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든버러의 마리 공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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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역사
루마니아 왕국 페르디난드 1세의 왕비
에든버러의 마리 공녀
Princess Marie of Edinburgh
Queen Marie of R...
이름
영어
마리 알렉산드라 빅토리아
(Marie Alexandra Victoria)
루마니아어
마리아 알렉산드라 빅토리아
(Maria Alexandra Victoria)
출생
사망
1938년 7월 18일 (향년 62세)
배우자
페르디난드 1세 (1893년 결혼 / 1927년 사망)
자녀
카롤 2세, 엘리사베트, 마리야, 니콜라에, 일레아나, 미르차
아버지
어머니
형제
종교
서명
MarieOfRomaniaSi...
 
 
 
 
 
 
 
 
 
 
 
 
 
 
 
 

1. 개요2. 작위3. 생애
3.1. 어린 시절3.2. 루마니아의 왕세자비3.3. 루마니아의 왕비3.4. 루마니아의 왕대비
4. 가족관계
4.1. 조상4.2. 자녀
5. 여담6. 둘러보기

 
 
 
 
 
 
 
 
 
 
 
 
 
 
 
 
 
 
 
 
 
 
 
 

1. 개요[편집]

 
 
 
 
 
 
 
 
 
 
 
 
 
 
 
 
 
 
 
 
 
 
 
 
 
 
 
 
 
 

2. 작위[편집]

 
 
 
 
 
 
 
 
 
 
 
 
 
 
 
 
 
 
 
 
 
 
 
 
Coat of Arms of ...
문장
 
 
 
 
 
 
 
 
 
 
 
 
 
 
 
 
 
 
 
 
 
 
 
 

3. 생애[편집]

 
 
 
 
 
 
 
 
 
 
 
 
 
 
 
 
 
 
 
 
 
 
 
 

3.1. 어린 시절[편집]

 
 
 
 
 
 
 
 
 
 
 
 
 
 
 
 
 
 
 
 
 
 
 
 
1875년 잉글랜드 켄트에서 에든버러 공작 알프레드 왕자에든버러 공작부인 마리아의 장녀이자 둘째로 태어났다. 해군인 아버지를 따라 몰타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세월이 흘러 에든버러 공작가에 자주 찾아오던 친사촌 웨일스의 조지 공자가 마리에게 반해서 그녀와 약혼하기로 마음 먹었다.

이 소식에 큰아버지 에드워드 7세와 아버지 알프레드 왕자, 할머니 빅토리아 여왕은 매우 흡족해했다. 하지만 양가의 어머니들인 알렉산드라 왕세자비에든버러 공작부인 마리아는 사이가 너무 나빠서 조지와 마리의 사이를 매우 반대했고[2] 조지와 마리의 결혼은 무산되었다.
 
 
 
 
 
 
 
 
 
 
 
 
 
 
 
 
 
 
 
 
 
 
 
 

3.2. 루마니아의 왕세자비[편집]

 
 
 
 
 
 
 
 
 
 
 
 
 
 
 
 
 
 
 
 
 
 
 
 
1893년 아버지 알프레드가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이 되기 몇 달 전 루마니아의 국왕 카롤 1세의 조카인 왕세자 페르디난드 1세와 결혼한 마리는 18살에 루마니아의 마리아 왕세자비로 불리게 되었다.

마리는 페르디난드 1세와의 결혼 생활에서 장남 카롤 2세를 포함한 3남 3녀를 낳았지만 결혼 생활은 매우 불행했다. 마리의 오랜 친구이자 미국인 무용가였던 로이에 풀러는 나중에 마리가 남편에 대해 "싫어하는 남자. 혐오감이 더해"라고 언급했다고 폭로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당시 루마니아 국왕 카롤 1세는 조카며느리 마리를 궁정에서 고립시켰는데, 이건 마리가 정치에 관여해 루마니아의 상황을 복잡하게 만들 것을 우려해서였다. 하지만 이유가 뭐든 간에 17살에 시집 간 마리에게 이런 생활은 매우 견디기 힘든 시간이었다.

마리는 18세의 어린 나이로 장남 카롤을 출산할 때 영국의 기준으로 의학적인 혜택을 덜 받았다. 할머니 빅토리아 여왕과 어머니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부인 마리아도 마리의 무통 분만을 지지했다. 그러나 루마니아에서는 무통 분만이 성경에 나오는 여성의 고통에 위반되는 것이라며 반대했다. 친정 어머니 마리아가 루마니아까지 쫓아와 한바탕 했음에도 카롤 1세는 끄떡도 안 해서, 결국 할머니 빅토리아 여왕까지 나서서 마리는 출산 때 영국인 의사의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고집불통 꼰대 시숙부와 약간 미친(?) 듯한 시숙모 엘리사베타 왕비와의 갈등까지 겹쳐 마리는 루마니아의 궁정 생활을 힘들어하기 시작했고, 이게 그녀가 위안받을 사람들을 찾게 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라고. 이후 마리는 스캔들과 남편 때문에 루마니아를 떠나 잠시 아버지의 영지인 코부르크로 가서 지내기도 했다.
 
 
 
 
 
 
 
 
 
 
 
 
 
 
 
 
 
 
 
 
 
 
 
 

3.3. 루마니아의 왕비[편집]

 
 
 
 
 
 
 
 
 
 
 
 
 
 
 
 
 
 
 
 
 
 
 
 
1914년 카롤 1세가 사망하자 남편 페르디난드 1세가 즉위하면서, 마리 왕세자비도 자동적으로 왕비가 되었지만 대관식은 8년 뒤인 1922년에 치렀다. 왕비가 된 마리아는 결혼 초기에는 루마니아에서 적응하기 힘들어했지만 이후 열렬한 애국주의자가 되었다. 늘 남편 페르디난드 1세하고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도 했고, 전쟁 시기에는 적십자 자원 봉사자로 가입하고 부상자들을 간호하기도 했다. 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루마니아는 협상국으로 참전한다.[3] 1917년 루마니아 국토 절반이 독일군에게 짓밟히자 마리와 군의 조언자들은 러시아에게 의지하지 말고 루마니아가 독립적으로 독일과 러시아 모두와 싸워야 한다고 선택했다. 여기서 미국의 자금을 얻을 수 있었다.

이러한 마리의 행동은 매우 올바른 처사였다. 1차 세계 대전은 영국과 루마니아가 가담한 협상국의 승전으로 끝났기 때문. 하지만 영국을 싫어했던 어머니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부인 마리아가 매우 화를 냈다고.[4] 그럼에도 마리는 루마니아 왕비로서 자신의 의무를 다했으며, 덕분에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루마니아는 루마니아어를 구사하는 주민들이 거주하는 지역을 통합하는 "대 루마니아" 실현을 위해, 왕비인 마리를 루마니아의 국제적 얼굴 마담으로 내세우며 프랑스로 보내기도 했다. "전사 왕비''의 등장을 국제 미디어에서는 열성적으로 맞이하고, 그 결과 루마니아는 자국의 국토를 40%나 늘리는데 성공했다.
 
 
 
 
 
 
 
 
 
 
 
 
 
 
 
 
 
 
 
 
 
 
 
 

3.4. 루마니아의 왕대비[편집]

 
 
 
 
 
 
 
 
 
 
 
 
 
 
 
 
 
 
 
 
 
 
 
 
1927년 남편 페르디난드 1세가 사망하고 장남 카롤 2세가 즉위하자 왕대비가 된 마리는 루마니아에 남아서 직접 회고록과 저작을 집필하다가 1938년 62세로 사망했다. 시신은 쿠르테아 데 아르제슈 수도원에 안치된 남편 페르디난드 1세의 옆에 안장했다. 생전 마리 왕대비의 유언으로 심장은 바르치크의 마리아가 건설한 바르치크 궁전의 납골당에 안치되어 있었다. 그러나 1940년 발틱 궁전 남도브루자의 나머지가 크라이오바 조약에 의해 불가리아에 반환되면서 마리 왕비의 심장은 브란 성으로 이송되었다.

그러나 장남 카롤 2세는 어머니의 기질을 물려받은 건지 심각한 바람둥이에다 루마니아에서 인기 높은 마리 왕대비를 질투하기까지 했다. 카롤은 결혼 전부터 지지 람브리노라는 여자와 사귀면서 사생아 카롤 람브리노를 얻었고, 그리스와 덴마크의 엘레니 공주와 결혼해 유일한 적자 미하이 1세를 얻었지만 처자식을 팽개치고 또다른 정부 마그다 루페스쿠와 동거했다.

결국 보다 못한 페르디난드 1세가 아들을 제끼고 손자 미하이 1세에게 왕위를 물려줬지만 카롤은 아들의 왕위를 빼앗아 기어코 루마니아 왕으로 즉위했다. 하지만 카롤 2세는 실정만 거듭하다가 퇴위당해 루마니아에서 쫓겨나 망명 생활 끝에 사망했다. 카롤 2세의 뒤를 이어 미하이 1세가 즉위하면서 괜찮아지려나 싶었지만 루마니아 왕국은 제2차 세계 대전 패전 이후 무너지면서 왕정제가 아예 폐지되었다. 이런 아들의 추태에 마리 왕대비는 굉장히 속을 썩히며 고통스러워 했다고 한다. 마리 왕대비의 막내 여동생인 갈리에라 공작부인 베아트리스는 퇴위당하고 망명한 카롤 2세가 스페인에 찾아왔을 때 "내 언니를 죽인 망나니놈"이라며 조카를 만나주지도 않았다.
 
 
 
 
 
 
 
 
 
 
 
 
 
 
 
 
 
 
 
 
 
 
 
 

4. 가족관계[편집]

 
 
 
 
 
 
 
 
 
 
 
 
 
 
 
 
 
 
 
 
 
 
 
 
 
 
 
 
 
 
 
 
 
 
 
 
 
 
 
 
 
 
 
 
 
 
 
 
본인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에든버러의 마리 공녀
(Princess Marie of Edinburgh)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 알프레트
(Alfred, Duke of Saxe-Coburg and Gotha)
작센코부르크고타의 알베르트 공자
(Prince Albert
of Saxe-Coburg and Gotha)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 에른스트 1세
(Ernest I, Duke of Saxe-Coburg and Gotha)
작센고타알텐부르크의 루이제 공녀
(Princess Louise of Saxe-Gotha-Altenburg)
켄트와 스트래선 공작 에드워드 왕자
(Prince Edward, Duke of Kent and Strathearn)[5]
작센코부르크잘펠트의 빅토리아 공녀
(Princess Victoria of Saxe-Coburg and Saalfeld)
러시아의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 여대공
(Grand Duchess Maria Alexandrovna of Russia)
알렉산드르 2세
(Alexander II)
프로이센의 샤를로테 공주
(Princess Charlotte of Prussia)[6]
헤센의 마리 공녀
(Princess Marie of Hesse and by Rhine)
헤센 대공 루트비히 2세
(Ludwig II, Grand Duke of Hesse)
바덴의 빌헬미네 공녀
(Princess Wilhelmine of Baden)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자녀
1남
카롤 2세
(Carol II)
지지 람브리노
슬하 1남
1녀
그리스 왕국의 왕비 엘리사베트
(Elisabeth, Queen of The Hellenes)
2녀
유고슬라비아 왕비 마리야
(Maria, Queen of Yugoslavia)
2남
루마니아의 섭정 니콜라에
(Nicholas, Prince Regent of Romania)
이오아나 두미트레스쿠-돌레티
테레자 리스보아 피게이라 데 멜로
3녀
오스트리아의 일레아나 대공비
(Archduchess Ileana of Austria)
오스트리아의 안톤 대공[9]
슬하 2남 4녀
스테판 니콜라에 이사레스쿠
3남
미르차 왕자
(Prince Mircea)
 
 
 
 
 
 
 
 
 
 
 
 
 
 
 
 
 
 
 
 
 
 
 
 

5. 여담[편집]

 
 
 
 
 
 
 
 
 
 
 
 
 
 
 
 
 
 
 
 
 
 
 
 
  • 사적으로는 바람기가 심하고 문란했다고 한다. 자녀들 중 끝에서 두 명은 불륜 상대 바르부 슈티르베이(Barbu Știrbey) 공의 아이들이라는 설이 무성했다.
게다가 이 바람기는 장남 카롤 2세도 제대로 물려받아서 여자를 엄청 밝혀 결혼 전부터 애인 지지 람브리노와 동거하며 사생아까지 낳았고, 그리스와 덴마크의 엘레니 공주와 결혼하여 유일한 적자 미하이 1세를 낳은 후에도 처자식은 팽개치고 줄창 불륜을 벌이다 이혼당했다. 보다못한 아버지 페르디난드 1세가 아들인 카롤 2세를 건너뛰고 손자 미하이에게 왕위를 물려줄 정도. 때문에 미하이 1세는 평생 아버지를 용서하지 않았고 1953년 카롤 2세가 사망했을 때에도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차녀 마리야는 유고슬라비아 왕국알렉산다르 1세와 결혼해서 3형제를 두었지만 남편 알렉산다르 1세가 1934년 프랑스에서 암살되면서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되어 조용히 살았고,[10] 차남 니콜라에는 형 카롤 2세와 서로 싫어하며 사이가 나빴고, 막내딸 일레아나는 그녀의 인기를 투기한 큰오빠 카롤 2세가 외국에 쫓아낼 목적으로 정해준 남편과 불행한 결혼 생활을 했다.
대외적으로도 왕비다운 모습으로 존경받았지만 가정적으로는 자녀 문제로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고, 사회적•명예적으로 빅엿을 날린 장남에 대한 심적 고통도 상당했다.
  • 드라큘라 성으로 유명한 브란 성을 1차 대전 이후로 소유하고 있다가, 3녀 일레아나 공주에게 물려주었다. 이후 일레아나가 소유하고 있던 브란 성은 루마니아가 공산화되면서 몰수되었는데, 2006년에 일레아나 공주의 차남이자 상속자인 도미니크 대공이 반환받아 지금까지 소유하고 있다.
 
 
 
 
 
 
 
 
 
 
 
 
 
 
 
 
 
 
 
 
 
 
 
 

6.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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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년 루마니아 공영방송 TVR이 루마니아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가장 위대한 루마니아인 100명'을 선정
TOP 10
1위
2위
3위
4위
5위
리하르트 부름브란트
6위
7위
8위
9위
10위
11위~100위
11위
12위
13위
14위
15위
조지 비칼리
헨리 코안더
16위
17위
18위
19위
20위
그레고리안 비볼라루
21위
22위
23위
24위
25위
니콜라에 티툴레스쿠
26위
27위
28위
29위
30위
이온 I. C. 브라티아누
31위
32위
33위
34위
35위
니콜라에 파울레스쿠
이울리우 마니우
이울리우 호수
36위
37위
38위
39위
40위
페트레 투테아
코르넬리우 코포수
41위
42위
43위
44위
45위
이오시프 트리파
니키타 스터네스쿠
이온 크레안거
마델리나 마놀
코르넬리우 바딤 투도르
46위
47위
48위
49위
50위
트라이안 부이아
조지 에밀 퍼레이드
아나 아슬란
51위
52위
53위
54위
55위
플로린 피에르시크
미하일 코갈리차누
야노스 코뢰시
56위
57위
58위
59위
60위
게오르그 잠피르
기카 페트레스쿠
엘리사베타 리제아
불라
암자 펠라
61위
62위
63위
64위
65위
티투 마이오레스쿠
토마 카라지우
미하이 트라이스타리우
66위
67위
68위
69위
70위
안드레아 마린
에밀 라코비차
빅터 바베슈
호리아로만 파타피에비치
71위
72위
73위
74위
75위
마린 프레다
두미트루 스타닐로아
알렉산드루 토데아
76위
77위
78위
79위
80위
투도르 게오르게
이온 티리아크
일리에 클레오파
아르세니 보카
바넬 니콜리타
81위
82위
83위
84위
85위
두미트루 코르닐레스쿠
그리고레 모이실
클라우디우 니쿨레스
플로렌틴 페트레
마리우스 모가
86위
87위
88위
89위
90위
니콜라에 스타인하트
로라 스토이카
커털린 흘단
안겔 살리그니
이반 피차이진
91위
92위
93위
94위
95위
마리아 터나세
세르지우 니콜라에스쿠
옥타비안 팔러
무명용사
치프리안 포룸베스쿠
96위
97위
98위
99위
100위
니쿠 코바시
두미트루 프루나리우
콘스탄틴 노이카
바데아 카르탕
출처
 
 
 
 
 
 
 
 
 
 
 
 
 
 
 
 
 
 
 
 
 
 
 
 
[1] 말년에는 신흥종교인 바하이에 빠졌지만 그런데도 교회에는 꾸준히 다녔다고 한다.[2] 에든버러 공작부인 마리아는 알렉산드라 왕세자비와 사이가 나빴는데, 정작 그런 알렉산드라의 여동생인 자기 올케 덴마크의 다우마 공주와는 사이가 매우 좋았다. 참고로 다우마는 언니 알렉산드라와도 평생 절친한 자매 관계를 유지했다.[3] 당시 적국 독일 제국의 수장 빌헬름 2세는 마리아 왕비의 사촌(고모 프린세스 로열 빅토리아의 장남)이었다.[4] 당시 마리는 3남 미르차 왕자를 잃고 상심이 컸는데 친정 어머니가 딸에게 편지로 엄청 디스했다고 한다. 마리는 독일의 군소공국 중 하나인 작센코부르고타의 공작부인이었기에 마리가 당연히 독일을 지지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독일의 적국이고 자신이 싫어하는 영국과 연합한 딸의 행동에 대해서 "이번 전쟁은 너의 책임이다"라는 소리까지 했다고 한다. 그래도 제1차 세계 대전이 터지면서 딸이 걱정됐는지 마리에게 무사하길 바라는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5] 조지 3세의 4남이다.[6]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의 장녀이다.[7] 미하이 1세 [8] 페타르 2세[9] 합스부르크 가문의 분가인 토스카나 대공가 출신으로 토스카나 대공 레오폴도 2세의 차남인 카를 잘바토어 대공의 손자이다.[10] 1930년대 후반부터 류머티즘이 악화되어 국왕이었던 장남 페타르 2세를 제외한 두 아들과 함께 1939년부터 영국에서 거주했다. 이후 유고슬라비아 왕국이 추축국의 침공으로 붕괴하고 전후에 왕정이 공식적으로 폐지되면서 그대로 영국에서 망명 생활을 하다 1961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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