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무 천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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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초대 천황 진무 천황 神武天皇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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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
사망 | |||||||||||||||||||
능묘 | 우네비야마우시토능(畝傍山東北陵) | ||||||||||||||||||
재위기간 | 초대 천황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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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무 천황과 금솔개(金鵄) |
일본의 초대 천황으로 여겨지는 인물이다.
이름이 《고사기》에는 '카무야마토이와레비코노미코토'(神倭伊波禮毘古命)라고 기록되었는데 《고사기》 표기를 표준으로 간주한다. 《일본서기》에는 칸야마토이와레히코노미코토(神日本磐余彦尊), 와카미케누노미코토(若御毛沼命), 사노노미코토(狹野尊), 히코호호데미노미코토(彦火火出見尊) 등으로 나왔고 황명도 하츠쿠니시라스 천황(始馭天下之天皇)로 불린다.
일본사에서 신화시대 인물들의 이름은 매우 길다. 초대 진무 천황으로부터 제44대 겐쇼 천황까지의 시호는 나라 시대의 대문장가였던 오미노 미후네(淡海三船 722~785)가 지었다고 한다.
이름이 《고사기》에는 '카무야마토이와레비코노미코토'(神倭伊波禮毘古命)라고 기록되었는데 《고사기》 표기를 표준으로 간주한다. 《일본서기》에는 칸야마토이와레히코노미코토(神日本磐余彦尊), 와카미케누노미코토(若御毛沼命), 사노노미코토(狹野尊), 히코호호데미노미코토(彦火火出見尊) 등으로 나왔고 황명도 하츠쿠니시라스 천황(始馭天下之天皇)로 불린다.
일본사에서 신화시대 인물들의 이름은 매우 길다. 초대 진무 천황으로부터 제44대 겐쇼 천황까지의 시호는 나라 시대의 대문장가였던 오미노 미후네(淡海三船 722~785)가 지었다고 한다.
진무 천황은 일본인의 비조(鼻祖)로도 통한다. 일본 황실의 시조이자 일본 역사상의 웬만큼 대단한 인물들의 시조로 그 계보를 따라가다 보면 결국에는 진무 천황이 나오기 때문이다.[20] 일례로 백제계 도래인 계통의 모후를 두었던 제50대 간무 천황의 현손자인 타이라 타카무네오로부터 시작된 타이라 가문(헤이시)의 경우, 헤이케 정권의 개창자인 타이라노 키요모리를 비롯한 모든 타이라 사람이 진무 천황의 후손이었다.
그리고 타이라 가문의 영원한 맞수인 미나모토 가문(겐지) 또한 진무의 자손으로, 열거해 보자면 다음과 같았다. '최초의 미나모토'인 미나모토 마코토를 시작으로 제52대 사가 천황의 황자 중 17명이 하사받은 사가 겐지 가문과, 사가 겐지 가문의 후손들에서 분파된 키타베 가문, 히로하타 가문, 히가시산조 가문, 요코가와 가문, 시조 가문, 요인 가문, 야기우메 가문, 다나카 가문, 니시시치조 가문, 다케다 가문이 그 후손들이었다. 또 성을 하사받은 황자 중 12번째인 미나모토 토오루가 사가 겐지 토오루류의 시조로서 거기서 분파된 미타 가문, 와타나베 가문, 마츠우라 가문, 카마치 가문 또한 진무의 후손들이었다. 그리고 제53대 닌묘 천황의 자손에게 하사된 닌묘 겐지 가문과 그 분파들인 하나부사 가문, 타테이시 가문, 또 타테이시 가문의 분파인 우루시마 가문, 키타야마 가문, 스가 가문, 우루시마 가문, 와다 가문, 나츠메 가문, 타나카 가문, 타치카와 가문, 모리 가문, 오오나 가문, 칸부미 가문, 이치마시마 가문도 진무 천황의 후손들이었다.
특히 제56대 세이와 천황의 6남 사다즈미 친왕의 두 아들 미나모토 츠네모토와 미나모토 츠네오가 하사받은 세이와 겐지 가문이 특히 유명하다. 대표적인 인물로 가마쿠라 막부의 개창자로 중세 무가 정권 시대의 서막을 연 미나모토 요리토모와 겐페이 합전의 레전드급 명장이었던 미나모토 요시츠네가 있다. 세이와 겐지 가문은 미나모토 가문 중에 가장 분파가 많아서 모든 분파와 후손을 다 거론할 수는 없다. 또 대표적인 후손들이 츠네모토의 손자 미나모토 요리노부를 시조로 두는 카와치 겐지 가문에서 나오는데, 이 가문에서 남북조시대를 풍미한 닛타 가문과 아시카가 가문이 나왔고, 특히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남조와 대립하며, 일본 역사상 두 번째 무가 정권인 무로마치 막부를 세웠다. 또한 미나모토 요리노부의 8대손이 마츠다이라 가문의 시조였던 마츠다이라 지카우지였는데, 그의 9대손으로, 마츠다이라 가문[21]의 당주였던 사람이 바로 아즈치모모야마 시대를 종결시키고, 세 번째 무가 정권인 에도 막부를 여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였다. 다만 마츠다이라-도쿠가와 가문은 족보를 위조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이렇게 본다면 호겐의 난, 겐페이 전쟁, 조큐의 난, 남북조시대, 오닌의 난, 전국시대나 세키가하라 전투는 전부 집안 싸움이 된다. 천황가를 압박한 미나모토 가문, 아시카가 가문, 도쿠가와 가문이 전부 천황가의 분가가 되기 때문이다.[22][23]
그렇다보니 신화시대의 인물이라 할지라도 진무 천황은 일본 역사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진무 천황을 시작으로 일본 역대 천황들의 대를 내려가다 보면 일본의 웬만한 귀족가들의 계보를 확인할 수 있다. 참고할 사람들은 역대 천황들을 살펴보면 좋다.
진무 천황의 형 이나히노미코토(稲飯命)를 두고 9세기 초 일본 서적이었던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録)에서는 신라 국왕과 조상이 같다고 주장했다.[24] 이 때문에 일제강점기 일본의 학자들이 일선동조론을 주장하는 데 악용하기도 했다.
그리고 타이라 가문의 영원한 맞수인 미나모토 가문(겐지) 또한 진무의 자손으로, 열거해 보자면 다음과 같았다. '최초의 미나모토'인 미나모토 마코토를 시작으로 제52대 사가 천황의 황자 중 17명이 하사받은 사가 겐지 가문과, 사가 겐지 가문의 후손들에서 분파된 키타베 가문, 히로하타 가문, 히가시산조 가문, 요코가와 가문, 시조 가문, 요인 가문, 야기우메 가문, 다나카 가문, 니시시치조 가문, 다케다 가문이 그 후손들이었다. 또 성을 하사받은 황자 중 12번째인 미나모토 토오루가 사가 겐지 토오루류의 시조로서 거기서 분파된 미타 가문, 와타나베 가문, 마츠우라 가문, 카마치 가문 또한 진무의 후손들이었다. 그리고 제53대 닌묘 천황의 자손에게 하사된 닌묘 겐지 가문과 그 분파들인 하나부사 가문, 타테이시 가문, 또 타테이시 가문의 분파인 우루시마 가문, 키타야마 가문, 스가 가문, 우루시마 가문, 와다 가문, 나츠메 가문, 타나카 가문, 타치카와 가문, 모리 가문, 오오나 가문, 칸부미 가문, 이치마시마 가문도 진무 천황의 후손들이었다.
특히 제56대 세이와 천황의 6남 사다즈미 친왕의 두 아들 미나모토 츠네모토와 미나모토 츠네오가 하사받은 세이와 겐지 가문이 특히 유명하다. 대표적인 인물로 가마쿠라 막부의 개창자로 중세 무가 정권 시대의 서막을 연 미나모토 요리토모와 겐페이 합전의 레전드급 명장이었던 미나모토 요시츠네가 있다. 세이와 겐지 가문은 미나모토 가문 중에 가장 분파가 많아서 모든 분파와 후손을 다 거론할 수는 없다. 또 대표적인 후손들이 츠네모토의 손자 미나모토 요리노부를 시조로 두는 카와치 겐지 가문에서 나오는데, 이 가문에서 남북조시대를 풍미한 닛타 가문과 아시카가 가문이 나왔고, 특히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남조와 대립하며, 일본 역사상 두 번째 무가 정권인 무로마치 막부를 세웠다. 또한 미나모토 요리노부의 8대손이 마츠다이라 가문의 시조였던 마츠다이라 지카우지였는데, 그의 9대손으로, 마츠다이라 가문[21]의 당주였던 사람이 바로 아즈치모모야마 시대를 종결시키고, 세 번째 무가 정권인 에도 막부를 여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였다. 다만 마츠다이라-도쿠가와 가문은 족보를 위조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이렇게 본다면 호겐의 난, 겐페이 전쟁, 조큐의 난, 남북조시대, 오닌의 난, 전국시대나 세키가하라 전투는 전부 집안 싸움이 된다. 천황가를 압박한 미나모토 가문, 아시카가 가문, 도쿠가와 가문이 전부 천황가의 분가가 되기 때문이다.[22][23]
그렇다보니 신화시대의 인물이라 할지라도 진무 천황은 일본 역사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진무 천황을 시작으로 일본 역대 천황들의 대를 내려가다 보면 일본의 웬만한 귀족가들의 계보를 확인할 수 있다. 참고할 사람들은 역대 천황들을 살펴보면 좋다.
진무 천황의 형 이나히노미코토(稲飯命)를 두고 9세기 초 일본 서적이었던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録)에서는 신라 국왕과 조상이 같다고 주장했다.[24] 이 때문에 일제강점기 일본의 학자들이 일선동조론을 주장하는 데 악용하기도 했다.
가독성을 위해서 존칭 '미코토'(命)를 한글 음역에서는 생략하고, 신명도 존칭 부분을 제외하고 '신'으로 대체한다.
진무는 히코호오리와 도요타마히메의 아들이자 세 번째 신대통치 신인 히코나기사타케우가야후키아에즈(彦波瀲武鸕鶿草葺不合命)와 바다의 신 와다츠미의 차녀였던 다마요리히메(玉依姬命) 사이에서 4남으로 태어났다. 15세 때 황태자가 되어 아히라츠히메(吾平津姬)와 결혼해 타기시미미(手硏耳命)와 키스미미(岐須美美命)를 낳았다.
이후 《일본서기》에 따르면 45세가 된 갑인년(기원전 667), 히무카국(日尙國, 현 미야자키현)의 다카치호노궁(高千穗宮)에 형제들을 모았다.[25]
이후 《일본서기》에 따르면 45세가 된 갑인년(기원전 667), 히무카국(日尙國, 현 미야자키현)의 다카치호노궁(高千穗宮)에 형제들을 모았다.[25]
진무의 말에 모든 형제들이 동의했고, 3대째 살아온 휴우가국(日向国)을 떠나 동쪽으로 향한 기나긴 진군을 시작했다. 이것을 진무동정(神武東征)이라고 부른다.

진무 천황이 동정(동쪽 정벌)하며 갔다는 길을 표시한 지도.
츠쿠시(筑紫)[27]의 우사(宇佐)[28]로부터 오카다궁(岡田宮), 아키(安芸)[29]의 타케리궁(タケリ宮)을 거쳐 이듬해 을묘년(기원전 666)에 키비(吉備)[30]의 타카시마궁(高島宮)에 도착했다. 진무는 그곳에서 3년간 군사와 무기를 준비하기로 했다. 3년이 지나 무오년(기원전 663)이 되자 나니와[31] 곶(岬)에서 가와치[32]의 오쿠모(青雲), 시라카타(白肩) 나루터에 이르러 상륙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 땅의 대호족 나가스네히코(長髄彦)에게 맹렬한 공격을 받아 멀리 후퇴했다. 이때 맏형 이츠세(彦五瀬命)가 적의 화살에 맞아 중상을 입었다. 진무는 '태양신의 자손인 우리가 태양이 뜨는 방위를 공격한 것이 좋지 않았다'라면서 깊이 후회했다. 이후 키이(紀伊)[33]로 상륙하여 카마야마(竈山)로 진군했다. 그 와중에 이츠세가 결국 숨을 거두었다. 진무는 형의 제사를 지낸 뒤 쿠마노(熊野)의 미와노무라(神邑)에 도착하여 바다를 건너지만 폭풍을 만나 남은 형들인 이나히(稲氷命)와 미케이리(三毛入野命)를 잃었다.
진무가 이끄는 군대가 어렵게 쿠마노(熊野)[34]에 상륙한 뒤, 쿠마노시의 산중에 접어들자 곰의 형상으로 변한 토지신이 갑자기 나타나 독기를 내뿜었다. 군사들이 독기에 모두 정신을 잃고 쓰러졌는데, 이 모습을 보고 천계 타카마노하라에서 타카미무스비 신(高御産巣日神)과 일본 천황가의 조상신 아마테라스[35]가 타케미카즈치 신(武甕槌神)을 원군으로 보내려 했지만, 타케미카즈치는 굳이 자신이 직접 내려갈 필요가 없다면서 대신 영검 후츠노미타마를 내려보냈다. 영검은 쿠마노의 호족 타카쿠라지(高倉下)의 창고 지붕을 뚫고 마루에 우뚝 꽂혔다. 이튿날 아침 타카쿠라지가 검을 발견하고 진무에게 진상하자 군사들이 모두 회복했고, 일대의 호족들을 격파하면서 진군을 이어갔다.
진무가 이끄는 군대가 어렵게 쿠마노(熊野)[34]에 상륙한 뒤, 쿠마노시의 산중에 접어들자 곰의 형상으로 변한 토지신이 갑자기 나타나 독기를 내뿜었다. 군사들이 독기에 모두 정신을 잃고 쓰러졌는데, 이 모습을 보고 천계 타카마노하라에서 타카미무스비 신(高御産巣日神)과 일본 천황가의 조상신 아마테라스[35]가 타케미카즈치 신(武甕槌神)을 원군으로 보내려 했지만, 타케미카즈치는 굳이 자신이 직접 내려갈 필요가 없다면서 대신 영검 후츠노미타마를 내려보냈다. 영검은 쿠마노의 호족 타카쿠라지(高倉下)의 창고 지붕을 뚫고 마루에 우뚝 꽂혔다. 이튿날 아침 타카쿠라지가 검을 발견하고 진무에게 진상하자 군사들이 모두 회복했고, 일대의 호족들을 격파하면서 진군을 이어갔다.
진무의 앞에는 난관이 하나 있었다. 진무와 휘하의 군사들은 규슈에서 나고 자란 탓에 이 일대의 지리에는 익숙하지 못했다. 부락이라면 모르겠지만, 산중에서 행군하는데 있어 지리를 모른다는 것은 큰 문제였다. 결국 의기양양하게 진군했던 것이 잘못이었는지 금세 길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이를 본 타카미무스비 신이 즉시 카모타케츠노미(賀茂建角身命)를 호출하여 진무를 도울 것을 명했다. 이에 카모타케츠노미는 다리가 3개 달린 까만(혹은 붉은) 까마귀 야타가라스의 형상을 취해 동정군의 머리 위로 춤추듯이 내려갔다. 진무는 갑자기 나타난 기묘한 형상의 까마귀를 신의 사자로 확신하여 전군에게 까마귀의 뒤를 쫓도록 명령했다. 야타가라스를 따라간 진무의 군대는 무사히 산을 넘을 수 있었다.
산을 넘어간 동정군은 요시노(吉野), 우다(宇多)로 진군했다. 그 땅은 에우카시(兄宇迦斯), 오토우카시(弟宇迦斯)라고 하는 호족 형제들이 통치하는 땅이었다. 에우카시는 진무에게 자청하여 이 땅을 양보하고 연회를 베풀 테니 참석을 권했다. 그러나 이는 함정이었고, 에우카시는 연회장에 장치를 설치해 진무가 들어가면 천정이 떨어져내리도록 했다. 하지만 형의 파렴치한 행동에 질린 동생 오토우카시가 진무에게 이에 대해 밀고했다. 진무는 에우카시가 연회장에 제일 먼저 들어가게 했고, 연회장은 바로 에우카시의 무덤이 되었다.
산을 넘어간 동정군은 요시노(吉野), 우다(宇多)로 진군했다. 그 땅은 에우카시(兄宇迦斯), 오토우카시(弟宇迦斯)라고 하는 호족 형제들이 통치하는 땅이었다. 에우카시는 진무에게 자청하여 이 땅을 양보하고 연회를 베풀 테니 참석을 권했다. 그러나 이는 함정이었고, 에우카시는 연회장에 장치를 설치해 진무가 들어가면 천정이 떨어져내리도록 했다. 하지만 형의 파렴치한 행동에 질린 동생 오토우카시가 진무에게 이에 대해 밀고했다. 진무는 에우카시가 연회장에 제일 먼저 들어가게 했고, 연회장은 바로 에우카시의 무덤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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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수장을 잃은 우다까지 정벌한 진무는 드디어 야마토까지 진격했고, 맏형 이쓰세를 죽인 원수 나가스네히코와 다시 대립했다. 양자의 싸움은 태양신의 후손과 긴키 일대를 다스리는 패자(覇者)의 대결이었다. 양군 모두 사력을 다해 싸웠고, 원정에 지친 진무의 군대는 밀려나 배수진을 치게 되었다. 이렇게 모두 죽음을 각오하는데 생각지 못한 일이 일어나 전황이 뒤바뀌었다. 진무가 최후의 돌격을 각오하고 하늘을 올려다 보자 하늘에서 황금빛 솔개(金鵄)가 날아와 진무가 쏘려던 활을 막았다. 솔개는 마치 번갯불과도 같이 빛을 비추며 나가스네히코의 군대가 친 진을 바라보았다.
그 빛을 보고는 나가스네히코의 군사들이 모두 눈이 멀어 전의를 상실한 채 도망쳐버렸다. 뒤를 쫓는 추격군을 피해 어떻게든 체계를 바로 세우며 반격의 기회를 노리던 나가스네히코의 앞으로 뛰쳐나온 자가 바로 그의 식객 니기하야히(饒速日尊)였다. 니기하야히가 십종신보(十種神宝) 중 야츠카노츠루기(八握剣)를 번쩍이며 한 번 휘두르자 나가스네히코의 머리가 경악한 표정을 띄운 채 땅으로 떨어졌다. 니기하야히는 처음부터 이때를 위해 나가스네히코의 곁에서 지냈던 것이다.
니기하야히는 그대로 진무의 진영으로 향해 야마토의 지배권을 진무에게 헌상했다.
《고사기》에서는 진무 천황이 나라현 우네비산[37] 가시하라궁에 좌정하여 통치했다고 매우 짧게 서술했다. 《일본서기》에서는 진무 천황이 즉위하기 2년 전(기원전 662?)에 '우네비산 동남쪽 가시하라 땅은 안주할 만한 곳이니 거기에 도읍을 정하자'라고 말했다고 서술했다.
진무 천황은 신화적 인물이니 당연히 능이 확실하지 않다. 그래서 막부 말기에는 어느 고분이 진무 천황의 능인가를 두고 학설이 분분했다. 분큐 2년(1862)에는 에도 막부의 자금으로 역대 천황릉을 보수하는 '분큐의 수복' 작업을 시행했는데, 이때 처음으로 공적 영역에서 진무 천황의 능의 위치를 두고 논쟁이 벌어졌다. 크게 세 가지 설이 있었고 그중 다니모리 요시오미(谷森善臣, 산조 사네토미의 국학 스승)의 설, 우네비산 동남쪽 가시하라가 채택되었다. 《일본서기》에서 우네비산 동남쪽 가시하라에서 즉위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에 따라 우네비산 동남쪽 근처에 자리한 큰 무덤이 바로 진무 천황릉이라는 설이다. 이때 채택한 설을 현재까지도 궁내청에서 받아들이고 있다.[38]
1890년 메이지 신정부는 진무 천황릉 옆에 가시하라 신궁을 창건했다. 창건시에는 면적이 2만 195평(6.7헥타르)이었지만 1911년 제1차 확장사업으로 3만 600평(10.1헥타르)으로 넓혔고, 1916년에는 총 13마을 208가구 1054명을 이주시켰다.
1938년에 황기 2600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가시하라 신궁 전체를 발굴하는 대규모 조사작업을 진행하였는데 신궁 마당 지하에서 조몬 시대 후기~말기의 대규모 취락지와 소년, 소녀들의 유골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도쿄학예대학의 카누마 케이요(鹿沼景揚) 교수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유물들의 대부분을 미국 미시간 대학교에 반입하여 탄소연대측정한 결과, 당대로부터 2600년 전의 물건들이며 그 전후 오차는 ±200년이라 실제로 가시하라 신궁 터가 진무 천황의 도읍지라고 증명된 사례라고 주장했다. 그에 힘입어 1938~1940년 제2차 확장사업을 시작해 연못과 산림을 늘렸다고 한다. 2차 확장사업의 전액은 국비와 황기 2600년 기념 봉축헌금으로 충당했다.
진무 천황은 신화적 인물이니 당연히 능이 확실하지 않다. 그래서 막부 말기에는 어느 고분이 진무 천황의 능인가를 두고 학설이 분분했다. 분큐 2년(1862)에는 에도 막부의 자금으로 역대 천황릉을 보수하는 '분큐의 수복' 작업을 시행했는데, 이때 처음으로 공적 영역에서 진무 천황의 능의 위치를 두고 논쟁이 벌어졌다. 크게 세 가지 설이 있었고 그중 다니모리 요시오미(谷森善臣, 산조 사네토미의 국학 스승)의 설, 우네비산 동남쪽 가시하라가 채택되었다. 《일본서기》에서 우네비산 동남쪽 가시하라에서 즉위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에 따라 우네비산 동남쪽 근처에 자리한 큰 무덤이 바로 진무 천황릉이라는 설이다. 이때 채택한 설을 현재까지도 궁내청에서 받아들이고 있다.[38]
1890년 메이지 신정부는 진무 천황릉 옆에 가시하라 신궁을 창건했다. 창건시에는 면적이 2만 195평(6.7헥타르)이었지만 1911년 제1차 확장사업으로 3만 600평(10.1헥타르)으로 넓혔고, 1916년에는 총 13마을 208가구 1054명을 이주시켰다.
1938년에 황기 2600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가시하라 신궁 전체를 발굴하는 대규모 조사작업을 진행하였는데 신궁 마당 지하에서 조몬 시대 후기~말기의 대규모 취락지와 소년, 소녀들의 유골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도쿄학예대학의 카누마 케이요(鹿沼景揚) 교수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유물들의 대부분을 미국 미시간 대학교에 반입하여 탄소연대측정한 결과, 당대로부터 2600년 전의 물건들이며 그 전후 오차는 ±200년이라 실제로 가시하라 신궁 터가 진무 천황의 도읍지라고 증명된 사례라고 주장했다. 그에 힘입어 1938~1940년 제2차 확장사업을 시작해 연못과 산림을 늘렸다고 한다. 2차 확장사업의 전액은 국비와 황기 2600년 기념 봉축헌금으로 충당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진무 천황은 황실의 정통성 및 역사, 권위를 높이기 위해 후대에 창조된 가공의 인물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진무 천황의 존재는 국풍 문화가 발전한 뒤로 일본과 야마토 민족의 민족주의적 상징으로 자리매김했다. 1868년 대정봉환 당시만 해도 선언문 <왕정복고의 대호령>에는 "진무 천황께서 창업하신 당초에 근거하여…"라는 문구가 있으며, 진무 천황 이후 일본 신화 상으로 수천 년간 이어져 내려온 황실의 계보가 만세일계라는 정통성을 부여했다. 메이지 5년(1872)에는 기원절을 제정했는데 당초에는 음력 1월 1일이었던 1월 29일이었으나, 음력이 불편하다는 이유와 이듬해부터 양력을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진무 천황의 즉위일을 양력으로 계산하여 2월 11일로 정했다. 이는 연합군 총사령부가 폐지시켰으나 1960년대 건국기념일이란 이름으로 부활,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일본제국 시기에는 진무 천황 제사일(神武天皇祭)인 4월 3일 또한 국가공휴일이었으나, 마찬가지로 연합군 총사령부가 폐지시켰고 이 날은 공휴일로 부활하지 못하였다.
진무 천황의 존재는 국풍 문화가 발전한 뒤로 일본과 야마토 민족의 민족주의적 상징으로 자리매김했다. 1868년 대정봉환 당시만 해도 선언문 <왕정복고의 대호령>에는 "진무 천황께서 창업하신 당초에 근거하여…"라는 문구가 있으며, 진무 천황 이후 일본 신화 상으로 수천 년간 이어져 내려온 황실의 계보가 만세일계라는 정통성을 부여했다. 메이지 5년(1872)에는 기원절을 제정했는데 당초에는 음력 1월 1일이었던 1월 29일이었으나, 음력이 불편하다는 이유와 이듬해부터 양력을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진무 천황의 즉위일을 양력으로 계산하여 2월 11일로 정했다. 이는 연합군 총사령부가 폐지시켰으나 1960년대 건국기념일이란 이름으로 부활,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일본제국 시기에는 진무 천황 제사일(神武天皇祭)인 4월 3일 또한 국가공휴일이었으나, 마찬가지로 연합군 총사령부가 폐지시켰고 이 날은 공휴일로 부활하지 못하였다.
과거 일본 사학계는 진무 천황을 비롯한 상고시대의 천황은 신성불가침의 존재로 치부하여 아예 건드리지 않았다. 하지만 다이쇼 시대의 역사학자인 와세다대학의 츠다 소키치(津田左右吉 1873-1961)는 자신의 저서를 통해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日本上代史硏究》, 1930
해당 주장으로 인해 쓰다는 일본 정부로부터 '황실을 모독했다.'는 지탄을 받으며, 3개월 금고형의 유죄 선고를 받았다 이후로 《고사기》와 《일본서기》 또한 엄격한 사료 비판을 받았다. 또한 다이쇼 천황의 4남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친왕(1915-2016)도 "진무 천황은 신화이지 역사가 아니다"라고 주장한 바 있다. 이로 인해 다카히토 친왕은 '빨갱이 왕자님'이라는 비난을 들었다.[39]
그는 일본에서 가장 큰 역사학회 중 하나인 사학회 자리에서, 앞서 언급한 건국기념일 제정에 대해 사학회가 결의를 해서 공식적으로 그에 대해 반대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가(이른바 '사학회 발언') 그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화가 나서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고도 한다.
중세사학자로 유명한 아미노 요시히코도 2000년에 발간한 저서 《일본이란 무엇인가》[40]에서 전혀 사실과는 상관없는 허구의 천황을 기념하여 국가에서 따로 날까지 지정하는 데는 동의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다카히토 친왕도 그러한 맥락에서 반대했을 것이다.
문헌과 기록은 둘째치고 127살이라는 나이는 당대 기준으로는 어이없을 정도로 오래 산 것이고 지금 기준으로도 세계 최고령으로 기네스북에 올라갈 수준인 저 엄청난 고령까지 살았다는 게 진무 천황의 신빙성을 떨어뜨리는 이유 중 하나가 되고 있다.[41]
고고학 연구가 진척되면서 야마토 정권의 실제 성립 시기는 3세기 중후반임이 밝혀졌고, 한반도의 백제, 신라, 가야도 연대를 인상하거나 가계를 조작하는 과정에서 초기 왕들의 활동 연대와 나이를 왜곡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초기 야마토의 대왕들도 같은 사례라 볼 수 있다. 일본의 경우에는 그 과장이 지나쳐서 역효과를 부른 것. 초기 일본 대왕위는 고구려/왕조가 그랬듯이 비혈연 계승-세대주의적 계승-형제계승-부자계승으로 넘어가는데, 3~4세기 비혈연 계승 당시의 대왕들이 진무 천황~닌토쿠 천황이고 5세기 리추 천황을 기점으로 세대주의적 계승이 이루어지다 게이타이 천황을 기점으로 형제계승으로 가계가 일원화된다. 신라/왕조가 그랬듯이 초기 일본의 대왕위는 왕들의 대표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여러 왕들이 동시대에 병존했고, 연대를 인상하는 과정에서 동시대에 병존한 여러 왕들을 다른 시대로 배치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서에는 나오지 않고 금석문에만 나오는 신라의 성한왕이 김씨 왕조의 시조라서 초대 신라왕인 혁거세 거서간과 별개로 '태조(太祖)'의 묘호를 받았듯이, 진무 천황이 스진 천황처럼 초대 오오키미(大王)은 아니었지만 現 일본 왕조의 시조격 인물이라서 태조급 위상을 가지게 되었을 수도 있다. 진무의 시호에는 이와레(磐余)라는 호칭이 있는데, 이와레는 現 나라현 카시하라시와 사쿠라이시 일대로 진구 황후, 리추 천황, 세이네이 천황, 게이타이 천황, 요메이 천황가 이와레에 미야(宮)를 조성하였다. 또 이토쿠 천황, 고겐 천황, 오진 천황의 근거지인 카루(輕)도 現 나라현 사쿠라이시 일대이며 세대주의적 계승(리추 천황~게이타이 천황)을 하던 당시 일본 대왕들의 근거지는 주기적으로 변했지만 카시하라시의 남쪽인 아스카(飛鳥), 카시하라시의 동쪽인 사쿠라이시, 사쿠라이시의 북쪽인 텐리시로 꽤 일관적이다.
진무 조의 동정 신화에는 미야자키현에서 나라현 카시하라시 일대로 이주하는 과정에서 야마토(大和)에 선주하던 수많은 현지 호족들을 제압하고 복속시키는 과정이 자세히 나오며, 그 후손들이 (비록 기기신화 편찬 당시에는 쇠퇴한 상태였지만) 극초기 야마토 왕권의 성립과 성장 과정에서 크게 기여한 씨족의 시조 또는 조상임을 강조한다. 일본과 유사한 성씨와 족단 문화를 가지고 있던 신라 왕조의 형성과 성장 과정을 고려하면, 태조 성한왕을 시조로 받들던 신라 김씨 왕조가 그랬듯이 진무를 시조로 받들고 있던 現 일본 왕조가 상대적으로 늦게 나라 분지로 들어왔고, 나라 분지 동남부 일대를 중심으로 급속도로 성장하여 5세기 오오키미(大王)위를 독점하고 6~7세기 형제/숙질계승을 거쳐 부자계승으로 계승원리가 일원화되었으며, 기기신화의 편찬으로 모든 대왕들의 가계를 통합하는 과정에서 진무를 초대 천황으로 내세우고 초대 대왕이었던 스진은 10대 천황으로 수정되었을 수도 있다.
현재 일본 역사학계에서 실체를 확신할 수 있는 천황은 10대 스진 천황부터라는 것이 정설이다.[42] 진무 천황이 즉위했다고 기록된 기원전 660년의 일본은 후기 조몬 시대에 해당하며, 도래인 집단에 의해 농사가 시작된 부족국가였다. 정사(正史)에서 교차 검증이 가능한 일본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후한 광무제 시기(57년)로 지금의 규슈 북부에 위치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나노국(奴國)의 왕이 후한에 조공하여 漢委奴國王(한위노국왕)[43]이라는 칭호와 금인[44]을 하사받았다는 내용이다.
현대 역사학계에서 진무 천황은 실존하지 않는 신화 속 인물이라는 것이 중론이다. 물론 신화와는 다른, 스진 천황이 속한 부족의 비조(9대조)이거나 혈통적 관계가 없는 선대 부족장 정도의 실존 인물이었을 가능성은 있다. 그렇다면 생존했던 시대는 기원전 660년보다는 수백 년 정도 이후일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는 별개로 많은 신사의 신관들과 신화를 신앙하는 사람들은 진무 천황을 여전히 실존인물로 여긴다.
진무 천황의 모티브가 되는 인물 자체는 있었을 수도 있는데, 야마토 정권 초기는 부족사회가 도시국가로 성장하여 제국(諸國)들이 들어선 지 얼마 되지 않아 오오키미(大王)위는 단순히 여러 키미(王)들의 대표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진무 천황의 휘가 2개로 내려오는 것과 규슈에서 간사이로 이주하는 과정이 자세히 기록된 것을 고려하면, 모티브가 되는 사람이 여럿 있었고 야마토 정권이 형성되기 직전 내지는 막 형성되던 당시 특이한 행보로 인해 후손들에게 신화적 존재로 회자되다 시대가 지나면서 한 사람의 일대기로 합쳐진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진무 천황을 스진 천황과 동일인물로 보기에는 다른 점이 많다. 진무 천황은 카시하라(橿原)[45]에 정착했지만 스진의 근거지는 카시하라의 북쪽에 있는 시키(磯城)[46]가 근거지였고, 진무 무오년 11월 7일자 기사에 진무가 동정하는 과정에서 시키 일대의 호족이었던 타케루에시키(梟帥兄磯城)를 죽이고 오토시키(弟磯城)를 복종시켰으며 2년 2월 2일자에 오토시키를 시키노 아가타누시(磯城縣主)로 삼았다고 한다. 시키노 아가타누시는 덴무 12년(684) 10월 5일자에 무라지(連)를 받은 14개의 씨족 중 하나로 고사기에는 스이제이 천황~이토쿠 천황 대까지, 일본서기의 일서(一書)에는 스이제이~고안 천황의 비가 시키노 아가타누시 출신이었다고 한다.
스진 즉위조에 따르면 스진의 어머니는 모노노베(物部) 출신이다. 진무 조에 따르면 모노노베는 니기하야히노 미코토(饒速日命)가 시조였다고 하는데, 진무처럼 하늘의 자손이었으며 진무와 비슷한 시기에 야마토로 이주해 '하늘의 자식'으로서 왕이 되었고 나가스네비코(長髓彦)의 여동생과 혼인하여 아들을 두었다. 그러나 진무의 동정 과정에서 나가스네비코와 진무 천황은 오사카부 일대에서 수차례 충돌하였고, 나가스네비코는 진무에게 패배하여 큰 피해를 입자 사람을 보내 '니기하야히노 미코토가 하늘의 자손이라 내가 받아들였는데 넌 뭐냐?'고 물었고, 진무가 하늘의 자손도 여럿이 있다며 증표를 보이라고 하자 니기하야히노 미코토가 가진 하늘의 후예의 징표를 보였고 진무도 자신이 가진 하늘의 자손의 징표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나가스네비코는 항복하려 하지 않았고, 니기하야히노 미코토가 나가스네비코를 배신하고 죽인 뒤 진무에게 항복하였다. 진무는 같은 하늘의 자손이라는 이유로 니기하야히노 미코토를 존중하였고, 그의 후손이 모노노베가 되었다고 한다.
이렇듯 진무의 일대기와 스진의 배경을 비교해 보면 스진은 진무에게 정복당한 집단들과 관련이 깊으며, 그 과정도 한 챕터를 할애할 만큼 자세히 그려진다. 스진의 일족과 現 일본 왕조는 서로 다른 집안으로 추정되는데, 스진의 일족을 비롯한 야마토의 前 대왕가들이 상대적으로 늦게 야마토에 유입된 現 일본 왕조에게 대왕위가 넘어간 듯하며, 그 과정도 前 왕조들과 격렬한 다툼 끝에 쟁취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
현대 역사학계에서 진무 천황은 실존하지 않는 신화 속 인물이라는 것이 중론이다. 물론 신화와는 다른, 스진 천황이 속한 부족의 비조(9대조)이거나 혈통적 관계가 없는 선대 부족장 정도의 실존 인물이었을 가능성은 있다. 그렇다면 생존했던 시대는 기원전 660년보다는 수백 년 정도 이후일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는 별개로 많은 신사의 신관들과 신화를 신앙하는 사람들은 진무 천황을 여전히 실존인물로 여긴다.
진무 천황의 모티브가 되는 인물 자체는 있었을 수도 있는데, 야마토 정권 초기는 부족사회가 도시국가로 성장하여 제국(諸國)들이 들어선 지 얼마 되지 않아 오오키미(大王)위는 단순히 여러 키미(王)들의 대표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진무 천황의 휘가 2개로 내려오는 것과 규슈에서 간사이로 이주하는 과정이 자세히 기록된 것을 고려하면, 모티브가 되는 사람이 여럿 있었고 야마토 정권이 형성되기 직전 내지는 막 형성되던 당시 특이한 행보로 인해 후손들에게 신화적 존재로 회자되다 시대가 지나면서 한 사람의 일대기로 합쳐진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진무 천황을 스진 천황과 동일인물로 보기에는 다른 점이 많다. 진무 천황은 카시하라(橿原)[45]에 정착했지만 스진의 근거지는 카시하라의 북쪽에 있는 시키(磯城)[46]가 근거지였고, 진무 무오년 11월 7일자 기사에 진무가 동정하는 과정에서 시키 일대의 호족이었던 타케루에시키(梟帥兄磯城)를 죽이고 오토시키(弟磯城)를 복종시켰으며 2년 2월 2일자에 오토시키를 시키노 아가타누시(磯城縣主)로 삼았다고 한다. 시키노 아가타누시는 덴무 12년(684) 10월 5일자에 무라지(連)를 받은 14개의 씨족 중 하나로 고사기에는 스이제이 천황~이토쿠 천황 대까지, 일본서기의 일서(一書)에는 스이제이~고안 천황의 비가 시키노 아가타누시 출신이었다고 한다.
스진 즉위조에 따르면 스진의 어머니는 모노노베(物部) 출신이다. 진무 조에 따르면 모노노베는 니기하야히노 미코토(饒速日命)가 시조였다고 하는데, 진무처럼 하늘의 자손이었으며 진무와 비슷한 시기에 야마토로 이주해 '하늘의 자식'으로서 왕이 되었고 나가스네비코(長髓彦)의 여동생과 혼인하여 아들을 두었다. 그러나 진무의 동정 과정에서 나가스네비코와 진무 천황은 오사카부 일대에서 수차례 충돌하였고, 나가스네비코는 진무에게 패배하여 큰 피해를 입자 사람을 보내 '니기하야히노 미코토가 하늘의 자손이라 내가 받아들였는데 넌 뭐냐?'고 물었고, 진무가 하늘의 자손도 여럿이 있다며 증표를 보이라고 하자 니기하야히노 미코토가 가진 하늘의 후예의 징표를 보였고 진무도 자신이 가진 하늘의 자손의 징표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나가스네비코는 항복하려 하지 않았고, 니기하야히노 미코토가 나가스네비코를 배신하고 죽인 뒤 진무에게 항복하였다. 진무는 같은 하늘의 자손이라는 이유로 니기하야히노 미코토를 존중하였고, 그의 후손이 모노노베가 되었다고 한다.
이렇듯 진무의 일대기와 스진의 배경을 비교해 보면 스진은 진무에게 정복당한 집단들과 관련이 깊으며, 그 과정도 한 챕터를 할애할 만큼 자세히 그려진다. 스진의 일족과 現 일본 왕조는 서로 다른 집안으로 추정되는데, 스진의 일족을 비롯한 야마토의 前 대왕가들이 상대적으로 늦게 야마토에 유입된 現 일본 왕조에게 대왕위가 넘어간 듯하며, 그 과정도 前 왕조들과 격렬한 다툼 끝에 쟁취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
진무 천황 이후 결사팔대에 속하는 천황들은 업적이나 행적에 대한 기록이 부실할 뿐만 아니라 재위기간 또한 비정상적으로 길다. 그렇게 장수가 가능한지는 논외로 한다고 해도 후사를 늦게 보지 않는 이상 왕이 오래 재위할수록 뒤를 이을 아들의 재위기간은 짧아진다.[47] 기원전 660년이 60갑자로 신유년이기 때문에, 후대의 〈신유혁명설〉[48]을 의식하여 연대를 만들어 냈으리란 설이 유력하다.
일본서기 진무 조에는 갑인-을묘-무오-기미-경신에 거쳐 동방 원정을 나간 끝에 신유년에 즉위하였다고 기록하였는데, 고고학적으로 야마토 왕권의 성립 시기인 3세기를 기준으로는 234-235-238-239-240-241년이 된다. 스진 천황의 즉위년인 갑신년은 264년이라 20년 정도 빠른 셈. 동방 정복이 본격화된 무오년도 무오혁운(戊午革運)[49]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다 들어맞지는 않을 것이다.
중국 기록에 따르면 지금도 규슈인지 긴키인지 논란이 있는 야마타이국의 히미코 여왕이 247/248년에 죽고 남자 왕이 즉위하였지만 대규모 내전이 일어난 끝에 히미코 가문의 여성인 토요라는 13살 여성이 즉위하고 나라가 다시 안정되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천문학자들의 시뮬레이션에 따르면 북규슈에서 히미코가 죽은 해 일몰에 일식이 일어났고, 토요가 즉위한 해 일출에 일식이 일어났고 이 '기적'이 히미코의 죽음과 토요의 즉위 이후 국내 안정화에 기여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중국 기록에는 히미코가 죽고 즉위했지만 내전이 일어나서 토요에게 밀린 남자 왕의 행방이 나오지 않으며, 동시기 긴키 일대에도 나름의 도시국가가 있었고 히미코가 조공한 중국 삼국시대 위나라의 거울이 긴키에서 발굴되었다. 히미코-토요 교체기는 야마토 정권의 성립까지 20~30년 정도의 시간차밖에 안 남을 고려하면 토요에게 밀린 남자 왕이 살아남아 다른 곳으로 갔을 수도 있다.
現 일본 왕조가 야마토 정권의 성립 시기(3세기 중후반)부터 존재했다기에는 미심쩍은 점이 많다. 진무의 동정 신화에 나오는 니기하야히노미코토를 통해 당시 야마토 일대에 이미 대왕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고, 진무가 동정 과정에서 제압한 나라 분지의 호족들은 前 왕조들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거기다 4세기 초반[50] 주아이 천황-진구 황후-오진 천황의 활동 반경을 자세히 보면 주아이 천황은 아예 긴키에서 활동한 적이 없고, 진구 황후 3년에 이와레(磐余)로 천도한다.
주아이, 진구 조의 기록을 보면 주아이-진구-오진의 집안은 츠누가(角鹿, 현 쓰루가시)가 원래 근거지였던 듯하며, 비와호를 중심으로 한 간사이 서부~주부 동부 지역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던 집안으로 주청된다. 진무 천황과 주아이-진구-오진 일가의 활동 경로는 명백히 다른데, 한쪽이 거짓이라기에는 양쪽 다 이동 과정이 자세하며 진무의 경우 오사카부를 통해 나라현에 들어가려다 막혀서 다른 경로로 나라현에 들어갔고 그 과정에서 거친 여러 지역들도 세세하게 남아있다. 초기 일본 대왕위가 복수 왕조임을 고려하면 애초에 다른 가문이라고 보는 것이 더 합리적이다.
기기신화에서 히무카는 게이코 천황 조에 여러 차례 등장한다. 일본서기 게이코 4년조에는 고사기에 나오지 않는 히무카노 카미나가 오호타네(日向髮長大田根)와의 사이에서 아무노 키미(阿牟君)의 시조인 히무카노 소츠비코 황자(日向襲津彦皇子)를 낳았다는 일화가 있고,[51] 12년 규슈를 정복하는 과정에서 11월 히무카 일대에 머물렀고, 13년 미카하시비메(御刀媛)라는 현지인을 아내로 삼아 히무카노 쿠니노 미야츠코(日向國造)의 시조인 토요쿠니와케노 미코(豐國別皇子)를 낳았다. 17년 히무카의 니모노워노(丹裳小野)를 노닐고는 "이 나라는 똑바로 해가 돋는 쪽을 향하였다"고 하여 히무카(日向)라 불렀다고 한다. 그 뒤 18년 규슈 각지를 돌아다니다 19년 히무카에서 긴키로 돌아갔다고 나온다. 이후 27년 구마소와 다시 전쟁을 벌여 야마토타케루가 파견되었고 28년 구마소 정복을 보고하였다. 게이코 천황기는 4~7세기라는 기나긴 세월에 걸쳐 진행된 야마토 정권의 정복기가 한 사람의 일대기로 소급되어 기록된 것이 특징이다. 게이코 천황기에서 야마토타케루의 활동을 빼면 대체로 마키무쿠(纒向)에 도읍한 인물 / 히무카(日向)에 도읍하여 규슈를 정복한 인물 / 간사이 동부와 주부 서부에서 활동하며 간토 확장을 시도한 인물 셋으로 나뉜다.
일본서기 진무 조에는 갑인-을묘-무오-기미-경신에 거쳐 동방 원정을 나간 끝에 신유년에 즉위하였다고 기록하였는데, 고고학적으로 야마토 왕권의 성립 시기인 3세기를 기준으로는 234-235-238-239-240-241년이 된다. 스진 천황의 즉위년인 갑신년은 264년이라 20년 정도 빠른 셈. 동방 정복이 본격화된 무오년도 무오혁운(戊午革運)[49]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다 들어맞지는 않을 것이다.
중국 기록에 따르면 지금도 규슈인지 긴키인지 논란이 있는 야마타이국의 히미코 여왕이 247/248년에 죽고 남자 왕이 즉위하였지만 대규모 내전이 일어난 끝에 히미코 가문의 여성인 토요라는 13살 여성이 즉위하고 나라가 다시 안정되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천문학자들의 시뮬레이션에 따르면 북규슈에서 히미코가 죽은 해 일몰에 일식이 일어났고, 토요가 즉위한 해 일출에 일식이 일어났고 이 '기적'이 히미코의 죽음과 토요의 즉위 이후 국내 안정화에 기여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중국 기록에는 히미코가 죽고 즉위했지만 내전이 일어나서 토요에게 밀린 남자 왕의 행방이 나오지 않으며, 동시기 긴키 일대에도 나름의 도시국가가 있었고 히미코가 조공한 중국 삼국시대 위나라의 거울이 긴키에서 발굴되었다. 히미코-토요 교체기는 야마토 정권의 성립까지 20~30년 정도의 시간차밖에 안 남을 고려하면 토요에게 밀린 남자 왕이 살아남아 다른 곳으로 갔을 수도 있다.
現 일본 왕조가 야마토 정권의 성립 시기(3세기 중후반)부터 존재했다기에는 미심쩍은 점이 많다. 진무의 동정 신화에 나오는 니기하야히노미코토를 통해 당시 야마토 일대에 이미 대왕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고, 진무가 동정 과정에서 제압한 나라 분지의 호족들은 前 왕조들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거기다 4세기 초반[50] 주아이 천황-진구 황후-오진 천황의 활동 반경을 자세히 보면 주아이 천황은 아예 긴키에서 활동한 적이 없고, 진구 황후 3년에 이와레(磐余)로 천도한다.
주아이, 진구 조의 기록을 보면 주아이-진구-오진의 집안은 츠누가(角鹿, 현 쓰루가시)가 원래 근거지였던 듯하며, 비와호를 중심으로 한 간사이 서부~주부 동부 지역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던 집안으로 주청된다. 진무 천황과 주아이-진구-오진 일가의 활동 경로는 명백히 다른데, 한쪽이 거짓이라기에는 양쪽 다 이동 과정이 자세하며 진무의 경우 오사카부를 통해 나라현에 들어가려다 막혀서 다른 경로로 나라현에 들어갔고 그 과정에서 거친 여러 지역들도 세세하게 남아있다. 초기 일본 대왕위가 복수 왕조임을 고려하면 애초에 다른 가문이라고 보는 것이 더 합리적이다.
기기신화에서 히무카는 게이코 천황 조에 여러 차례 등장한다. 일본서기 게이코 4년조에는 고사기에 나오지 않는 히무카노 카미나가 오호타네(日向髮長大田根)와의 사이에서 아무노 키미(阿牟君)의 시조인 히무카노 소츠비코 황자(日向襲津彦皇子)를 낳았다는 일화가 있고,[51] 12년 규슈를 정복하는 과정에서 11월 히무카 일대에 머물렀고, 13년 미카하시비메(御刀媛)라는 현지인을 아내로 삼아 히무카노 쿠니노 미야츠코(日向國造)의 시조인 토요쿠니와케노 미코(豐國別皇子)를 낳았다. 17년 히무카의 니모노워노(丹裳小野)를 노닐고는 "이 나라는 똑바로 해가 돋는 쪽을 향하였다"고 하여 히무카(日向)라 불렀다고 한다. 그 뒤 18년 규슈 각지를 돌아다니다 19년 히무카에서 긴키로 돌아갔다고 나온다. 이후 27년 구마소와 다시 전쟁을 벌여 야마토타케루가 파견되었고 28년 구마소 정복을 보고하였다. 게이코 천황기는 4~7세기라는 기나긴 세월에 걸쳐 진행된 야마토 정권의 정복기가 한 사람의 일대기로 소급되어 기록된 것이 특징이다. 게이코 천황기에서 야마토타케루의 활동을 빼면 대체로 마키무쿠(纒向)에 도읍한 인물 / 히무카(日向)에 도읍하여 규슈를 정복한 인물 / 간사이 동부와 주부 서부에서 활동하며 간토 확장을 시도한 인물 셋으로 나뉜다.
옛날 우리의 천신(天神) 타카미무스히노 미코토(高皇産靈尊)와 오호히루메노 미코토(大日孁尊)가 토요아시하라노 미츠호노 쿠니(豐葦原瑞穗國)를 모두 우리의 천조(天祖) 히코호노 니니기노 미코토(彦火瓊瓊杵尊)에게 주셨으므로, 호노 니니기노 미코토(火瓊瓊杵尊)가 하늘의 문을 열고 구름길을 헤치고, 행인을 물리치는 일을 맡은 신(神)을 앞서 보내고 오셨다. 이때 세상은 태고 시대로 어둡고 질서도 잡히지 않은 상태였다. 어두운 세상에서 바른 길을 가르치시고, 서쪽 변방을 다스리셨다. 우리 할아버님과 아버님은 신성하셔서 오랫동안 선정을 펴셨다.
일본서기에는 니니기가 하늘(한반도)에서 히무카(日向)로 내려온 이후 니니기-호오리-우가야후키아에즈의 대까지 호오리가 호노스소리노 미코토(火闌絳命)와 전쟁을 하여 와타츠미의 도움으로 승리한 뒤 호노스소리노 미코토의 후예가 하야토가 되었다는 것 외에 특별한 행보가 없다. 그러나 진무가 동정을 결심할 당시 한 발언을 통해 3대에 걸쳐 히무카를 근거지로 두고 규슈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한 규모 있는 호족이라 유추할 수 있는데, 게이코 12~18년 조에 나오는 히무카 군주의 규슈 정복 일대기는 히무카 3대의 일대기를 하나로 모아서 쓴 것일 수도 있다.
오진 천황의 부인 중 1명이 히무카노 이즈미노 나가히메(日向泉長媛)로 오호하에 황자(大葉枝皇子)와 워하에 황자(小葉枝皇子)를 낳았고, 오진 13년 히무카노 카미나가히메(日向髮長媛)를 히무카에서 불러 쿠와츠노 무라(桑津邑)[52]에 살게 했다가 닌토쿠 천황과 만나 혼인하게 되었다. 히무카노 카미나가히메는 인교 천황의 즉위 당시 경쟁했다가 안코 천황에게 억울하게 살해당하고 아내를 빼앗긴 오호쿠사카 황자(大草香皇子)를 낳았다고 한다.[53] 오진 11~13년 조에 나오는 히무카노 카미나가히메 일화에 따르면 히무카노 카미나가히메는 히무카에서 '데려온' 것이며, 모로가타노 키미 우시모로위(諸縣君牛諸井)도 히무카에서 이주한 사람으로 나오는데, 모로가타노 키미(諸縣君)는 『和名類聚抄』에 보이는 日向國 諸縣(미야자키현 남서부)의 수장층으로 게이코 18년 3월조에 대왕이 먹을 것을 미리 준비한 모로가타노 키미 이즈미히메(諸縣君泉媛)의 일족으로 추정된다.
규슈가 야마토 정권의 아래로 들어가기 시작하는 건 4세기이며, 진무가 긴키에서 즉위한 신유년이 4세기로 301/361년인 것, 오진 천황이 247(367)년 한반도 기사에 본명으로 등장함을 고려하면 '히무카에서 긴키로 이주한 왕'은 4세기 인물일 가능성도 있다. 당시까지도 왜 대왕위가 집단지도체제임을 고려하면 오진과 동시대 인물이라도 이상한 건 아니다. 이 경우 진무의 증조부인 니니기가 3세기 인물이 되는데, 한반도에서 바로 미야자키현까지 내려가는 것도 부자연스럽고 아마테라스와 아메노오시호미미, 신라(?)에서 이즈모시로 이주한 스사노오의 일화까지 고려해 보면 실제로는 더 이전에 일본 열도의 다른 장소로 이주했다가 모종의 사유로 미야자키현으로 다시 이주한 것일 수도 있다. 이 경우 아메노 오시호미미나 니니기가 토요에게 밀려난 남자 왕이었을 수도 있다. 오진 11~13년조의 히무카노 카미나가히메 일화에 나오는 모로가타노 키미 우시 모로위(諸縣君牛諸井)가 히무카 출신인데 야마토 조정(긴키)에서 일하다 나이가 많이 들자 은퇴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는 일설이 있는 것을 고려하면 해당 집안이 긴키로 이주한 시기는 4세기 초반으로 추정된다.
그 외에 진무는 카시하라시에서 활동한 기록이 부실한 편인데, 오진 조의 기록을 보면 카시하라시와 관련된 기록이 종종 나타나며 오진 조에 나오는 히무카 관련 인물들까지 고려하면 오진 조에 나오는 카시하라 및 히무카 관련 기록의 일부는 '히무카에서 카시하라로 이주한 왕'일 수도 있다. 이 경우 '카시하라 왕'의 활동 연대는 4세기 초반~중반이 된다.
토요에게 밀려난 남자 왕과 히무카에서 긴키로 이주한 집안이 같은 집안일 가능성도 있다. 그와 별개로 3세기에 2~3세기 야마타이국의 유물 중 일부가 긴키에도 나타나는 점과 나라현 진입 과정에서 나타나는 행보를 고려하면 야마토 정권의 성립 시기인 3세기에 규슈에서 긴키로 이주한 세력, 4세기에 규슈에서 긴키로 이주한 세력, 나라현 진입 과정에서 큰 마찰을 빚은 호족이 모두 다른 사람일 수도 있다.
기기신화에 나오는 주요 덴노들의 일대기를 보면 마냥 허무맹랑한 건 아니고 모티브가 되는 인물들은 확실히 존재하는데, 연대를 인상하는 과정에서 기록을 너무 난잡하게 해놓다 보니 실존성이 부정당한 사례로 볼 수 있다.
오진 천황의 부인 중 1명이 히무카노 이즈미노 나가히메(日向泉長媛)로 오호하에 황자(大葉枝皇子)와 워하에 황자(小葉枝皇子)를 낳았고, 오진 13년 히무카노 카미나가히메(日向髮長媛)를 히무카에서 불러 쿠와츠노 무라(桑津邑)[52]에 살게 했다가 닌토쿠 천황과 만나 혼인하게 되었다. 히무카노 카미나가히메는 인교 천황의 즉위 당시 경쟁했다가 안코 천황에게 억울하게 살해당하고 아내를 빼앗긴 오호쿠사카 황자(大草香皇子)를 낳았다고 한다.[53] 오진 11~13년 조에 나오는 히무카노 카미나가히메 일화에 따르면 히무카노 카미나가히메는 히무카에서 '데려온' 것이며, 모로가타노 키미 우시모로위(諸縣君牛諸井)도 히무카에서 이주한 사람으로 나오는데, 모로가타노 키미(諸縣君)는 『和名類聚抄』에 보이는 日向國 諸縣(미야자키현 남서부)의 수장층으로 게이코 18년 3월조에 대왕이 먹을 것을 미리 준비한 모로가타노 키미 이즈미히메(諸縣君泉媛)의 일족으로 추정된다.
규슈가 야마토 정권의 아래로 들어가기 시작하는 건 4세기이며, 진무가 긴키에서 즉위한 신유년이 4세기로 301/361년인 것, 오진 천황이 247(367)년 한반도 기사에 본명으로 등장함을 고려하면 '히무카에서 긴키로 이주한 왕'은 4세기 인물일 가능성도 있다. 당시까지도 왜 대왕위가 집단지도체제임을 고려하면 오진과 동시대 인물이라도 이상한 건 아니다. 이 경우 진무의 증조부인 니니기가 3세기 인물이 되는데, 한반도에서 바로 미야자키현까지 내려가는 것도 부자연스럽고 아마테라스와 아메노오시호미미, 신라(?)에서 이즈모시로 이주한 스사노오의 일화까지 고려해 보면 실제로는 더 이전에 일본 열도의 다른 장소로 이주했다가 모종의 사유로 미야자키현으로 다시 이주한 것일 수도 있다. 이 경우 아메노 오시호미미나 니니기가 토요에게 밀려난 남자 왕이었을 수도 있다. 오진 11~13년조의 히무카노 카미나가히메 일화에 나오는 모로가타노 키미 우시 모로위(諸縣君牛諸井)가 히무카 출신인데 야마토 조정(긴키)에서 일하다 나이가 많이 들자 은퇴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는 일설이 있는 것을 고려하면 해당 집안이 긴키로 이주한 시기는 4세기 초반으로 추정된다.
그 외에 진무는 카시하라시에서 활동한 기록이 부실한 편인데, 오진 조의 기록을 보면 카시하라시와 관련된 기록이 종종 나타나며 오진 조에 나오는 히무카 관련 인물들까지 고려하면 오진 조에 나오는 카시하라 및 히무카 관련 기록의 일부는 '히무카에서 카시하라로 이주한 왕'일 수도 있다. 이 경우 '카시하라 왕'의 활동 연대는 4세기 초반~중반이 된다.
토요에게 밀려난 남자 왕과 히무카에서 긴키로 이주한 집안이 같은 집안일 가능성도 있다. 그와 별개로 3세기에 2~3세기 야마타이국의 유물 중 일부가 긴키에도 나타나는 점과 나라현 진입 과정에서 나타나는 행보를 고려하면 야마토 정권의 성립 시기인 3세기에 규슈에서 긴키로 이주한 세력, 4세기에 규슈에서 긴키로 이주한 세력, 나라현 진입 과정에서 큰 마찰을 빚은 호족이 모두 다른 사람일 수도 있다.
기기신화에 나오는 주요 덴노들의 일대기를 보면 마냥 허무맹랑한 건 아니고 모티브가 되는 인물들은 확실히 존재하는데, 연대를 인상하는 과정에서 기록을 너무 난잡하게 해놓다 보니 실존성이 부정당한 사례로 볼 수 있다.
또한 7세기 후반에 궁중 가인 가키노모토노 히토마로(柿本人麻呂)가 지은 〈빈궁 반카〉(장례용 노래)에 따르면 아마노하라[54]에서 덴무 천황이 내려와 아스카에서 다스리고, 석실 문을 열어 하늘로 올라갔다고 기록하는데, 여기에는 진무 천황이나 스진 천황이 전혀 언급되지 않았을 뿐더러 아마테라스 신화 내용의 일부까지 있다. 이 노래는 8세기 초반에 편찬된《고사기》보다 오래되었기 때문에 이때까지만 해도 우리가 아는 일본의 기기신화가 제대로 정착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아니면 극단적으로는 아예 고사기 편찬 이전까지 우리가 아는 기기신화의 내용이 없었을 수도 있다.
이외에도 일본에 소중화사상이 대두될 때[55] 진무 천황이 사실 춘추시대 오나라의 시조인 태백의 후손, 혹은 형제라는 속설이 주목받기도 했다.[56]
이외에도 일본에 소중화사상이 대두될 때[55] 진무 천황이 사실 춘추시대 오나라의 시조인 태백의 후손, 혹은 형제라는 속설이 주목받기도 했다.[56]
1882년, 미에현에서 활동하던 민권운동가 오바 나리아키(大庭成章)[57]가 연설을 하면서 다음과 같은 논조를 주장하다가 불경죄로 재판을 받기도 했다.
진무 천황은 외국에서 힘을 키운 뒤 일본으로 건너와 일본의 겁쟁이들을 제압하고 일본 전체를 먹은 큰 도적이요, 그 후손인 금상천황(메이지)은 물론 고관대작들도 모두 큰 도적이다.
이 사례는 일본 판례 자료인 〈메이지 15년(1882) 형법 시행 직후의 불경죄사건9(明治十五年刑法施行直後の不敬罪事件九)〉 에도 나오지만, 일본 논문·서적에서는 자주 인용되지 않는다. 오바 나리아키가 불경죄로 입건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많이 알려진 사례는 아닌 듯하다.
태양의 여신 아마테라스의 5대손이라고 전한다.
- 아마테라스
- 우가야후키아에즈-다마요리히메미코토(玉依姫命)
- 이츠세노미코토(彦五瀬命): 진무 천황의 첫째 형. 나가스네히코(長髄彦)의 세력에게 화살을 맞고 중상으로 죽었다.
- 이나히노미코토(稲飯命): 진무 천황의 둘째 형
- 미케누노미코토(三毛入野命): 진무 천황의 셋째 형
- 진무 천황
- 제1비: 아히라츠히메(吾平津姬)
- 1남: 타기시미미노미코토(手硏耳命, ?~기원전 585?)
아버지 진무 천황이 붕어한 뒤, 의붓어머니 히메타타라이스즈히메노미코토를 아내로 삼고, 이복동생 3명을 죽이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그 전에 이복동생들인 카무야이미미노미코토와 스이제이 천황에게 살해됨. - 2남: 키스미미노미코토(岐須美美命)
《고사기》에서만 나옴.
- 제2비: 히메타타라이스즈히메노미코토(媛蹈鞴五十鈴媛命) 황후
- 3남: 히코야이노미코토(日子八井命)
- 4남: 카무야이미미노미코토 또는 카무누나카와미미노미코토(神八井耳命 또는 神渟名川耳尊, ?~기원전 578?)
타기시미미의 반역 사건 때 동생 스이제이 천황과 함께 타기시미미노미코토를 죽임. - 5남: 히코야이노미코토(日子八井命)
초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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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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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카누케후타마타 황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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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호도 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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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치노헤노오시하 황자 | 오이 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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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대 | 제23대 | 제22대 | │ | |||||||||||||||||||
히코우시 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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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대 | 제28대 | 제29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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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대 | 제31대 | 제33대 | 제32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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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사카노히코히토노오에 황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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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6대 | ||||||||||||||||||||||
[1] 카무야마토이와레히코토스메라메코토[2] 《일본서기》(日本書紀)[3] 카무야마토이와레히코노미코토[4] 《고사기》(古事記)[5] 와카미케누노미코토[6] 《고사기》(古事記)[7] 와카미케누노미코토[8] 《고사기》(古事記)[9] 사노노미코토[10] 하츠쿠니시라스스메라미코토[11] 이와레비코호호데미코토[12] 이와레비코노미코토[13] 이와레비코노미카도[14] 히코호호데미노미코토[15] 이상 《일본서기》(日本書紀)[16] 토요미케누노미코토[17] 카무야마토이와레비코노미코토[18] 이상 《고사기》(古事記)[19] 니아메노시타시로시메스스메라미코토[20] 일본 고대사는 도래인 말고 진무 천황과 관계가 없으면 기록이 되지 않는다.[21] 카와치 겐지 가문의 분가인 닛타 가문의 분가.[22] 사실 일본 뿐만 아니라 고대에 일어난 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반란 대부분은 주류에서 밀려난 황족이나 지방 호족이 주도하여 벌이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그러한 지방 호족도 거슬러 올라가보면 황족인 경우가 많았다. 그만큼 기반이 되는 지지층이 많기 때문에 사람을 모아 반란을 일으키기도 쉬웠던 것이다.[23] 물론 족보를 날조하기 쉬운 난세의 인물들임은 감안해야 한다. 예를 들어 오다 가문이 타이라 가문의 후손을 자칭한 것은 오다 노부나가 때부터였다.[24] 흘해 이사금 시기 왜국(야마토 정권)의 황자비가 된 아찬 급리(急利)의 딸 소생으로 추측된다.[25] 정말 여담이지만 이 중 진무의 둘째형 이나히노미코토는 신찬성씨록에 무려 신라 국왕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당연히 일본서기와 고사기에는 이런 내용이 없고, 진무동정 중 바다로 군대를 이끌고 가는데 바닷길이 험해 나아갈 수가 없자 '우리의 어머니가 바다의 신의 아들인데 왜 바다가 우리 길을 막아서냐?'며 바다로 뛰어들었다고 한다.[26] 호노니니기가 31만 8543년, 야마사치히코가 63만 7892년, 우가야후키아에즈가 83만 6042년을 다스렸다고 하므로 이들 기간을 합치면 179만 2477년이다.[27] 현재의 후쿠오카현[28] 단, 현재의 우사 지역은 오이타현에 속한다.[29] 현재의 히로시마현[30] 현재의 오카야마현 오카야마시[31] 현재의 오사카시. 오사카시 키타구(北区)에 있는 오사카 천만궁(大阪天満宮)에는 1940년에 황기 2600년을 기념하여 세운 비석이 있다. 비석의 앞면에는 '신무천황성적난파지기현창비'(神武天皇聖蹟難波之碕顯彰碑)라고 새겼다. 진무와 그의 군대가 무오년(기원전 663)에 나니와곶에 들렀음을 기념한다.[32] 현재의 오사카[33] 지금의 와카야마현 오노미나토(雄水門)[34] 오늘날 미에현 쿠마노시의 어딘가이다. 정확한 위치를 특정할 수는 없었지만 1937년 지역민들이 호보정(甫母町)의 남쪽 곶에 기념비를 세웠으나 1959년 태풍 때문에 유실되었다. 지역민들이 위치를 조금 바꾸어 2019년에 비석을 다시 세웠는데 세부 모습은 달라졌다. '쿠마노 아라사카 나루'(熊野荒坂津)라고 새긴 비석과 '신무천황최종어상륙지'(神武天皇最終御上陸地)라고 새긴 조금 작은 비석이 같이 있다.[35] 신화의 기록에 따라 촌수를 따지면, 아마테라스는 진무 천황의 5대조가 된다.[36] 기원전 585년에 사망했는데 세는 나이로 향년 127세라면 진무 천황의 생년은 기원전 711년, 향년 137세라면 생년은 기원전 721년이다.[37] 나라현 가시하라시에 있는 야트막한 산이다. 정상의 높이가 해발 220m 불과할 정도로 낮은 편이지만, 야마토 3산 중 하나로 손꼽히며 헤이안 시대에는 중요한 곳이었다.[38] 여담으로, 당시 전 천황릉 중에 가장 시간과 돈을 많이 들인 곳이 진무 천황의 능이다. 100여 기가 넘게 존재하는 천황릉 중에서도 진무 천황의 능에만 전체 자금의 17.7%를 쏟아부었다. 그만큼 진무 천황이 중요하게 인식되었다는 반증일 것이다. 같은 해 11월에는 진무 천황릉의 수리를 시작하자, 고다이고 천황의 능이 명동(鳴動)해서 담이나 석물 등이 무너져 부서졌다는 기록이 있다.[39] 이 일로 인해 도쿄 찌르기 사건의 범인 야마구치 오토야가 노리는 대상 중 하나였다고 한다.[40] 원제: 《日本 とは何か 日本の歴史00》. 강담사 발행. 우리나라에는 2003년 창작과비평사가 번역 출판했다.[41] 비슷하게 한국사에서도 수로왕(157세), 태조대왕(118세)이 엄청나게 장수했지만 장수왕(98세)과는 달리 인정받지 못하는 이유가 다른 나라의 사서들과의 교차검증이 없고 지나치게 장수한 것도 한 몫을 했다.[42] 《천황제 50문 50답》, 歴史教育者協議会(일본역사교육자협의회)/ 36p.[43] 실물 사진[44] 다만 현존하는 에도 시대 때 발견된 일본의 국보 '漢委奴國王'(한위노국왕) 금인은 조작 논란이 있다.[45] 현 나라현 카시하라시[46] 현 나라현 시키군[47] 청나라의 성조 강희제가 61년간이나 재위하는 바람에 아들 세종 옹정제는 재위기간이 13년에 불과했다. 다만 옹정제가 사인이 과로사로 추정될 정도로 워커홀릭이라 짧아진 것도 있다.[48] 간지가 신유인 해가 되면 세상에 큰 변화(혁명)가 생긴다는 도참설이다.[49] 중국에서 유래된 단어로 신유혁명과 마찬가지로 역사상 왕자의 운명이 크게 바뀌는 해로 여겨졌다.[50] 즉위년 간지를 보면 임신(312)-신사(321)-경인(330)이며, 한반도 기사의 이주갑인상과 맞아떨어진다. 320/321년생인 오진의 부왕이 진구 사망년으로 기록된 기축(329)에 사망해 경인(330)에 즉위하고 한동안 모후의 섭정을 받다가 나중에 친정한 듯하다.[51] 야먀구치현 아부군을 근거지로 둔 일족이다.[52] 현 효고현 이타미시[53] 이 때문에 그 아들인 마요와 왕(眉輪王)이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안코 천황을 죽였다가 유랴쿠 천황에게 살해당하는 최후를 맞이한다. 자신을 죽이려는 유랴쿠에게 나는 왕위(王位)에 관심 없고 그저 아버지의 복수를 했을 뿐이라고 유랴쿠에게 대꾸하거나 유랴쿠의 형(?)인 사카아히노 쿠로히코 황자(坂合黑彦皇子)가 도움을 청하자 같이 데리고 도망친 걸 고려하면 사람이 괜찮았던 듯하다.[54] 타카마노하라와 표기가 다르다.[55] 조선왕조가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로 비판을 받긴 했지만 사실 일본, 베트남 모두 조선 왕조만큼은 아니지만 중화계승사상이 존재했다.[56] 대표적인 경우가 하야시 라잔이었다.[57] '오니와 시게아키'로도 알려졌지만 성은 원래는 오-바(おおば)라고 장음으로 읽는다. 원래 성이 없는 평민 출신이었을 수도 있고, 나중에 스스로 개명했을 수도 있다. 이름의 독음은 요미가나 자료가 보이지 않아 확신할 수는 없으나 이룰 성(成)은 대개 나리, 글 장(章)은 대부분 아키라고 읽으므로 '나리아키'일 것으로 보인다. 일례로 헤이안 말기의 무장 오바 카게요시(大庭景義)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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