)」
349권 「학질등전(郝質等傳)」
350권 「묘수등전(苗授等傳)」
351권 「조정지등전(趙挺之等傳)」
352권 「당각등전(唐恪等傳)」
353권 「하율등전(何㮚等傳)」
354권 「심수등전(沈銖等傳)」
355권 「가역등전(賈易等傳)」
356권 「유증등전(劉拯等傳)」
357권 「하관등전(何灌等傳)」
358·359권 「이강전(李綱傳)」
360권 「종택등전(宗澤等傳)」
361권 「장준전(張浚傳)」
362권 「주승비등전(朱勝非等傳)」
363권 「이광등전(李光等傳)」
364권 「한세충전(韓世忠傳)」
365권 「악비전(岳飛傳)」
366권 「유기등전(劉錡等傳)」
367권 「이현충등전(李顯忠等傳)」
368권 「왕덕등전(王德等傳)」
369권 「장준등전(張俊等傳)」
370권 「왕우직등전(王友直等傳)」
371권 「백시중등전(白時中等傳)」
372권 「주탁등전(朱倬等傳)」
373권 「주변등전(朱弁等傳)」
374권 「장구성등전(張九成等傳)」
375권 「등숙등전(鄧肅等傳)」
376권 「상동등전(常同等傳)」
377권 「상자인등전(向子諲等傳)」
378권 「위부민등전(衞膚敏等傳)」
379권 「장의등전(章誼等傳)」
380권 「하주등전(何鑄等傳)」
381권 「범여규등전(范如圭等傳)」
382권 「장도등전(張燾等傳)」
383권 「진준경등전(陳俊卿等傳)」
384권 「진강백등전(陳康伯等傳)」
385권 「갈필등전(葛邲等傳)」
386권 「유공등전(劉珙等傳)」
387권 「황흡등전(黃洽等傳)」
388권 「주집고등전(周執羔等傳)」
389권 「우무등전(尤袤等傳)」
390권 「이형등전(李衡等傳)」
391권 「주필대등전(周必大等傳)」
392권 「조여우전(趙汝愚傳)」
393권 「팽귀년등전(彭龜年等傳)」
394권 「호굉등전(胡紘等傳)」
395권 「누약등전(樓鑰等傳)」
396권 「사호등전(史浩等傳)」
397권 「서의등전(徐誼等傳)」
398권 「여단례등전(余端禮等傳)」
399권 「정각등전(鄭瑴等傳)」
400권 「왕신등전(王信等傳)」
401권 「신기질등전(辛棄疾等傳)」
402권 「진민등전(陳敏等傳)」
403권 「조방등전(趙方等傳)」
404권 「왕약해등전(汪若海等傳)」
405권 「이종면등전(李宗勉等傳)」
406권 「최여지등전(崔與之等傳)」
407권 「두범등전(杜範等傳)」
408권 「오창예등전(呉昌裔等傳)」
409권 「고정자등전(高定子等傳)」
410권 「누기등전(婁機等傳)」
411권 「탕숙등전(湯璹等傳)」
412권 「맹공등전(孟珙等傳)」
413권 「조여담등전(趙汝談等傳)」
414권 「사미원등전(史彌遠等傳)」
415권 「부백성등전(傅伯成等傳)」
416권 「오연등전(吳淵等傳)」
417권 「교행간등전(喬行簡等傳)」
418권 「오잠등전(呉潛等傳)」
419권 「선증등전(宣繒等傳)」
420권 「왕백대등전(王伯大等傳)」
421권 「양동등전(楊棟等傳)」
422권 「임훈등전(林勳等傳)」
423권 「오영등전(吳泳等傳)」
424권 「육지지등전(陸持之等傳)」
425권 「유응룡등전(劉應龍等傳)」
426권 「순리전(循吏傳)」
427·428·429·430권 「도학전(道學傳)」
431·432·433·434·435·436·437·438권 「유학전(儒學傳)」
439·440·441·442·443·444·445권 「문원전(文苑傳)」
446·447·448·449·450·451·452·453·454·455권 「충의전(忠義傳)」
강보예 · 마수 · 동원형 · 조근 · 소함 · 진전서 · 첨량신 · 이약수 · 유겹 · 부찰 · 양진 · 장극전 · 장확 · 주소 · 사항 · 손익(孫翊) · 곽안국 · 이연 · 이막 · 서규 · 진구 · 조불시 · 조령성 · 당중 · 서휘언 · 상자소 · 양방예 · 증고 · 유급 · 정양 · 여유성 · 곽영 · 한호 · 구양순 · 장충보 · 이언선 · 조립 · 왕충식 · 당기 · 이진 · 진구도 · 최종 · 임충지 · 등무실 · 위행가 · 염진 · 조사가 · 역청 · 호빈 · 범왕 · 마준 · 양진중 · 고가 · 조우문 · 진인 · 허표손 · 진륭지 · 왕익 · 이성지 · 진원규 · 장순 · 범천순 · 우부 · 변거의 · 진소 · 윤옥 · 이불 · 윤곡 · 조묘발 · 당진(唐震) · 조여석 · 조회 · 조양순 · 강재 · 마기 · 밀우 · 장세걸 · 육수부 · 서응표 · 진문룡 · 등득우 · 장각(張珏) · 고민 · 경사충 · 왕기 · 장흥조 · 곽호(郭滸) · 오혁 · 이익 · 조사륭 · 진쉬 · 황우 · 학중련 · 유유보 · 우호 · 위언명 · 유사영 · 적흥 · 주필 · 공즙 · 이긍 · 능당좌 · 양수중 · 강예 · 곽선 · 사마몽구 · 임공재 · 황개 · 손익(孫益) · 왕선 · 오초재 · 이성대 · 도거인 · 고영년 · 국사복 · 손소원 · 증효서 · 조백진 · 왕사언 · 설경 · 손휘 · 송창조 · 이정(李政) · 강수 · 유선 · 굴견 · 정담 · 요흥 · 장기(張玘) · 왕공 · 유태 · 손봉 · 유화원 · 호당로 · 왕주 · 유안(劉晏) · 정진(鄭振) · 맹언경 · 고담 · 연만부 · 설양현 · 당민구 · 왕사도 · 조시상 · 조희계 · 유자천 · 여문신 · 종계옥 · 경세안 · 정보 · 미립 · 후핍 · 왕효충 · 고응송 · 장선옹 · 황신 · 진달 · 소뇌룡 · 추붕 · 유사소 · 진동 · 구양철 · 마신 · 여조검 · 양굉중 · 화악 · 등약수 · 진보 · 모겸지 · 서도명
456권 「효우전(孝友傳)」
457·458·459권 「은일·탁행전(隱逸卓行傳)」
460권 「열녀전(列女傳)」
461·462권 「방기전(方伎傳)」
463·464·465권 「외척전(外戚傳)」
466·467·468·469권 「환자전(宦者傳)」
470권 「영행전(佞幸傳)」
471·472·473·474권 「간신전(姦臣傳)」
475·476·477권 「반신전(叛臣傳)」
478권 「남당세가(南唐世家)」
479권 「서촉세가(西蜀世家)」
480권 「오월세가(吳越世家)」
481권 「남한세가(南漢世家)」
482권 「북한세가(北漢世家)」
483권 「호남·형남·장천·진세가(湖南荊南漳泉陳世家)」
484권 「주3신전(周三臣傳)」
485·486·487·488·489·490·491·492권 「외국전(外國傳)」
493·494·495·496권 「만이전(蠻夷傳)」


[1] 당시 문중의 소종이 대종의 뒤를 잇는건 무척 번거로운 문제였기에 인종은 자신의 양자인 조서에게 ‘종실’이라는 명칭을 붙여줬다고 한다. 그런데 이때 조서는 한사코 이를 거절하고 몸이 아프다는 핑계를 대면서 겸손하게 사양해 인종을 흡족하게 만들었고 이후 신하들에게도 사군으로 인정받게 되어 인망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2] 전형적인 서생인 조서(영종)는 당시 종실예법이 엄격하고 종법제도가 국가의 근본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기에 다른 이들보다 이 문제에 대해 신중하고 엄격하게 대했다고 한다. 그래서 자신이 양모 조황후와 조정 중신들의 명으로 양부 인종의 후계자로 선포되었음에도 두려움에 떨며 한사코 마다하려고 했다.[3] 영종은 즉위 직후부터 정국 주도권 다툼, 친아버지의 봉작 문제로 인종의 계후(이자 영종 본인에게는 양모) 조태후와 대립했다. 여기에는 조태후가 정국주도권을 쥐려 했던 이유로 영종에게 옥새를 내주지 않은 이유도 있지만, 사실 영종이 조태후를 여러 차례 속이고 평소 조태후를 대하는 것에 있어서 진심으로 대하지 않은 이유가 컸다. 실제로 영종은 옥새를 돌려받는 과정에서도 재상 한기와 짜고 다소 무례해보일 수 있는 방법으로 조태후를 속여 서로의 감정이 상했다. 이후에도 양모 조태후를 대함에 있어서 소홀히 대했다. [4] 자신이 강력히 추진해오던 추봉 문제를 조태후가 동의하지 않자 매일같이 고의로 문안인사를 드렸다고 한다. 이런 노력에도 영종 친부의 추봉이 미뤄지자 어느날 조태후를 모시고 궁궐내 복숭아꽃을 보고 함께 식사를 한 자리에서 건강을 축승한다면서 조태후에게 술을 먹여 취하게 한 뒤, 사인을 받아내 아버지를 추봉시킨 일로 크게 조야에서 비난을 받기도 했다. 당연히 술이 깬 뒤 영종의 속셈을 알게 된 조태후는 시정잡배도 안 할 방법으로 어머니를 속였다고 노발대발했고, 신하들까지 반대했기에 영종은 이를 취소해야했다.[5] 당시 송나라 조정에서는 예법상 복왕 조윤양이 친부이기에 ‘황고’라고 불러야 된다는 의견과 양자로 일찍이 입적했기 때문에 ‘황백’이라고 불러야 된다는 의견이 팽팽하게 대립했다고 한다.[6] 숙주, 박주에서 수재가 크게 나고 하남, 산동, 강소, 절강 일대에서도 폭우가 내려 재난이 발생했으며 수도에서도 홍수로 사람이 죽는 등 일련의 천재지변이 일어났다.[7] 치평 원년 11월과 영종이 죽는 해인 치평 4년에 수도에서 하늘이 탁하고 뿌옇게 되는 대풍매가 있었는데, 이후 기침을 얻어 병에 걸렸고 이 병이 다시 걸려 사망하였다. 사마광의 기록에 따르면 영종이 이영각에서 경사강독을 듣던 중 기침을 하였는데 이후 병이 나았지만 다시 병에 걸렸고 사망했다고 한다. 아울러 그의 손자인 철종 역시 겨울에 감기에 걸려 기침으로 고생하다 요절했다.
CC-white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문서의 r53 판에서 가져왔습니다. 이전 역사 보러 가기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이 저작물은 CC BY-NC-SA 2.0 KR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단, 라이선스가 명시된 일부 문서 및 삽화 제외)
기여하신 문서의 저작권은 각 기여자에게 있으며, 각 기여자는 기여하신 부분의 저작권을 갖습니다.

나무위키는 백과사전이 아니며 검증되지 않았거나, 편향적이거나, 잘못된 서술이 있을 수 있습니다.
나무위키는 위키위키입니다. 여러분이 직접 문서를 고칠 수 있으며, 다른 사람의 의견을 원할 경우 직접 토론을 발제할 수 있습니다.

  •  
  •  
  •  
  •  
  •  
  •  
  •  
  •  
  •  
  •  
  •  
  •  
  •  
  •  
  •  
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