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스탄틴 치올콥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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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역사
콘스탄틴 치올콥스키
Константин Циолковский
Konstantin Tsiolkovsky
치올코프스키
본명
Константин Эдуардович Циолковский
콘스탄틴 에두아르도비치 치올콥스키
출생
러시아 제국 랴잔현 스파스키 지구 이젭스코예 마을
사망
1935년 9월 19일 (향년 78세)
국적
직업
학력
소속
종교
서명
Konstantin Tsiol...
수훈
 
 
 
 
 
 
 
 
 
 
 
 
 
 
 
 
 
 
 
 
 
 
 
 
 

1. 개요2. 일생
2.1. 어린 시절2.2. 학자2.3. 말년과 사망
3. 업적
3.1. 우주 항법3.2. 항공학3.3. 외계 행성, 외계인3.4. 우주 탐사 방법론3.5. 우주의학과 트랜스휴머니즘
4. 일화5. 기타6. 어록

 
 
 
 
 
 
 
 
 
 
 
 
 
 
 
 
 
 
 
 
 
 
 
 
 
 
 
 
 
 
 
 
 
 
 
 
 
 
 
 

1. 개요[편집]

 
 
 
 
 
 
 
 
 
 
 
 
 
 
 
 
 
 
 
 
 
 
 
 
 
 
 
 
 
 
 
 
 
 
 
 
 
 
 
 
Земля - это колыбель разума, но нельзя вечно жить в колыбели.
지구는 인류 문명의 요람이지만, 그 누구도 요람 속에서만 평생을 살아갈 수는 없다.

우주 개발과 우주 개척의 필요성을 역설한 그의 유명한 격언.

러시아 제국-소련물리학자, 공학자, 작가.

로켓 방정식과 다단식 로켓 개념을 제시하여 현대 우주공학의 이론적 기초를 마련한 인물로, '우주 시대의 선구자'로 불린다. 그의 연구는 훗날 소련의 우주 개발 프로그램에 직접적인 사상적, 기술적 기반을 제공하였고, 전세계 우주항공 분야의 발전에 장기적인 영향을 미쳤다.

세계 최초 인공위성스푸트니크 1호도 1957년 그의 탄생 100주년에 맞춰 발사[11]된 것이다.
 
 
 
 
 
 
 
 
 
 
 
 
 
 
 
 
 
 
 
 
 
 
 
 
 
 
 
 
 
 
 
 
 
 
 
 
 
 
 
 

2. 일생[편집]

 
 
 
 
 
 
 
 
 
 
 
 
 
 
 
 
 
 
 
 
 
 
 
 
 
 
 
 
 
 
 
 
 
 
 
 
 
 
 
 

2.1. 어린 시절[편집]

 
 
 
 
 
 
 
 
 
 
 
 
 
 
 
 
 
 
 
 
 
 
 
 
 
 
 
 
 
 
 
 
 
 
 
 
 
 
 
 
1857년 9월 17일, 러시아 제국 라잔현 이젭스코예 마을의 산림관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인 에두아르드 이그나티예비치 치올콥스키[12]는 몰락한 폴란드-리투아니아 대공국의 귀족이자 자연과학 교사이자 지방 산림청 관료였다. 어머니인 마리야 이바노프나 유마셰바[13]타타르의 소규모 지주 귀족이자 상공업 협동조합의 경영자였다. 자연과학 교사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릴때부터 수학, 물리학, 천문학 등 자연과학 분야에 자연스럽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다가 10살 무렵 겨울에 아버지 친구의 아이들과 같이 눈썰매를 타고 놀다가 성홍열을 앓았고, 이 때문에 청각 장애에 걸렸다. 이 점이 학습과 공부에 여러모로 방해가 될 것이란 것을 염려하던 어머니의 결정으로, 집에서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홈스쿨링을 받다가 1872년, 12세에 아버지가 자연과학 교사로 부임했었던 밧캬의 김나지야(중등학교)로 보내졌다. 그러나, 경직되고 수동적인 학교 분위기에 청각 장애가 있어서 학교 생활에 적응을 못하였다. 그리고 14살일 때 치올콥스키의 어머니가 사망하면서, 그는 힘든 삶을 살기 시작하였다.

1874년, 16세 때 청각 장애와 권위주의적인 학교 생활 부적응과 매우 불규칙적인 시험 성적 때문에 다니던 학교로부터 퇴학 조치를 받게 되었다. 그 이후부터는 자기 관심 분야, 특히 자연과학 관련 학문에 한정해서 독학에 더더욱 열정적으로 임했다. 19살 때까지 그는 여러 도서관들을 방문하는데에 아주 많은 시간을 할애했었다. 굳이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스스로 완전 독학으로 물리학, 천문학, 수학, 의학, 생태학, 철학, 문학 등등의 다양한 학문들을 공부[14]하면서 꾸준한 학습 과정을 거쳤다. 이미 어릴 때부터 본격적인 독학을 시작하였고, 특히 14살 때부터는 수학에 대한 큰 관심과 강한 학구열을 가지게 된 이후, 어릴 적부터 모스크바와 같은 대도시에서 명성을 나름 얻고 싶어했었던 야망이 올랐다. 그의 부단한 노력 끝에 자신의 아버지로부터 학문적 능력이 있음을 인정받았으며, 16세에 아버지의 지인이자 천문학자인 아리스타크 아폴로노비치 벨로폴스키의 기술학교 입학 추천서를 받은 아버지 에두아르드의 동행 하에 치올콥스키는 모스크바로 보내졌다.

이후 모스크바에 도착한 치올콥스키는 모스크바 남동부 행정 구역의 레포트로보 시립 지구 쌀닷츠카야 거리의 월셋방[15]에 세를 들어살기 시작했다. 그리고 루먄체프 공공 도서관[16]에서 자기 자신에게도 엄격하고도 체계적인 독학을 시작하였으며, 비교적 안정적인 생계를 유지하고자 곧바로 모스크바의 유명한 도서관 중 하나였던 체르트콥스카야 공공 도서관[17]으로 찾아가서 면접을 본 뒤, 최종적으로 합격하여 그곳의 보조 관리인으로서 일을 시작하였다. 매일 열심히 주경야독 비슷한 생활을 열심히하기 시작한 치올콥스키는 도서관의 보조 관리인이 된 지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자신의 기억에 남을 스승이 될, 체르트콥스카야 공공 도서관의 정식 관리인 중 한 명인 니콜라이 표도로비치 표도로프를 만나게 되었다.

당시 러시아 우주철학의 창시자 중 한 명이자 러시아의 소크라테스라고 불리던 니콜라이 표도로프는 첫 만남 이전부터 자신의 일터를 기웃거리며, 열심히 업무와 학습에 집중하고 있었던 치올콥스키를 잘 알고 있었다. 물론, 이런 부류의 만남이 그러하듯 치올콥스키는 소문으로만 듣던 위대한 철학자인 니콜라이 표도로프와의 첫 만남 과정이 그리 설레지는 않았다. 그도 그럴게, 평소에 피곤한 표정의 왠 노숙자같이 생긴 늙은 관리인이 근무시간에 꾸벅꾸벅 졸다가 옆에 서있던 다른 관리인에게 "태업하지 마십시오!"라는 경고를 받는 광경을 자주 봤었기 때문이였다. 치올콥스키는 처음엔 그 노인이 유명한 지식인인 표도로프라는 사실을 전혀 몰랐었고, 나중에서야 경고를 받던 그 늙은 관리인의 정체를 깨닫게 되었다. 평생을 검소하고, 겸손하게 살면서 주변인들에게 정교회적 아가페를 실천하던 재야의 유명 지식인인 표도로프가 그 이름 모를 게으른 노사서였다는 점을 뒤늦게 깨닫고는 치올콥스키는 표도로프를 찾아가 성급한 무례를 용서해달라면서, 그의 제자가 되길 요청하였다.

첫 만남은 우스꽝스러웠지만 흔치않은 몽상가이던 두 사람의 공통점은 제자와 스승의 관계로 발전시키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표도로프에게 직접 찾아가서 자신을 제자로 받아달라는 간곡한 요청을 마침내 표도로프로부터 승낙받은 치올콥스키는 표도로프와 사제 관계를 가지고, 서로 친해지는 과정에서 그의 지도 아래, 이따금 제정 러시아 정부로부터 금서로 지정된 책들과 러시아 내에서 구하기 어려운 책들을 몰래 숨겨두고 있었던 표도로프를 통하여 이런 금서들을 몰래 빌려 읽거나, 표도로프에게 러시아 우주철학에 대하여 아주 상세하게 배우거나, 당대 유명한 지식인들과 교류함으로써 자신의 우주 개척을 향한 갈망에 대해 큰 열정을 불어넣으면서도, 다방면에서의 독학과 탐구, 지적 교류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1873년부터 1876년까지 3년 동안의 엄격한 독학은 그의 건강이 악화되도록 만들었다.[18] 이 모습을 지켜보던 동료 도서관 관리인이자 그의 청소년기 때 유일한 후원자였던 니콜라이 피사레프가 치올콥스키의 아버지와 여러차례 편지를 주고 받으면서, 폐인에 가까운 몰골이 된 치올콥스키가 걱정된다며 부자간 만남의 자리를 주선하였다. 직장 동료인 피사레프의 초대를 받고 따라온 치올콥스키는 이미 몇 차례 자기 자신의 건강 문제에 대해 걱정하던 가족들, 특히 모스크바로 찾아온 아버지가 자신의 피폐한 몰골에 충격을 받은 나머지 아들에게 염려가득한 목소리로 훈계하는 것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피사레프가 보낸 편지의 내용대로 건강과 외관이 망가질대로 망가진 아들의 모습에 경악하면서, "어디에 재정착하던 상관없으니, 적어도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안정적인 직업과 거처를 얻어두어라. 네가 성인이 된 이후부터는 널 책임지기는 힘들겠구나."란 마지막 경고가 섞인 꾸지람을 듣던 치올콥스키는 아버지가 아주 오래간만에 사주시는 외식을 먹다가 이내 미래 진로와 관련히여 잠깐 생각에 빠졌고, 결국에는 장기적 관점에서 이대로 살다가는 정말로 죽을지도 모른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에 아버지의 설득이 타당하다고 여겼으며, 마침내 치올콥스키는 아버지의 의견을 따르기로 하였다.

때문에 체르트콥스카야 공공 도서관과 표도로프에게 작별을 하고 1876년, 그의 아버지가 근무하던 부임지 밧캬로 아버지를 따라서 모스크바를 떠났다. 밧캬에서 명망높은 지식인이자 자유주의자들의 대표인으로서 나름 잘 알려진 아버지의 인맥을 통해, 과외 교사로써 잘 사는 집안의 자제들을 1:1로 지도하고, 그 댓가로 25코페이카부터 1루블까지의 비고정적인 수업료를 받으며 살아갔다.
 
 
 
 
 
 
 
 
 
 
 
 
 
 
 
 
 
 
 
 
 
 
 
 
 
 
 
 
 
 
 
 
 
 
 
 
 
 
 
 
 
 
 
 
 
 
 
 
 
 
 
 
 
 
 
 
 
 
 
 
 
 
 
 
 
 
 
 
 
 
 
 
 
 
 
 
 
 
 
 
1876년, 뱟카에서 주로 대수학과 기하학을 가르치던 그는 마침내 안정적인 생활을 하면서 꿈에 그리던 자신만의 작업용 실험실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 시련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1875년에 여동생이 사망하였고, 고등 교육 과정을 밟고 있었던 전도유망한 그의 남동생 이그나티우스도 발진티푸스로 사망하였다. 아버지 에두아르드마저도 청각 장애와 심각한 신경성 장애를 앓기 시작하자, 치올콥스키는 1878년 약 2년 동안 해왔던 과외 교사 활동을 그만 두고, 고향인 라쟌현을 향해 돌아갔다. 치올콥스키의 형들 중 이오시프는 카잔 보병 학교의 수료생, 즉 장교 신분이였던 만큼 러시아-튀르크 전쟁에 참전해야만 하였다. 다만 1878년 11월 12일에 러시아-튀르크 전쟁 중 입대 영장을 받고 신체 검사를 받았는데 청각 장애와 근시 문제로 인해 영구적인 병역 면제를 받았다.

라쟌의 임대 아파트에서 하는 일 없이 세월을 보내던 치올콥스키는 점점 생활고에 시달리게 되었다. 그나마 할 줄 아는 교육 분야에서 먹고 살고자, 1879년 9월달에는 외부 활동인 자격으로 공립학교 교사 임용고시의 첫 시험에 통과하였으며, 제일 어려웠던 마지막 시험에서도 통과하였다. 시범 교사로서의 수업과 수학 및 기하학 분야에서의 능력 검증을 끝으로 4개월 동안 공식적인 공립학교 교사 임명장이 올 때까지 밧캬 인근 농촌 지역 대지주의 자제들을 상대로 다시 한 번 과외를 지도하거나, 우연히 농촌에서 알게된 한 소녀에게 글을 읽고 쓰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등 시간을 적절하게 떼우면서 보내고 있었다.

마침내, 1880년 1월 24일에 보롭스크 시립 중등학교로부터 수학 및 기하학 교사라는 직책을 수여한다는 공식 임명장을 받아내고는 첫 부임지를 향해 이삿짐을 싸기 시작하였다. 이 소식에 기뻐하기 시작한 그의 아버지가 32루블의 비싼 외투를 주문 제작한 것에 대해 나름 신경이 쓰였었는지 첫 수업으로 받은 급여의 일부를 아버지에게 용돈으로 보내주었지만, 1년 뒤 1881년 1월 9일에 에두아르드가 갑작스럽게 급사하였다. 치올콥스키는 그 당시 보롭스크에서 한참 바쁘게 일할 때였으며, 아버지의 부고 소식이 담긴 편지는 너무 늦게 도착하였다. 소식이 너무 늦었던 탓에 치올콥스키는 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여할 수 없었고, 이 때문에 그는 가족과 의도치 않게 절연한 사람이 되었다.

보롭스크에 도착한 뒤, 치올콥스키는 지역의 호텔에 머물렀다가 보롭스크 시립 중등학교의 교장인 톨마셰프의 초대를 받아 교장의 집에 도착하였다. 그가 도착하기 직전에 모금 활동으로 얻은 장려금으로 집을 구하길 바란다며 교장으로부터 모아둔 돈을 받아내었고, 마침 근무지 근처에 빈 집이 있던 상황에서 그 집의 소유주와 계약을 맺었다. 그러나 어느 날, 숙면을 취하던 중에 원인 불명의 일산화탄소가 마구 쏟아져나오면서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사망할 뻔하였다. 이 때문에 다음 날 날이 밝자마자 원인 파악에 나섰다가 난방장치가 아주 허술하게 설치된 것을 알게된 치올콥스키가 곧바로 건물주를 불러서 계약을 단칼에 해지하였다. 이후에 예디노베리예 정교회 구교파 교회의 신부이자 집주인인 "예브그라프 예고로비치 소콜로바"로부터 3칸짜리 방이 딸린 아파트를 임대받았고, 그 곳에서 예브그라프 신부가 꽤나 주당이라 벌어지는 사소한 문제들을 제외한다면, 이웃이자 집주인인 소콜로프 가족과 직장 상사인 톨마쵸프 교장, 동료인 체르트코프 교사는 물론 보롭스크의 이웃들과 친근한 관계를 형성할 수 있었고, 나름 편한 생활을 보낼 수 있었다.

보롭스크 시립 중등학교에서 근무를 선지 몇 개월만에 집주인인 소콜로프의 딸, 바르바라 소콜로바와 결혼하였고, 몇 년에 걸쳐서 슬하에 7명의 남매 자녀들을 두게 되었다. 그리고 보롭스크에서의 근무 기간 중 남는 시간에 치올콥스키는 처음으로 학문적 성과를 내고자 하였는데, 1882년부터 1883년까지 동일한 내용을 담은 논문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른 채, 물리적 동역학과 공기 및 유체역학적 유사성에 관한 과학적 연구 논문인 "균일하게 움직이는 평면에 대한 액체의 압력[19]"을 저술하여 학계에 기고하였다. 나중에 치올콥스키는 학계 관계자로부터 '이미 이전에 연구된 바가 있는 주제'라며 무뚝뚝한 답장을 받는 것으로 별 관심을 받지 못하는 듯 하였으나,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교러시아 물리화학회의 공동창립자 중 한 명인 "표트르 페트로비치 판데르플리트"로부터 일개 시골 도시 중등학교의 수학 및 기하학 교사치고는 유능하고 과학적인 면에 대해 주목을 받았고, 그 결과 플리트로부터 러시아 물리화학회의 정회원 자격과 권리를 수여받을 수 있었다.

이후에 승진 가도를 달려가던 치올콥스키는 1886년부터 1887년까지 대형 제어 열기구의 비행에 관한 계산을 완료하여 후에 금속 항공기와 우주 발사체에 대한 이론적 기초를 쌓을 수 있었고, 1887년 봄에는 보롭스크를 방문한 파벨 미하일로비치 골루비츠키는 치올콥스키에게 방문하여 짧은 모스크바 여행 계획을 같이 세웠다. 골루비츠키와 같이 모스크바를 여행하다가 그 곳에 있는 폴리테크닉 박물관에서 열린 "자연 과학, 인류학 및 민족지학 애호가 협회"에서 금속 열기구에 관한 보고서를 읽었고, 이는 나중에 그가 항공우주 분야에서 선각자로서 두각을 드러낼 수 있도록 하는 좋은 지적 기반이 되어주었다.

그러나 치올콥스키는 또 다시 한 번 시련을 맞이하고 마는데, 집에 돌아온 치올콥스키는 이웃 농부가 숯 버너로 요리를 하다가 실수로 치올콥스키의 집 근처의 건초 헛간에 불을 지르게 되었고, 이 불이 자신의 집까지 번져서 집과 재산은 물론이고, 그 동안 쌓아둔 연구 기반들이 대부분 불에 타버린 탓에 심한 상실감과 우울증에 걸리고 말았다. 그러나 거기서 시련은 끝나지 않았는데, 집을 잃고 식구들을 데리고 이웃들의 집에서 더부살이를 하다가 강변에 위치한 새로운 집으로 이사를 갔으나, 1888년 매우 이례적인 대홍수로 집 전체가 유실되어 그나마 얼마없던 연구 기반마저 전부 집과 함께 흙탕물을 뒤집어 쓴 쓰레기가 되었다.

결국엔 이성의 끈을 거의 다 놓아버리고만 그는 그 당시 선진적이고도 진보적인 교육을 하던 극소수의 교육자였었으나, 많은 인내심은 남아있었지만 예전과 같은 평정심을 잃고 방황하면서 폭력성을 가진 사람으로 잠깐동안 변모하였었다. 여타 같은 학교의 동료 교사들처럼 말도 안 되는 요구는 기본이요, 모욕과 체벌을 통해 원하는 학습 요구를 달성하도록 강제하였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마음을 추스를 수 있었다.

그렇게 치올콥스키는 묵묵히 교육 공무원으로서의 책무를 다하였고, 그 공로로 1889년에 교육 공무원으로서는 고위직인 직책을 수여받았고, 이를 통해 자신의 교육학적 경험을 지속적으로 향상시켜나갔다. 1890년에 그는 보롭스크 시립학교의 교육 위원회에서 승인한, 1~3학년을 위한 대수학 및 기하학의 새로운 커리큘럼을 개발하였다. 1890년 여름에 모스크바 교육청의 관리위원이 치올콥스키에게 블라디미르 학교로의 전근을 제안했고, 치올콥스키는 이에 동의했지만, 전근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치올콥스키는 자신이 금속 비행선 프로젝트를 마무리하고 있다고 10월 23일 러시아 기술 협회와의 정기 회의에서 보고하였다. 프로젝트 자체는 승인되었지만 비현실적이란 이유로 자금 조달은 거부되었다. 1891년, 치올코프스키는 전금속 단엽 비행기 프로젝트를 맡았고, 부단한 노력 끝에 이 혁신적인 발상의 비행기를 니콜라이 예고로비치 주콥스키에게 보냈는데, 당시 러시아 항공공학 학계의 저명한 공학자 중 한 명이였던 주콥스키는 비행기에 대해 매우 호의적으로 평가하였다.

그리고 평소에 전근을 원하던 치올콥스키에게 마침내 기회가 찾아왔다. 1892년 1월 27일, 칼루가 주의 공립학교 교장인 운콥스키가 가장 유능하고 성실한 교사 중 한 명인 치올콥스키를 칼루가로 전근시켜 달라는 탄원서를 모스크바에 제출하였고, 2월 4일, 그 청원이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보롭스크 시의 시민들은 도시에 뛰어난 업적과 공로를 세운 치올콥스키에게 엄숙한 작별 인사를 하였고, 소년 합창단은 작별의 노래를 불렀으며, 동료이자 상사, 후배인 교직원들은 그에게 작별 인사를 하였다.
 
 
 
 
 
 
 
 
 
 
 
 
 
 
 
 
 
 
 
 
 
 
 
 
 
 
 
 
 
 
 
 
 
 
 
 
 
 
 
 
 
 
 
 
 
 
 
 
 
 
 
 
 
 
 
 
 
 
 
 
 
 
 
 
 
 
 
 
 
 
 
 
 
 
 
 
 
 
 
 
1892년, 정들었던 보롭스크 시를 뒤로 하고, 몇몇 동료들과 같이 칼루가에 전근 온 치올콥스키는 보롭스크에 남아서 일하던 지리학 교사 에르옘예프의 도움으로 칼루가 시의 게오르기옙스카야 거리에 있는 임대 아파트로 이사를 마쳤고, 치올콥스키는 그 직후 지역 중등학교의 수학 및 기하학 교사로서 근무를 시작하였다.

그는 칼루가에서의 새로운 삶을 보내던 중에 이 지역의 최고 유력자이자 귀족 가문의 가주인 드미트리 야코볼레프 쿠르소노프와 원만한 관계를 가지고자 노력하였고, 이후에 그와의 사이가 괜찮아진 쿠르소노프의 아들들을 1대 1 지도 과외를 통해 학습을 시켰다. 칼루가에서의 교직 생활 동안에도 수 많은 연구개발과 실험을 손놓지 않고 열심히 연구를 이어나갔으며, 1890년대 후반 그의 주요 연구는 전금속 단엽 비행기와 전금속 모듈화 비행선이였고, 이를 검증하기 위한 풍동 실험실을 러시아 최초로 건축하여 과학 실험에 적극적으로 사용하였다.

허나 자신의 몸을 제때 돌보지 않는 습관을 고치지 못했고, 막내 아들인 레온티를 백일해로 잃었던 상황에서 스트레스를 평소에 많이 받는 업무를 계속한 탓에 복막염에 걸린지도 몰랐던 치올콥스키는 더 심각해지기 전에 병원에 입원하였다. 내과 의사의 꾸준한 치료와 복막염 수술로 병을 고칠 수는 있었지만, 기력이 많이 상했던 탓으로 가사 상태를 통해 죽음을 체감하게 되었다. 이후에 체력과 면역력을 점차 회복하여 기적적으로 다시 깨어난 치올콥스키는 잠깐 동안의 재활 치료 기간을 가졌다. 1899년부터는 칼루가 시에 소재한 정교회 성직자들의 영애들을 가르치는 폐쇄적인 수도원 겸 교구 여학교에서 물리학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같은 해인 1899년부터 풍동 실험실에 대한 확충과 기자재 구매를 위하여 러시아 물리-화학 아카데미에 기체 역학과 관련된 실험 지원에 관한 요청을 지속적으로 보내왔고, 끝없는 요청에 대한 결과로 1900년에 아카데미로부터 470루블의 연구 투자금을 배정받을 수 있었고, 자신의 집 한켠에 있는 실험실에 해당 자금을 투자, 개선된 연구 환경에서 비행기와 비행선에 대한 지속할 수 있었다. 게다가 흠잡기 어려운 지난 20년간의 꾸준한 교직원으로서의 노고를 인정받아, 교육당국으로부터 연간 324루블의 연금을 수령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끝없는 가정의 빈곤과 정신적 고통에 가족들은 더 이상은 버틸 수 없었다. 자신의 아들과 딸들은 자기 자신의 관심사와 연구, 특히 과학에 대한 집착을 더 이상 이해할 수 없게 되었고, 그 직후 결정적으로 치올콥스키가 1903년에 그 유명한 '반작용 추진 장치를 이용한 우주 탐사 연구'를 학계에 기고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모스크바 대학교로 유학을 떠났던 장남 이그나트가 시안화칼륨을 음독하는 극단적 선택을 내리고 말았다. 가장 자신이 아끼던 아들의 죽음에 치올콥스키는 장례식장에서 의식을 잃고 실신하기도 하였으며, 장례식이 끝난 직후에는 크나큰 정신적 충격 때문에 사회생활에 어려움을 겪고, 향후 10년 동안 매우 눈에 띄는 그 어떠한 형태의 활동들 : 연구도, 실험도, 저작도 하지 않은 채 조용히 내면을 추스르는 시간을 보낸다. 허나 그러한 고통스러운 세월 속에서도 연구를 계속해서 멈추지는 않았다. 바로 우주 개척을 위한 상상과 추론들을 현실로 옮기기 위하여 내면에서의 자기 사고 실험들을 조용히 진행하고 있었다.

칼루가에서 그를 이름만 들은 사람들, 즉 보롭스크에서 치올콥스키가 이미 많이 봐온 평범한 농촌 도시의 평범한 사람들은 치올콥스키의 행동과 주장, 그리고 상상에 대해 현실성이 하나도 없어보이는 이야기나 하는 몽상가이자 이상한 장신구(실제론 과학 연구와 실험과 관련됨 기자재지만)에나 열광하는 정신나간 괴짜라는 취급을 하였음에도 치올콥스키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이론이 확고한 가능성의 과학적 추론임을 더 입증하고자 노력했다. 다만, 고등 교육을 받은 그의 주변 동료와 후배, 상사, 지인들은 그에게 대체로 좋은 평가를 내렸는데, 일전부터 치올콥스키의 저작물들을 둘러보았기에 그러하였다. 그가 재능 좋은 교직원이자 독학 과학자인 것을 알고 있었던 주변인들은 그의 이론에 감탄하며 언젠가는 실현 가능성이 높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었다.

그리하여 치올콥스키는 전금속 모듈화 비행선 아이디어를 실현시키기 위한 후원 모금과 홍보 활동을 계속하였고, 치올콥스키를 후원해주던 사람들 중에서는 무려 러시아 항공학의 시조인 니콜라이 예고로비츠 주콥스키가 있었다. 10년 동안 전금속 비행 물체에 대한 연구와 개발, 실험을 지속하면서 마침내 비교적 만족스러운 결과물을 낼 수 있었고, 1909년 6월 26일에 비행선 외피의 금속판을 움직일 수 있게 연결하는 설계가 담긴 특허 신청서가 재무부 산하 무역제조부에 제출되었다.

같은 해 12월 중순까지 독일과 영국에서도 유사한 특허가 신청되었고, 등록 절차에 많은 비용이 들기 때문에, 1910년 1월 치올콥스키는 '실험 과학 및 실용적 응용 진흥 협회'에 지원 신청서를 제출하였고, 주콥스키에게 청원서를 제출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5월에 협회 위원회에서는 치올콥스키에게 시제형 모델 제작을 위해 400루블을 할당하였고, 동시에 1910년에는 벨기에와 스웨덴에서, 12월에는 이탈리아에서 전금속 비행선 외피의 시트를 결합하는 방법에 대한 특허가 신청되었다. 치올콥스키는 특허를 얻기 위한 자금을 찾지 못했지만, 1911년까지 그는 오스트리아와 미국에 특허를 신청했고, 이 신청은 러시아에서도 수락되었다.

프랑스어로 발행된 잡지 'L'Aeronaute'에 콘스탄틴 에두아르도비치의 연구개발과 실험 성과에 대한 기사가 기고되면서 그의 고국에서의 관심을 크게 높였으며, 칼루가 시민 자연 연구 협회의 명예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1913년에는 우주 정복이라는 같은 꿈을 꾸고 있었던 수학자 겸 물리학자인 야코프 이시도비치 페렐만을 만나서 그와 학문적 동지 관계를 맺었다. 계속해서 자신의 전금속 모듈화 비행선 아이디어를 받아줄만한 곳을 찾다가 러시아 제국군에 자신의 설계 아이디어를 제시하였지만 거절당하였고, 1914년에 그는 제3회 전러시아 항공기술자 대회에 참여하였다. 1914년에 해당 대회에서 주콥스키와 같은 항공학 권위자들은 치올콥스키의 작업에 대해 최종적으로 부정적인 의견을 내놓았고, 이에 대한 자금 지원이 부적절하다고 인정하였으며, 직후 연구 지원은 그대로 단절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에는 러시아 제국 내의 교통 시스템을 혁신하고, 제국의 언어를 통합하고자 하는 유토피아 프로젝트에도 참여했으나, 이 프로젝트 자체가 당시로서는 실현 가능성이 전무하였던 탓에 1년만에 해당 프로젝트가 거절당했다. 이후 생계를 위해서 1916년에 칼루가 로마노프 고등학교에 계약직으로 입학하였고, 기존에 근무하던 교구 여성 학교에서 해임되었다. 그리고 그의 인생은 여기서부터 또 다른 전환점을 맞이한다. 야코프 이시도비치 페렐만과 표트르 파블로비치 칸닌그와 같은 동지 겸 추종자들의 도움으로 치올콥스키의 이론과 업적들이 러시아 전역으로 점차 홍보되기 시작하였고, 1917년 여름에 치올콥스키는 교직원 은퇴 신청서를 교육당국에 제출, 건강검진을 받음으로서 교육부 장관에게서 은퇴를 허가받았고, 이후부터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독학 과학자이자 철학자이며, 지식인으로서의 활동을 시작하였다.
 
 
 
 
 
 
 
 
 
 
 
 
 
 
 
 
 
 
 
 
 
 
 
 
 
 
 
 
 
 
 
 
 
 
 
 
 
 
 
 

2.3. 말년과 사망[편집]

 
 
 
 
 
 
 
 
 
 
 
 
 
 
 
 
 
 
 
 
 
 
 
 
 
 
 
 
 
 
 
 
 
 
 
 
 
 
 
 
1917년 11월 27일(12월 11일), 러시아 혁명으로 칼루가 시에 소비에트 정권이 수립되었다. 이제 60세의 노인이 된 치올콥스키는 청각 장애로 인해 혁명기에 정치 토론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자서전에서 자신을 "볼셰비키"로 여겼다고 주장했다. 그 해 12월에 인민대학교 개교 후, 치올콥스키는 그곳에서 미래 사회의 사회 구조와 지식 철학에 대한 여러 강연을 했지만, 삶은 극도로 궁핍해졌다. 물가가 급등하는 상황에서 불규칙적으로 지급되는 연금은 턱없이 부족했고, 때로는 장작이나 등유 등 난방 물품이 부족하여 사람들은 불을 피우기 위해 횃불까지 사용해야 했던 상황이였다. 다행이도, 딸인 안나 콘스탄티노브나가 식량부에서 270루블의 월급을 받고 일했기 때문에 콘스탄틴의 가족은 굶주리지 않았을 수 있었다.

1918년 7월 1일, 모든 기존 교육 기관이 문을 닫았고, 치올콥스키는 교구 학교에서 시간제 근무를 할 기회를 잃었다. 그 결과, 7월 30일 그는 청원서를 가지고 사회주의 사회•과학 아카데미에 지원했고, 월급 300루블의 정회원으로 받아들여졌다. 또한 11월 1일부터 콘스탄틴 에두아르도비치는 II급 제6 소련 노동학교의 교사로서 다시 활동하였고, 1919년 2월, 치올콥스키는 남부 전선 사령부와 인민위원회에 풍선과 비행기에 대한 팜플렛을 널리 배포하기 시작했다. 그는 소련 공군 총사령부의 관심을 끌었지만, 주콥스키를 포함한 위원회는 5월 30일 치올콥스키의 비행선 건조 가능성에 대해 부정적인 결론을 내렸다. 1919년 10월 5일, 치올콥스키의 아들 이반은 장폐색과 상한 자우어크라우트로 인한 식중독으로 고통스럽게 사망하였고, 콘스탄틴은 또 마음에 큰 상처를 입고 말았다.

그러다, 같은 해 11월 17일, 심신의 안정을 취하던 치올콥스키는 체카에 의해 체포되어 모스크바로 압송되었다. 이에 칼루가의 모든 지식인과 시민들이 항의 차원에서 시위와 집회, 그리고 구명을 위한 서명 활동으로 맞섰다. 그 중에서도 칼루가 시의 교육계 인사들이 가장 격렬하게 항의하며 청원서를 당국에 제출하였다. 이에 모스크바 체카 특별부장인 Е. Г. 에브도키모프의 명령으로 다시 재조사를 해본 결과, 체포 사유는 단순한 오해로 인한 신고로 밝혀졌고, 2주 후인 12월 2일에 체카의 지하감옥에서 풀려남으로서 사건은 종결되었다. 이때 의아한 점으로는 콘스탄틴 치올콥스키가 펠릭스 제르진스키개인적으로 소통했다는 소문이 돌기도 하였고, 치옽콥스키 본인도 고문과 심문이 뒤따를 줄 알았으나, 바깥보다 더 좋은 양질의 식사와 잠자리를 제공받으면서 지냈다는 점이었다.

어찌되었던, 모스크바에서 풀려난 그는 화물 열차를 타고 칼루가로 돌아왔는데, 탑승하는 동안 열차 운행 중 사고로 다리를 심하게 다쳐 간신히 집으로 돌아왔지만, 몸을 살펴볼 겨를도 없었다. 그가 칼루가로 돌아온 후 1919년 12월 즈음에 자신이 제일 아끼던 지역 청년 중 한 명인 P. P. 칸닌그가 병으로 사망했단 소식에 콘스탄틴은 크게 통곡하며 슬퍼했다. 이후 마음을 추스른 뒤 1920년 6월, 치올콥스키는 우주과학 애호가 협회에 가입했지만(회장인 Н. 모로조프를 직접 만나지는 못했다.), 사회주의 아카데미는 그를 정회원으로 재선출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자연스럽게 그의 연금도 지급이 중단되었고, 생존의 필요성으로 인해 치올콥스키는 1920년 우크라이나 SSR의 국가경제위원회에 -자신의 발명품을 사용하기 위해 우크라이나로 이주시켜달라'는 내용의 탄원서을 제출했다. 이는 주로 지난 해에 그를 직접 체포한 체카의 요원이자 조종사인 A. Ya. 표도로프의 도움으로 이루어졌다. 그해 9월에는 당국은 전체 열차 차량을 이전시키기 위해 이전할 준비를 마쳤다.

1921년 1월-2월, 칼루가 주 국가경제위원회는 소련 공군 총사령부에 연락했고, 4월 9일, 치올콥스키는 "특별 보호"를 받으면서 금속 비행선 협회의 주도적 그룹이 만들어지기까지 했다. 6월 20일, 치올콥스키는 컨설턴트로서 국가경제위원회의 일원으로 등록되었고, 교육인민위원회에 학술 연구비와 개인 연금을 지급해 달라는 청원서가 제출되었다. 8월 26일, 교육인민위원회 학술센터는 치올콥스키에게 50만 루블의 일회성 수당을 지급했고, 10월 1일부터는 두 배에 달하는 학업 배급을 받기 시작했다. 1921년 10월 22일, 치올콥스키는 칼루가 학교 교사직에서 해임해 달라는 신청서를 제출했다. 1921년 11월 1일, 치올콥스키는 건강상의 이유로 소련 노동학교에서 해고되었다. 11월 9일, 지역인민위원회가 치올콥스키의 사건을 심의했고, 그 결과 그에게 50만 루블의 종신 연금을 월말마다 분할 지급하라는 결의안이 발표되었다.

이를 위한 관료적 절차가 진행되는 동안, 1922년 1월 21일, 당시 공산당 당원이었던 치올콥스키의 딸 안나(결혼 후에 성을 키셀레바로 개명)가 결핵으로 사망했고, 또 다시 추스르는 시간을 가졌다. 4월 22일, 지역경제위원회는 치올콥스키의 직위를 강등했고, 그 댓가로 치올콥스키의 업무를 지원하고 그가 시간과 에너지, 지식을 국가의 이익을 위해 온전히 헌신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조성할 방법을 찾을 수 있도록 노력하기 시작했다. 5월 1일부터 지방경제위원회는 치올콥스키에게 매달 2,500만 루블의 연구비를 지급하기 시작했다. 당국은 금속 비행선 프로젝트를 진지하게 검토하였고, 1922년 9월 29일, 주 항공 및 함대 과학기술위원회는 치올콥스키에게 항공기의 실제 알루미늄 모형 제작을 위해 금 3,000루블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소련의 화폐 개혁 이후, 지역인민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K. E. 치올콥스키는 매달 75 금 루블의 연금을 받았다. 이때 치올콥스키는 A. L. 치쳅스키를 만나고 알게되었다. 그러나 1923년 6월 28일에는 그에게 비극이 또 다시 발생했다. 우크라이나에 살던 치올콥스키의 아들 알렉산드르가 우울증으로 비관에 빠졌다가 자살하고 말았다. 그에게는 편할 날이 없었다.

다음 해인 1924년, 소련 공군 기술 사관학교에서 행성 간 교류 연구 학회가 설립되었고 , K. E. 치올콥스키는 4월 29일부터 직접 해당 학회와 서신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학회의 활동이 '시기상조'라는 이유로 12월에 서신 교환이 중단하였다. 6월에는 '행성 간 에테르 속의 생명'이라는 에세이의 첫 부분이 해당 학회으로 발송되었다. 동시에, 프리드리히 짠데르가 이 주제에 대한 에세이를 게재할 예정이었던 잡지 '기술과 삶, 13호 출간지'에서 행성 간 통신에 관한 대중 과학 기사 게재 신청이 들어왔다. 하지만 에세이는 게재되지 않았다. 12월, 항공총국(Главвоздухофлот)의 명령으로 치올콥스키는 금속 비행선의 대형 모형을 완성했고, 이는 칼루가 주 국가 경제 위원회에 보고되었다. 위원회는 1925년 4월 4일 모형을 검사했고, 치올콥스키는 이에 대해 금속 외피가 '조악하게 만들어졌다(재료가 좋지 않았고 내 실수도 있었다.)'라는 내용의 평론을 작성했다. 5월 3일, 치올콥스키의 비행선에 대한 공개 토론이 폴리테크닉 박물관의 대강당에서 열렸는데, TsAGI, 항공총국, 전러시아 자연주의자 협회(АССНАТ), 심지어 농업인민위원회의 대표들이 참여했다. 완공 후 기자 회견에서 치올콥스키는 항공총국의 자금 지원을 받아, 기술을 시험하기 위해 실험용 모델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6월 3일, 항공총국의 기술 위원회는 150m³ 비행선 모델 설계 작업에 2,000루블을 할당하기로 결정했고, 7월 16일, 이 문제는 국가계획위원회 평의회에서 심의되었다. 기존의 개략도를 기반으로 한 기술적 계산으로 세부적인 프로젝트를 개발할 수 있도록 치올콥스키의 작업에 대한 조건을 제공하기로 결정했다. 8월 4일, 오소아비아힘 상임위원회는 치올콥스키의 비행선 모형 제작을 위한 차관 지원을 결정했고, 1926년 4월에는 АССНАТ에서 황동 모형의 제작이 시작되었다 . 5월 14일, 항공총국 위원회와 소련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항공국 상임위원회 사무국은 8월 9일 모형에 대한 추가 작업이 부적절하다고 결정했다. 9월에는 치올콥스키의 설계를 검토하기 위해 TsAGI 위원회(위원장 B. P. 베친킨)가 설립되었고, 위원회는 조사 끝에 비행선 설계가 비합리적이라는 결론을 내렀다. 비행선 사건에 대한 검토는 1927년에도 계속되었다. 1927년 11월, 사회보장인민위원회의 개인연금 수여위원회는 치올콥스키의 연금을 월 150루블로 인상했지만, 1928년 2월,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의 인민위원회는 연금을 월 75루블로 동결했다. 1929년, 막내딸 마리야(결혼 후 성을 코스티나로 개명함)가 콘스탄틴과 바르바라와 함께 살면서 집안일을 시작했다.

1928년에 치올콥스키의 연금은 월 100루블로 인상되었지만 오소아비아힘은 그에게 혜택 지급을 중단했다. 또한 TsAGI의 내부적 반대와 연구 예산의 증가로 인해 소련 국가경제위원회 최고평의회는 비행선 작업을 중단하고, 프로젝트를 검토할 새로운 위원회를 임명하기로 결정했다. TsAGI의 위원장과 소련 공군 총사령부는 다시 한번 작업에 대한 비실용성과 전망 부족을 지적했다. 그러나 오소아비아힘은 과학자의 연금을 인상해 달라고 두 번이나 청원했고, 1928년 6월 1일에 월 225루블로 인상되었다. 1929-1930년에 치올콥스키는 공기 흡입 엔진을 장착한 항공기를 만드는 아이디어에 관심을 갖게 되었지만, 1930년 8월 26일 소련 공군의 기술장교들은 이 제안이 비경제적이고, 구조적으로됴 미개발의 영역이라고 인식했다. 1932년 3월, А. Я. 라포포트의 도움으로 비행선 건조 위원회 조직 내에서 치올콥스키 비행선 그룹을 만드는 데 성공했으며, 3월 1일부터 다시 200루블의 급여를 받았다.

그러다, 오소아비아힘은 치올콥스키의 75번째 생일을 기념하는 행사을 거행하기로 결정했고, 또한 그에게 노력적기훈장을 수여하기 위한 청원서를 제출했다. 이 행사는 1932년 9월 9일 칼루가의 철도 노동자 회관에서 개최되었다. 콘스탄틴 에두아르도비치의 삶과 과학적 업적을 기념하기 위한 야코프 페렐만의 책이 출판을 위해 서명되었다(8월 16일). 8월 20일, 디리지블스트로이는 전금속 비행선 프로젝트를 마감했다. 10월 17일, 소련 중앙 집행위원회는 치올콥스키에게 훈장 수여와 오소아비아힘이 치올콥스키에게 월 600루블의 연금을 수여하라는 청원을 승인했고, 칼루가 시의회는 치올콥스키의 자택이 위치한 브루타 거리를 그의 이름을 따서 개칭했다. 같은 날, 전-연방 소비에트의 본청 메인 홀에서 그의 명예를 기리는 회의가 열렸고(콘스탄틴 에두아르도비치는 참석을 거부했고, 회의 보고서는 Р. 아이데만과 Н. 리닌이 대신 낭독했다.), 메트로폴 호텔에서 기자 회견이 열렸다. 이 명령은 1932년 11월 27일에 소련 당 중앙위원회와 상임위원회 회의에서 발표되었다.

1933년 내내 А. Я. 라포포트는 전금속 비행선 건조 작업을 재개하려고 했다. 여름에 치올콥스키는 콤소몰의 요양 시설에서 청중 강의를 했고, 7월 25일에는 라디오 생방송으로 성층권 비행기와 로켓에 대한 강의를 했다. 그는 또한 피오네르 캠프에서도 어린 소년단원들을 상대로 강연을 했다. 칼루가 시의회는 치올콥스키 가족에게 새 집을 제공했고 그들은 11월 18일에 이사했다. 1934년에 반작용 추진 연구 그룹이 반작용 연구소로 다른 연관 조직과의 통합 및 재조직화를 거쳐서 설립된 후 치올콥스키는 연구소장 I. T. 클레이메노프와 연구소 부서 중 하나의 책임자인 미하일 티혼라포브를 만났다. 모스크바 지역에서 유성이 5월 14일에 떨어졌다는 목격담을 손자에게서 들은 치올콥스키는 신문을 통해 목격자들과 연락하여 그들이 받은 인상을 자신에게 보고하도록 요청했다. 거의 같은 시기에 바실리 주라블레프와 빅토르 슈클로프스키가 영화 "우주 비행"에 대한 협의를 위해 칼루가에 도착했는데, 슈클로프스키는 각본 집필에 참여했고, 치올콥스키는 과학기술 고증 자문위원으로서 영화 제작에 참여했다.

1935년, 칼루가 시에 많은 학문적, 기술적 공헌을 했던 치올콥스키의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집적 노동절 집회에 참여하였으며, 국가 고위 관리들의 연설 직후, 그의 육성이 라디오로 방송되었다(칼루가에서는 전날 녹음되었다). 그 연설에서 치올콥스키는 우주 여행이 실현될 것이라는 확고한 믿음을 표명했고, 많은 청취자가 그것을 목격할 것이라고 말했다. 연설은 주로 항공학에 관한 것이었음에도 말이다. 7월 9일, 콘스탄틴 에두아르도비치는 루리아 교수 와 게르슈타인 교수의 진찰을 받았고, 그들은 치올콥스키에게 위암 판정을 내렸다. 그리고 그들의 판정대로 암에 걸린 치올콥스키의 상태는 빠르게 악화되었다.

9월 4일, 그날에 그의 딸 류보프 콘스탄티노브나가 적은 일기장에는 콘스탄틴 치올콥스키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고통받았고, 사는 것에 지쳤다.'고 주장했다는 내용을 적었다. 9월 7일, 병원으로 떠나기 전날, 치올콥스키와 그의 딸은 그의 개인 기록 보관소를 정리하고, 이 목적으로 특별히 구입한 폴더에 서류를 넣고 있었습니다. 그는 누워서 써야만 했다. 그는 절반도 끝내지 못한 채 피곤해했다. 그런 다음 플롯킨 교수와 스미르노프 교수의 상담이 있었다. 9월 8일, 치올콥스키는 칼루가 철도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여기서 오후 11시 20분에 그는 수술을 받았다. 이후 콘스탄틴 치올콥스키의 건강은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직접적이고도 지속적인 관리를 받았다. 과학자의 상태에 대한 의료 보고서는 중앙 및 칼루가 언론에 게재되었다. 라자르 카가노비치가 치올콥스키의 저작물을 국가에 이관한다는 계획을 세웠고, 그에 맞춰서 자료 이전을 서둘러야 했다. 9월 13일, 치올콥스키의 상태는 급격히 악화되었지만, 그는 의식은 멀쩡했고 판단력도 명석했다. 칼루가 지역 위원회 제1서기인 В. 트레이바스는 이오시프 스탈린에게 직접 보낸 치올콥스키의 편지(언론인인 페투코프가 대리로 작성했다.) 초안을 작성하도록 지시했다. 트레이바스는 병원에 입원해있는 치올콥스키를 방문하여 치올콥스키에게 편지에 서명하도록 설득했다. 치올콥스키의 고집과 청각 장애를 고려하면 절대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해당 편지는 치올콥스키가 먼저 허락을 한 후 모스크바에 있는 카가노비치에게 전달되었다. 트레이바스의 아내인 M. 셀리베르스토바는 유언장을 직접 모스크바로 가져가, 당 중앙위원회와 프라우다 신문에 각각 한 부씩 보냈다. 그러나 원본의 검열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스탈린에게 보내는 편지 전달은 지연되었다. 카가노비치의 지시에 따라 스탈린은 9월 16일 오후 11시에 원본 편지를 받았다. 치올콥스키에게 보낸 정부의 답신 전보는 9월 17일 프라우다와 이즈베스티야 신문에 게재되었고, 곧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치올콥스키는 그의 허약함에도 불구하고, 깊은 감명을 받아 침대에서 일어나 답장 전보를 받아 적었다.

9월 19일 오후 10시 34분, 치올콥스키가 사망했다. 병원에서 부고 소식을 접한 기자 페투코프는 즉시 모스크바에 전화를 걸었고, 20분 후에 타스의 긴급 보도가 송출되었다. 프라우다의 부고 기사는 카를 라데크가 작성했다 . 9월 21일, 시골 정원에서 열린 치올콥스키의 장례식은 대규모 행렬로 바뀌었는데, 언론 보도에 따르면 약 5만 명이 참석했을 정도였고, 이는 칼루가(Kaluga) 시의 거의 전 인구에 해당했다. 그의 우주 개척을 향한 삶의 여정은 많은 이들의 존경과 애도 속에서 끝났다.
 
 
 
 
 
 
 
 
 
 
 
 
 
 
 
 
 
 
 
 
 
 
 
 
 
 
 
 
 
 
 
 
 
 
 
 
 
 
 
 

3. 업적[편집]

 
 
 
 
 
 
 
 
 
 
 
 
 
 
 
 
 
 
 
 
 
 
 
 
 
 
 
 
 
 
 
 
 
 
 
 
 
 
 
 

3.1. 우주 항법[편집]

 
 
 
 
 
 
 
 
 
 
 
 
 
 
 
 
 
 
 
 
 
 
 
 
 
 
 
 
 
 
 
 
 
 
 
 
 
 
 
 
1883년, 콘스탄틴 에두아르도비치 치올콥스키는 '자유 공간'[20]를 기고함으로서 우주 비행에 대한 초기 구상안을 포함하여 궤도 정거장 모형에 관한 원초적인 아이디어를 주장하였으며, 훗날 이 주장들은 우주 정거장 개념의 시초가 되었다.

1903년에는 치올콥스키는 고단한 연구와 실험의 대장정 끝에 '반작용 추진 장치를 이용한 우주 탐사 연구'[21]라는 논문을 학계에 제출하였고, 1911년과 1914년, 1926년, 1932년 총 4차례의 개정을 거쳐 자신의 우주용 로켓과 우주 항법에 관한 이론 증명을 수행했다.

해당 논문에서는 지구에서 벗어나 다른 행성으로 이동할 때 사용 연료 대비 적재량(payload)의 비율을 높이는 데 최적화된, 적합한 설계가 다단계 추진 로켓이라는 것과 추력 조정 장치, 액체 연료를 사용하는 엔진을 검증하기 위한 수학적 입증인 치올콥스키 로켓 방정식을 소개하였고, 치올콥스키는 자신의 방법이 자신의 평생 소원이던 우주 진출의 실현을 위한 도구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또한 우주 정거장과 에어록에 대한 개념을 설명하였다.

이후 1933년에 '별들로 가는 여정'[22]이란 과학 소설을 기고하여 '에테리얼(etherial) 정거장'[23] 설계 구상을 포함하여 로켓 열차(다단계 추진 로켓)를 통한 모듈 발사와 조립 개념을 서술함으로 기술적 방법론을 구체화하였다. 이외에도 전기 추진에 기반한 이온 엔진과 태양풍 돛을 활용한 성간 항해 등 현대 및 미래 우주 개발에 필요한 핵심 아이디어들을 제안한 바가 있다.

그러나 당시 주류 학계에서는 이제 막 비행기에 대한 실용화 과정을 처음으로 진행하는 과정을 목도하는 시대적 상황[24] 속에서 우주 탐사와 개척을 위한 수학적 입증과 과학적 추론이 담긴 치올콥스키의 논문을 매우 비현실적인 공상 내지 망상 취급하며, 치올콥스키의 비전을 부정적으로 바라보았다.

물론, 로버트 고다드헤르만 오베르트와 같은 로켓 공학자들이 액체 연료 로켓의 발사 실험에 성공하면서 점차 가능성이 제기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콘스탄틴 치올콥스키를 자신의 롤모델로 삼았었고, 그의 연구와 실험에 관한 결과들을 낙관적으로 바라보던 소련의 과학자이자 로켓 공학자 프리드리히 찬데르[25]세르게이 코롤료프, 미하일 티혼라보프[26] 와 함께 공동으로 반작용 추진 연구 그룹을 설립하였고, 관련 학계와 기관의 전문가와 실무진들이 거듭된 연구와 실험 끝에 소련 최초의 액체 연료 로켓인 ГИРД-X를 발사하는데 성공함으로서 실용적 기초를 닦아내었다.

이후에 반작용 추진 연구 그룹의 공동 창립자이자 후일 우주 경쟁에서 소련 측의 최고 실무 기술자로서 활동하게 되는 세르게이 코롤료프가 본인이 직접 설계한 R-7 로켓을 발사한 것을 시작으로 블라디미르 첼로메이, 발렌틴 글루시코, 미하일 얀겔 등 항공우주공학 분야의 저명한 전문가들이 우주 개발 프로그램에 참여하며 우주 진출의 신호탄을 쏘아올렸다. 우주 경쟁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 미국이 스푸트니크 쇼크를 계기로 당시 선두 주자인 소련에게 뒤쳐지지 않고자 베르너 폰 브라운[27]과 같은 나치 독일 출신의 이공계 인사들을 '페이퍼 클립 작전'으로 대거 스카우트하면서 본격적인 우주 경쟁이 시작[28]되었다.

냉전이 끝나고, 소련이 해체된지 수십 년이 지나서, 항공우주 국영기관들이 항공우주 관련 민간기업들과 협업 내지 하청을 주어 우주 탐사와 개척에 재시동을 걸고있는 지금의 상황을 보자면 한때, 말도 안 되는 망상에 몰두하며 망상을 이야기하는 미친 노인네 소리를 들었었던 칼루가의 현자, 콘스탄틴 치올콥스키의 미래지향적 선견지명은 현재진행형이라고 할 수 있겠다.
 
 
 
 
 
 
 
 
 
 
 
 
 
 
 
 
 
 
 
 
 
 
 
 
 
 
 
 
 
 
 
 
 
 
 
 
 
 
 
 

3.2. 항공학[편집]

 
 
 
 
 
 
 
 
 
 
 
 
 
 
 
 
 
 
 
 
 
 
 
 
 
 
 
 
 
 
 
 
 
 
 
 
 
 
 
 
콘스탄틴 치올콥스키는 러시아 항공학의 시조인 니콜라이 주콥스키만큼은 아니였지만 로켓공학 뿐만이 아니라 항공학 전반에도 지대한 관심들을 가진 바가 있었다.

'금속 외피를 가진 조종 가능한 기구'[29]에서 금속 외피를 가진 기구의 이론적 설계를 제시하였으며, 이는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개념이였다. 분해와 조립, 보관이 가능한 전금속 모듈화 설계에 외부 기체가 아니라 엔진의 가열된 기체로 비행하며, 고도별로 안정화시킬 수 있는 팽창-압축식 동체라는 설계는 후에 금속제 비행선의 발전에 기여하였다.[30]

여기서 그치지 않고 콘스탄틴 에두아르도비치는 '비행기 또는 새와 유사한 (항공) 기계'[31]에서 비행기의 기본 설계와 공기역학적 특성에 대해 논의하였으며, 특히 날개의 형태와 비행 기계의 구조에 대한 이론을 제시하였다. 특히 금속 골조 및 외피 설계와 직접 조종이 가능한 단엽기 구조를 세계 최초로 제안하였고, 날개의 두꺼운 곡선형 프로파일과 유선형 동체와 소음이 줄어든 쌍축 프로펠러, 소용돌이 효과를 최소화하기 위한 대칭 회전 쌍동 프로펠러, 자율 안정성을 위한 자이로 기반 자동조종장치(autopilot) 도입 제안과 더불어 착륙장치로서 수납식 바퀴(접이식 랜딩기어) 아이디어도 세계 최초로 명시하였다. 현대 모든 비행기들의 설계를 돌이켜보자면 치올콥스키의 아이디어는 매우 미래예지적인 것이였다.

이러한 설계 이론들을 뒷받침하고자 '인위적인 공기 흐름에 삽입된 표면에 대한 공기 압력'[32], '비행 시의 문제들'[33]', '19세기 비행학의 성과[34], '비행 시 날개에 관한 문제들'[35]등의 저작들을 기고함으로서 수리적 입증을 해내었다.
 
 
 
 
 
 
 
 
 
 
 
 
 
 
 
 
 
 
 
 
 
 
 
 
 
 
 
 
 
 
 
 
 
 
 
 
 
 
 
 
 
 
 
 
 
 
 
 
 
 
 
 
 
 
 
 
 
 
 
 
 
 
 
 
 
 
 
 
 
 
 
 
1895년에 '지구와 하늘의 꿈과 만유인력의 효과(Грёзы о Земле и небе и эффекты всемирного тяготения)''''이란 과학 소설을 출간하여 '외계 행성의 지구화', 즉 테라포밍의 과학적 가능성에 관한 추론을 우주 진출에 대해 비관적으로 바라보던 시대상 속에 예견하였고, 외계 생명체와의 접촉도 고려했다.

일전에 보롭스크에서 자신의 추종자인 이반 쇼킨과 함께 온실을 건축하고 아열대 과일 작물을 재배한 바가 있었던 치올콥스키는 이 과학 소설에서 하나의 거대한 온실형 생태주거돔을 제안하였고, 기존의 지구 동물과 식물의 유전적 요소들을 합성하여 척박한 환경을 가진 행성(예를 들자면 비교적 가까운 태양계 행성인 화성)들에 적응할 수 있는 새로운 개념의 생명체를 양산하여 인류가 영구적으로 정착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게 하자고 주장했다.

외계인의 존재 여부 및 그들과의 통신과 교류에 관해서는 '화성인과의 대화(Разговор с Марситами)', '정체불명의 지적 존재들(Неизвестные разумные силы, 1928년)', '생명체들이 거주하는 행성들(Планеты заселены живыми существами, 1933년), '우주의 의지(Воля Вселенной)' 등 자신의 추론과 상상을 해당 저작물들을 통하여 주장한 바 있다.

평소에 외계 행성에 생명체가 어떤 형태로든지 존재할 것이라는 생각을 굳게 믿어왔었던 치올콥스키의 과학적 추론이 담긴 저작들이며, '우주에는 우리와 같은 생명체가 희박하거나 아예 없을 것이다.'라는 우리의 관점과는 달리 의외로 생명체들로 가득 차 있으며, 다양한 형태를 가진 지적 생명체가 반드시 존재할 것이라는 가능성을 해당 서적을 통해 주장하였다.
 
 
 
 
 
 
 
 
 
 
 
 
 
 
 
 
 
 
 
 
 
 
 
 
 
 
 
 
 
 
 
 
 
 
 
 
 
 
 
 

3.4. 우주 탐사 방법론[편집]

 
 
 
 
 
 
 
 
 
 
 
 
 
 
 
 
 
 
 
 
 
 
 
 
 
 
 
 
 
 
 
 
 
 
 
 
 
 
 
 
콘스탄틴 치올콥스키는 1895년에 기고한 '지구와 하늘에 대한 환상'[36]에서 우주 탐사 방법론에 관한 다양한 예견과 추론들을 제시하였는데, 우주 정거장과 궤도 엘리베이터에 대한 초기 개념을 제시하였다. 이후 1903년에 '반작용 추진 장치를 이용한 우주 탐사'[37]를 통해 이론적인 가능성을 얻게 된 치올콥스키는 1918년 '지구 너머로[38]라는 SF 소설을 저작하여 기존의 우주 탐사 방법론을 더더욱 체계화하였고, 이 체계화의 과정에서 태양계 탈출, 우주 정거장, 궤도 엘리베이터 등등 매우 급진적인 이론과 영감을 과학적 입증 과정을 통하여 제시하였다.

특히 괄목할만한 부분으로는 태양계 탈출에 대한 부분인데, 1918년에 저작한 '지구 너머로'[39]에서 치올콥스키는 우주선이 태양계의 중력을 벗어나기 위해 필요한 속도와 에너지를 계산하였고, 수학적 방법을 통해 입증하여 태양계를 탈출하는 방법을 제시한 바 있다. 그리고, 이에 멈춰서지 않고 1929년에 '성간 항해의 목표들'[40]라는 저작에서는 기존의 태양계 탈출의 필요성과 방법론을 더더욱 구체적으로 설명하였고, 만약에 태양이 갑자기 냉각[41]되거나 소멸할 때 인류가 태양계를 떠나야할 가능성을 언급하였고, 이를 위한 기술적 준비와 계획을 제안하였다.
 
 
 
 
 
 
 
 
 
 
 
 
 
 
 
 
 
 
 
 
 
 
 
 
 
 
 
 
 
 
 
 
 
 
 
 
 
 
 
 
 
 
 
 
 
 
 
 
 
 
 
 
 
 
 
 
 
 
 
 
 
 
 
 
 
 
 
 
 
 
 
 
 
 
 
 
 
 
 
 
콘스탄틴 에두아르도비치는 우주로 단지 나아가는 것 뿐만 아니라 우주에서 장기적으로 생존하고 번영하기 위하여 우주의학과 트랜스휴머니즘에 관한 저작 활동 또한 진행하였다.

'우주 철학[42]에서 우주 거주를 통한 인류 진화, 인류와 우주의 모든 생명의 '영원한 행복'을 목표로 삼았다. 또한 중력, 방사선, 미세중력 등 우주 항행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한 생체 적응 시스템 설계를 제안[43]하였고, 신진대사, 심리, 면역계 변화에 대응한 공급 체계(폐쇄형 생태 시스템·우주복·의료), 즉 우주의학이 필수적인 학문이자 도구임을 강조하였다.

'우주의 일원론[44]에서는 우주 만물의 생명성(panpsychism)을 주장하며, 인류 뿐만이 아니라 모든 존재의 의식적 진화와 완성을 목적으로 삼았으며, 고차원 인간의 등장을 예견하였다.[45] 또한 인류 집단의 자기선택적 생물 형질 개량[46]을 통해 진화를 촉진할 필요성을 명시하였다.

이외에도 다른 저작물들인 '정체불명의 지적 존재[47]와 '우주의 의지'[48]에서 '우주적 의지의 존재와, 높은 수준의 지적 존재들이 인류 진화의 조건을 관망하고 있다는 관점'을 제시하였다. 이는 트랜스휴머니즘에서 흔히 논의하는 선택적 포괄적 진화 유도와 맞닿는 개념이다.
 
 
 
 
 
 
 
 
 
 
 
 
 
 
 
 
 
 
 
 
 
 
 
 
 
 
 
 
 
 
 
 
 
 
 
 
 
 
 
 

4. 일화[편집]

 
 
 
 
 
 
 
 
 
 
 
 
 
 
 
 
 
 
 
 
 
 
 
 
 
 
 
 
 
 
 
 
 
 
 
 
 
 
 
 
  • 정치적으로는 확실한 공산주의자는 아니었으나[49], 소련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은 인물이었고, 사후에도 소련 정부에서 적극적으로 우대를 받았다. 혁명 이전의 러시아 제국 정부와도 나쁘지 않은 관계였으며, 제정 시절에 교육 관련 공로로 훈장을 여러 차례 수훈받거나 고위직으로의 승진을 임명받았던 적이 있었을 정도였다.
  • 쥘 베른이 쓴 지구에서 달까지를 보고 완전히 엉터리라고 비난하기도 했다.[50] 사실 쥘 베른도 이걸 알았기에 이 소설에서도 대포 내부에 온갖 완충 장치 설계를 반영했지만, 막상 달에 도착할 때에는 같이 탄 개는 머리가 으스러져 죽었으며, 탑승한 사람들도 한참을 기절하다가 극심한 두통과 현기증, 구토를 호소했다.
  • 평소에 매우 검소한, 은둔형 재야 과학자의 삶을 살아왔음에도 인간 관계 자체를 포기하진 않았기 때문에, 그가 벌여온 여러 기행에 대한 흥미로운 일화들이 전해지고 있다. 그가 살면서 해온 기이한 행동들 중 보롭스크에서의 일화들을 둘러보자면 다음과 같다.
    • 스스로 과학 실험에 필요한 장비를 제작하고 사용하고 있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진공 펌프였다. 어느 날, 월셋방 집주인과 그의 지인이 치올콥스키의 집에 방문했었을 때, 진공 펌프 특유의 야릇한 소음을 완벽하게 성대모사하였고, 월셋방 집주인과 그의 지인은 폭소를 터뜨릴 수 밖에 없었다.
    • 때로는 방문객이 그의 집을 찾아올 때마다, 교묘하게 설치한 전류 기계 장치와 연결된 접시에 눈에 보이지 않는 잼을 발라둬놓고, 방문객들에게 그 잼을 맛보게 한 뒤에 접시와 연결된 전류 기계 장치를 작동, 손님들을 깜짝 놀라게 할 정도의 약한 전류를 내보내어 방문객들의 다양한 반응을 살펴보는 짖궂은 장난기도 있었다.
    • 치올콥스키는 당시 전 러시아의 교육자들이 이론과 반복을 강조하는 것과 달리 실험과 탐구를 강조하는 진보적인 교육자였고, 동시에 권위와 관습을 딱히 중요시하지 않던 사람이였다. 그렇기에 아이들에게 보여준 행보는 체벌과 폭언 대신에 창의성과 자율성을 존중해주는 모습이였고, 학생들에게 인기 많은 교사였다. 그러나 동료와 상사, 후배들 중 일부 교사들은 치올콥스키나 그의 교육 방식을 불신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방식은 19세기 말엽 당시 제정 러시아의 매우 반동적이고 보수적인 교육 정책 기조와 반대되는 지향점이였기 때문에 항상 주변 교육자들로부터 은근한 견제와 방해, 감시를 받았었다. 융통성있고 실용적인 가치관을 가졌었던 톨마셰프 교장의 은퇴 및 사후에 후임으로 들어온 필리포프 교장은 반동적인 교육 가치관을 가졌던 교육자였던 탓으로 꽤나 자신의 교육 방식을 실천하는데 애를 많이 먹었었다.
    • 발사체 이론에 관한 영감을 얻고자 밤에 폭죽을 몇 다발씩이나 터뜨리거나 연등을 건물 지붕 위로 최대한 많이 날려보냈기 때문에, 주변 이웃 주민들에게 광범위한 층간 소음과 광공해를 유발하기도 했었다.
    • 우주로의 탐사 비행 과정에서 지구를 탈출할 때의 대기권에서 벌어질만한 기압 변화 상황들을 알아보고자 했었다. 직접 사비를 들여서 마련한 공기 펌프 장치가 설치된 밀폐된 건물 공간을 활용, 다양한 고도 상에서의 환경들을 구현하고자 노력하였다. 동시에 동일한 실험실에서 진공 상태에서의 산소 부족 상태를 스스로 체감해보려고 자가 실험을 강행한 적도 있었다. 물론 거의 죽을 뻔 하기 직전에 실험실 문을 박차고 나왔지만 말이다.
    • 테라포밍에 대해 과학적 영감과 추론을 얻고자 아파트 인근에 추종자 이반 쇼킨과 함께 온실을 건축한 다음, 레몬과 오렌지를 파종하고 재배하였다. 그러나 만성적인 연구 자금의 부족과 당시 기술력의 한계로 인하여 기대하던 것과 달리 실험 결과는 만족스럽지 못했으나, 주변인들의 반응은...
    • 자신의 극초기 로켓 방정식과 추론으로 고체 연료를 사용하는 소형 시제형 발사체를 여유가 된다면 친한 이웃이자 자신을 믿고 따라주던 추종자 이반 쇼킨[51]과 같이 제작 및 발사하였으며, 재정적 여유가 괜찮다면 하늘 위로 높이, 그것도 성공할 때까지 수차례에 걸쳐서 발사하였다. 모든 보롭스크 주민들이 그를 민폐나 끼치는 인간이라고 수군덕대고 있을 때[52][53], 때마침 발사에 성공한 것이다. 이 때의 발사 실험의 성공이 어찌나 기이한 상황이였었는지, 그 이후부터 그는 보롭스크 시에서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긴, 괴짜 학교 교사로 유명해졌다.
  • 이렇게 다양한 분야에서 대단한 업적들을 남긴 치올콥스키에게도 한계와 오점이 있었는데, 식민주의인종주의에 기반한 우생학에 대한 옹호와 연구[54]알베르트 아인슈타인상대성 이론에 대한 확고한 의문 제기[55], 잠깐 방황하던 사기에 가족과 제자들에게 억압적이고도 무정하게 대했었던 점[56] 등이 존재한다.
 
 
 
 
 
 
 
 
 
 
 
 
 
 
 
 
 
 
 
 
 
 
 
 
 
 
 
 
 
 
 
 
 
 
 
 
 
 
 
 

5. 기타[편집]

 
 
 
 
 
 
 
 
 
 
 
 
 
 
 
 
 
 
 
 
 
 
 
 
 
 
 
 
 
 
 
 
 
 
 
 
 
 
 
 
  • 1957년 소련과 2011년 러시아에서는 치올콥스키에 대해 다룬 전기 형식의 다큐멘터리 영화를 제작한 바가 있다.

    (Дорога к Звёздам(별들로 가는 여정).)

(Удивительные миры Циолковского(치올콥스키의 놀라운 세계).)
  • 미미의 컴퓨터 여행에서 한 에피소드 주역으로 나왔다. 밈에게 달 세계 여행을 보고 너무 허구가 많다고 지적하고 우주로 배를 만들어 직접 쏴 올리는 게 더 현실감이 있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밈과 같이 현실화된 우주선을 우주복 차림으로 타고 이게 언젠가 가능할 것이라고 상상한다. 그리고, 1957년 그의 동상이 스푸트니크 1호가 쏴 올라가는 하늘을 바라보며 밈이 1957년 그의 탄생 100주년에 맞춰 '인류는 세계 최초 인공위성을 쏘아 우주로 올렸습니다.'라고 에피소드가 끝난다.
  • 1950년대 소련이 루나 3호의 탐사 프로그램 진행 과정에서 달의 뒷면에 대한 촬영에 성공했을 때, 달 뒷면의 분화구 중 한 곳에 그의 이름을 붙였다.
  • 소련과 현대 러시아에서 우주 개발에서 가장 중요한 세 사람을 꼽으라면 반드시 포함되는 인물이다. 나머지 둘은 세르게이 코롤료프, 유리 가가린이다. 로스코스모스 설립 이전 구 소련 우주국 청사 로비엔 이 세 인물의 대형 초상화가 치올코프스키, 코롤료프, 가가린 순으로 걸려 있었다.
  • 콘스탄틴 치올콥스키의 직업이 많은 이유는 애초에 자기 자신이 주류 학계와 거리가 먼 아마추어 지식인이자 학자였으며, 성장기부터 꾸준히 독학으로 지적 성장과 통찰을 해왔던 개인적인 면모 때문이다.
 
 
 
 
 
 
 
 
 
 
 
 
 
 
 
 
 
 
 
 
 
 
 
 
 
 
 
 
 
 
 
 
 
 
 
 
 
 
 
 

6. 어록[편집]

 
 
 
 
 
 
 
 
 
 
 
 
 
 
 
 
 
 
 
 
 
 
 
 
 
 
 
 
 
 
 
 
 
 
 
 
 
 
 
 
- 콘스탄틴 E. 치올코프스키의 어록 출처
Все, что мы знаем, было известно и будет известно, ничтожно по сравнению с тем, что мы никогда не узнаем.
우리가 알았고 알고 알게 될 모든 지식은 우리가 절대 알지 못할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 지식에 관한 그의 관점과 가치관을 잘 대변하는 격언.
Человечество не останется вечно на Земле, но в погоне за светом и пространством сначала робко проникнет за пределы атмосферы, а затем завоюет себе всё околосолнечное пространство… и дальше — к другим солнцам, к другим галактикам, к бесконечности.
인류는 영원히 지구에 머물러 있지 않을 것이다. 빛과 공간을 향한 갈망 속에서 먼저 조심스럽게 대기권 밖으로 나아가고, 이어 태양 주변의 모든 공간을 정복할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다른 태양들로, 다른 은하들로, 무한을 향해 나아갈 것이다.

- « Вне Земли | 지구 너머로 », 1920년.
…Это даст возможность даже громадные оранжереи делать со стенками очень тонкими. Может быть, даже и растения переработаются так, что будут жить без внешней газовой среды, перерабатывая всё внутри себя, как зоофиты (кактусы). Если мы мечтаем о таком преобразовании для животных, то тем более можем научно думать о том же для более простых существ, каковы растения.

...이것은 심지어 거대한 온실들도 극도로 얇게 만들 수 있게 해줄 것이다. 아마도 식물들조차 외부 기체 환경 없이 살 수 있도록 재활용될 것이고, 그들의 내부의 모든 것을 동물-식물(선인장)처럼 스스로 재활용할 것이다. 만약 우리가 동물을 위한 이러한 변화를 꿈꾼다면, 우리는 더 단순한 생물들, 즉 식물에 대해 과학적으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 « Жизнь в межзвёздной среде | 성간 환경에서의 생활 », 1919년.
Планета есть колыбель разума, но нельзя вечно жить в колыбели.
행성지성의 요람이다. 그러나 누구도 영원히 요람에서만 살 수는 없다.

- 모 지인과 주고 받은 편지들의 내용 중, 1911년.
Сначала неизбежно идут: мысль, фантазия, сказка; за ними шествует научный расчет, и уже, в конце концов, исполнение венчает мысль.

먼저 첫 번째로 진행되는 것은 생각, 공상, 꿈 같은 이야기이고, 과학적인 계산이 뒤따르게 되어있으며, 그리고 최종적으로, 계획하던 바완성될 것이다.

- « Исследование мировых пространств реактивными приборами | 반작용 추진 장치를 이용한 우주 탐사 연구 », 1903년 기고, 1911~1912년 개정.
Невозможное сегодня станет возможным завтра.
오늘 실현시킬 수 없는 것은 가까운 미래라면 실현될 것이다.

- « Исследование мировых пространств реактивными приборами | 반작용 추진 장치를 이용한 우주 탐사 연구 », 1903년 기고, 1911~1912년 개정.
Многие думают, что жизнь так сложна, так загадочна, что начало её не могло зародиться на такой ничтожной пылинке, как Земля, что жизнь есть произведение безграничной вселенной, зародилась где-то на планетах, между далёкими солнцами, в течение бесконечности веков, и только перенесена случайно на Землю, где и расцвела. Конечно, об этом можно говорить. Но не преувеличивают ли загадочность жизни? Это во-первых. Во-вторых, перенос жизни через мировые пространства довольно трудно допустить:

많은 사람들은 생명이 너무 복잡하고 신비로워서 지구와 같은 작은 먼지 같은 행성에서 자연적으로 생겨날 수 없으며, 생명이란 광대한 우주의 산물로서, 머나먼 태양들 사이 어딘가의 행성에서 수억 년 동안 자라났고, 우연히 지구로 옮겨져서 꽃피웠다고 생각한다. 당연히, 이런 주장도 고려해볼 수는 있다. 그러나 우리는 생명의 신비로움을 너무 과장하고 있지는 않을까? 첫째로, 그것을 지적해야 하며, 둘째로 생명이 우주 공간을 통해 옮겨졌다는 주장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 « Зарождение жизни на Земле | 지구상 생명의 기원 », 1922년.
“Млечный Путь содержит сотни миллионов солнц и миллиарды планет, на которых могла бы зародиться жизнь."
우리 은하에는 수백만개의 태양과 수십억개의 행성이 있으며, 그곳들 중에는 생명이 탄생할 수 있는 곳도 있을 것이다.”

- « Зарождение жизни на Земле | 지구상 생명의 기원 », 1922년.
...Они, герои, смельчаки, проложат первые воздушные тропы трасс: Земля — орбита Луны, Земля — орбита Марса, а ещё далее: Москва — Луна, Калуга — Марс.
...용감한 영웅인 그들지구 - 달의 궤도, 지구 - 화성의 궤도, 그리고 더 나아가서 모스크바 - 달, 칼루가 - 화성 같은 첫 번째 비행로열어낼 것입니다.

- 1935년 5월 1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노동절 집회 참가자들을 위한 전연방라디오 연설 중에서.
 
 
 
 
 
 
 
 
 
 
 
 
 
 
 
 
 
 
 
 
 
 
 
 
 
 
 
 
 
 
 
 
 
 
 
 
 
 
 
 
[1] 1882년부터 1918년까지 그의 공식적인 직업은 교사였다.[2] 중등학교에서 학생들을 대상으로 수학과 물리학을 가르쳤다.[3] 정확히 따지자면, 천체역학궤도역학 전문가에 가깝다.[4] 그 당시 법적으로는 무학력자였으나, 실제로는 19살에 대학교 2학년 학부 과정 이상까지 모든 학문 분야, 그 중에서도 수학과 물리학 분야에 대해 집중적으로 독학해낸 상태였다. 중등학교 교사로 부임하던 청년 시절부터는 석•박사급의 학습 및 응용 역량을 자신의 연구 및 저작 활동을 통해 보여주었다.[5] 콘스탄틴 치올콥스키는 해당 학회의 공동 설립자 중 한 명이였던 표트르 판-데어 플리트의 인정을 받고 학회 정회원으로 임명받았지만, 정작 학회와 학계가 콘스탄틴 에두아르도비치를 바라보던 시선은 평소에 좋지 못했었다. 그러한 긴장관계가 진행되다가 1890년대 말엽에 전금속 모듈화 비행선 아이디어에 관한 논문을 기고했고, 당시 러시아 제국 300루블이면 시제품을 제작하기에 충분하다고 계산했었지만, 도서관 독학 동기이던 알렉산드르 코반코프에게 잘 좀 봐달라고 부탁하던 것이 문제가 되었다. 사실 알렉산드르는 자신에게 뒷돈을 찔러주는 사람들에게만 심사 통과를 진행해주던 부정부패를 저지르고 있었는데다가 직권남용을 자주 해왔던 탓에 학회 관계자들로부터 단단히 찍힌 상태였었다. 결국 이러한 상황을 진작에 파악하지 못했던 콘스탄틴의 전금속 모듈화 비행선 아이디어는 거부되었다.[6] 1924년 8월 23일, 소련 정부가 콘스탄틴 에두아르도비치가 이룩한 그 동안의 연구 공로를 기리고자 이 사관학교의 첫 번째 명예 교수로 임명하였다.[7] 여담으로, 해당 사관학교는 유리 가가린, 게르만 티토프, 발렌티나 테레시코바, 알렉세이 레오노프 등등 소련 우주 개척사에서 이름을 남긴 유명한 우주 비행사들을 배출한 곳이기도 하다.[8] 사회주의 사회과학 아카데미의 정회원이였으나. 체카에게 반혁명 및 반동적 행위 혐의로 체포되어 루뱐카의 지하감옥에 투옥되었다가 풀려난 사건 때문에 퇴출당했다.[9] Georgy Manaev, "How are religion and Russian space science connected?", 「Russia Beyond」, 2021.5.27.[10] 이 훈장은 치올콥스키가 75세가 된 것을 기념하고자 소련 공산당이 수여식 행사를 통해 치올콥스키 본인에게 수여한 것이다. 그러나 소련 공산당당과 국가의 위업에만 치중한 겉멋 들이기 행사를 하였고, 대다수 평범한 인민들의 경우엔 본인의 연구 성과에만 관심이 몰려있었다. 이렇게까지 자신의 우주 이론이 무시당하고 관심받지 못하는 것에 대해 매우 실망하였다.[11] 특히 콘스탄틴 치올콥스키 본인의 로켓 방정식을 설계에 반영한 우주선이 지구 궤도에 발사되어 한 치의 오차없이 성공적으로 궤도상에 최초의 인공 위성이 안착되었다. 자신의 이론이 틀리지 않았음을 늦었지만 사후에라도 후배들을 통해 입증한 셈이다.[12] Эдуард Игнатьевич Циолковский[13] Мария Ивановна Юмашева[14] 보통 수준의 학습을 한 건 아니었다. 도서관의 문이 열리자마자 입장하여, 도서관이 다시 문을 닫기 직전에 도서관 관리인이 치올콥스키를 직접 문 밖으로 정중히 내쫓을 때까지 최대한 많은 책들을 가능하다면 다 읽으려했을 정도였다.[15] 여담으로, 치올콥스키는 생애 처음으로 이 때부터 이성 간 연애를 시작했다. 독일계 자본가 가문인 침머만 가문의 집과 자신의 월셋방이 거리가 가까웠고, 침머만 가문의 딸과 어느새 면식을 트게 된 것을 계기로, 서로가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이까지 발전하였었다. 다만, 당시의 치올콥스키는 돈도 빽도 없었기에, 침머만 양 부모님의 의심과 경계에 마지막 편지 한 통을 끝으로 첫 이성 관계는 끊겼다.[16] 1862년 7월 1일에 설립되어, 후일 소련 시대에 '국립 레닌 도서관'으로 불렸다가, 소련 해체 이후에 '러시아 국립 도서관'으로 재개장한 유서깊은 공공 도서관이다.[17] 모스크바 최초의 공공 도서관으로서, 원래는 과학자이자 고고학자, 민족학자, 역사가인 알렉산드르 드미트리예비치 체르트코프의 개인 도서 소장시설이였으나, 사후 그의 유언에 따라 공공 도서관으로서 1863년에 정식 개관하였다. 이후에 바실리 주콥스키, 알렉산드르 푸시킨, 니콜라이 고골, 레프 톨스토이, 안톤 체호프,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등의 러시아의 유명한 지식인들이 자주 방문하였고, 이후에 입소문을 타서 명망 높고, 역사가 깊은 지식의 보고 그 자체인 유명한 공공 도서관으로 알려지게 되었다.[18] 치올콥스키는 자신의 아버지가 매달 보내주는 10루블(이따금 15루블을 받기도 하였다.)에서 대부분을 서적 구매와 물리 및 화학 실험용 기자재 구매와 자신이 거처하던 셋방의 월세 지불에 사용하였고, 그렇게 남은 돈 90코페이카만으로 흑빵을 사고 우물물을 길어다가 달마다 그렇게 연명하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지독한 생활고가 한참 젊고 열정 넘치는 그의 학구열과 우주에 대한 야망을 완전히 꺾어낼 수는 없었다.[19] Давление жидкости на равномерно движущуюся в ней плоскость[20] Свободное пространство, 1883[21] Исследование мировых пространств реактивными приборами[22] Пути к звёздам[23] 궤도상 거대한 도넛 형태 우주 정거장[24] 라이트 형제가 동력을 활용한 비행 장치 실험을 성공한 것이 같은 해인 1903년 말엽이란 것을 생각해보자.[25] 일찍이 콘스탄틴 치올콥스키의 과학적 상상에 대해 현실적 실현성과 가능성이 매우 충분하다고 생각하던 1920~1930년대 소련의 선견자이자 발트 독일계 러시아인 공학자 겸 과학자.[26] 후일 스푸트니크 1호 우주선의 연료 적재량 및 탄도 비행 궤적 계산과 인공위성 및 유인 우주선 캡슐에 대한 설계 및 제작에 직접적으로 관여하게 된다.[27]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베르너 폰 브라운도 콘스탄틴 치올콥스키와 그의 이론과 업적에 감복된 사람이였다. 대학원생 시절에 마침 헤르만 오베르트의 밑에 들어가서 수학하면서 치올콥스키와 그의 저작들에 대해 알게되었고, 그의 이론과 업적에 대해 존경해왔었다. 게다가 독일어로 번역된 치올콥스키의 연구 자료와 논문, SF 서적들을 소장하고 있었으며, 치올콥스키의 저작에 자신의 코멘트와 메모들을 적어놓기도 하였다.[28] 물론 소련도 헬무트 그뢰트룹과 같이 베르너 폰 브라운을 개인적으로 혐오하거나, 미처 피난을 하지 못했던 나치 독일 출신의 이공계 인사들을 섭외 내지 포섭하기도 했으나, 대중적으로 알려진 바와는 달리 이미 소련은 우주항공공학 분야에서 지난 수십 년간 이론적 경험을 쌓아왔으므로, 나치 독일 출신의 이공계 인사들은 탄도비행 유도 제어장치와 특수 목적 로켓의 대량 양산에 관한 노하우같은 최중요 기술과 과정만을 전수받았으며, 얼마 못 가서 소련 이공계가 나치 독일의 과학기술을 복제 및 활용 가능한 수준에 이르게 되자, 나치 독일 출신 이공계 인사들은 연구 및 실험 분야에서 완전하게 배제되었다.[29] Аэростат металлический управляемый, 1892[30] 19세기 말, 치올콥스키가 선보인 해당 전금속 모듈화 비행선 아이디어가 그의 옛 독학 동기인 코반코의 의도적인 방해공작에 퇴짜를 맞은지 몇 년 후에 독일에서 시험 비행에 성공한 체펠린 비행선에서 선보였던 기슬들이 치올콥스키의 설계 이론이 해당 비행선의 설계 개념과 유사한 점이 많았던 점에서 일부 러시아 과학계에서는 러시아 설계가 독일 기술에 접목된 것이 아니냐는 추정을 하기도 하였었다.[31] Аэроплан, или Птицеподобная (авиационная) летательная машина, 1894[32] Давление воздуха на поверхности, введенные в искусственный воздушный поток, 1898[33] Вопросы воздухоплавания, 1900[34] Успехи воздухоплавания в XIX веке, 1900[35] К вопросу о летании посредством крыльев, 1891[36] Грёзы о Земле и Небе[37] Исследование мировых пространств реактивными приборами[38] Вне Земли[39] Вне Земли[40] Цели звездного кораблестроения[41] 그러나 현대 천문학의 향후 미래 예측에 따르자면 태양은 더더욱 커져서 적색거성이 된 다음에 더 이상 핵융합을 할 수가 없을 때에 외피를 날려보내고 백색왜성이 될 것이라고 한다.[42] Космическая философия, 1932[43] 비록 구체적으로 소개한 것은 아니지만 이론적 토대를 구축하였다.[44] Монизм Вселенной, 1925[45] 이는 트랜스휴머니즘의 관점에서 인공지능·바이오닉스적, 사이버네틱스적 신체로의 이행 가능성을 내포하는 것이였다.[46] 유전자 조작, 선별적 혼인, 혈통 선택 등등[47] Неизвестные разумные силы, 1928[48] Воля Вселенной, 1928[49] 다만 여러 현실적인 제약 때문에 겉으로 굳이 들어내진 못했지만, 치올콥스키는 본인의 자서전에서 자기 자신의 성격만큼은 '혁명가이자 공산주의자'였다고 주장하였다. 물론 조용히 대세를 따르고 싶었기 때문에, 완전한 진심까지는 아니였지만 말이다.[50] 거대한 대포로 사람이 탑승한 포탄을 달로 쏴서 간다는 줄거리인데, 실제로 그렇게 쏘면 엄청난 압력으로 포탄 속 사람은 발사 순간에 바로 끔살당한다.[51] 이반 쇼킨은 치올콥스키의 온실 건축 및 온실에서의 레몬 및 오렌지 재배 실험에도 같이 참여했다.[52] 소형 로켓 모형이 공중에서 폭발한다거나, 아니면 분사 추력으로 잘 상승하던 로켓이 갑자기 고꾸라진다거나 등등으로 고전하던 치올콥스키는 애초에 평소 기이한 행동들 때문에 그다지 좋은 평가를 받지는 않았는데, 인명 사고가 날만한 위험한 로켓 실험을 하고 있었으니, 주민들로써는 당연한 반응일 수 밖에 없었다.[53] 게다가 매일 쉬지도 않고 실험과 연구를 지속하였기에 당연하게도 주변에 큰 폭발과 소음, 악취를 유발하였고, 농촌 지역의 미신이 치올콥스키에 대한 악평과 뒤섞이자, 마을 사람들로부터 허구한날 망상이나 해대는 이상한 사람이라는 비호감형 인간으로 단단히 찍혀버려서 그 누구도 치올콥스키의 집에 방문할 엄두를 내거나, 심지어 그와 대화 한 마디조차 하려고 하지 않았다.[54] 그렇다고 나치같은 극단주의적 우생학까지는 아니였지만, 그 당시 과학자로서는 그 누구보다도 계급사회를 싫어했으면서도 천부적인 재능에 관한 관점을 믿어온 탓으로, 인류의 나쁜 유전적 인자들, 그의 언급에 따르면 저지능자, 약자, 게으른 사람, 무지한 사람, 무책임한 사람, 흉악무도한 범죄자들 등등을 외과적 거세 방법이나 주류 사회와 물리적으로 완전 격리하는 방식을 통하여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우생학이 비과학적이라고 판명난 현대 시점의 기준으로는 문제가 있는 건 당연하기 때문에 그의 우생학 분야에 관한 관심과 탐구는 비판받아야 할 것이다.[55] 치올콥스키는 과학자로서의 기본 소양을 갖춘 사람이긴 했으나, 원래부터 세계적인 주류 학계와 관계가 멀었던 사람이었고, 이미 폐기된 에테르 이론을 고수했기에 '모든 질량을 가진 물체는 빛보다 더 빠른 속도를 가질 수 없다.'라는 상대성 이론의 법칙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였다. 지금 기술로는 빛보다 더 빠른 속도를 낼만한 수준도 안 되지만, 후손 세대라면 자신의 방법보다 더 나은 방법들을 발견해낼 것이라는 인간 지성에 대한 확실한 믿음에서 그러하였다. (여담으로 과학기술이 눈부시게 발전한 현재에서도 핵분열, 핵융합, 반물질 등 기존 화학 연료 대비 더 좋은 추진력을 낼 수 있는 반작용 추진 장치가 탑재된 우주선은 아직도 이론적 단계에서 성장하는 중이다. 그보다 더 추상적인 웜홀, 알큐비에레 드라이브 등의 초광속 여행은 아직도 실현 가능성이 매우 낮다.)[56] 물론 처음부터 주변인들과의 관계가 나쁜 것은 아니였다. 냉담한 성격의 아내(아내인 바르바라 소콜로바는 의외로 남편의 과학 사랑과 연구개발에 대해 진심으로 응원해주고, 실험을 도와주기도 하였다)와 입장 차이를 좁히려고 노력했고, 심지어는 아내를 도와 집안일을 하기도 했었다. 친자식들 중 이그나트는 자신을 존경하던 아들이였다. 그의 제자들은 체벌이나 모욕, 주입식 교육, 권위주의 따위 다 집어던진 스승인 그를 사랑하고 존경했었다. 허나 자신의 우주 관련 연구에 서서히 여러 악재들로 하여금 연구에 발목이 잡히기 시작하자 점차 사이가 서먹해진 바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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