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종(고려 제3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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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제3대 국왕 정종 | 定宗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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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릉 전경 | |
출생 | |
즉위 | |
사망 | |
능묘 | 안릉(安陵) |
재위기간 | 고려 제3대 국왕 |
고려의 제3대 국왕이자 태조의 셋째 아들.
묘호는 정종(定宗), 시호는 문명대왕(文明大王), 휘는 요(堯), 자는 천의(天義). '요'(堯)는 군주의 이름이므로 고려가 멸망할 때까지 피휘에 따라 사용이 금지되었다. 이 단어 대신 《삼국유사》 <고조선> 기사[5]에서의 예와 같이 '높을 고'(高) 자를 사용했다.
초대 태조는 신라, 제2대 혜종은 태봉 출신인데 비해 정종은 고려 출신의 첫 번째 군주로 23살에 즉위해 27살에 죽은 청년 군주였으며 강력한 군사력과 지지 세력을 바탕으로 대학살을 시작한 군주다. 허나 왕족과 호족 세력들 간의 내전과 정치적 싸움이 지속되는 와중에 건강까지 악화됨에 따라 동생 광종에게 왕위를 넘겨주고 최후를 맞았다.
묘호는 정종(定宗), 시호는 문명대왕(文明大王), 휘는 요(堯), 자는 천의(天義). '요'(堯)는 군주의 이름이므로 고려가 멸망할 때까지 피휘에 따라 사용이 금지되었다. 이 단어 대신 《삼국유사》 <고조선> 기사[5]에서의 예와 같이 '높을 고'(高) 자를 사용했다.
초대 태조는 신라, 제2대 혜종은 태봉 출신인데 비해 정종은 고려 출신의 첫 번째 군주로 23살에 즉위해 27살에 죽은 청년 군주였으며 강력한 군사력과 지지 세력을 바탕으로 대학살을 시작한 군주다. 허나 왕족과 호족 세력들 간의 내전과 정치적 싸움이 지속되는 와중에 건강까지 악화됨에 따라 동생 광종에게 왕위를 넘겨주고 최후를 맞았다.
동생 왕소가 올린 공식 묘호는 '정종'(定宗)이다. 묘호를 달리 불러 '정묘'(定廟)라고도 불렸다. 묘호의 발음이 제10대 임금 정종(靖宗)과 같아 현대 한국인들은 종종 헷갈려 한다. 그런데 두 글자의 발음이 고려시대에는 달랐다. 한자는 각각 定(3대)과 靖(10대)을 쓰는데, 중고한어에서는 이 글자들의 발음이 각각 '뎡(定)'과 '졍(靖)'으로 서로 달랐을 것이라 비정하므로 고려 당대의 구어(口語)로도 두 임금은 구분이 되었을 것이다.
시호는 다수 고려 군주들이 그렇듯 두 가지가 있다.
시호는 다수 고려 군주들이 그렇듯 두 가지가 있다.
- 《고려사》 <정종 세가> -총서-:
지덕장경정숙문명대왕(至德章敬正肅文明大王)
- 《고려사》 <정종 세가> 마지막 조:
장원간경영인정숙장경문명대왕(莊元簡敬令仁正肅章敬文明大王)
대표 시호는 동생이 올린 '문명대왕'(文明大王).
대표 시호는 동생이 올린 '문명대왕'(文明大王).
태조의 3남이지만 둘째 형인 왕태가 요절했기 때문에 사실상 차남 대우를 받았다. 혜종 1년에 세워진 강원도 영월군의 '징효대사탑비'에는 '왕요군'(王堯君)으로 등장한다. 동생은 '왕소군'(王昭君)으로 등장. 청단궁주, ▨▨대왕, 필영대왕 같은 왕족과 왕규, 왕순식의 두 아들 등 수많은 인물이 나온다.
왕자 시절 별다른 작호를 받지는 않은 것으로 보이는데 훗날 즉위하는 왕소의 동복형으로 유약한 면이 있었던 이복형인 왕무와 달리 야심이 많고 강인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혜종 집권기에 눈에 띄는 행적을 보였다는 기록은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나 혜종 사후 신속한 즉위 과정을 보면 얌전히 있었을 리는 없다. 최소한 혜종의 건강이 악화되기 시작했다는 소식들 접한 후부터는 뭔가 활동을 보였을 거라 생각된다.
선대 혜종은 사실 쓸 수 있는 대비책이 별로 없었다. 박술희, 왕규와 같은 친위 세력을 빼면 지지 기반이 없었기 때문에 정종은 어머니, 장인, 누이뿐만 아니라 왕식렴 등 막강한 지지 세력을 앞세워 혜종의 세력을 위협했다. 게다가 혜종의 최측근이라고 할 수 있는 왕규는 초반에 무리하게 왕요와 왕소 형제를 제거하려 시도했으나 혜종의 반대에 부딪히고 만다.
그뿐만 아니라 그 세력 내부에서도 박술희가 왕규와 첨예하게 대립하는 등 분열을 거듭하며 위기를 키워갔다. 혜종은 그 외가인 나주 오씨 가문이 왕건의 다른 아들들의 가문에 비하면 무척 한미한 편이었기 때문에 비록 보위에 올랐다고 해도 늘 불안에 떨어야 했으며 자신을 암살하려 한 자객을 체포하고도 취조하기는커녕 책임조차 묻지 못했다. 아마도 배후 세력이 밝혀지는 것과 무관하게 지지 기반이 미약했던 혜종 입장에서는 함부로 쳐낼 수 없었을 것이다.
반면 정종은 이미 배후에 든든한 지지 기반을 갖추고 즉위했던 만큼 자신감과 야망을 감추지 않고, 의욕적으로 왕권 강화를 추진할 수 있었던 듯하다. 정종은 혜종이 즉위하던 시절에 왕규에게 역적이라고 찍히고도 무사하게 보위에 올랐을 정도로 기반과 세력이 강성했다.
정종은 당대 강력한 호족이었던 충주의 대호족 유긍달의 딸 신명왕후 유씨의 소생으로, 형 혜종과는 달리 탄탄한 권력 기반을 갖추고 있었으며, 처가 또한 후백제의 부마였던 박영규와 견훤의 딸 사이에서 태어난 문성왕후와 문공왕후의 집안이었다. 그중 문성왕후와의 사이에서 경춘원군을 두었다. 동복누이인 낙랑공주가 경순왕에게 시집을 가서 전체적인 세력 기반만 놓고 보면 형 혜종을 압도할 정도로 막강했다.
이 정도의 세력을 가진 왕요(정종)를 혜종이 통제할 수 있는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고 할 수 있다. 그나마 있다면 박술희의 충성과 자신의 종군 경력에서 오는 권위로 움켜쥐고 있는 중앙군인데, 사병과 달리 순수 무력집단에 가까웠던 중앙군으로 왕요를 통제하려 든다는 건 결국 동생에게 칼을 휘둘러야 한다는 이야기인데, 왕규의 왕요 숙청도 거절했던 혜종이 하물며 본인이 그런 방식으로 동생을 견제하는 건 성격 때문에 불가능했을 것이다. 하다못해 세력이 작기라도 하면 소수 병력으로 조용히 처리할 수나 있지 엄청난 세력의 왕요를 제압하려면 대규모 병력을 투입해야 했을 것이니, 시도했으면 이길 수야 있었겠지만 그 과정에서 오는 피해며, 동생과의 대규모 골육상쟁이라는 사태를 혜종의 심성상 도저히 감내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이복형인 혜종이 이른 나이에 붕어하고 박술희도 뭔가 거취에 문제가 생겨 중앙의 군권에 공백이 생기자 그 틈을 타 종실 세력의 거두였던 왕식렴과 서경 세력의 지지를 얻어 즉위했다. 왕실 종친인데다 혜종의 어린 시절부터 그를 지켜봤을 왕식렴이 혜종을 지지하지 않았던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는데, 일단 자신이 거주하던 서경이 개경과 너무 떨어져서 중앙정계가 작동할 땐 애초에 거기에 개입할 명분이나 이유를 찾지 못했을 것이란 것, 또한 혜종의 지지 세력이 미약한데다 그나마 있던 친위 세력마저 서로 갈등을 벌이며 혜종이 정치적으로 고립되어 있었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흥화궁군이라는 혜종의 맏아들이 있었음에도 왕요가 왕위에 오른 것은 왕요의 세력이 그만큼 막강했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겠다. 다만 정종 본인은 장조카 대신 자신이 즉위하는 정당성에 나름 자신이 있던 걸로 보이는데, 흥화궁군이 정종으로부터 숙청은 커녕 정치적 견제를 받았단 기록도 거의 눈에 안 띈다. 왕규 일파에 대한 숙청은 그렇게 잔혹하게 했던 정종이 말이다. 북쪽의 거란이 있는 불안한 정세라면 어린 흥화궁군 대신 자신이 즉위하는 것이 옳다는 모종의 합의를 중앙 제신들로부터 받아냈을 가능성도 있다.
왕요(정종)의 배후 세력을 종합하면 아래와 같다.
왕자 시절 별다른 작호를 받지는 않은 것으로 보이는데 훗날 즉위하는 왕소의 동복형으로 유약한 면이 있었던 이복형인 왕무와 달리 야심이 많고 강인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혜종 집권기에 눈에 띄는 행적을 보였다는 기록은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나 혜종 사후 신속한 즉위 과정을 보면 얌전히 있었을 리는 없다. 최소한 혜종의 건강이 악화되기 시작했다는 소식들 접한 후부터는 뭔가 활동을 보였을 거라 생각된다.
선대 혜종은 사실 쓸 수 있는 대비책이 별로 없었다. 박술희, 왕규와 같은 친위 세력을 빼면 지지 기반이 없었기 때문에 정종은 어머니, 장인, 누이뿐만 아니라 왕식렴 등 막강한 지지 세력을 앞세워 혜종의 세력을 위협했다. 게다가 혜종의 최측근이라고 할 수 있는 왕규는 초반에 무리하게 왕요와 왕소 형제를 제거하려 시도했으나 혜종의 반대에 부딪히고 만다.
그뿐만 아니라 그 세력 내부에서도 박술희가 왕규와 첨예하게 대립하는 등 분열을 거듭하며 위기를 키워갔다. 혜종은 그 외가인 나주 오씨 가문이 왕건의 다른 아들들의 가문에 비하면 무척 한미한 편이었기 때문에 비록 보위에 올랐다고 해도 늘 불안에 떨어야 했으며 자신을 암살하려 한 자객을 체포하고도 취조하기는커녕 책임조차 묻지 못했다. 아마도 배후 세력이 밝혀지는 것과 무관하게 지지 기반이 미약했던 혜종 입장에서는 함부로 쳐낼 수 없었을 것이다.
반면 정종은 이미 배후에 든든한 지지 기반을 갖추고 즉위했던 만큼 자신감과 야망을 감추지 않고, 의욕적으로 왕권 강화를 추진할 수 있었던 듯하다. 정종은 혜종이 즉위하던 시절에 왕규에게 역적이라고 찍히고도 무사하게 보위에 올랐을 정도로 기반과 세력이 강성했다.
정종은 당대 강력한 호족이었던 충주의 대호족 유긍달의 딸 신명왕후 유씨의 소생으로, 형 혜종과는 달리 탄탄한 권력 기반을 갖추고 있었으며, 처가 또한 후백제의 부마였던 박영규와 견훤의 딸 사이에서 태어난 문성왕후와 문공왕후의 집안이었다. 그중 문성왕후와의 사이에서 경춘원군을 두었다. 동복누이인 낙랑공주가 경순왕에게 시집을 가서 전체적인 세력 기반만 놓고 보면 형 혜종을 압도할 정도로 막강했다.
이 정도의 세력을 가진 왕요(정종)를 혜종이 통제할 수 있는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고 할 수 있다. 그나마 있다면 박술희의 충성과 자신의 종군 경력에서 오는 권위로 움켜쥐고 있는 중앙군인데, 사병과 달리 순수 무력집단에 가까웠던 중앙군으로 왕요를 통제하려 든다는 건 결국 동생에게 칼을 휘둘러야 한다는 이야기인데, 왕규의 왕요 숙청도 거절했던 혜종이 하물며 본인이 그런 방식으로 동생을 견제하는 건 성격 때문에 불가능했을 것이다. 하다못해 세력이 작기라도 하면 소수 병력으로 조용히 처리할 수나 있지 엄청난 세력의 왕요를 제압하려면 대규모 병력을 투입해야 했을 것이니, 시도했으면 이길 수야 있었겠지만 그 과정에서 오는 피해며, 동생과의 대규모 골육상쟁이라는 사태를 혜종의 심성상 도저히 감내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이복형인 혜종이 이른 나이에 붕어하고 박술희도 뭔가 거취에 문제가 생겨 중앙의 군권에 공백이 생기자 그 틈을 타 종실 세력의 거두였던 왕식렴과 서경 세력의 지지를 얻어 즉위했다. 왕실 종친인데다 혜종의 어린 시절부터 그를 지켜봤을 왕식렴이 혜종을 지지하지 않았던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는데, 일단 자신이 거주하던 서경이 개경과 너무 떨어져서 중앙정계가 작동할 땐 애초에 거기에 개입할 명분이나 이유를 찾지 못했을 것이란 것, 또한 혜종의 지지 세력이 미약한데다 그나마 있던 친위 세력마저 서로 갈등을 벌이며 혜종이 정치적으로 고립되어 있었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흥화궁군이라는 혜종의 맏아들이 있었음에도 왕요가 왕위에 오른 것은 왕요의 세력이 그만큼 막강했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겠다. 다만 정종 본인은 장조카 대신 자신이 즉위하는 정당성에 나름 자신이 있던 걸로 보이는데, 흥화궁군이 정종으로부터 숙청은 커녕 정치적 견제를 받았단 기록도 거의 눈에 안 띈다. 왕규 일파에 대한 숙청은 그렇게 잔혹하게 했던 정종이 말이다. 북쪽의 거란이 있는 불안한 정세라면 어린 흥화궁군 대신 자신이 즉위하는 것이 옳다는 모종의 합의를 중앙 제신들로부터 받아냈을 가능성도 있다.
왕요(정종)의 배후 세력을 종합하면 아래와 같다.
- 태조의 사실상 차남이란 혈통.
- 어머니와 충주 호족.
- 누이와 처남과 구(舊) 왕실.
- 5촌 당숙인 왕식렴과 서경 세력.
- 처가와 구(舊) 백제 세력.
정종은 즉위 후 개국공신인 박술희를 살해한 죄와 반역을 꾀한 죄 등을 물어 왕규 일파를 처단한 것을 시작으로 자신의 뜻에 걸림돌이 될 수 있고, 자신에게 위협이 될 만한 정적들을 제거해나갔다.
정적 처리 과정에서 왕규가 세력을 모아 반란을 꾀했는데 이를 진압할 때 지나칠 정도로 인명을 살상하여 개경 세력들과의 사이가 나빠졌다. 무엇보다 개경 백성들의 불만을 사서 민심마저 악화되고 말았다. 이 사건으로 연루되어 목숨을 잃은 자만 무려 300명이었다고.
재위 1년 차인 946년, 사찰에 곡식을 시주하고 친히 개국사(開國寺)에 행차하여 불사리를 봉안하였다. 불사리 봉안은 아마 인명 살상에 대한 개인적인 죄책감을 씻기 위한 행위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곳은 부왕 태조 왕건이 직접 세운 사찰 중 하나로 교종 계열이었다. 태조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으며, 위치는 황성(皇城) 근처에 있었다.
정적 처리 과정에서 왕규가 세력을 모아 반란을 꾀했는데 이를 진압할 때 지나칠 정도로 인명을 살상하여 개경 세력들과의 사이가 나빠졌다. 무엇보다 개경 백성들의 불만을 사서 민심마저 악화되고 말았다. 이 사건으로 연루되어 목숨을 잃은 자만 무려 300명이었다고.
재위 1년 차인 946년, 사찰에 곡식을 시주하고 친히 개국사(開國寺)에 행차하여 불사리를 봉안하였다. 불사리 봉안은 아마 인명 살상에 대한 개인적인 죄책감을 씻기 위한 행위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곳은 부왕 태조 왕건이 직접 세운 사찰 중 하나로 교종 계열이었다. 태조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으며, 위치는 황성(皇城) 근처에 있었다.
947년(재위 2년) 서경에 왕성(王城)을 쌓기 시작했다.
앞선 정적 숙청 과정에서 이미 민심이 악화되었기에 정종은 개경에서 더 이상 자신의 뜻을 펼치기가 힘들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아예 개경을 떠나려는 목적에서 서경(西京)으로 천도를 계획한다. 당시 평양은 고려의 제2수도로 행정 단위는 평양대도호부 → 서경 → 평양부 순으로 바뀌었다. 천도를 계획한 시점에는 개경의 지기가 나빠져 나라의 도읍으로 삼기 힘들다는 점과 서경으로 천도하는 것이 고구려의 옛 영토 회복에 유리하다는 점을 구실로 삼았다.
또한 서경이 풍수지리상 길지로 꼽힌다는 점도 서경 천도 계획의 이유 중 하나가 되었는데 이는 왕건도《훈요십조》에서
앞선 정적 숙청 과정에서 이미 민심이 악화되었기에 정종은 개경에서 더 이상 자신의 뜻을 펼치기가 힘들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아예 개경을 떠나려는 목적에서 서경(西京)으로 천도를 계획한다. 당시 평양은 고려의 제2수도로 행정 단위는 평양대도호부 → 서경 → 평양부 순으로 바뀌었다. 천도를 계획한 시점에는 개경의 지기가 나빠져 나라의 도읍으로 삼기 힘들다는 점과 서경으로 천도하는 것이 고구려의 옛 영토 회복에 유리하다는 점을 구실로 삼았다.
또한 서경이 풍수지리상 길지로 꼽힌다는 점도 서경 천도 계획의 이유 중 하나가 되었는데 이는 왕건도《훈요십조》에서
"서경은 우리나라 지맥의 근본이 되고 대업을 만 대에 전할 땅이니..."
라고 이야기할 만큼 서경이 풍수적으로 매우 좋은 땅이라는 것으로 이러한 이점을 근거 삼아 서경 천도를 주장했던 것이다.
그러나 서경에 새 궁궐을 짓는 공사 과정에서 장정들을 계속 뽑아 부역에 쓰게 되었고, 이 탓에 서경 백성들조차 중앙 조정에 반감을 품기 시작했다. 심지어 개경의 백성을 서경으로 강제 이주시켜 서경 시내를 채우니 개경 백성들은 더욱 반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서경 천도 계획은 민심을 얻기는커녕 그에 대한 반대 세력과 불만을 가중시키는 결과만 낳고 말았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종 붕어 직전까지 서경 천도가 진행되었던 것을 보면 당시 호족들과 신하들조차 정종의 의지를 꺾을만한 힘은 가지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서경에 새 궁궐을 짓는 공사 과정에서 장정들을 계속 뽑아 부역에 쓰게 되었고, 이 탓에 서경 백성들조차 중앙 조정에 반감을 품기 시작했다. 심지어 개경의 백성을 서경으로 강제 이주시켜 서경 시내를 채우니 개경 백성들은 더욱 반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서경 천도 계획은 민심을 얻기는커녕 그에 대한 반대 세력과 불만을 가중시키는 결과만 낳고 말았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종 붕어 직전까지 서경 천도가 진행되었던 것을 보면 당시 호족들과 신하들조차 정종의 의지를 꺾을만한 힘은 가지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최언위의 아들 최광윤은 유학을 갔다가 거란에게 잡히게 되었다. 그러나 최광윤의 재능을 높게 산 거란은 그에게 벼슬을 주어 생활하게 했는데, 최광윤은 거란에서 일하던 중 거란이 고려를 침공하려는 것을 알아차리고 몰래 편지를 보내와 조정에 알렸다. 이에 정종은 재위 2년(947년)에 '광군사(光軍司)'를 설치하고 300,000명의 광군을 편성하여 병력을 모았다. 광군사는 명칭이 '광군도감(光軍都監)'으로 바뀌었다가 다시 '광군사'로 돌아온다.
광군은 전쟁 수행만을 담당하는 국가의 상비군이 아닌 농민들로 이루어진 예비군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더불어 호족들이 통솔하는 지방군의 역할을 수행했으며, 어쩌면 그저 단순한 육체노동을 제공하는 노동 부대였다는 주장도 있다. 다시 말해 광군의 질은 병농을 함께하는 부병의 수준도 못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고려의 지방 호족들은 그들 스스로가 강력한 전투 집단이었던 사실도 감안해야 한다.
당시 고려의 군대는 고려 조정의 명령에 따르는 정규군과 지방 호족들이 통제하는 사병으로 나뉘어 있었다. 정종은 광군 편성을 통해 호족들의 사병을 중앙 정부의 통제 하에 두고자 했다. 광군의 편성은 산만한 군대의 지휘권을 통합해 왕권을 강화시키려는 목적도 있었으며, 이는 후대의 성종(제6대)이 경군(京軍)[6]과 외군(外軍)[7]을 정해 군권을 통합하고 현종(제8대)이 광군을 주진군과 주현군으로 개편시키는 것으로 드러난다. 주현군은 노역만을 담당하는 1품군, 2품군, 3품군으로 편성되었다. 특히 2만 남짓한 1품군을 제외한 2품군과 3품군은 조정의 통계에서도 빠져 성종부터 현종 시기에 이르기까지 광군의 인적자원에 대한 중앙의 통제력 강화 시도는 미완에 그쳤음을 짐작게 한다.
잔존한 광군은 점차 축소된 채로 남아 '기광군(奇光軍)'이라는 명칭으로 바뀌어 현종, 문종의 즉위 시절까지 '사면 기광군(四面 奇光軍)'과 '유음 기광군(有蔭 奇光軍)'으로 나뉘어 동•서•남•북 사면에 배치되었는데, 이는 광군이 호족들의 사병 출신이었기 때문에 많은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이다. 특히 '유음 기광군(有蔭 奇光軍)'은 기광군 중에서 특별 대우를 받아 음전(蔭田)을 조금씩 가졌다는 뜻으로 '유음(음전이 있는) 기광군'이라고 불렸던 것이다.
광군은 전쟁 수행만을 담당하는 국가의 상비군이 아닌 농민들로 이루어진 예비군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더불어 호족들이 통솔하는 지방군의 역할을 수행했으며, 어쩌면 그저 단순한 육체노동을 제공하는 노동 부대였다는 주장도 있다. 다시 말해 광군의 질은 병농을 함께하는 부병의 수준도 못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고려의 지방 호족들은 그들 스스로가 강력한 전투 집단이었던 사실도 감안해야 한다.
당시 고려의 군대는 고려 조정의 명령에 따르는 정규군과 지방 호족들이 통제하는 사병으로 나뉘어 있었다. 정종은 광군 편성을 통해 호족들의 사병을 중앙 정부의 통제 하에 두고자 했다. 광군의 편성은 산만한 군대의 지휘권을 통합해 왕권을 강화시키려는 목적도 있었으며, 이는 후대의 성종(제6대)이 경군(京軍)[6]과 외군(外軍)[7]을 정해 군권을 통합하고 현종(제8대)이 광군을 주진군과 주현군으로 개편시키는 것으로 드러난다. 주현군은 노역만을 담당하는 1품군, 2품군, 3품군으로 편성되었다. 특히 2만 남짓한 1품군을 제외한 2품군과 3품군은 조정의 통계에서도 빠져 성종부터 현종 시기에 이르기까지 광군의 인적자원에 대한 중앙의 통제력 강화 시도는 미완에 그쳤음을 짐작게 한다.
잔존한 광군은 점차 축소된 채로 남아 '기광군(奇光軍)'이라는 명칭으로 바뀌어 현종, 문종의 즉위 시절까지 '사면 기광군(四面 奇光軍)'과 '유음 기광군(有蔭 奇光軍)'으로 나뉘어 동•서•남•북 사면에 배치되었는데, 이는 광군이 호족들의 사병 출신이었기 때문에 많은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이다. 특히 '유음 기광군(有蔭 奇光軍)'은 기광군 중에서 특별 대우를 받아 음전(蔭田)을 조금씩 가졌다는 뜻으로 '유음(음전이 있는) 기광군'이라고 불렸던 것이다.
이런저런 개혁들이 연이어서 실패하자 심신이 약해진 정종은 즉위 과정에서 인명을 지나치게 살상한 것에 대해 죄의식을 느끼기 시작했다.
재위 3년차인 948년 9월에 동여진 대광(東女眞 大匡)이 와서 특산물과 말 700여 마리를 바쳤다. 대광은 고려의 고위 향직 품계이다. 고려 국민이 아닌 동여진 사람이 대광 품계를 받은 이유는 그가 고려의 제후로 취급되어 고려의 관작을 받았기 때문. 대광급 품계를 받은 걸 보면 이 여진인은 나름 높은 영향력을 가졌던 유력 인사로 보인다. 정종은 당시 본궐의 정전(正殿)인 천덕전(天德殿)에서 그를 맞이하여 은, 면포, 비단 등을 내려주었다.
이렇게 조공품과 하사품을 교환하던 중 갑작스레 천둥번개가 치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여러 신하와 물품들이 번개에 맞고 천덕전의 서쪽 부분 또한 번개에 맞으니 정종은 이에 크게 놀랐고, 당장 편전인 중광전(重光殿)[8]으로 옮겨갔다. 하지만 이 사건으로 인해 정종은 그만 큰 충격을 받아 병에 걸리고 말았다. 그 와중에 자신의 후원자였던 왕식렴이 사망하자 마음의 병이 더욱 악화되었고, 결국 재위 4년 만인 949년 3월 13일에 27세의 젊은 나이로 붕어하는 비운을 맞았다. 드라마 제국의 아침에서는 간에 생긴 육종이 원인으로 사망한다.[9]
정종은 죽기 전, 자신의 동생 왕소를 불러 선양한 뒤 내제석원에 머물다가 사망했다. 그 최후마저도 비참하기 그지없어 정종이 떠난 후, 서경 천도 계획이 취소되자 부역에 시달리던 백성들이 기뻐하며 환호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어떤 만화책에서는 부역에 시달리다가 죽은 백성들이 긴생머리를 풀어헤친 채 귀신샷으로 정종의 꿈에 나타나 저주를 퍼부으며 죽이는 내용이 담겨 있다.
재위 3년차인 948년 9월에 동여진 대광(東女眞 大匡)이 와서 특산물과 말 700여 마리를 바쳤다. 대광은 고려의 고위 향직 품계이다. 고려 국민이 아닌 동여진 사람이 대광 품계를 받은 이유는 그가 고려의 제후로 취급되어 고려의 관작을 받았기 때문. 대광급 품계를 받은 걸 보면 이 여진인은 나름 높은 영향력을 가졌던 유력 인사로 보인다. 정종은 당시 본궐의 정전(正殿)인 천덕전(天德殿)에서 그를 맞이하여 은, 면포, 비단 등을 내려주었다.
이렇게 조공품과 하사품을 교환하던 중 갑작스레 천둥번개가 치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여러 신하와 물품들이 번개에 맞고 천덕전의 서쪽 부분 또한 번개에 맞으니 정종은 이에 크게 놀랐고, 당장 편전인 중광전(重光殿)[8]으로 옮겨갔다. 하지만 이 사건으로 인해 정종은 그만 큰 충격을 받아 병에 걸리고 말았다. 그 와중에 자신의 후원자였던 왕식렴이 사망하자 마음의 병이 더욱 악화되었고, 결국 재위 4년 만인 949년 3월 13일에 27세의 젊은 나이로 붕어하는 비운을 맞았다. 드라마 제국의 아침에서는 간에 생긴 육종이 원인으로 사망한다.[9]
정종은 죽기 전, 자신의 동생 왕소를 불러 선양한 뒤 내제석원에 머물다가 사망했다. 그 최후마저도 비참하기 그지없어 정종이 떠난 후, 서경 천도 계획이 취소되자 부역에 시달리던 백성들이 기뻐하며 환호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어떤 만화책에서는 부역에 시달리다가 죽은 백성들이 긴생머리를 풀어헤친 채 귀신샷으로 정종의 꿈에 나타나 저주를 퍼부으며 죽이는 내용이 담겨 있다.
혜종이 사망한 뒤 그의 세력이었던 박술희와 왕규까지 연달아 제압하고 임금이 되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혜종과 똑같이 동생 때문에 환장하다가 허망하게 요절하는 비운을 맞고야 말았다.
왕위에 오르자마자 동생인 왕소가 적잖이 자신의 권력에 위협이 되었다. 그를 제압하자니 기반이 만만치 않아 그조차 쉽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왕규까지 반란을 일으키고 앉았으니. 결국 정종이 여러 반란을 때려잡고 왕권에 위협이 될 만한 요소를 박살내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허망하게 요절하면서 결국 광종이 즉위하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광종에게 비판적이었던 최승로는 비슷하게 피의 숙청을 한 정종에게는 우호적이었다. 아래는 정종에 대한 최승로의 평가다.
왕위에 오르자마자 동생인 왕소가 적잖이 자신의 권력에 위협이 되었다. 그를 제압하자니 기반이 만만치 않아 그조차 쉽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왕규까지 반란을 일으키고 앉았으니. 결국 정종이 여러 반란을 때려잡고 왕권에 위협이 될 만한 요소를 박살내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허망하게 요절하면서 결국 광종이 즉위하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광종에게 비판적이었던 최승로는 비슷하게 피의 숙청을 한 정종에게는 우호적이었다. 아래는 정종에 대한 최승로의 평가다.
정종께서는 왕자였을 때부터 훌륭한 명성이 있었습니다. 혜종께서 병석에 누워 오래 동안 회복되지 않자 재신 왕규 등이 몰래 모의하여 왕실을 넘보았습니다. 정종께서 이를 먼저 알아차리시고 은밀히 서도(西都)의 충성스럽고 절의가 있는 장군(왕식렴)과 함께 계책을 정하여 대비하셨습니다. 내란이 일어나려 하자 호위하는 군사가 많이 도착했으므로 간악한 계략은 실패로 돌아가고 흉악한 무리들은 죽음을 맞았습니다. 이는 비록 천명에 따랐다고는 하나 사람의 계책도 있었으니 어찌 뛰어나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태조로부터 지금까지 38년 간 왕위가 끊어지지 않았던 것은 역시 정종의 힘이었습니다.
정종께서는 임금의 형제로 왕위를 이어받아 밤낮으로 노력하여 나라 다스리는 도리를 구하셨습니다. 때로는 촛불을 밝혀들고 조정의 선비를 접견하셨고, 또 어떤 때는 정사에 바빠서 늦게 식사하면서 모든 정사를 듣고 결정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즉위한 초기에 사람들이 모두 서로 기뻐하였습니다. 그런데 도참을 그릇되게 믿게 되자 도읍을 옮기로 결정하셨습니다. 게다가 천성이 굳세시어 고집을 굽히지 않으셨고, 급박하게 백성들을 징발하여 역사(役事)를 일으키고 사람들을 수고롭게 하니, 비록 임금의 생각이 옳다고 해도 사람들의 마음은 이를 따르지 않았습니다. 원망과 비방이 이로 인해 일어났고 재난이 그림자와 메아리처럼 재빨리 응하여 서경으로 도읍을 옮기지도 못하고 임금의 자리를 영원히 떠나게 되었으니 참으로 통탄할 만합니다.
최승로는 고려 왕씨가 계보를 이어나갈 수 있었던 힘은 광종이 아니라 정종의 공이라고 평하고 있다. 비록 무리한 서경 천도를 벌여 민심의 이반을 불러왔고 끝내 요절하기는 했지만 보통 인물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동국통감》의 평은 혜종과 함께 서업을 지킨 왕으로 평가받았다.
혜종(惠宗)·정종(定宗)은 서로 이어가며 서업(緖業)을 지켰고,
보통 드라마에서 광종을 주인공으로 삼는 경우가 많아 찌질한 성격의 폭군 혹은 악역을 맡는다. 이후에는 왕규의 난이 새롭게 해석되면서 더욱 악역 같아졌다. 그런데 후에 최승로의 평가처럼 반대파를 숙청해 고려를 일시적으로나마 안정화시켰고, 밤잠을 거르며 인재들을 만나 나랏일에 열중이었다는 평과 비록 흐지부지됐지만 거란 침공 대비를 위한 30만 광군 편성 등 여러모로 능력만큼은 준수했던 군주였다. 실권을 왕식렴이 가지고 있었던 탓에 그의 힘에 밀렸다고 하는 견해도 있는데 실상 그랬다는 기록은 별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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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제국의 아침》에서의 정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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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빛나거나 미치거나》에서의 정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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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달의 연인 - 보보경심 려》에서의 정종 |
자세한 내용은 왕요(달의 연인 - 보보경심 려)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是歲天鼓鳴赦.
이 해(946년) 천고(天鼓)가 울리므로 사면령을 내렸다.
- 정종의 요절과 관련해서 후에 광종이 되는 친동생 왕소와의 대립 끝에 시해되었다는 견해가 있다. 외가는 같았을지언정 정종의 후견인이 왕식렴 등 서경 세력이었던 반면, 광종의 뒷배경은 처가인 황주 황보씨였고, 이들이 연계되어 서로 갈등을 빚었다고 보는 설이다. 광종의 아내 대목왕후 황보씨는 태조와 신정왕후 황보씨 사이의 딸로 외가의 성을 따랐다.
실제로 후에 광종은 태조의 4비 신정왕후 황보씨 소생 아우인 왕욱의 아들이자 자신의 조카인 성종에게 자신의 맏딸 문덕왕후 유씨를 재가시켜 사위로 삼기도 했다. 문덕왕후 유씨는 이미 왕족 인물이었던 홍덕원군 왕규에게 시집을 가 딸 1명을 낳는다. 문덕왕후 유씨가 낳은 딸은 목종의 왕비 선정왕후이다 그리고 이후 성종과 재혼한다. 아들 경춘원군(慶春院君)이 있었지만 너무 어려서《훈요 10조》3번 조항에 따라 동생 왕소가 대를 이었다. 경춘원군은 이후 전대 혜종의 아들 흥화군(興化君)과 함께 광종에 의해 숙청되어 비극적인 최후를 맞는다. - 알려진 사서의 기록과는 달리 박술희를 암살한 것도 정종이며, 반란의 주동자로 알려졌던 왕규를 처형한 뒤 그에게 모든 죄를 덮어 씌웠다는 가설이 존재한다. 비록 왕규가 혜종 대에 반역을 꾀하고, 박술희를 모함하여 유배보낸 후 왕명을 사칭하여 유배지에 머물던 그를 살해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으나 이를 곧이 곧대로 믿기는 힘들다. 왕규와 박술희 모두 태조의 유지를 받들어 혜종을 모시던 고명대신들이었기 때문이다. 왕규와 박술희는 특별한 문제가 있지 않는 이상 불화를 일으킬 사이도 아니었다. 그러나 《고려사》 <박술희 열전>에는 혜종이 병에 들자 100여 명의 호위를 이끌고 왕규와 대립했다고 적혀있으며, 왕규는 왕소와 왕요를 제거하고자 했는데 박술희는 이에 대해 반대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두 사람은 정치적으로 서로 부족한 부분들을 보완해주는 정치적 동반자에 가까운 관계였으며, 단지 그 방식에 양자간 차이가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박술희는 몰라도 왕규는 조금 애매한데 왕규는 혜종에게 "왕요와 왕소를 죽이자"고 간했으나 혜종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왕소에게 딸을 시집 보내는 등 왕규의 뜻과는 다른 태도를 취했다. 다만 이에 대해서는 자신의 딸을 왕소에게 출가시켜 그와 동복형인 왕요를 서로 분열시키려 한 것이 아니냐는 견해도 있다. 혜종의 뒷배경이 미약했고, 심지어 당대에도 혜종을 노리는 여러 번의 암살 시도가 있었다는 것을 감안해보면 생존을 위해 왕소와 왕요 형제 사이를 갈라놓으려 한 것으로 풀이해볼 수 있는 셈.
- 그가 묻힌 안릉에서 두개골 조각이 출토되었는데, 정종의 것으로 추정된다. 이 두개골이 정종의 것이 맞다면 정종은 역대 고려 왕들 중에서도 유골을 남긴 몇 안되는 왕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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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1.1 1.2 율리우스력 10월 23일[B] 2.1 2.2 율리우스력 4월 13일[5] 요임금과 같다(與堯同時/여요동시)라 할 것을 與‘高’同時(여‘고’동시)로 썼다.[6] 임금이 직접 통솔하는 2군 6위.[7] 임금이 임명한 무관이 통솔하는 주현군(住縣軍)과 주진군(住鎭軍)[8] 중광전, 후 강안전(康安殿)으로 바뀌는 이 전각은 고려본궐에서 가장 중용된 편전이었다. 형 혜종이 죽은 곳이기도 하다.[9] 다만 위의 천둥번개 에피소드는 그대로 차용되었는데, 여기서는 정종이 직접 번개에 맞는다.[출처] 고려사 최승로 열전[11] 태조 왕건의 제11비[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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