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시 인도유럽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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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역사
 
 
 
 
1. 개요2. 역사
2.1. 기원
2.1.1. 쿠르간(초원) 가설2.1.2. 아르메니아 가설2.1.3. 히타이트 가설
2.2. 분화 과정
3. 문화4. 특징
 
 
 
 

1. 개요[편집]

 
 
 
 
原始印歐人 / Proto-Indo-Europeans

원시 인도유럽인 또는 인도유럽조인은 오늘날의 캅카스 산맥을 중심으로 거주하며, 인도유럽조어를 사용하던 최초의 인도유럽민족으로, 오늘날 모든 인도유럽제족의 조상이다. 발상지인 캅카스와 관련된 이름이 아니라 이런 이름이 된 이유는 크게 서쪽으로는 유럽과 동쪽으로는 인도 아대륙으로 나뉘어져서 그런 것인데, 그중 아시아쪽으로 정착한 이들은 동쪽으로 멀게는 중국 서부에 닿는 중앙아시아까지 퍼졌기 때문이다.

원시 인도유럽인은 유목민인 관계로 그 특성상 현대인만큼 유전적으로 혼합되었을 수 있었기 때문에, 공통된 언어를 사용하는 민족언어 집단일 뿐 그 어떤 인종적 의미나 구분으로 보기는 어렵다.[1]

인류 역사상 최초로 등장한 유목민으로 추정되며, 이들이 유라시아 대륙 곳곳으로 퍼지면서 마차를 유라시아의 여러 민족들에게 소개한 것으로 보인다.
 
 
 
 
상세 내용 아이콘   자세한 내용은 인도유럽어족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원시 인도유럽인의 존재에 대한 추정은 인도유럽어족의 조어인 인도유럽조어를 재구해내는 과정에서 비롯되었므로 인도유럽어족의 원향이 어디냐에 따라 이들의 발원지가 어디인지도 자연스레 밝혀진다.
 
 
 
 

2.1.1. 쿠르간(초원) 가설[편집]

 
 
 
 
원시 인도유럽인이 흑해 북부에서 카스피해 북부에 이르는 폰토스-카스피 대초원(Pontic-Caspian steppe)에서 기원했다는 가설로, 현대 학계에서 받아들여지는 가장 유력한 가설이다.

1869년 독일 언어학자 테오도르 벤페이(Theodor Benfey, 1809~1881)를 시작으로, 1883년 독일 문헌학자 오토 슈레이더(Otto Schrader, 1855~1919)가 동유럽 초원 기원설을 주장하였으나, 당시에는 다양한 지역의 기원설이 난립했고, 정확한 원향을 특정할 방법이 없었기에 그저 후보 중 하나에만 머물렀다.

20세기 들어 고고학이 발달하며 동유럽 초원의 발굴 조사가 진행되어 초원 기원설을 지지하는 고고학자들도 생겨났는데, 호주 고고학자 V. 고든 차일드(V. Gordon Childe, 1892~1957)와 독일 고고학자 에른스트 발레(Ernst Wahle, 1889~1981)가 대표적인 지지자였다.

에른스트 발레의 제자 중에서는 리투아니아의 고고학자인 요나스 푸지나스(Jonas Puzinas, 1905 ~1978)가 있었는데, 푸지나스가 리투아니아 비타우타스 마그누스 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던 중 가르친 제자가 바로 마리야 김부타스였다.

리투아니아에서 출생해 미국으로 이민한 고고학자이자 교수였던 마리야 김부타스는 초원 가설이 주류 이론으로 부상하는데 기여한 선구적 인물로, 동유럽 스텝 지대에 무수히 존재하는 분묘들을 발굴하여 연구한 결과 및 언어학적 연구 자료들을 토대로 1956년, 쿠르간 문화와 고유럽(Old Europe)이라는 개념을 제기했다.

김부타스 교수는 폰토스 카스피 대초원에서 특유의 분구묘를 제작하던 목축민(쿠르간 문화)들이 서유럽으로 진출하며 기존에 거주하던 토착민들을 대체하여 고유럽 시대를 끝내고, 자신들의 언어와 문화를 전파시켰다는 '쿠르간 가설'을 발표했다. 김부타스 교수는 해당 가설에서 쿠르간 문화를 4개의 연속적인 시기로 나누었다.
  • 쿠르간 I: 기원전 4000년대 전반, 드네프르강~볼가강 지역. (사마라 문화, 세로글라조보 문화 등.)
  • 쿠르간 II~III: 기원전 4000년대 후반, 드네프르강~캅카스산맥. 신을 형상화한 석비와 거석. (스레드니 스토그, 마이코프 문화)

또한 쿠르간 문화의 스텝 밖 확산을 3번의 물결로 정리했다.
Distribution of ...
  • 제1물결: 기원전 4400~4300년경 볼가강 하류와 우랄산맥 하류 지역에서 기원한 쿠르간인들이 흑해 서쪽으로 침투하여 바르나(Varna), 카라노보(Karanovo), 빈차(Vinča) 등의 문화에 괴멸적인 타격을 입혔으며, 체르나보다 I(Cernavoda I) 문화를 형성했다.
Distribution of ...
  • 제2물결: 기원전 3500년 이후 흑해 북부 및 북캅카스 지역에서 기원한 쿠르간인들이 쿠쿠테니(Cucuteni) 문화를 변형시켰고, 바덴(Baden) 문화와 코토페니(Coțofeni) 문화권에 영향을 주어 중부 유럽과 발칸반도 일부를 '쿠르간화(Kurganization)'시켰다.
Distribution of ...
  • 제3물결: 기원전 3000~2800년경, 볼가강 초원 지역의 쿠르간인들인 얌나야인(Yamnaya)들이 서쪽으로 대규모 침투하여 헝가리 동부와 발칸반도 전역으로 확산되었으며, 중부 유럽의 끈무늬토기 문화(Corded Ware culture)와 종형 비커 문화(Bell Beaker cultrue)의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김부타스 교수의 이러한 가설은 발표 초기에도 큰 반향을 얻었지만 1990년대 이후 고고유전학이 발달하면서 동유럽 초원에서 서쪽으로의 대규모 이동과 인구·문화적 대체가 실제로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져 더욱 재평가를 받게 된다. 다만 하플로그룹 등의 인류 이동 경로를 짐작할 수 있게 하는 게놈 연구나 여러 추가적인 발굴 조사들이 이루어지기 한참 전의 가설이라 현재의 연구와는 상충되는 부분이 있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의 '분화 과정' 문단에서 다룬다.
 
 
 
 

2.1.2. 아르메니아 가설[편집]

 
 
 
 
아르메니아 가설이란 아르메니아어가 현대 시기는 물론, 고대 시기에도 문법적 성의 개념이 없었다는 데서 기원한 가설로, 1980년대 초반 조지아의 언어학자 타마즈 가므크렐리제(Tamaz V. Gamkrelidze, 1929~2021)와 러시아(당시 소련) 문헌학자 뱌체슬라브 이바노프(Vyacheslav Ivanov, 1929~2017)가 제기했다.

이 가설은 인도유럽어족의 원향을 캅카스산맥 남쪽과 동부 아나톨리아, 상부 메소포타미아를 포괄해서 비정하는 견해다. 이 가설은 기원전 5~3천년경 이 지역에서 원시 인도유럽어가 형성되었고, 이후 확산하면서 여러 분파로 갈라졌다고 본다.

이 가설에 따른 구체적인 인도유럽어족의 분화 과정은 다음과 같다. 기원전 4천 년 무렵 캅카스 지역을 출발지로 인도유럽조어에서 맨 처음 아나톨리아어파[2]가 갈라져 나왔고 서쪽으로 이동해 대략 기원전 3천 년 무렵에 아나톨리아 반도에 정착했다. 이후 헬라-아르메니아-인도이란 조어가 분리되었다가 기원전 3천 년쯤에 각각 헬라어파, 아르메니아어파, 인도이란어파로 분리된 뒤 헬라어파 사용자들은 서쪽으로 이동해 아나톨리아와 남유럽 방면으로 진출하였고 인도이란어파, 켈트-이탈리아-토하라 조어, 발트-슬라브-게르만 조어 사용자들은 카스피해 동안을 따라 캅카스산맥을 넘어 북상했다.

기원전 2천 년 무렵에는 켈트-이탈리아-토하라 조어에서 토하라어파가 분리된 뒤 흑해 북안을 거쳐 중앙아시아 방면으로 이동했다. 기원전 2천 년에서 기원전 1천 년 사이 켈트-이탈리아 조어 및 발트-슬라브-게르만 조어 사용자들은 카스피해 북쪽의 동유럽 초원지대를 거쳐 서쪽으로 이동하여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간다. 원시 인도이란어파 사용자들의 유전자에서 유럽 토착 농경민의 혈통이 일부 섞인 걸로 나타났다. 일단 상기 집단들과 함께 초원지대를 거쳐 서쪽으로 이주했다가 다시 동쪽으로 이동해 흑해 북안을 거쳐 중앙아시아, 서아시아, 남아시아 방면으로 이동했던 듯하다.[3]

아르메니아(남캅카스)가설은 원시 인도유럽인의 초기 무대를 캅카스 남쪽·동아나톨리아로 상정하는 소수설로, 캅카스/이란계 신석기 집단과의 장기적 접촉을 강조한다. 반면 주류 학계의 합의는 쿠르간(초원) 가설에 더 무게가 실려 있으며, 폰틱–카스피 초원의 얌나야·코디어웨어 연속, 말·수레 기술을 동반한 이동목축의 확산, 그리고 고대 DNA에서 확인되는 초원계 조상 성분의 대규모 파급이 인도유럽어의 광역 확산을 보다 설득력 있게 설명하는 근거로 제시된다. 이 때문에 보완적 시사점은 있으나 현재로선 주변적 해석으로 평가된다.
 
 
 
 

2.1.3. 히타이트 가설[편집]

 
 
 
 
아나톨리아 가설이라고도 불리며 1987년 영국의 고고학자 콜린 렌프류(Colin Renfrew, 1937~2024)가 제기한 가설이다.

아나톨리아반도에서 발원한 문명인 히타이트의 언어인 히타이트어가 재구된 인도유럽조어와 유사한 부분이 많다는 점에서 기원한 가설이다. 위의 두 가설과의 차이가 있다면 쿠르간 가설과 아르메니아 가설에서는 원시 인도유럽인을 유목민으로 비정하고 있지만 이 가설에서는 원시 인도유럽인을 아나톨리아 반도에서 농경 생활을 하던 정주민으로 본다는 것과 원시 인도유럽인이 발생한 시기를 기원전 9500년 무렵에서 기원전 8천 년 즈음으로 잡는다는 것이 있다. 히타이트 가설에서는 농경생활을 하던 원시 인도유럽인이 모종의 이유로 오늘날의 캅카스 지역으로 이주하면서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남고자 농경 생활을 포기하고 유목민이 되었다고 본다.

하지만 이 가설은 2021년 기준으로 주류 언어학계에서 빠르게 지지를 잃었다. 쿠르간 문화의 후신으로 추정되는 얌나야 문화의 유적에서 출토된 유골을 분석한 결과, 히타이트의 유적지에서 발굴된 유골과 형질인류학적으로 친연 관계가 그리 깊지 않음이 밝혀졌기 때문이다.[4] 그래서 히타이트인을 포함한 아나톨리아반도의 농경민들은 비(非) 인도유럽어족 계열의 선주민들이 원시 인도유럽인들에게 정복당한 뒤에 이들에게 동화되면서 형성된 민족이라고 추정한다.
 
 
 
 

2.2. 분화 과정[편집]

 
 
 
 
기원전 3300년쯤 쿠르간 문화의 주민들이 오늘날의 우크라이나까지 남하하였고 이 과정에서 아나톨리아어파 계열 언어를 쓰는 집단들이 기원전 3천 년 무렵 아나톨리아반도로 진출하고 현지의 선주민들을 정복하여 히타이트를 포함한 아나톨리아어파 계열 민족의 기원이 되었다. 이들은 고대 이후 그리스인이나 아르메니아인에 동화되었다가 11세기 만치케르트 전투 이후 튀르크인들의 지배를 받기 시작하면서 그들과 문화적으로 동화되어 오늘날의 튀르키예인이 되었다.

우크라이나에 남아있던 이들이 그리스어, 아르메니아어, 인도이란어파의 조어를 쓰는 집단과 발트어파, 슬라브어파, 게르만어파의 조어를 쓰는 집단, 켈트어파, 이탈리아어파[5], 토하라어의 조어를 쓰는 집단으로 분화되었는데 이 중에서 원시 그리스어를 쓰는 집단이 기원전 3천 년쯤으로부터 기원전 2500년 무렵에 그리스-아르메니아-인도이란어의 공통조상에서 분리된 뒤에 서진하여 오늘날의 그리스에 정착하여 현대 그리스인이 기원이 되었다. 나머지는 카스피해의 동쪽 연안 지역을 따라서 북상하다가 기원전 2천 년쯤 동일집단에서 인도이란어파 계열 민족들의 공통조상인 아리아인이 분화되어 아시아 방면으로 진출했는데, 캅카스 방면으로 진출한 이들이 아르메니아인의 기원이 되었다.

기원전 2천 년 무렵 켈트-이탈리아-토하라어의 공통조상에서 분리된 집단이 오늘날의 러시아시베리아 지역으로 진출하였는데[6][7] 이들이 뒷날 중국신장 위구르 자치구 지역까지 진출하여 현지의 고대 북유라시아인계 선주민들을 동화시키면서 토하라인의 기원이 되었고 나머지가 유럽 방면으로 서진하여 중부유럽이탈리아반도로 이주하여 오늘날의 켈트계 민족들과 라틴계 민족의 기원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기원전 2천 년 즈음에서 기원전 1500년 무렵까지 발트-슬라브-게르만어의 공통조상이 오늘날의 스칸디나비아반도독일, 폴란드 일대 및 러시아유럽 지역으로 진출하면서 리투아니아인, 라트비아인 등의 발트계 민족들과 게르만계 민족들, 슬라브계 민족들의 기원이 되었다.
 
 
 
 

3. 문화[편집]

 
 
 
 
쿠르간 문화의 유적지와 재구된 인도유럽조어에 대한 연구결과에 의하면 원시 인도유럽인은 인류 역사상 최초의 유목민으로 추정된다. 인도유럽조어의 어휘에는 이나 마차유목 생활과 관련된 어휘가 대거 확인되는데 쿠르간 문화와 그 후신 문화인 얌나야 문화, 아파나시에보 문화의 유적지에서도 말의 뼈와 마차의 부품 등이 대거 출토되어 이들이 유목민이었다는 사실이 확실하게 입증되었다. 말 사육 기술은 기원전 3500년쯤 선사 시대중앙아시아 선주민들이 세운 보타이 문화의 주민들로부터 습득한 것으로 보이며 식용에 그쳤던 말을 수송용으로 이용하는 방법을 스스로 터득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시기에는 흔히 알려진 유목민들의 모습마냥 말 위에 직접 탑승하는 형식은 아니었는데 이 시기의 말은 사람의 체중을 버텨내기가 어려웠던 터라 사람이 직접 타는 대신에 말이 끄는 수레, 즉 마차를 만들어서 타고다니면서 유목 생활을 했다.[8]

원시 인도유럽 신화를 믿었던 것으로 보이며 원시 인도유럽인들이 유라시아의 각지로 진출하면서 그리스 로마 신화베다 신화, 발트 신화 등의 인도유럽어족 계통 민족들의 신화가 파생되어 나왔다. 이 신화에서 주신은 천신인 디에우스였다.[9] 발음을 보면 알겠지만 이 신은 제우스, 유피테르의 기원이 되는 신이기도 하다.

남아 있는 주거지 유적 연구에 따르면 주거지는 형태다. 그래서 인도유럽조어로 집을 가리키는 단어가 영어로 돔을 뜻하는 dome의 어원이 된 *domo다. 여기서 나온 단어가 도미토리(dormitory)다. 이 시기에는 돔=집이었다.
 
 
 
 

4. 특징[편집]

 
 
 
 
고대 북유라시아인의 후손이다. 얌나야 문화와 아파나시에보 문화권 지역에서 발견된 유골들에서 약 25%의 ANE 유전 요소가 검출됐으며 현대 유럽인들에게선 다소 희석됐지만 10~20% 정도 검출되고 현대 유럽인들에게 ANE의 영향은 대체로 지중해 일대의 남유럽인들에게는 10% 이하로 낮게 나오지만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북유럽인들에게는 최대 25%까지 나온다.

머리칼은 갈색, 눈은 갈색이었다. 2022년 연구 결과에 따르면 얌나야 문화권 인종들의 전형적인 표현형은 금발벽안이 아니라 갈색 머리/갈색 눈이었다. 서유럽에 금발보다 갈색 머리가 훨씬 많은 이유이기도 하다. 사실 당연한 게 금발 형질이 열성이기 때문에 혼혈 민족인 아리아인들은 당연히 갈색머리가 대부분일 수밖에 없다. 대한민국에서 갈색머리가 금발로 혼동됨은 유럽에서 갈색 머리라고 칭하는 것을 미국에서는 blond라고 일컫는 경우가 많은데, 미국발 정보를 번역하는 한국에서 영상매체 없이 글로만 blond라고 적힌 걸 그냥 금발로 번역하다 보니 생기는 일이다.

머리카락과 눈동자 색이 밝으며 비인도유럽인보다 비교적 금발벽안이 많았다. 금발벽안은 구석기 시대엔 개체 별로 종종 발현되었지만 환경상 원인으로 대중화되지 못했다. 그러나 고위도에 거주했고 우크라이나 평원에 살았던 이들에게서 금발벽안이 다른 민족들과 달리 대중적으로 발현되었다. 그들보다 훨씬 고위도에 거주했던 우랄어족의 조상[10]보다 더 비타민D 부족에 시달려서 피부를 통한 햇빛 합성으로 비타민D를 합성하는 개체가 자연선택되었기 때문이다.

고위도 지방인 시베리아 서부에 거주하던 말타-뷰렛 지역의 고대 북유라시아인, 더 엄밀하게는 말타뷰렛 문화와 관련이 있는 러시아크라스노야르스크 시 근교의 플라이스토세홀로세 사이의 구석기 시대 유적인 아폰토바 고라(Afontova Gora) 발굴지에서 출토된 3번 소녀 유골(일명 AG3)에서 돌연변이가 발생했다고 추정한다. 탄소연대측정 결과 1만 6천 년 전의 고대인으로 인류 사상 가장 오래된 금발 유전자를 보유한 호모 사피엔스이다. AG3의 어머니가 현존하는 유럽인 금발 보유자의 가장 최근의 공통 조상인 듯한데 동유럽 스텝의 목축민의 확산을 따라 전파되었다.[11]

게르만족이 남하하기 이전인 고대 로마알렉산드로스 대왕 시기의 그리스에도 금발이 존재했다. 심지어 시리아에도 존재했다. 사실 이는 당연하다. 5천 년 전 고대 북유라시아인의 자손인 이 원시 인도유럽인이 확산하면서 금발 유전자도 덩달아 유럽 전역뿐만 아니라 서아시아까지 확산되었기 때문이다.[12]

이들은 청동기 시대유럽으로 확산되어 당시 원시적인 농경생활을 하던 유럽 원주민[13]들과 혼혈하여 다인자유전으로 갈발, 녹안, 회안 등 다양한 색을 지닌 자손들을 발현시켰고 농경민이 거의 없었던 스칸디나비아반도우크라이나, 러시아 평원에서만 금발벽안이 대중적으로 발현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들의 유전자는 서아시아, 남아시아에는 대중화되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신석기 시대에도 당시 유럽보다 인구가 훨씬 많아서[14] 다인자유전에서 이들이 밀렸기 때문이다. 다만 이들이 청동기 시대부터 지배층 노릇을 했기 때문에 원주민 언어들을 박탈할 수 있었을 뿐이다.[15] 헬레니즘 시대부터 마그레브, 이집트, 레반트, 이라크에서도 라틴어, 그리스어, 페르시아어 등의 인도유럽어족 언어들이 대중화되어 셈어파 언어들이 멸종될 뻔했지만 7세기에 아랍인의 진출로 오히려 이들이 아랍화되어 아랍어를 모어로 쓰게 되었다. 남인도의 드라비다인은 열대 기후에 거주했기 때문에 이들이 적응하기 어려웠다. 캅카스 산맥은 험하고 농경 역사도 신석기 시대부터였기 때문에[16] 인도유럽어족북캅카스어족 등의 토착 언어를 대체할 수 없었다.

본래 러시아 남부, 우크라이나 동부, 카자흐스탄 서부의 평원에서 유목 생활을 하던 유목민이다 보니 목축업만으로는 식량 조달이 어려웠다. 이를 벌충하기 위해 허구헌날 인근의 정주농경민이나 다른 유목민 부족들을 약탈하는 일이 비일비재했으므로, 사회 전반에 군사적인 분위기가 강해서 철저한 가부장제를 유지했다.[17]

[1] 정주민이 아닌 이상,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면서 생활하기 때문에, 근친혼의 폐해를 막고, 결혼동맹을 통한 안보를 보장받고자 체류지의 토착민과 자주 통혼하는 것은 당연하다.[2] 히타이트 문명에서 쓰이던 히타이트어가 여기에 속한다.[3] Nash, Alexander (2015), The Proto-Indo-European Urheimat: The Armenian Hypothesis.[4] PDB Damgaard et al., 2018, Science[5] 로망스어군이 속한 언어군이다.[6] 이때 원시 우랄인, 원시 예니세이인 등의 시베리아 원주민들과 혼혈을 이루었기 때문에 코카소이드였던 원시 인도유럽인의 영향으로 인해 시베리아 원주민들의 적지 않은 수가 유라시안이다.[7] 기원전 2천 년~기원전 1500년 무렵까지 오늘날의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번성했던 선사 시대 문화권인 아파나시에보 문화가 이렇게 해서 분화된 토하라인들이 세운 문화권이다.[8] 원시 인도유럽 신화에서 신들인 신성한 쌍둥이 신이나 세훌, 헤우소스 등이 마차를 탄다는 묘사가 자주 나오는데 이는 유목 생활의 흔적이 반영된 결과로 보인다.[9] 정확히 말하면 '디에우스 피테'인데 '하늘의 아버지'라는 뜻이다.[10] 신석기 시대우랄어족계 민족들의 조상은 냉대기후 일대에 거주하던 탓에 당시에도 순록을 이용하여 유목 생활을 하거나 수렵채집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날고기를 먹어서 비타민D를 보충했다.[11] ^ Reich, David (2018). Who We are and How We Got Here: Ancient DNA and the New Science of the Human Past. Oxford University Press. ISBN 978-0198821250|#[12]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들의 금발은 아폰토바 고라 유적의 유골과는 상관없는 별개의 돌연변이로 인해 생긴 것이라서 고대 북유라시아인이나 원시 인도유럽인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13] 바스크족, 에트루리아인, 미노아인의 조상을 포함한 유럽 선주민들을 말한다.[14] 현대의 서아시아는 건조기후지만 신석기 시대엔 지중해성 기후나 사바나 기후의 범위가 넓었다. 반면 유럽은 빙하기에서 막 벗어난 시기였기 때문에 여전히 한랭했고 토질도 좋지 않아 토지생산성이 서아시아보다 낮았다.[15] 유목민의 특성 상 지배층조차도 현지인들과 혼혈이 잦아서 지배층이 현지 피지배층을 동화시키거나 역으로 동화되는 일이 많았다. 특히 고대에는 문명이 발달한 곳이 많지 않아서 정주 농경민조차도 유목민보다 소프트 파워가 후달리는 경우가 꽤 되었던지라 유목민 출신 지배층들에게 농경민들이 동화되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16] 북동캅카스어족 계통의 민족들은 비교언어학형질인류학 연구 결과에 의하면, 오늘날의 이라크 북부, 즉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생긴 비옥한 초승달에서 기원한 농경민의 후손들이다.[17] 후대에 등장한 유목민족인 튀르크족만 해도 오스만 제국 시기에 등장한 유럽인계 무슬림으로 구성된 군인계층인 예니체리를 법적으로 황제의 노예들이라고 규정해 놓거나, 조정 대신들과 지방의 유력 귀족(파나리오테스)들도 공식적으로는 아무런 귀족 작위도 주지 않은 채 황실에 대한 절대 복종만을 강요하는 등, 정부 자체를 권위주의적으로 운영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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