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페인의 인판타 마리아 루이사(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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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 로마 제국 레오폴트 2세의 황후 스페인의 인판타 마리아 루이사 Infanta María Luisa de España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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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마리아 루이사 안토니아 테레사 라파엘라 데 보르본 이 사호니아 (María Luisa Antonia Teresa Rafaela de Borbón y Sajonia) |
출생 | |
사망 | |
배우자 | 레오폴트 2세 (1764년 결혼 / 1792년 사망) |
자녀 | |
아버지 | |
어머니 | |
형제 | |
종교 | |
1745년 11월 24일, 나폴리와 시칠리아의 왕이었던 보르보네의 카를로와 작센의 마리아 아말리아의 딸로, 나폴리 근교의 포르티치 궁전에서 태어났다. 마리아 루이사가 태어난 날은 어머니 마리아 아말리아 왕비의 21번째 생일이었다.
마리아 루이사의 아버지 보르보네의 카를로는 원래 외가의 뒤를 이어 파르마 공국의 공작이었으나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으로 파르마 공국을 오스트리아에 내어준 후 나폴리-시칠리아 국왕으로 즉위했다.[1] 1759년 백부인 페르난도 6세가 사망하면서 아버지가 스페인 국왕으로 즉위하면서 그녀는 스페인의 인판타 마리아 루이사로 알려졌고, 스페인으로 이주했다.
마리아 루이사의 아버지 보르보네의 카를로는 원래 외가의 뒤를 이어 파르마 공국의 공작이었으나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으로 파르마 공국을 오스트리아에 내어준 후 나폴리-시칠리아 국왕으로 즉위했다.[1] 1759년 백부인 페르난도 6세가 사망하면서 아버지가 스페인 국왕으로 즉위하면서 그녀는 스페인의 인판타 마리아 루이사로 알려졌고, 스페인으로 이주했다.
마리아 루이사는 원래 오스트리아의 요제프 대공과 결혼할 예정이었지만, 요제프 대공이 자신의 외손녀인 파르마의 이사벨라 공녀와 결혼하기를 원했던 프랑스 국왕 루이 15세의 반대로 인해 결혼이 무산되었다.
1764년 2월 16일, 마리아 루이사는 마드리드에서 3살 연하인 마리아 테레지아와 프란츠 1세의 3남이자 토스카나 대공국의 후계자인 레오폴트 대공과 대리 결혼했다. 결혼 전 아버지 카를로스 3세의 요청으로 스페인 왕위 계승권을 포기했다. 대리혼을 올린 후 마리아 루이사는 바르셀로나, 제노바, 보첸을 거쳐 오스트리아로 떠났다. 이듬해 8월 5일 인스브루크에서 레오폴트 대공과 결혼했다.
1764년 2월 16일, 마리아 루이사는 마드리드에서 3살 연하인 마리아 테레지아와 프란츠 1세의 3남이자 토스카나 대공국의 후계자인 레오폴트 대공과 대리 결혼했다. 결혼 전 아버지 카를로스 3세의 요청으로 스페인 왕위 계승권을 포기했다. 대리혼을 올린 후 마리아 루이사는 바르셀로나, 제노바, 보첸을 거쳐 오스트리아로 떠났다. 이듬해 8월 5일 인스브루크에서 레오폴트 대공과 결혼했다.
프란츠 1세의 죽음으로 마리아 루이사의 남편 레오폴트 대공이 토스카나 대공국의 새로운 대공 레오폴도 1세가 되었고 부부는 피렌체로 이주하여 향후 25년 간 살았다. 두 사람은 1765년 9월 13일 피렌체에 도착했고 피티 궁전에 정착했다.
마리아 루이사는 생생한 매력과 가식 없고 소박하며 관대하고 친절한 성격을 가진 푸른 눈의 미녀였는데 거기에 따뜻한 친근감으로 결혼식 당시부터 레오폴트의 다소 차가운 성격과 대조를 이뤘다. 마리아 루이사는 결혼 생활 동안 무려 12남 4녀라는 많은 자녀들을 낳았는데 거기에 따르는 모든 어려움도 엄격한 가톨릭 교육을 통해 불평없이 견뎌냈다. 레오폴트와의 금슬도 좋았으며 마리아 루이사는 지적이고 충성스러운 아내였다.[2]
토스카나의 대공비가 된 마리아 루이사는 1765년 기근이 닥친 피렌체에서의 첫 해에 가난하고 필요한 사람들에게 식량과 의료 지원을 제공했다. 1768년 7월 레오폴트의 즉위식에 참석했다. 올케이자 시누이인 마리아 카롤리나와 동생인 나폴리-시칠리아 국왕 페르디난도의 결혼식에도 동행했는데 토스카나 대공 부부는 1768년 여름 동안 그곳에 머물렀다. 1770년에 레오폴트가 오스트리아 빈에 방문하자 동행했다. 마리아 루이사와 레오폴트는 공식적인 행사를 즐기지 않았고 의례적인 궁정 생활도 거의 하지 않았다. 레오폴트가 정치와 개인적인 즐거움으로 시간을 보내는 동안 마리아 루이사는 상류 사회로부터 거의 떨어져 자녀들의 양육에 전념했다. 마리아 루이사와 레오폴트는 공식적인 궁정 생활에서 벗어나 슬하의 자녀들을 매우 자유롭게 양육했고, 때때로 시골과 해안으로 여행을 떠났고 마리아 루이사는 지역 귀족들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은 채 개인 생활을 즐겼다.
마리아 루이사는 생생한 매력과 가식 없고 소박하며 관대하고 친절한 성격을 가진 푸른 눈의 미녀였는데 거기에 따뜻한 친근감으로 결혼식 당시부터 레오폴트의 다소 차가운 성격과 대조를 이뤘다. 마리아 루이사는 결혼 생활 동안 무려 12남 4녀라는 많은 자녀들을 낳았는데 거기에 따르는 모든 어려움도 엄격한 가톨릭 교육을 통해 불평없이 견뎌냈다. 레오폴트와의 금슬도 좋았으며 마리아 루이사는 지적이고 충성스러운 아내였다.[2]
토스카나의 대공비가 된 마리아 루이사는 1765년 기근이 닥친 피렌체에서의 첫 해에 가난하고 필요한 사람들에게 식량과 의료 지원을 제공했다. 1768년 7월 레오폴트의 즉위식에 참석했다. 올케이자 시누이인 마리아 카롤리나와 동생인 나폴리-시칠리아 국왕 페르디난도의 결혼식에도 동행했는데 토스카나 대공 부부는 1768년 여름 동안 그곳에 머물렀다. 1770년에 레오폴트가 오스트리아 빈에 방문하자 동행했다. 마리아 루이사와 레오폴트는 공식적인 행사를 즐기지 않았고 의례적인 궁정 생활도 거의 하지 않았다. 레오폴트가 정치와 개인적인 즐거움으로 시간을 보내는 동안 마리아 루이사는 상류 사회로부터 거의 떨어져 자녀들의 양육에 전념했다. 마리아 루이사와 레오폴트는 공식적인 궁정 생활에서 벗어나 슬하의 자녀들을 매우 자유롭게 양육했고, 때때로 시골과 해안으로 여행을 떠났고 마리아 루이사는 지역 귀족들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은 채 개인 생활을 즐겼다.
1790년 시아주버님인 요제프 2세가 자녀가 없이 사망하자 남편 레오폴트가 합스부르크 세습령을 물려받고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레오폴트 2세로 선출되자 마리아 루이사도 함께 신성 로마 제국의 황후가 되었다. 레오폴트 2세 일가는 빈으로 이사했고 그곳에서 마리아 루이사는 독일어인 마리아 루도비카로 불렸다. 하지만 레오폴트 2세는 즉위한 지 2년 만인 1792년 3월 1일 사망했다. 마리아 루도비카 역시 장남 프란츠 2세가 레오폴트 2세의 뒤를 이어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선출되는 것도 보지 못하고 레오폴트의 사후 3개월도 채 되지 않아 46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사후 카푸친 교회의 남편 옆에 안장되었다.
본인 | 부모 | 조부모 | 증조부모 |
스페인의 인판타 마리아 루이사 (Infanta María Luisa de España) | |||
파르마의 공세자 오도아르도 파르네세 (Odoardo Farnese di Parma) | |||
브란덴부르크바이로이트의 크리스티아네 에베르하르디네 (Christiane Eberhardine von Brandenburg-Bayreuth) | |||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요제파 (Maria Josepha von Österreich) | |||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 / 자녀 |
1녀 | 안톤 슬하 1남 3녀 | |||
1남 | 뷔르템베르크의 엘리자베트 슬하 1녀 | |||
외스터라이히에스테의 마리아 루도비카 | ||||
2남 | ||||
작센의 마리아 페르디난다 | ||||
2녀 |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안나 여대공 (Erzherzogin Maria Anna von Österreich) | |||
3남 | 나사우바일부르크의 헨리에타 슬하 4남 2녀 | |||
4남 | 오스트리아의 알렉산더 레오폴트 대공 (Erzherzog Alexander Leopold von Österreich) | |||
5남 | 오스트리아의 알브레히트 요한 요제프 대공 (Erzherzog Albrecht Johann Joseph von Österreich) | |||
6남 | 오스트리아의 막시밀리안 요한 요제프 대공 (Erzherzog Maximilian Johann Joseph von Österreich) | |||
7남 | 러시아의 알렉산드라 파블로브나 여대공 슬하 1녀 | |||
안할트 베른부르크-샤움부르크-호임의 헤르미네 슬하 1남 1녀 | ||||
뷔르템베르크의 마리아 도로테아 슬하 2남 3녀[9] | ||||
3녀 | 칼라브리아 공작부인 마리아 클레멘티나 (Maria Klementine, Duchessa di Calabria) | 프란체스코 1세 슬하 1남 1녀 | ||
8남 | ||||
4녀 |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아말리아 여대공 (Erzherzogin Maria Amalia von Österreich) | |||
9남 | 안나 플로흘[귀천상혼] 슬하 1남 | |||
10남 | ||||
11남 | 오스트리아의 루트비히 대공 (Erzherzog Ludwig von Österreich) | |||
12남 |
[1] 파르마 공국은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으로 마리아 루이사의 숙부 펠리페 왕자가 파르마 공작 필리포 1세로 즉위하여 보르보네파르마 가문을 개창하였다.[2] 남편의 불륜도 불평 없이 받아들였다고 한다. 레오폴트의 가장 잘 알려진 정부 중에는 안나 고어 카우퍼가 있었고 또 다른 정부로는 발레리나인 리비아 라이몬디가 있었는데 레오폴트는 자신의 사생아인 루이지 폰 그륀(1788~1814)을 낳은 리비아에게 피렌체 산 마르코 광장에 있는 궁전을 선물했다고 한다.[3] 팔츠 선제후 필리프 빌헬름의 딸.[4] 친할머니 마리아 테레지아가 자식들에게 장녀를 낳으면 자신의 이름으로 지으라고 명해서 할머니의 이름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친사촌과 고종사촌들도 장녀인 경우 똑같이 할머니의 이름을 딴 경우가 많다. 대표적으로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 여대공(요제프 2세의 장녀), 프랑스의 마리 테레즈, 나폴리와 시칠리아의 마리아 테레사 공주 등.[5] 프랑스의 황후 마리 루이즈, 오스트리아의 황제 페르디난트 1세, 브라질의 황후이자 포르투갈의 왕비 마리아 레오폴지나, 프란츠 카를 대공 등[6] 외삼촌 페르디난도 1세와 고모 마리아 카롤리나 여대공의 차녀이자 위에 나온 마리아 테레사의 동생으로 사촌 간의 겹사돈이다.[7] 레오폴도 2세 등[8] 프리드리히 대공, 스페인의 왕비 마리아 크리스티나, 카를 슈테판 대공, 오이겐 대공의 외조부(4녀 엘리자베트 프란치스카의 자식들.)다.[9] 벨기에의 왕비 마리 앙리에트 등[10] 1801~1803년 쾰른 선제후였다. 쾰른 선제후국이 프랑스 제1공화국에 합병된 후 튜튼 기사단장을 맡다가 빈 회의로 롬바르디아-베네치아 왕국이 신설되며 부왕이 되었다.[11]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의 외증조할아버지다. 안나 플로흘(Anna Plochl, 1804~1885)이라는 우체국장의 딸과 귀천상혼해서 둘 사이의 외아들 메란 백작 요한 슈테판은 백작 지위를 받았고 요한 슈테판의 외손자가 바로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 요한과 안나의 이야기는 2009년 오스트리아에서 나온 '사랑하는 요한, 사랑하는 안나'(Geliebter Johann Geliebte Anna)라는 90분짜리 단편 드라마의 소재가 되었다.[귀천상혼] [13] 1818년부터 1848년까지 롬바르디아-베네치아 왕국 부왕으로 재임했다.[14] 사르데냐-피에몬테 국왕 카를로 알베르토의 여동생.[15] 사르데냐의 왕비 아델라이데 등[16]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후원자이자 제자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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