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손권
최근 수정 시각:
손오 초대 황제 손권 | 孫權 | |
![]() | |
출생 | |
즉위 | |
사망 | |
능묘 | 장릉(蔣陵) |
재임기간 | 후한의 장군 |
재위기간 | 후한의 남창후 |
손오의 황제 | |
![]() |
손권 |
중국 삼국시대 삼국의 하나인 손오의 개국군주이며 초대 황제. 묘호는 태조이며 시호는 대황제. 손견의 차남이자 손책의 동생으로, 자는 중모(仲謀)다.
강동 손씨 세력의 기틀을 닦은 형 손책이 급사한 이후 그 자리를 이어받아 적절한 군사 활동과 외교로 강동을 천하를 삼분하는 한 축으로 키워냈다. 외정에서는 비교적 많은 실패를 겪었지만 자신의 통치 구역을 잘 다스리고 외적을 물리치는 등의 성과를 거두어 자신의 권위와 위상을 크게 높였으며, 229년에 황제로 즉위하면서 오나라를 건국하였다.[5] 그러나 말년에는 여러 실책[6]을 보이기도 했다.
보다 광범위한 역사적인 측면에서 오나라를 건국한 손권은 강남을 본격적으로 중국 역사의 보다 중심적인 무대로 옮기기 시작한 인물로 볼 수도 있다. 그가 세운 동오의 통치를 통해서 강남 지역의 여러 이민족들이 토벌되고 중화 문화권으로 서서히 편입되었으며[7], 강남을 배경으로 하는 본격적인 국가 및 사회 체제가 등장하게 되었다. 이러한 동오의 유산은 거의 그대로 육조시대로 이어짐으로써[8][9] 남북조시대의 한 축을 담당하게 된다.
大는 시호로서는 안 쓰이는 글자고, 흔히 대황제라고 하면 시호가 아니라 단순히 황제를 더 높여 부르는 보통명사에 불과하기 때문에, 이 시호는 유교적 예법을 따졌을 때 제대로 지은 시호라고 보기 힘들다. 그래서 '대황제'라는 시호는 후대에 오나라가 기본적인 예절도 모르는 촌동네라고 비난당하는 이유 중 하나가 되었다.
실제로 삼국지의 저자 진수는 위나라를 정통으로 보아 추존군주 조조를 무제(武帝), 위나라를 건국한 창업군주이며 초대 황제 조비를 문제(文帝), 2대 황제 조예를 명제(明帝) 등으로 호칭했고, 자기가 한때 섬겼던 촉한은 유비, 유선을 각각 선주(先主), 후주(後主)로 어느 정도 권위있게 존중해서 표현했다.
반면 오나라의 경우 손권은 오주(吳主)전, 이후의 황제들은 삼사주전으로 일괄처리했고, 손견, 손책도 추숭된 시호를 부르지 않고 다 생전 관직인 '파로토역'으로 전을 처리한 걸로 봐선 아무래도 손권만 특별 대우를 받은 듯 싶다.
그러나 막상 내용으로 들어가면 촉서 선주전에서는 "선주의 성은 유, 휘는 비, 자는 현덕이다." 라고 소개하고[10] 유비를 계속 선주라고 부르는 반면, 오주전(손권전)은 그냥 다짜고짜 "손권은 자가 중모이다." 로 시작한 이후 그냥 계속 손권이라고 부르고 있다.
실제로 삼국지의 저자 진수는 위나라를 정통으로 보아 추존군주 조조를 무제(武帝), 위나라를 건국한 창업군주이며 초대 황제 조비를 문제(文帝), 2대 황제 조예를 명제(明帝) 등으로 호칭했고, 자기가 한때 섬겼던 촉한은 유비, 유선을 각각 선주(先主), 후주(後主)로 어느 정도 권위있게 존중해서 표현했다.
반면 오나라의 경우 손권은 오주(吳主)전, 이후의 황제들은 삼사주전으로 일괄처리했고, 손견, 손책도 추숭된 시호를 부르지 않고 다 생전 관직인 '파로토역'으로 전을 처리한 걸로 봐선 아무래도 손권만 특별 대우를 받은 듯 싶다.
그러나 막상 내용으로 들어가면 촉서 선주전에서는 "선주의 성은 유, 휘는 비, 자는 현덕이다." 라고 소개하고[10] 유비를 계속 선주라고 부르는 반면, 오주전(손권전)은 그냥 다짜고짜 "손권은 자가 중모이다." 로 시작한 이후 그냥 계속 손권이라고 부르고 있다.
- 손권은 죽은 뒤 장릉에 묻혔다. 이곳은 난징시의 명산인 중산(钟山)을 가리킨다. 그는 자신의 할아버지 손종(孫鐘)의 이름자를 피해 종산을 장산(蔣山)으로 바꾸고 자신의 무덤을 장릉이라 했다. 명말청초의 문인 장대(張岱)의 저서 도암몽억(陶庵夢憶)에 따르면 훗날 명 태조(明太祖) 주원장이 종산에 자신의 무덤인 효릉(孝陵)을 만들 때 담당관이 손권의 무덤을 이장하자고 건의했지만 주원장은 "손권은 영웅호한(英雄好漢)이니 그대로 두라, 그를 남겨두어 문을 지키게 하라"고 했다고 한다.# 때문에 오늘날에도 손권과 주원장의 무덤은 묘역 하나에 같이 있다. 손권의 무덤은 원래 손릉강(孫陵崗)이라 불렸는데, 이곳에 매화가 많기 때문에 1940년대에 매화산(梅花山)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 산에는 그의 부인인 보씨(步氏), 반씨(潘氏) 및 선명태자(宣明太子) 손등 등이 함께 묻혀 있다. 매화산은 자금산(紫金山)의 일부로, 자금산에는 손권, 주원장, 쑨원의 무덤이 있다. 주원장의 명효릉과 쑨원의 중산릉, 손권의 장릉은 같은 구역에 있는 셈이다.# 일단 해당인들의 무덤은 묘자리가 명당이라고 하여 풍수지리설에 따른 배치라고 한다.#


![]() |
난징시 문물 보호단위, 오 대제 손권 장릉, 난징시 인민정부 2023년 9월 14일에 공포하여 난징시 인민정부가 세움 |
- 손권의 무덤 근처에 조성되어 있는 손권의 석상과 비석. 제법 화려한 유비의 무덤을 생각하면 좀 쓸쓸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그래도 손권이 난징시의 실질적인 아버지 격이라 그런지 시 정부에서 2020년대 들어서 신경을 좀 써서 원래는 덜렁 '손권묘유지(遺址)'#라고 안내문만 적었던 이곳을 '난징시 문물 보호단위'로 새로이 지정하고 비석을 새로 세운 뒤 이곳이 '오 대제 손권의 장릉'이 있는 곳이라고 단장하긴 했다. 여담으로 2006년 조사 당시 인근 지하에서 '갑(甲)'자 형태의 인공 구조물을 확인하기는 했다고 하나 발굴하지는 않은 듯하다.# 엄밀하게 말하면 손권의 장릉은 난징 중산릉과 홍무제의 릉인 명효릉경구 안에 있는 부속묘지 취급이라 눈에 안 띄는 것에 가깝긴 하다.
- 삼국지연의에서는 정사와는 이미지가 꽤 다르다. 술을 좋아하고 무예를 즐겼던 호탕인 이미지는 거의 없으며 아버지나 형과는 큰 차이가 있는 맹장형보다는 견실한 타입의 군주로 묘사된다. 술을 좋아해 자주 문제를 일으켰던 내용도 연의에선 죄다 애꿎은 장비에게로 옮겨갔다. 그래도 합비 대전에서 장료가 도발해오자 몸소 창을 들고 싸우려는 대목이 있다. 이 점에서 손책에 못지않은 장재가 있었는지도 모르지만, 정확히는 신하들이 경솔하다며 주의하고 손권도 이를 수긍해 반성하는 대목이라 장군보다는 군주로서의 이미지가 강하다. 그러나 작중에서 툭하면 결정을 미루다가 주유나 장소 같은 책사들의 의견을 따르는 등 우유부단하게 구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 손권 나오는 장면을 보다 보면 '손권이 대답을 않고 있는데~' 라는 대목이 진짜 많이 나온다. 아예 들을 줄은 아는 원소라고 봐도 못지않다. 그러다 보니 개성이 강한 유비와 조조는 물론이고, 자기보다 출연이 적은 형 손책보다도 인기가 떨어지는 편이다. 그래도 제갈량과 장소를 비롯한 손오 신하 일당들과의 설전을 판정하며 칼로 책상을 내리치는 장면은 살려놔서, 결단력이 아예 없지는 않은 것으로 묘사한다. 그래도 전체적으로는 수혜를 받은 편이다. 젊은 나이에 수성의 달인으로 불리는 것은 우유부단하다는 소리를 들을지언정 앞의 두 영웅(유비, 조조)에 비해 '젊은 나이에 한 나라의 운명을 짊어진 책임감 있는 군주'라는 이미지를 확실하게 가져간 것이다.[12] 또한 위연의 됨됨이를 알아보는 등 통찰력도 나름대로 있고, 조조의 '세 개의 해' 꿈 이야기 등의 일화를 통해 유비와 조조에 꿀리지 않도록 비중을 확실히 줬다. 게다가 이궁지쟁이라는 손권의 대표적 흑역사 중 하나는 아예 언급도 안 됐다.
- 흔히 손권이라고 하면 삼국지에서의 이미지만 떠올리지만 중국 강남 불교사에서 나름대로 중요한 역할을 한 지도자이다. 그는 일찍이 한나라 말 중원의 난리를 피해 강동으로 이주한 서역승 지겸을 후원해 불경을 번역할 수 있도록 도왔고, 강승회의 영향을 받아 불교를 숭배하여 강남에 건초사(난징시), 보은사(쑤저우시), 용화사(상하이시), 감로사(전장시)[13] 등을 지었다. 보은사는 적오 연간에 어머니의 명복을 빌기 위해 지어졌고, 강승회의 설득을 통해 불교에 귀의한 기념으로 적오 10년(247년)에 건초사를 지었다. 용화사는 적오 5년(242년)에 부처의 사리를 모시기 위해 지어졌다. 이로 인해 중국의 강남 지역에 불교가 전파되기 시작했다. 출처
- 진나라 최표가 지은 고금주에 기록되기를 손권은 여섯 자루의 보검을 가지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하나는 백홍(白虹)이고, 둘은 자전(紫電)이며, 셋은 피사(辟邪)이며, 넷은 유성(流星), 다섯은 청명(靑冥), 여섯은 백리(百里)이다.
- 삼국의 황제들 중에서 제일 장수했다. 반대로 제일 단명한 황제는 아들인 손량이다.
- <태평어람>에 나오는 원희지(袁希之)의〈한표전(漢表傳)〉기록에 따르면 손견이 하비승일 때 손권이 태어났는데 턱은 네모나고 입이 크고 눈빛이 반짝반짝해서 손견이 기이하게 여기고 귀한 상이라 했다고 한다. 그 외에 상체는 길고 하체는 짦았다는〈헌제춘추〉의 기록과 턱은 네모나고 입은 크고 눈의 총기가 남달랐다는〈강표전〉의 기록이 남아있다. 손권의 풍모를 두고 설화나 연의에서 '벽안'을 강조하며 눈빛의 기이함을 강조한 것은 이런 손권의 눈빛이 남다르게 빛나고 총기가 있어 기이하다는 기록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건강실록>에서 인용한 강표전에 묘사된 손권의 외모는 넓은 이마를 가졌다고 쓰여 있다. 그의 아버지인 손견의 미추에 대한 자세한 묘사는 없으나, 그의 외모는 평범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로 미루어 보아 손권의 생김새는 이국적인 모습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여지가 있다. 형 손책은 특이한 외모에 대한 언급은 없고 대단한 미남이라고만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그의 어머니 쪽의 영향이 컸을지도 모른다. 그 외 후대 인물 환온의 평가 중에서는 환온의 눈은 자주빛 석릉(石棱, 자수정의 모서리) 같고, 수염은 고슴도치의 털이 빳빳하게 선 듯하며 어렸을적부터 기골이 남달라 사마의와 손권의 풍모와 비견된다는 기록이 있는데 사마의도 꽤나 풍채가 좋은 인물이었기에 손권 역시 남자답고 풍채가 좋은 인물이었다고 볼 여지가 있다. 손권이 기이한 눈빛을 가진것과 똑같이 환온의 눈빛이 기이하다는 표현도 닮은 면이 있는데 손권이나 환온이나 후대 사람의 기록에 남을 만큼 눈빛이 대단히 특이한 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 ||||||||||||||||||||||||||||||||||||||||||||||||||||||||||||||||||||||||||||||||||||||||||||||||||||||||||||||||||||||||||||||||||||
| ||||||||||||||||||||||||||||||||||||||||||||||||||||||||||||||||||||||||||||||||
[1]
토로장군 200년 ~ 209년
거기장군 209년 ~ 219년
표기장군 219년 ~ 220년[2] 키가 7척 6촌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당시 척단위인 23.7cm로 계산하면 180cm가 나온다.[3] 독자 연호를 선포하기 이전에는 후한과 위의 연호를 사용했다. 참고로 손권이 황무라는 연호를 썼을 때는 손권이 아직 황제를 칭하기 전이며 동시에 오나라를 건국하기 전이다. 본래 연호는 천자가 선포하는 것이니, 독자 연호를 선포한다는 것은 향후 적절한 시기에 위나라에 대한 신종(臣從)을 철회하고 스스로 황제가 될 것이라는 신호를 보낸 셈이다. 더불어 222년에는 조비가 태자 손등을 인질로 보내라는 요구를 해오자, 손권이 이를 거부하여 위나라와 강동의 손씨 세력이 군사적으로 대치하고 있었다. 손권이 명목상 위나라의 신하를 칭하면서도 독자적인 연호를 선포한 것은 바로 이런 상황에서 기인하는 것이다.[4] 229년에 손권이 황제로 즉위하면서 오나라를 건국한 이후에 사용한 공식적인 오나라의 첫번째 연호.[5] 새로이 세력권을 창출해내거나 영토를 크게 확장하는 것보다 물려받은 것을 잘 지켜냈다는 점에서 나라를 건국한 창업군주인 동시에 삼국시대의 대표적인 수성 군주로 알려져 있다.[6] 예를 들어 이궁지쟁이나 동연과의 외교 문제 등[7] 예를 들어 그의 재위 시절에 안휘와 호남을 비롯한 각 지방의 산월 소수 민족과 그 밖의 이민족들을 토벌하고 대만과 해남도 방면에 원정군을 보내는 등의 활동이 있었다.[8] 육조시대 자체에 동오가 포함되므로, 손권은 육조의 첫 군주라는 상징성을 갖는다.[9] 보다 정확히는 서진 말기의 대혼란으로 인해 강남으로 피난한 화북 출신의 귀족들과 강남 호족들의 결합체[10] 휘라는 말은 일단 황제급으로 인정하고 있다는 말[11] 손익의 아내다.[12] 길게 보면 위촉오 셋 중에 오나라가 가장 간을 보면서(?) 오래 살아남다가 멸망하는 후반부 전개를 염두에 뒀을 수도 있다.[13] 삼국지연의에서 손권과 유비가 칼질로 만들었다는 십자문석으로 유명한 절이다.[14] 이때 주목할만한 건 이때 올려진 진상품에 말 수백필이 들어가 있었다는 것이다. 교주가 의외로 말 산지였던 것. 비단 교주 뿐 아니라 촉이 평정한 운남 지방에서도 명마가 났다고.[15] <헌제춘추>의 기록에는 장료가 합비에서 손권을 격파 후 항복한 오나라 장수들에게 "오나라 퇴각 후미에 남아서 싸운 장수가 자줏빛 수염에 상체가 길고 하체는 짧은데, 말을 잘 타고 궁술에 능했소. 그 장수는 누구요?" 라고 묻자 그들이 "그 사람이 손회계(손권)입니다." 라고 대답해 악진과 서로 멍하니 바라보다 뒤늦게 쫓았지만 잡을 수 없었다고 나온다.[16] 주연이 모신 황제는 손권밖에 없다. 손권 시대에 활동하여 손권이 죽기 2년 전에 사망했기 때문이다.[17] 문서 맨 위의 초상화(역대제왕도권)는 실제 손권을 보고 그린 것이 아니라 당나라 시기에 손권을 추정해서 그린 것이다.
토로장군 200년 ~ 209년
거기장군 209년 ~ 219년
표기장군 219년 ~ 220년[2] 키가 7척 6촌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당시 척단위인 23.7cm로 계산하면 180cm가 나온다.[3] 독자 연호를 선포하기 이전에는 후한과 위의 연호를 사용했다. 참고로 손권이 황무라는 연호를 썼을 때는 손권이 아직 황제를 칭하기 전이며 동시에 오나라를 건국하기 전이다. 본래 연호는 천자가 선포하는 것이니, 독자 연호를 선포한다는 것은 향후 적절한 시기에 위나라에 대한 신종(臣從)을 철회하고 스스로 황제가 될 것이라는 신호를 보낸 셈이다. 더불어 222년에는 조비가 태자 손등을 인질로 보내라는 요구를 해오자, 손권이 이를 거부하여 위나라와 강동의 손씨 세력이 군사적으로 대치하고 있었다. 손권이 명목상 위나라의 신하를 칭하면서도 독자적인 연호를 선포한 것은 바로 이런 상황에서 기인하는 것이다.[4] 229년에 손권이 황제로 즉위하면서 오나라를 건국한 이후에 사용한 공식적인 오나라의 첫번째 연호.[5] 새로이 세력권을 창출해내거나 영토를 크게 확장하는 것보다 물려받은 것을 잘 지켜냈다는 점에서 나라를 건국한 창업군주인 동시에 삼국시대의 대표적인 수성 군주로 알려져 있다.[6] 예를 들어 이궁지쟁이나 동연과의 외교 문제 등[7] 예를 들어 그의 재위 시절에 안휘와 호남을 비롯한 각 지방의 산월 소수 민족과 그 밖의 이민족들을 토벌하고 대만과 해남도 방면에 원정군을 보내는 등의 활동이 있었다.[8] 육조시대 자체에 동오가 포함되므로, 손권은 육조의 첫 군주라는 상징성을 갖는다.[9] 보다 정확히는 서진 말기의 대혼란으로 인해 강남으로 피난한 화북 출신의 귀족들과 강남 호족들의 결합체[10] 휘라는 말은 일단 황제급으로 인정하고 있다는 말[11] 손익의 아내다.[12] 길게 보면 위촉오 셋 중에 오나라가 가장 간을 보면서(?) 오래 살아남다가 멸망하는 후반부 전개를 염두에 뒀을 수도 있다.[13] 삼국지연의에서 손권과 유비가 칼질로 만들었다는 십자문석으로 유명한 절이다.[14] 이때 주목할만한 건 이때 올려진 진상품에 말 수백필이 들어가 있었다는 것이다. 교주가 의외로 말 산지였던 것. 비단 교주 뿐 아니라 촉이 평정한 운남 지방에서도 명마가 났다고.[15] <헌제춘추>의 기록에는 장료가 합비에서 손권을 격파 후 항복한 오나라 장수들에게 "오나라 퇴각 후미에 남아서 싸운 장수가 자줏빛 수염에 상체가 길고 하체는 짧은데, 말을 잘 타고 궁술에 능했소. 그 장수는 누구요?" 라고 묻자 그들이 "그 사람이 손회계(손권)입니다." 라고 대답해 악진과 서로 멍하니 바라보다 뒤늦게 쫓았지만 잡을 수 없었다고 나온다.[16] 주연이 모신 황제는 손권밖에 없다. 손권 시대에 활동하여 손권이 죽기 2년 전에 사망했기 때문이다.[17] 문서 맨 위의 초상화(역대제왕도권)는 실제 손권을 보고 그린 것이 아니라 당나라 시기에 손권을 추정해서 그린 것이다.
![]()
이 저작물은 CC BY-NC-SA 2.0 KR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단, 라이선스가 명시된 일부 문서 및 삽화 제외)
기여하신 문서의 저작권은 각 기여자에게 있으며, 각 기여자는 기여하신 부분의 저작권을 갖습니다.
나무위키는 백과사전이 아니며 검증되지 않았거나, 편향적이거나, 잘못된 서술이 있을 수 있습니다.
나무위키는 위키위키입니다. 여러분이 직접 문서를 고칠 수 있으며, 다른 사람의 의견을 원할 경우 직접 토론을 발제할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