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든버러의 마리 공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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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루마니아 왕국 페르디난드 1세의 왕비 에든버러의 마리 공녀 Princess Marie of Edinburgh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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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영어 | 마리 알렉산드라 빅토리아 (Marie Alexandra Victoria) |
루마니아어 | 마리아 알렉산드라 빅토리아 (Maria Alexandra Victoria) | |
출생 | ||
사망 | ||
배우자 | 페르디난드 1세 (1893년 결혼 / 1927년 사망) | |
자녀 | 카롤 2세, 엘리사베트, 마리야, 니콜라에, 일레아나, 미르차 | |
아버지 | ||
어머니 | ||
형제 | ||
종교 | ||
서명 | ![]() | |
문장 |
1875년 잉글랜드 켄트에서 에든버러 공작 알프레드 왕자와 에든버러 공작부인 마리아의 장녀이자 둘째로 태어났다. 해군인 아버지를 따라 몰타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세월이 흘러 에든버러 공작가에 자주 찾아오던 친사촌 웨일스의 조지 공자가 마리에게 반해서 그녀와 약혼하기로 마음 먹었다.
이 소식에 큰아버지 에드워드 7세와 아버지 알프레드 왕자, 할머니 빅토리아 여왕은 매우 흡족해했다. 하지만 양가의 어머니들인 알렉산드라 왕세자비와 에든버러 공작부인 마리아는 사이가 너무 나빠서 조지와 마리의 사이를 매우 반대했고[2] 조지와 마리의 결혼은 무산되었다.
이 소식에 큰아버지 에드워드 7세와 아버지 알프레드 왕자, 할머니 빅토리아 여왕은 매우 흡족해했다. 하지만 양가의 어머니들인 알렉산드라 왕세자비와 에든버러 공작부인 마리아는 사이가 너무 나빠서 조지와 마리의 사이를 매우 반대했고[2] 조지와 마리의 결혼은 무산되었다.
1893년 아버지 알프레드가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이 되기 몇 달 전 루마니아의 국왕 카롤 1세의 조카인 왕세자 페르디난드 1세와 결혼한 마리는 18살에 루마니아의 마리아 왕세자비로 불리게 되었다.
마리는 페르디난드 1세와의 결혼 생활에서 장남 카롤 2세를 포함한 3남 3녀를 낳았지만 결혼 생활은 매우 불행했다. 마리의 오랜 친구이자 미국인 무용가였던 로이에 풀러는 나중에 마리가 남편에 대해 "싫어하는 남자. 혐오감이 더해"라고 언급했다고 폭로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당시 루마니아 국왕 카롤 1세는 조카며느리 마리를 궁정에서 고립시켰는데, 이건 마리가 정치에 관여해 루마니아의 상황을 복잡하게 만들 것을 우려해서였다. 하지만 이유가 뭐든 간에 17살에 시집 간 마리에게 이런 생활은 매우 견디기 힘든 시간이었다.
마리는 18세의 어린 나이로 장남 카롤을 출산할 때 영국의 기준으로 의학적인 혜택을 덜 받았다. 할머니 빅토리아 여왕과 어머니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부인 마리아도 마리의 무통 분만을 지지했다. 그러나 루마니아에서는 무통 분만이 성경에 나오는 여성의 고통에 위반되는 것이라며 반대했다. 친정 어머니 마리아가 루마니아까지 쫓아와 한바탕 했음에도 카롤 1세는 끄떡도 안 해서, 결국 할머니 빅토리아 여왕까지 나서서 마리는 출산 때 영국인 의사의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고집불통 꼰대 시숙부와 약간 미친(?) 듯한 시숙모 엘리사베타 왕비와의 갈등까지 겹쳐 마리는 루마니아의 궁정 생활을 힘들어하기 시작했고, 이게 그녀가 위안받을 사람들을 찾게 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라고. 이후 마리는 스캔들과 남편 때문에 루마니아를 떠나 잠시 아버지의 영지인 코부르크로 가서 지내기도 했다.
마리는 페르디난드 1세와의 결혼 생활에서 장남 카롤 2세를 포함한 3남 3녀를 낳았지만 결혼 생활은 매우 불행했다. 마리의 오랜 친구이자 미국인 무용가였던 로이에 풀러는 나중에 마리가 남편에 대해 "싫어하는 남자. 혐오감이 더해"라고 언급했다고 폭로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당시 루마니아 국왕 카롤 1세는 조카며느리 마리를 궁정에서 고립시켰는데, 이건 마리가 정치에 관여해 루마니아의 상황을 복잡하게 만들 것을 우려해서였다. 하지만 이유가 뭐든 간에 17살에 시집 간 마리에게 이런 생활은 매우 견디기 힘든 시간이었다.
마리는 18세의 어린 나이로 장남 카롤을 출산할 때 영국의 기준으로 의학적인 혜택을 덜 받았다. 할머니 빅토리아 여왕과 어머니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부인 마리아도 마리의 무통 분만을 지지했다. 그러나 루마니아에서는 무통 분만이 성경에 나오는 여성의 고통에 위반되는 것이라며 반대했다. 친정 어머니 마리아가 루마니아까지 쫓아와 한바탕 했음에도 카롤 1세는 끄떡도 안 해서, 결국 할머니 빅토리아 여왕까지 나서서 마리는 출산 때 영국인 의사의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고집불통 꼰대 시숙부와 약간 미친(?) 듯한 시숙모 엘리사베타 왕비와의 갈등까지 겹쳐 마리는 루마니아의 궁정 생활을 힘들어하기 시작했고, 이게 그녀가 위안받을 사람들을 찾게 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라고. 이후 마리는 스캔들과 남편 때문에 루마니아를 떠나 잠시 아버지의 영지인 코부르크로 가서 지내기도 했다.
1914년 카롤 1세가 사망하자 남편 페르디난드 1세가 즉위하면서, 마리 왕세자비도 자동적으로 왕비가 되었지만 대관식은 8년 뒤인 1922년에 치렀다. 왕비가 된 마리아는 결혼 초기에는 루마니아에서 적응하기 힘들어했지만 이후 열렬한 애국주의자가 되었다. 늘 남편 페르디난드 1세하고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도 했고, 전쟁 시기에는 적십자 자원 봉사자로 가입하고 부상자들을 간호하기도 했다. 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루마니아는 협상국으로 참전한다.[3] 1917년 루마니아 국토 절반이 독일군에게 짓밟히자 마리와 군의 조언자들은 러시아에게 의지하지 말고 루마니아가 독립적으로 독일과 러시아 모두와 싸워야 한다고 선택했다. 여기서 미국의 자금을 얻을 수 있었다.
이러한 마리의 행동은 매우 올바른 처사였다. 1차 세계 대전은 영국과 루마니아가 가담한 협상국의 승전으로 끝났기 때문. 하지만 영국을 싫어했던 어머니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부인 마리아가 매우 화를 냈다고.[4] 그럼에도 마리는 루마니아 왕비로서 자신의 의무를 다했으며, 덕분에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루마니아는 루마니아어를 구사하는 주민들이 거주하는 지역을 통합하는 "대 루마니아" 실현을 위해, 왕비인 마리를 루마니아의 국제적 얼굴 마담으로 내세우며 프랑스로 보내기도 했다. "전사 왕비''의 등장을 국제 미디어에서는 열성적으로 맞이하고, 그 결과 루마니아는 자국의 국토를 40%나 늘리는데 성공했다.
이러한 마리의 행동은 매우 올바른 처사였다. 1차 세계 대전은 영국과 루마니아가 가담한 협상국의 승전으로 끝났기 때문. 하지만 영국을 싫어했던 어머니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부인 마리아가 매우 화를 냈다고.[4] 그럼에도 마리는 루마니아 왕비로서 자신의 의무를 다했으며, 덕분에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루마니아는 루마니아어를 구사하는 주민들이 거주하는 지역을 통합하는 "대 루마니아" 실현을 위해, 왕비인 마리를 루마니아의 국제적 얼굴 마담으로 내세우며 프랑스로 보내기도 했다. "전사 왕비''의 등장을 국제 미디어에서는 열성적으로 맞이하고, 그 결과 루마니아는 자국의 국토를 40%나 늘리는데 성공했다.
1927년 남편 페르디난드 1세가 사망하고 장남 카롤 2세가 즉위하자 왕대비가 된 마리는 루마니아에 남아서 직접 회고록과 저작을 집필하다가 1938년 62세로 사망했다. 시신은 쿠르테아 데 아르제슈 수도원에 안치된 남편 페르디난드 1세의 옆에 안장했다. 생전 마리 왕대비의 유언으로 심장은 바르치크의 마리아가 건설한 바르치크 궁전의 납골당에 안치되어 있었다. 그러나 1940년 발틱 궁전 남도브루자의 나머지가 크라이오바 조약에 의해 불가리아에 반환되면서 마리 왕비의 심장은 브란 성으로 이송되었다.
그러나 장남 카롤 2세는 어머니의 기질을 물려받은 건지 심각한 바람둥이에다 루마니아에서 인기 높은 마리 왕대비를 질투하기까지 했다. 카롤은 결혼 전부터 지지 람브리노라는 여자와 사귀면서 사생아 카롤 람브리노를 얻었고, 그리스와 덴마크의 엘레니 공주와 결혼해 유일한 적자 미하이 1세를 얻었지만 처자식을 팽개치고 또다른 정부 마그다 루페스쿠와 동거했다.
결국 보다 못한 페르디난드 1세가 아들을 제끼고 손자 미하이 1세에게 왕위를 물려줬지만 카롤은 아들의 왕위를 빼앗아 기어코 루마니아 왕으로 즉위했다. 하지만 카롤 2세는 실정만 거듭하다가 퇴위당해 루마니아에서 쫓겨나 망명 생활 끝에 사망했다. 카롤 2세의 뒤를 이어 미하이 1세가 즉위하면서 괜찮아지려나 싶었지만 루마니아 왕국은 제2차 세계 대전 패전 이후 무너지면서 왕정제가 아예 폐지되었다. 이런 아들의 추태에 마리 왕대비는 굉장히 속을 썩히며 고통스러워 했다고 한다. 마리 왕대비의 막내 여동생인 갈리에라 공작부인 베아트리스는 퇴위당하고 망명한 카롤 2세가 스페인에 찾아왔을 때 "내 언니를 죽인 망나니놈"이라며 조카를 만나주지도 않았다.
그러나 장남 카롤 2세는 어머니의 기질을 물려받은 건지 심각한 바람둥이에다 루마니아에서 인기 높은 마리 왕대비를 질투하기까지 했다. 카롤은 결혼 전부터 지지 람브리노라는 여자와 사귀면서 사생아 카롤 람브리노를 얻었고, 그리스와 덴마크의 엘레니 공주와 결혼해 유일한 적자 미하이 1세를 얻었지만 처자식을 팽개치고 또다른 정부 마그다 루페스쿠와 동거했다.
결국 보다 못한 페르디난드 1세가 아들을 제끼고 손자 미하이 1세에게 왕위를 물려줬지만 카롤은 아들의 왕위를 빼앗아 기어코 루마니아 왕으로 즉위했다. 하지만 카롤 2세는 실정만 거듭하다가 퇴위당해 루마니아에서 쫓겨나 망명 생활 끝에 사망했다. 카롤 2세의 뒤를 이어 미하이 1세가 즉위하면서 괜찮아지려나 싶었지만 루마니아 왕국은 제2차 세계 대전 패전 이후 무너지면서 왕정제가 아예 폐지되었다. 이런 아들의 추태에 마리 왕대비는 굉장히 속을 썩히며 고통스러워 했다고 한다. 마리 왕대비의 막내 여동생인 갈리에라 공작부인 베아트리스는 퇴위당하고 망명한 카롤 2세가 스페인에 찾아왔을 때 "내 언니를 죽인 망나니놈"이라며 조카를 만나주지도 않았다.
본인 | 부모 | 조부모 | 증조부모 |
에든버러의 마리 공녀 (Princess Marie of Edinburgh) | |||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자녀 |
1남 | 슬하 1남 | |||
1녀 | 그리스 왕국의 왕비 엘리사베트 (Elisabeth, Queen of The Hellenes) | |||
2녀 | 유고슬라비아 왕비 마리야 (Maria, Queen of Yugoslavia) | |||
2남 | 루마니아의 섭정 니콜라에 (Nicholas, Prince Regent of Romania) | 이오아나 두미트레스쿠-돌레티 | ||
테레자 리스보아 피게이라 데 멜로 | ||||
3녀 | 오스트리아의 일레아나 대공비 (Archduchess Ileana of Austria) | |||
3남 | 미르차 왕자 (Prince Mircea) |
- 사적으로는 바람기가 심하고 문란했다고 한다. 자녀들 중 끝에서 두 명은 불륜 상대 바르부 슈티르베이(Barbu Știrbey) 공의 아이들이라는 설이 무성했다.
게다가 이 바람기는 장남 카롤 2세도 제대로 물려받아서 여자를 엄청 밝혀 결혼 전부터 애인 지지 람브리노와 동거하며 사생아까지 낳았고, 그리스와 덴마크의 엘레니 공주와 결혼하여 유일한 적자 미하이 1세를 낳은 후에도 처자식은 팽개치고 줄창 불륜을 벌이다 이혼당했다. 보다못한 아버지 페르디난드 1세가 아들인 카롤 2세를 건너뛰고 손자 미하이에게 왕위를 물려줄 정도. 때문에 미하이 1세는 평생 아버지를 용서하지 않았고 1953년 카롤 2세가 사망했을 때에도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 다른 자녀들의 문제도 심각했다. 일찍 요절한 막내아들 미르차를 제외한 장남 카롤 2세는 할 말 없는 막장 플레이보이 가장이어서 끝내 본처인 그리스와 덴마크의 엘레니 공주와 이혼했고, 장녀 엘리사베트는 그리스 왕국의 국왕 요르요스 2세와 결혼했으나 1935년 자녀 없이 이혼했다. 이혼 원인은 엘리사베트의 성격 탓. 워낙 안하무인이라 시어머니 소피아 왕대비가 굉장히 안 좋게 봤다고.
대외적으로도 왕비다운 모습으로 존경받았지만 가정적으로는 자녀 문제로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고, 사회적•명예적으로 빅엿을 날린 장남에 대한 심적 고통도 상당했다.
- 드라큘라 성으로 유명한 브란 성을 1차 대전 이후로 소유하고 있다가, 3녀 일레아나 공주에게 물려주었다. 이후 일레아나가 소유하고 있던 브란 성은 루마니아가 공산화되면서 몰수되었는데, 2006년에 일레아나 공주의 차남이자 상속자인 도미니크 대공이 반환받아 지금까지 소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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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말년에는 신흥종교인 바하이에 빠졌지만 그런데도 교회에는 꾸준히 다녔다고 한다.[2] 에든버러 공작부인 마리아는 알렉산드라 왕세자비와 사이가 나빴는데, 정작 그런 알렉산드라의 여동생인 자기 올케 덴마크의 다우마 공주와는 사이가 매우 좋았다. 참고로 다우마는 언니 알렉산드라와도 평생 절친한 자매 관계를 유지했다.[3] 당시 적국 독일 제국의 수장 빌헬름 2세는 마리아 왕비의 사촌(고모 프린세스 로열 빅토리아의 장남)이었다.[4] 당시 마리는 3남 미르차 왕자를 잃고 상심이 컸는데 친정 어머니가 딸에게 편지로 엄청 디스했다고 한다. 마리는 독일의 군소공국 중 하나인 작센코부르고타의 공작부인이었기에 마리가 당연히 독일을 지지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독일의 적국이고 자신이 싫어하는 영국과 연합한 딸의 행동에 대해서 "이번 전쟁은 너의 책임이다"라는 소리까지 했다고 한다. 그래도 제1차 세계 대전이 터지면서 딸이 걱정됐는지 마리에게 무사하길 바라는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5] 조지 3세의 4남이다.[6]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의 장녀이다.[7] 미하이 1세 [8] 페타르 2세 등[9] 합스부르크 가문의 분가인 토스카나 대공가 출신으로 토스카나 대공 레오폴도 2세의 차남인 카를 잘바토어 대공의 손자이다.[10] 1930년대 후반부터 류머티즘이 악화되어 국왕이었던 장남 페타르 2세를 제외한 두 아들과 함께 1939년부터 영국에서 거주했다. 이후 유고슬라비아 왕국이 추축국의 침공으로 붕괴하고 전후에 왕정이 공식적으로 폐지되면서 그대로 영국에서 망명 생활을 하다 1961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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